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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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부활 성당'''(Собор Воскресения Христова /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 성당. 또다른 명칭은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Храм Спаса на Крови) [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 약칭 '피의 성당'으로 흔히 불린다. 예카테린부르크에도 니콜라이 2세가 죽은 곳에 세운 피의 성당이 있는데, 정식명칭은 이곳과 다르다.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1881년 3월 13일 ,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 니콜라이 리사코프, 소피아 페롭스카야 등의 폭탄 테러를 당했는데 첫 번째로 리사코프가 던진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지나가던 민간인만 다쳤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흐르니예비츠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을 맞은 그는 비록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그 후 알렉산드르 3세는 이 성당을 짓고, 정치범들에 대한 혹독한 복수를 실행했다.
다음날인 3월 14일 비상 국회가 개최되어 알렉산드르 3세에게 “도시운영회에게 도시세금으로 예배당이나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 이에 대해 황제는 “예배당 말고 교회가 좋을 것으로 사료”라고 답변하였으나 임시 예배당 설치는 허가되었다. 건축은 레온티 볘눈에게 위임. 빠른 진행으로 인해 1881년 4월 17(29)일 예배당 헌당식(정화식), 기념 추도식을 지냈다. 그로모프와 밀리틴 일급 상인길드원이 건축비를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임시 예배당은 1883년 봄 사원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존되었으며 이후 카뉴셴나야 광장으로 옮겨져 9년 동안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어쨌든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이후 1997년에 수리를 거쳐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근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중세 러시아 성당건축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지었다. 다섯 개의 화려한 돔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건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매우 화려하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모자이크화로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이 많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의 서유럽화에 선을 긋고 러시아적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알렉산드르 3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1. 개요
'''그리스도 부활 성당'''(Собор Воскресения Христова / Cathedral of the Resurrection of Christ)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 성당. 또다른 명칭은 '피 흘리신 구세주 교회'(Храм Спаса на Крови) [Church of Our Savior on Spilled Blood] 약칭 '피의 성당'으로 흔히 불린다. 예카테린부르크에도 니콜라이 2세가 죽은 곳에 세운 피의 성당이 있는데, 정식명칭은 이곳과 다르다.
알렉산드르 2세가 피를 쏟았던 폭탄 테러 장소에 후계자 알렉산드르 3세가 아버지를 애도하여 지은 성당이다.
2. 역사
1881년 3월 13일 , 러시아 제국의 차르 알렉산드르 2세는 사람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의회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궁으로 향했다. 그런데 당일 사회주의(혹은 무정부주의, 공화주의) 운동가 인민의 의지파 소속 이그나치 흐르니예비츠키, 니콜라이 리사코프, 소피아 페롭스카야 등의 폭탄 테러를 당했는데 첫 번째로 리사코프가 던진 폭탄에 맞았을 때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의 안전장치 덕분에 안에 있던 본인은 무사했고 호위병과 지나가던 민간인만 다쳤다. 알렉산드르 2세는 "난 괜찮다"라고 말하며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다른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하다가''' 그 모습을 본 흐르니예비츠키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번째 폭탄을 던졌다. 두 번째 폭탄을 맞은 그는 비록 즉사하진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잘려나가고 피투성이로 쓰러져 "짐은 궁궐에서 죽고 싶다..."라는 말을 겨우 했다. 이미 누가 봐도 가망이 없어서 신하들이 마지막 부탁대로 궁궐로 데려갔고 결국 궁궐 안에서 사망했다. 그 후 알렉산드르 3세는 이 성당을 짓고, 정치범들에 대한 혹독한 복수를 실행했다.
다음날인 3월 14일 비상 국회가 개최되어 알렉산드르 3세에게 “도시운영회에게 도시세금으로 예배당이나 기념비를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 이에 대해 황제는 “예배당 말고 교회가 좋을 것으로 사료”라고 답변하였으나 임시 예배당 설치는 허가되었다. 건축은 레온티 볘눈에게 위임. 빠른 진행으로 인해 1881년 4월 17(29)일 예배당 헌당식(정화식), 기념 추도식을 지냈다. 그로모프와 밀리틴 일급 상인길드원이 건축비를 부담하였기 때문에 국회는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이임시 예배당은 1883년 봄 사원이 건축이 시작되기 전까지 보존되었으며 이후 카뉴셴나야 광장으로 옮겨져 9년 동안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약탈당해 많은 손상을 입었고, 그 뒤로는 창고로 사용되었지만 어쨌든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이후 1997년에 수리를 거쳐 박물관으로 재개관했다.
3. 양식
근현대에 지어진 건축물이지만 중세 러시아 성당건축 스타일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지었다. 다섯 개의 화려한 돔은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비슷한데 실제로 성 바실리 성당을 모티브로 건축했다고 한다. 내부도 매우 화려하다. 성당 안에 있는 모든 벽화가 모자이크화로 사람이 일일이 조그마한 타일을 이어 붙인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이 많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다른 건축물들 사이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면모를 자랑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에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데,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러시아의 서유럽화에 선을 긋고 러시아적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알렉산드르 3세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