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고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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Πυθαγόρας
Pythagoras
피타고라스

본명
피타고라스
출생
기원전 580년 소아시아 서안 이오니아 사모스
사망
기원전 500년 메타폰티온
직업
수학자,철학자
1. 개요
2. 출생 및 행적
3. 수학에서의 피타고라스
4. 철학에서의 피타고라스
6. 여담

사상의 영역에서 피타고라스만큼 영향력이 큰 사람은 더 없을 터이다. 플라톤 사상처럼 보이던 점이 분석을 거치고 나면 실제로는 피타고라스 사상으로 드러난다. 지성에는 드러나지만 감각에 드러나지 않는, 순수하고 영원한 세계의 착상은 피타고라스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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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서양철학>


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출신지를 따서 사모스의 피타고라스(Πυθαγόρας ο Σάμος)라고도 한다.

2. 출생 및 행적


소아시아 서안 이오니아사모스 섬 출신으로, 영향력에 비해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후대 신피타고라스 학파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과장이나 미화가 들어가기도 한다. 이는 신피타고라스 학파가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보이곤 한다. 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가 한 날 한 시에 두 곳에서 나타났다는 증언을 전해주기도 한다. 아무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것은 틀림없다.
피타고라스는 이집트로 가서 학문을 배웠으며, 돌아온 뒤 그리스의 종교의식에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등 사람들에게 평판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기원전 530년경 피타고라스는 폴뤼크라테스의 폭정에 대한 불만으로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탈리아 남부의 크로토네에 도착한 피타고라스는 그의 높은 학식을 바탕으로 크로토네 사람들에게 여러 조언을 하고, 그들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인도하였다. 이후 그를 중심으로 피타고라스 학파가 형성되었고, 주변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1]
당시 크로토네의 명망가였던 퀼론은 피타고라스적 삶에 참여하는 것에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성품이 거칠고, 요란하고 전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피타고라스는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부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퀼론은 그의 추종자들을 모아 피타고라스주의자들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고, 이 때문에 피타고라스는 메타폰티온으로 떠나 기원전 490년 그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3. 수학에서의 피타고라스


흔히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그가 증명했다고 여겨지지만, 아쉽게도 해당 통설을 뒷받침할 만한 당대의 자료들(예를 들어, 신피타고라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들이 쓴 자료)이 없어 교차검증은 되지 않고 있다. 우선 신빙성 있는 초기 자료들을 볼 때 확실한 것은 그가 혼의 전이설을 주장한 사람이며,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을 만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수와 관련된 그의 글 중 초기 자료에 해당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단편으로 여겨지는 '피타고라스적 삶에 대하여' 뿐인데, 여기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기록은 피타고라스의 후기자료 중 하나인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저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에서 언급된 아폴로도로스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는 직각삼각형의 빗변의 제곱이 직각을 둘러싼 각변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황소 100마리를 제물로 바쳤다라고 한다. 여기서 '발견했다.'는 말을 '증명했다.'는 뜻으로 이해하긴 어렵다. 초기자료에서 이에 대한 근거가 될 만한 것이 없으며, 수학의 증명방법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였기 때문. '발견했다'를 '증명없이 최초로 알아냈다'라고 보기도 어렵다. 피타고라스 이전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사람들도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나타내는 사실을 (증명을 통해 정리되진 않은 상태였지만) 알았기 때문. 그렇기 때문에 피타고라스를 수학 발전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하자면 피타고라스는 오늘날 생각하는 형태의 '수학자'라고는 할수 없다는 소리다. 오히려 고대 그리스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의 위대한 수학자는 유클리드라고 할수있다. 유클리드는 현대 수학의 기초를 닦을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니까.
참고로 당시 그리스에서는 모든 수는 분수로 표현 가능하다고 여겼는데, 이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 이론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무리수의 존재를 알려주게 된다. 이 일로 인해 제자를 죽였다는 말도 있다.[2]
참고로 고대 그리스에서 기하학산수를 독립된 분야로 생각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런것들이었다. 즉 뭔가 산수 비슷하기는 한데, 숫자로 표현이 안되는 영역이니까 아예 다른 분야로 취급한 것.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 2권에서 보면, 대수학의 영역에서 자연스럽게 입증해야 할 '(a+b)2=a2+2ab+b2'이 기하학적 원리로 증명된 것도 이런 경향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피타고라스는 제자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한 부류는 수업만 듣고 토론에는 참석하지 않는 일반 학생(아쿠스마틱스)으로, 그들에게는 심오한 지식을 전하지 않았다. 또 다른 부류는 그리스어로 마테마티코이라 부르며 피타고라스 학파의 진정한 회원이었다. 이 말은 나중에 수학을 뜻하는 라틴어 마테마티카(mathematica)로 발전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만물은 모두 수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우주 현상이 어떤 숫자의 상호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수의 성질을 연구하면 영원불멸한 우주의 진리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수는 곧 만물이다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어 보일 수 있으나, 사물이 따르는 규칙이 수학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즉 자연계의 수학법칙을 탐구하는 과정이 근대과학을 크게 발전시킨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먼저 음악에서 음률의 수학적 원리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높은 도와 낮은 도의 음정 비율은 1:2, 솔과 도의 비율은 2:3, 파와 도는 3:4, 미와 도는 4:5, 파와 레는 5:6 등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수를 두고 독특하게 분류했다. 1, 3, 6, 10 등을 삼각수, 1, 4, 9, 16 등을 사각수, 1, 5, 12, 22등을 오각수라고 불렀다.[3]

4. 철학에서의 피타고라스


신비주의 성향을 띄며, 영혼의 불멸과 윤회 등을 믿었다. 콘퍼드에 의하면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오르페우스교의 개혁 운동이라고 한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학과 신비주의는 이질적인 영역으로 보이겠지만, 피타고라스에게서는 매우 밀접하게 합리와 신비가 결합되어있다.[4]
이를테면 직각삼각형 정리를 생각해보자.[5] 피타고라스는 이 정리를 증명했지만, 감각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정확한 직각삼각형을 그릴 수 없다. 아무리 정교한 그림을 그리더라도 어딘가에서는 1나노미터 쯤은 삼각형이 비틀렸을 것이고, 10억분의 1 라디안 정도 각도가 어긋날수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렇다. '진짜 직각삼각형'은 감각으로 관측하는 세계가 아닌 지성으로 관측하는 세계에 있는 것이고, 감각세계의 것들은 '진짜 직각삼각형'을 모방한 짝퉁들에 불과한 것이다.[6] 또한 '수'와 같은 수학의 대상들은 실재한다고 해도 영원한 존재로서 시간에 구속받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피타고라스의 사상은 신비주의와 멸집하게 결합되어있다.[7]
이온은 피타고라스가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며 사후에 혼의 삶이 있다라고 주장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피타고라스는 단순히 혼의 삶이 있다는 것에 멈추지 않고 사람의 혼은 불사적이며 다른 동물에게 옮겨갈 수 있다고 말한다. 즉 모든 동물은 동족관계에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혼의 전이는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라고도 피타고라스는 보았다.[8]
한편 플라톤은 피타고라스는 피타고라스적 삶의 방식을 만든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삶의 방식은 피타고라스의 공동체에서 은밀하게 공유되었으며, 아무나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었다. 유스티누스의 글에 따르면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300명의 젊은이들이 음모자들의 비밀스러운 집회를 갖기라도 하듯, 다른 이들과는 떨어져 살았으며 크로톤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었다고 한다. 공동체 내에서의 규율에 대해서는 밑에서 서술.

5. 피타고라스 정리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직각삼각형의 성질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발견하고 신에게 황소 100마리를 바쳤다고 한다. 자세한건 문서 참조

5.1. 피타고라스 세 쌍


위 피타고라스 정리를 만족하는 자연수 집합족.

6. 여담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는지, 어느 날 대장간 앞을 지나가다가 장정들이 망치로 무쇠를 두들기는 소리를 듣고 순정률과 피타고라스 음률을 발견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 피타고라스의 음률에서 나오는 화음은 기타에도 응용된다.
피타고라스가 쓴 책은 전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비밀결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타인이나 타단체에게 함부로 저작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의 저작이 피타고라스 학파 밖으로 처음 유출된 것은 필롤라오스가 극심한 경제적 궁핍을 겪고 있을 때 플라톤이 거금을 주고 피타고라스의 책 3권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를 낭설이라고 치부하고 피타고라스는 책을 쓴 적이 없다는 기록도 있다. 또, 많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저작들이 피타고라스의 것이 아닌데 피타고라스의 것이라고 오해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아무튼 그렇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직접적인 저술이건 간접적으로 인용하는 것이건 간에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별 진전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채식주의를 권하고 실천하면서도, 은 절대 먹지 말라고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제1규율도 '콩을 먹지 말라'일 정도. 이에 대해서는 '단순히 콩을 싫어해서', 또는 '피타고라스가 콩 알레르기를 앓고 있어서' 등, 여러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콩을 수를 세는데에 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는 파바 콩(fava beans)을 먹고 피를 토하며 죽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파바 콩은 몸에서 활성산소를 만들어내는데 일부 지중해인은 유전적인 결함으로 인해 이를 잘 분해하지 못해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9]
사망 원인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메타폰 타운에서 생애를 보내다 죽었다는 얘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콩과 관련되어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는 설 또한 유명하다. 피타고라스의 활동 시기에 그리스 문화권을 휩쓸던, 귀족파와 민주파와의 대치 사이에서 피타고라스 학파는 귀족파에 속해 있었는데, 때마침 피타고라스와 그 학파의 일원들이 한 귀족의 집에 교류를 위해 모여 있었고, 이를 알게 된 민주파 세력이 그 집에 불을 질렀다. 모두들 불타는 집에서 간신히 빠져 나왔으나, 피타고라스 한 명만은 빠져나가기를 거부하고 불에 타 죽었다. 왜냐하면 그 집 주변은 전부 콩밭이어서, 도저히 가로질러 도망갈 수 없었기에.
또는 불을 지른 게 아니라, 민주파 병사들이 들이닥쳤는데 도망가기를 거부하고 앉아있다 체포된 뒤 죽었다는 말도 있다. 이유는 상술한 것과 같이... 이보다 더욱 어이없는 이야기로는, 어쩔 수 없이 콩밭을 가로질러 도망갔는데 콩밭 한 복판에서 갑자기 돌연사했다는 설조차 있다. 다른 여러가지 사망설도 있지만, 아무래도 개인적으로든 학파적으로든 콩을 금기시했던 것과 얽혀, 이런 류의 사망설이 널리 퍼진 듯. 여튼 콩과 관련된 죽음에 있어서 그가 지중해성 빈혈이 있었을거라는 사람도 있다. 특정 종류의 콩이나 콩 꽃가루, 그리고 군대에서 줄기차게 먹는 클로로퀸을 먹으면 적혈구가 용해되어서 사망에 이르기 때문이다.
제자 중 하나로 B.C 6세기~5세기에 활동한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여성 수학자로 생각되는 크로토네의 테아노(Θεανώ)가 있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피타고라스는 테아노와 결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자식들을 최소 5명(아들들인 텔라우게스(Τηλαύγης)와 므네사르코스(Μνήσαρχος), 딸들인 다모(Δαμώ), 뮈이아(Μυῖα), 아리그노테(Ἀριγνώτη))를 두었다고 한다. 자식들 또한 피타고라스 학파 학자들이 되었다. 참고로 테아노는 그의 딸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자식 중 하나의 이름이 잘못 기록되었거나, 기록되지 않은 자식 중 하나의 이름이 어머니와 같았거나, 피타고라스의 제자 중 테아노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 최소 2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된다.

[1] 이 지역을 연고로 하는 2016/17시즌 세리에A에 승격한 축구팀 FC 크로토네의 애칭 중 하나가 Pitagorici인데 이와 관련있다.[2] 제자의 이름은 히파소스로, 무리수, 루트를 발견했기에 피타고라스에 의해 수장당했다고 한다. 혹은 그 존재를 쉬쉬하던 학파 사람들에게 누설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난파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거나 제명까지 못 살았다.[3] <수학의 역사>/ 지즈강지음/ 권수철옮김/ 더숲/2011.[4] 마치 그리스도교의 신학하고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러셀에 의하면, 피타고라스의 사상이 그리스도교 신학에도 이런 형태의 간접적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5] 위에서 언급했듯, 피타고라스가 진짜로 증명했는지에는 논란이 있지만 일단 이 예시에서는 증명했다고 가정했다.[6]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이기도 하다.[7]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이런식의 경향은 지금까지도 많이 발견된다.[8] 피타고라스는 한 개가 개패듯이 처맞고 있는 것을 보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그 개가 짖는 소리를 들으니까 내 친구였던 사람의 혼이 개로 태어난 것이니 때리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일화는 상당히 유명한 웃음거리가 되었다고.[9] 좀 더 과학적으로 풀어 쓰자면 G6PD(Glucose 6-phosphate dehydrogenase)라는 효소가 선천적으로 부족한 질병이다. 이 병을 가진 사람은 말라리아에 내성을 가지기 때문에 아프리카를 포함한 지중해지역에 이 병을 지닌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G6PD는 포도당을 5탄당으로 바꾸면서 NADPH라는 물질을 합성하는 효소이다. NADPH는 NADH와 비슷하지만 동화작용에 쓰이는 물질로 대부분의 양을 G6PD를 이용해 만들어내고 나머지는 미토콘드리아에서 만들어진다. 우리 몸은 활성산소를 없애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글루타싸이온(glutathion)이라는 물질이다. 이 물질이 활성산소를 한 번 없애면 NADPH를 이용해서 다시 원래대로 바꿔줘야 한다. 파바 콩은 활성산소를 만들어내므로 글루타싸이온을 소모시키는데 G6PD에 이상이 있는 사람의 경우 소모된 글루타싸이온을 다시 되돌리는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활성산소에 의해 몸이 공격당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적혈구는 미토콘드리아가 없기 때문에 NADPH의 양이 매우 적어 활성산소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고 적혈구에 큰 손상을 입으면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