하이델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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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라인 강 지류인 네카르 강변에 위치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도시이다. 유구한 역사의 하이델베르크 성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알려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로 유명한 도시이며, 관광지로 꽤 각광받고 있는 관광도시이기도 하다. 인구는 2015년 기준 156,267명으로, 이 도시가 꽤 작은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인근에 만하임, 카를스루에 등 비교적 큰 도시들이 있다.
2. 역사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의 조상격으로 추측되는 하이델베르크 원인(原人)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으며[3] 기원전 5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측되는 켈트족의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라인강 이서 지방이 로마의 영역으로 편입된 이후 하이델베르크 일대에 로마군의 주둔지가 세워졌으며, 로마 제국이 쇠락한 3세기 이후 이 일대는 다시 게르만족의 영향권에 편입된다.
하이델베르크라는 지명이 처음 언급되는 것은 중세이던 서기 12세기의 일로,[4] 가톨릭 수도원들이 이 일대에 건립되면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하고 1386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가 당시 팔츠 선제후였던 루퍼트 1세에 의해 설립되면서 발전세가 급속히 빨라진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당대 독일 문화권 지성들의 경연장과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으나 17~18세기 끊임없는 전란으로 타격을 입고 만다. 1622년에는 틸리 백작이 이끄는 가톨릭 측이 2달에 걸친 포위전 끝에 이 곳을 점령하면서[5] 일시적으로 하이델베르크는 팔츠가 아니라 바이에른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1634년 스웨덴 군이 하이델베르크를 탈환하자 가톨릭 측은 하이델베르크를 재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계획했으나 프랑스가 스웨덴 군을 지원하면서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하여 하이델베르크는 다시 팔츠 선제후의 품안으로 돌아왔지만, 본격적인 전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팔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6] 9년 전쟁이 발발한 것. 1693년 하이델베르크는 프랑스 군에 의해 점령되고, 이 과정에서 도시는 철저하게 파괴된다.[7]
이후 1803년 하이델베르크는 바덴 대공국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존재의 힘입어 19세기 전반기 내내 하이델베르크는 자유주의의 성지와도 같은 역할을 수행했고 1848년 혁명 당시에는 혁명세력의 거점 역할을 맡기도 했다가 혁명이 결국 분쇄당하면서 프로이센 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되기도 한다.[8] 원체 소규모 도시였기 때문에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물결을 타지는 못한 채 소규모의 도시로 머물러있어야 했지만, 독일 제국 시기에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존재에 힘입어 하이델베르크는 독일의 중요한 학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나치 독일 시기는 하이델베르크의 흑역사인데, 나치의 정치적 아성이었기 때문.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아서 나치가 집권한 이후 뉘른베르크 법에 따라 많은 비 아리아(주로 유대인) 출신 교직원들이 해고되었으며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나치 당원과 슈츠슈타펠을 위한 시설을 건설하기도 했다(...) 산업이나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말 그대로 순수한 교육 도시였기 때문에, 2차 대전 중에는 연합국 측으로부터 폭격을 피할수 있었으며[9]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3월 30일에 미군이 이 곳을 점령했고, 이후 2011년까지 하이델베르크는 주독미군의 거점 중 하나였다.[10] 그 탓에 1970년대 내내 급진 공산주의 학생조직이었던 적군파(RAF)의 타겟이 되어 1972년에는 이 곳에 주둔하던 미군 세 명이 살해당하는 사건도 빚어졌다.
사실 하이델베르크는 독일 역사에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큰 영향을 끼친 사건도 없었다. 미군이 주둔하게 되면서 이곳에 미국 방문자들이 늘어났고, 미군들의 휴양을 위해 그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메르헨 가도'라는 관광코스가 생겨나면서 관광지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의정부시나 평택시 같은 도시와 비교할 수 있다.
3. 여담
-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 조지 패튼이 교통사고로 인해 이 곳에서 사망한다.[11]
- 2007년에는 하이델베르크 성과 구 시가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미국 관광객들을 위해 사실상 새로 지어진 시설들이기 때문이다.
- 고전 뮤지컬 'The Student Prince'(한국에서는 황태자의 첫사랑으로 번역)의 무대이기도 하다. 독일 어느 소국에서 이 도시로 유학온 왕자가 현지 바걸과 사랑에 빠진다는 작품인데, 듣보잡 독일 연극을 각색하여 1924년 미국에서 제일 처음 상연하였며 영화로는 1954년 만들어졌다. 역시 하이델베르크를 띄우기 위해 미국에서 엄청 홍보한 작품이다.
- 독일에서 이름있는 도시임에도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프로축구팀이 없다. 웬만한 소도시들도 다 도시를 대표로 하는 축구팀이 있음을 감안하면 의외의 일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축구팀으론 2. 분데스리가의 SV 잔트하우젠이 있고 가장 가까운 분데스리가 팀으로는 진스하임 연고의 TSG 1899 호펜하임이 있다.
4. 관련 문서
[1] 이미지 출처(위키미디어)[2] R이 모음화되는 독일어 경향상 현지인들의 발음을 들어보면 '하이델베어크' 정도에 가깝게 들린다.[3] 하이델베르크 원인이 살았던 시기가 신생대라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정확히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견해가 갈리는데, 200만~60만년 전 사이로 그 폭이 꽤나 넓다.[4] 그 전에도 이 일대에 사람들이 거주하기는 했지만 사료에서는 일반적으로 베르크하임(Bergheim)이라는 지명으로 불린다.[5] 이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는 비블리오테카 팔라티나(Bibliotheca Palatina)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도서관을 갖추고 있었고 이 도서관에는 알프스 이북에서 르네상스 시기 발간된 수많은 장서들을 보관되어있었으나, 틸리 백작에 의하여 바티칸으로 압수된다.[6] 팔츠 선제후였던 카를 루트비히 1세는 자신의 딸을 루이 14세의 동생이었던 오를레앙 공작에게 시집보냈는데, 팔츠 선제후 가문의 대가 끊기자 루이 14세가 이 혼인을 근거로 팔츠가 자신의 땅임을 주장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 측의 반응은 이뭐병...[7] 한편 거듭된 전란에 지친 (하이델베르크를 포함한) 팔츠 일대 주민은 영국을 거쳐 신대륙으로 이주를 감행하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미국의 펜실베니아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일대를 개척한 선구자들이다.[8]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1815년 혁명 이념을 박살내버리기로 결의하면서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 러시아 사이에서 체결된 신성 동맹이 이곳에서 맺어졌다는 점이다.[9] 미군이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를 막사나 포로 수용소로 쓰려고 일부러 폭격을 안했다는 루머도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전쟁이 길어질 경우 이곳에 원자폭탄을 투하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남겨 두었던 것이다.[10] 2011년 이후로 2013년까지 2년에 걸쳐 비스바덴으로 주둔지를 옮겼지만, 한창 시절에는 하이델베르크 인구의 10%가 미군이던 시절도 있었다.[11] 사고가 발생한 곳은 하이델베르크 인근의 도시였던 만하임이었으나 치료를 위해 하이델베르크로 옮겨졌고, 치료 도중에 끝내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