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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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馬車)
Carriage / A Horse-Drawn Vehicle
'''마차'''(馬車)는 말이 끄는 수레를 말한다. 채리엇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리엔트 · 이집트 등의 각지에서 발견되는 부조에 그려져 있는 1마리 또는 여러 마리가 끄는 2륜전차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주나라에는 사마라고 하는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있었으며 당시의 왕릉 등에서는 마차가 차장·사수·마부를 태우고 말이 멍에에 매인 채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와 고조선 시대에는 수레와 마차가 널리 쓰였다. 당연히 도로도 잘 닦았으며, 폭 또한 넓었다고 한다.고조선 시대의 마차 그림 삼국시대에도 도로와 마차는 전국적으로 운용되었다. 관산성 전투의 배경이었던 충북 옥천군에서는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되기도 했다. 도로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수-당 시대의 장안은 신라와 일본 등에서 도시계획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넓은 대로를 오가는 수레도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가 되면서 마차는 점차 쇠퇴하고 대신 잘 닦인 수로를 통한 조창과 조운선이 발달하게 되는데, 특히 조선은 경강상인의 등장 등으로 민간 선박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어 민간 상업 활동까지 선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마차는 점차 경제적으로 의미를 잃게 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양마장을 설치하고 청의 품종 좋은 말을 들여 북방 평지지역인 평안도에 마차를 적극적으로 운용해보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해 그만둔 내용이 있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6품 미만은 한양에서 말을 타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법도 있었다.
정치적인 영향 또한 있었는데 마차는 그 특성상 잘 닦인 큰 도로가 필요했고 평지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문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도로는 적군의 기동 경로가 되어버리고, 평지 특성상 방어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주로 수행하는 나라에서는 도로를 잘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지만 작은 예방전쟁 이상의 국가간 전쟁은 직접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때문에 고려 때부터 모든 교통로는 보도를 중심으로 편제되었는데, 고구려같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기도 한 경우는 평시에도 마차의 이용이 꽤 있기는 했으나 신라나 백제는 이미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사용이 적었고, 고려 때부터는 의전용에 가깝게 변해가게 된다. 조운선이 닿지 못하는 지역은 말이 끄는 마차 대신 소달구지나 수레 같은 우마차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도로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도로고 등의 서적도 나온다.
특히 조선시대엔 말이 끄는 마차에서 소가 끄는 수레로 완전히 변화하게 되는데, 수원화성 축성 때 소가 끄는 민간 수레가 동원되었고 속대전에서 민간 수레의 동원에 대해 기록해놓기도 했다. 특히 산지가 많은 함경도, 강원도 지역에서는 소달구지가 많이 쓰였다.[2]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엄청나게 쇠퇴하여 고려도경에서 소 잡을 때 진짜 무식하게 잡는다고 표현했던 고려 시대에는 소나 말이나 어차피 못 먹는 거라 두 동물 사이에 가치적인 차이가 크게 없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들도 소뼈를 쌓아놓고 먹을 정도로 소고기 매니아가 되어 버리면서 말 대신 식육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 소를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농사지을 때랑 산지 이동에도 소가 더 유용했기 때문에 말은 점차 마차를 끄는 짐말에서 기병용 전투마로 키우게 된다.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승객용 마차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서스펜션의 문제도 있었다.
맨 처음 나온 기술인 판 스프링의 경우 기본적으로 탄성력을 이용하는 건데, 유럽이 17세기 중반[3] 에 판 스프링을 처음 도입했는데, 한중일은 판 스프링 기술이 발전할 정도의 재료가 없었다. 최소한 강철이나 그와 비슷한 탄성력이 강한 재료가 필요한데, 중국은 평지가 많아서 고민을 덜 했고, 한국, 일본은 산지가 많은 지형상 답이 없어서 가마를 타거나 말을 직접 타는 판국이었다. 일본에서도 천황, 그것도 즉위식 쯤 되어야 겨우 두 바퀴 달린 수레가 나오는 정도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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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마차와 우차를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덕흥리 고분벽화의 행렬도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병이 나타나자 승용·화물운반용으로 바뀌면서 바퀴도 두 바퀴에서 네 바퀴로 되었다.
유럽에서는 화물용으로도 오랫동안 그냥 짐말에게 밀렸는데, 그 이유가 괴랄한것이 마차를 허리가 아니라 목에다 메서 말들이 목이 졸려 제대로 끌지를 못했다 (...)
주로 중세시대와 근세시대의 높으신 분들이 사용을 했으며 화려함과 부의 상징으로 기억되었다. 다만 중세 초기에는 길이 개판이라 마차를 타는 것보다 말을 타는 게 더 편한 여행인 경우도 있었다(...) 여자들은 치마 때문에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는 특별한 안장이 있어야 했다. 그나마도 여성의 승마가 아예 금지된 문화권도 있었으니 대표적으로 명나라 이후의 중국이다.[5]
근대에도 마차는 여러 목적으로 쓰였는데 버스처럼 승합용도로 쓰는 게 있는가 하면, 우편마차와 포장마차와 카우보이, 보안관 등 서부 개척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족으로, 서부극에서 간혹 우편마차가 기습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우편물이 아니라 '''현금'''을 노린 것이다. 이 시절의 미국에는 우편마차가 현금수송차량 역할도 겸했기 때문.[6]
말이 많을수록 마력이 올라 더 무거운 짐을 싣고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어 현대의 엔진이 마력을 보고 속도나 적재량을 예측하는 것처럼 한 마차당 할당된 말의 수로 마차의 능력을 짐작하기도 했다. 트로이카(삼두마차) 처럼 고유명사화된 규격도 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육상 교통수단에서의 마차의 위치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기기관은 증기 기관차와 함께 철도라는 새로운 육상교통수단을 탄생시켰고, 장거리 운송에서의 운하와 마차의 위치는 철도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단운송이 불가능하다는 철도의 특성 때문에 중단거리 운송은 여전히 마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보다 가벼운 내연기관이 발명되고, 말보다 더 빠르고 힘센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마차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다만 마차의 구조는 그대로 자동차에 계승되었다. 실제로 초기의 자동차 디자인은 그냥 마차에 말 대신 엔진 달아놓은 거라서...
현대의 자동차도 기본적인 승차, 적재 구조는 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동력 자동차가 첫 등장했을 때 마차와 자동차는 그야말로 서로 물어뜯는 앙숙적인 사이였다. 그 싸움의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기도 한 영국의 '''적기조례'''. 물론 이후의 전개는 이런 현실무시적인 악법에도 아랑곳없이 현대의 풍경이 보여주듯 마차는 완벽하게 쇠퇴하고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문자 그대로 19세기 말까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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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세기 초까지 마차는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였다. 왜냐면 당시엔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자동차도 고가여서, 당장 20세기 중반인 1차대전과 2차대전만 봐도 대량의 기병, 말, 마차가 동원되었으며, 단순한 운송수단일 뿐만 아니라 타찬카 처럼 군사용으로도 쓰였다.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마차는 일부 특수 목적을 제외하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관광용이나 전통 행사 등의 특수한 용도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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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에선 전통적으로 1762년에 만든 아이리쉬 스테이트 코치라는 황금마차를 아직도 현역으로 쓰고 있다. 대관식 같은 아주 큰 행사에만 쓰이는데, 아무래도 워낙 오래전에 만들어서 기술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승차감이 엄청 안좋아서 엘리자베스 2세가 싫어했다고 한다. 제위 기간중 몇번 타지 않고 거의 50년째 전시용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청계천에 진짜 말이 끄는 마차가 운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은 굶어죽어가고 집도 없이 묶이는 등 학대받고 있다.
경주시에서도 '경주 꽃마차'라는 이름으로 운행했으나, 마부들이 영업시간이 끝난 후 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학대를 가한 사실이 드러났고,[7] 언론 보도 이후 마차 운영 업체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문제의 마차 운영 업체는 철수했으며 말들은 구조되어 한국마사회에서 보호 및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좋은 사례도 있다. 단양군의 유명한 관광지 도담삼봉에서도 마차가 있는데 꽤나 복지가 잘되어있으며, 충청도 사전컨설팅 우수사례로 뽑히고 충북 MBC뉴스에 소개기 될 정도로 평이 굉장히 좋다. 학대논란으로 마차에 관한 이미지가 바닥이였던걸 생각하면 대단한 수준 링크
영국의 교통이 마차 중심이던 시절에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인 마부들은 보통 마차 오른쪽 자리에 앉아서 말을 몰았고, 이로 인해 보행자들은 좌측 통행을 하게 되었다. 이는 마차가 자동차로 대체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영국 및 영국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자동차 운전석이 차량의 오른쪽에 있고, 좌측 통행을 한다.
한국에선 그다지 엄격하지 않지만, 서양에서 중요한 예절중 하나인 자동차의 상석 구분같은 승차예절은 대부분 귀족들이 마차를 이용할때 만들어졌던 예절 규범들이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들이다. 이 승차,하차 매너 개념은 현대판 마차인 의전용 대형차,쇼퍼드리븐 자동차를 탈 때나 해외생활 하면서 남의 차를 타게 될때 그대로 적용되므로 특히 연장자와 같은 차를 타게 되거나, 아니면 친구가 아닌 타인의 차를 자주 타거나 높으신분 의전용 차를 타는 일이 있을 경우 알아두는게 중요하다.
기술적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내구성 좋고 승차감 좋은 마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 높은 기술력이 요구된다.
상하 요동에 의한 바퀴축 파손 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완충장치가 필요한데, 현대에도 차량에 흔히 쓰이는 판 스프링은 마차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이다. 질 좋은 탄성 강재를 만들기 이전에는 탄력 좋은 목재로 비슷한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마차의 너비는 철도의 너비(2두 마차 기준)으로 이어졌으며, 현대의 로켓 등은 이 철도로 운반되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다.
즉, '''마차 규격 → 철도 규격 → 로켓 규격''' 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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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馬車)
Carriage / A Horse-Drawn Vehicle
1. 개요
'''마차'''(馬車)는 말이 끄는 수레를 말한다. 채리엇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리엔트 · 이집트 등의 각지에서 발견되는 부조에 그려져 있는 1마리 또는 여러 마리가 끄는 2륜전차가 그것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2. 역사
중국에서는 은나라 ·주나라에는 사마라고 하는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있었으며 당시의 왕릉 등에서는 마차가 차장·사수·마부를 태우고 말이 멍에에 매인 채 매장되어 있는 것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와 고조선 시대에는 수레와 마차가 널리 쓰였다. 당연히 도로도 잘 닦았으며, 폭 또한 넓었다고 한다.고조선 시대의 마차 그림 삼국시대에도 도로와 마차는 전국적으로 운용되었다. 관산성 전투의 배경이었던 충북 옥천군에서는 신라 서라벌과 옥천을 잇는 도로 유적이 2018년 발견되기도 했다. 도로 표면에는 수레바퀴 자국과 수레를 끌었던 짐승의 발자국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특히 수-당 시대의 장안은 신라와 일본 등에서 도시계획의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넓은 대로를 오가는 수레도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려와 조선시대가 되면서 마차는 점차 쇠퇴하고 대신 잘 닦인 수로를 통한 조창과 조운선이 발달하게 되는데, 특히 조선은 경강상인의 등장 등으로 민간 선박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어 민간 상업 활동까지 선박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면서 마차는 점차 경제적으로 의미를 잃게 되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양마장을 설치하고 청의 품종 좋은 말을 들여 북방 평지지역인 평안도에 마차를 적극적으로 운용해보려 했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효율성이 떨어지고 경제적으로 별 재미를 보지 못해 그만둔 내용이 있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6품 미만은 한양에서 말을 타지 못하게 하는 이상한 법도 있었다.
정치적인 영향 또한 있었는데 마차는 그 특성상 잘 닦인 큰 도로가 필요했고 평지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다.
문제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런 도로는 적군의 기동 경로가 되어버리고, 평지 특성상 방어에도 매우 취약해진다.
때문에 침략전쟁을 주로 수행하는 나라에서는 도로를 잘 닦아 놓을 필요가 있었지만 작은 예방전쟁 이상의 국가간 전쟁은 직접 일으키려 하지 않았던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 때문에 고려 때부터 모든 교통로는 보도를 중심으로 편제되었는데, 고구려같이 넓은 벌판을 끼고 있기도 한 경우는 평시에도 마차의 이용이 꽤 있기는 했으나 신라나 백제는 이미 전쟁시가 아닌 평상시에는 사용이 적었고, 고려 때부터는 의전용에 가깝게 변해가게 된다. 조운선이 닿지 못하는 지역은 말이 끄는 마차 대신 소달구지나 수레 같은 우마차로 대체되었다. 그래도 도로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도로고 등의 서적도 나온다.
특히 조선시대엔 말이 끄는 마차에서 소가 끄는 수레로 완전히 변화하게 되는데, 수원화성 축성 때 소가 끄는 민간 수레가 동원되었고 속대전에서 민간 수레의 동원에 대해 기록해놓기도 했다. 특히 산지가 많은 함경도, 강원도 지역에서는 소달구지가 많이 쓰였다.[2] 불교 문화의 영향으로 육식 문화가 엄청나게 쇠퇴하여 고려도경에서 소 잡을 때 진짜 무식하게 잡는다고 표현했던 고려 시대에는 소나 말이나 어차피 못 먹는 거라 두 동물 사이에 가치적인 차이가 크게 없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민간인들도 소뼈를 쌓아놓고 먹을 정도로 소고기 매니아가 되어 버리면서 말 대신 식육적으로 더 가치가 있는 소를 키우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농사지을 때랑 산지 이동에도 소가 더 유용했기 때문에 말은 점차 마차를 끄는 짐말에서 기병용 전투마로 키우게 된다.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승객용 마차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로 서스펜션의 문제도 있었다.
맨 처음 나온 기술인 판 스프링의 경우 기본적으로 탄성력을 이용하는 건데, 유럽이 17세기 중반[3] 에 판 스프링을 처음 도입했는데, 한중일은 판 스프링 기술이 발전할 정도의 재료가 없었다. 최소한 강철이나 그와 비슷한 탄성력이 강한 재료가 필요한데, 중국은 평지가 많아서 고민을 덜 했고, 한국, 일본은 산지가 많은 지형상 답이 없어서 가마를 타거나 말을 직접 타는 판국이었다. 일본에서도 천황, 그것도 즉위식 쯤 되어야 겨우 두 바퀴 달린 수레가 나오는 정도다.[4]
[image]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마차와 우차를 볼 수 있다. 위 사진은 덕흥리 고분벽화의 행렬도다.
기원전 8세기부터 기병이 나타나자 승용·화물운반용으로 바뀌면서 바퀴도 두 바퀴에서 네 바퀴로 되었다.
유럽에서는 화물용으로도 오랫동안 그냥 짐말에게 밀렸는데, 그 이유가 괴랄한것이 마차를 허리가 아니라 목에다 메서 말들이 목이 졸려 제대로 끌지를 못했다 (...)
주로 중세시대와 근세시대의 높으신 분들이 사용을 했으며 화려함과 부의 상징으로 기억되었다. 다만 중세 초기에는 길이 개판이라 마차를 타는 것보다 말을 타는 게 더 편한 여행인 경우도 있었다(...) 여자들은 치마 때문에 다리를 한쪽으로 모으는 특별한 안장이 있어야 했다. 그나마도 여성의 승마가 아예 금지된 문화권도 있었으니 대표적으로 명나라 이후의 중국이다.[5]
근대에도 마차는 여러 목적으로 쓰였는데 버스처럼 승합용도로 쓰는 게 있는가 하면, 우편마차와 포장마차와 카우보이, 보안관 등 서부 개척 시대의 아이콘으로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사족으로, 서부극에서 간혹 우편마차가 기습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우편물이 아니라 '''현금'''을 노린 것이다. 이 시절의 미국에는 우편마차가 현금수송차량 역할도 겸했기 때문.[6]
말이 많을수록 마력이 올라 더 무거운 짐을 싣고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어 현대의 엔진이 마력을 보고 속도나 적재량을 예측하는 것처럼 한 마차당 할당된 말의 수로 마차의 능력을 짐작하기도 했다. 트로이카(삼두마차) 처럼 고유명사화된 규격도 있다.
증기기관이 발명되면서 육상 교통수단에서의 마차의 위치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증기기관은 증기 기관차와 함께 철도라는 새로운 육상교통수단을 탄생시켰고, 장거리 운송에서의 운하와 마차의 위치는 철도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단운송이 불가능하다는 철도의 특성 때문에 중단거리 운송은 여전히 마차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면 보다 가벼운 내연기관이 발명되고, 말보다 더 빠르고 힘센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마차는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다만 마차의 구조는 그대로 자동차에 계승되었다. 실제로 초기의 자동차 디자인은 그냥 마차에 말 대신 엔진 달아놓은 거라서...
현대의 자동차도 기본적인 승차, 적재 구조는 마차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동력 자동차가 첫 등장했을 때 마차와 자동차는 그야말로 서로 물어뜯는 앙숙적인 사이였다. 그 싸움의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세계 최초의 교통법이기도 한 영국의 '''적기조례'''. 물론 이후의 전개는 이런 현실무시적인 악법에도 아랑곳없이 현대의 풍경이 보여주듯 마차는 완벽하게 쇠퇴하고 자동차가 도로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와 아울러 영국의 자동차 산업은 문자 그대로 19세기 말까지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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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20세기 초까지 마차는 여전히 유효한 수단이였다. 왜냐면 당시엔 도로사정도 좋지 않고 자동차도 고가여서, 당장 20세기 중반인 1차대전과 2차대전만 봐도 대량의 기병, 말, 마차가 동원되었으며, 단순한 운송수단일 뿐만 아니라 타찬카 처럼 군사용으로도 쓰였다.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냉전이 시작되면서 마차는 일부 특수 목적을 제외하면 거의 사라지게 된다.
3. 현재
관광용이나 전통 행사 등의 특수한 용도가 아니면 사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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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왕실에선 전통적으로 1762년에 만든 아이리쉬 스테이트 코치라는 황금마차를 아직도 현역으로 쓰고 있다. 대관식 같은 아주 큰 행사에만 쓰이는데, 아무래도 워낙 오래전에 만들어서 기술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승차감이 엄청 안좋아서 엘리자베스 2세가 싫어했다고 한다. 제위 기간중 몇번 타지 않고 거의 50년째 전시용으로 쓰고 있다고 한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청계천에 진짜 말이 끄는 마차가 운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들은 굶어죽어가고 집도 없이 묶이는 등 학대받고 있다.
경주시에서도 '경주 꽃마차'라는 이름으로 운행했으나, 마부들이 영업시간이 끝난 후 말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학대를 가한 사실이 드러났고,[7] 언론 보도 이후 마차 운영 업체에 대해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이 때문에 문제의 마차 운영 업체는 철수했으며 말들은 구조되어 한국마사회에서 보호 및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좋은 사례도 있다. 단양군의 유명한 관광지 도담삼봉에서도 마차가 있는데 꽤나 복지가 잘되어있으며, 충청도 사전컨설팅 우수사례로 뽑히고 충북 MBC뉴스에 소개기 될 정도로 평이 굉장히 좋다. 학대논란으로 마차에 관한 이미지가 바닥이였던걸 생각하면 대단한 수준 링크
4. 기타
영국의 교통이 마차 중심이던 시절에 오른손잡이가 대부분인 마부들은 보통 마차 오른쪽 자리에 앉아서 말을 몰았고, 이로 인해 보행자들은 좌측 통행을 하게 되었다. 이는 마차가 자동차로 대체된 오늘날까지 이어져 영국 및 영국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자동차 운전석이 차량의 오른쪽에 있고, 좌측 통행을 한다.
한국에선 그다지 엄격하지 않지만, 서양에서 중요한 예절중 하나인 자동차의 상석 구분같은 승차예절은 대부분 귀족들이 마차를 이용할때 만들어졌던 예절 규범들이 시대에 맞게 변형되어 지금까지 내려오는 것들이다. 이 승차,하차 매너 개념은 현대판 마차인 의전용 대형차,쇼퍼드리븐 자동차를 탈 때나 해외생활 하면서 남의 차를 타게 될때 그대로 적용되므로 특히 연장자와 같은 차를 타게 되거나, 아니면 친구가 아닌 타인의 차를 자주 타거나 높으신분 의전용 차를 타는 일이 있을 경우 알아두는게 중요하다.
기술적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내구성 좋고 승차감 좋은 마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꽤 높은 기술력이 요구된다.
상하 요동에 의한 바퀴축 파손 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완충장치가 필요한데, 현대에도 차량에 흔히 쓰이는 판 스프링은 마차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이다. 질 좋은 탄성 강재를 만들기 이전에는 탄력 좋은 목재로 비슷한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마차의 너비는 철도의 너비(2두 마차 기준)으로 이어졌으며, 현대의 로켓 등은 이 철도로 운반되는 것을 전제로 제작된다.
즉, '''마차 규격 → 철도 규격 → 로켓 규격''' 이라는 역사적 흐름의 시작.
[1] 사진의 마차는 최대 22명까지 탈 수 있는 옴니버스라는 합승마차이다. 오늘날의 버스처럼 다른 마차보다 가격이 저렴했으며, 운행 시간도 더 길었다고 한다.[2] 이 수레를 가지고 예전에 국내의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반계수록을 쓴 실학자 유형원이 "우리나라(조선) 풍속은 수레를 쓸 줄 모른다."라고 적은 걸 가지고 조선은 수레를 안 썼다고 여긴 사람들이 많았으나,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 등의 사료들을 보면, 성을 쌓는 공사에 소가 끄는 수레를 8백여 대나 사용할 만큼 많이 동원했다. 즉, 조선에서 수레를 안 쓴다는 유형원의 말은 엄연히 거짓이다.# 유형원의 말은 수레가 안 쓰인다기보다는 중국 대륙처럼 통일된 수레 규격(이는 진시황대에 이루어졌다) 등 유통망에 관한 이야기일 수 있다.[3] 1600년대 중반이다. 해설하자면 임진왜란 직후.[4] 2020년 나루히토 즉위 때 선을 보인 적 있는데, 당나라 문화 영향을 받은 헤이안 시대의 수레 디자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5] 조선은 경국대전에 의해 금지당했다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지만 경국대전에서 금지하는 것은 마군(馬裙)이라는 승마용의 치마바지를 입지 않고 타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마군은 겉보기에는 치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에 탔을 때 종아리나 허벅지가 보이지 않게 하는 바짓단이 있는 일종의 치마바지다. 이것을 입지 않고 말을 탔다가 남자의 희롱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봐서 간혹 입지 않고 타 다리의 맨살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이걸 방지하기 위해(특히 성 윤리가 전대 왕조들보다 굉장히 보수적인 조선왕조의 경우 여성의 맨살을 보이는것을 불경으로 생각했다.) 이걸 반드시 입게 법제화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 숙종시대까지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여성은 전부 말을 타고 다니고 가마를 타지 않았다. 조선에서 여자들이 말 대신 가마를 타는 게 유행한 건 숙종 이후의 일이다.[6] 이 때문에 당시 마부의 옆자리에는 샷건으로 무장한 해병대원이 탑승했다. 미국에서 운전수 옆자리를 샷건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서 기인하였다. 그래서 과거에 미국 우체부는 꽤 몸이 고달픈 직업이였다.[7] 학대행위가 가해진 공터가 길가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즉 사람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대로변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놓고 학대를 가했다는 뜻. 게다가 말들이 구타를 견디다 못해 쓰러진 뒤에도 계속 매질을 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