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모토 나나미

 




'''하시모토 나나미'''
'''橋本 奈々未|Nanami Hashimoto'''
'''본명'''
'''하시모토 나나미 (橋本 奈々未(はしもと ななみ, Nanami Hashimoto)'''
'''출생'''
1993년 2월 20일 (31세)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시
'''국적'''
일본 [image]
'''신체'''
163cm|B형
'''가족'''
부모님, 남동생
'''경력'''
'''노기자카46 1기생'''
노기자카46 (2012~2017)
'''별명'''
'''나나밍'''(ななみん)[1]
'''링크'''
755[2]
'''기타사항'''
'''노기자카46 졸업과 동시에 연예계를 은퇴'''
1. 개요
2. 노기자카46에 들어가기까지
2.1. 유년 시절
4. 취향
5. 오디션 지원 계기
6. 대인관계
6.1. 관계자 평
7. 졸업 이후


1. 개요


'''"하시모토 나나미는 아이돌 계의 新 스트라이크존"''' - 시노모토634[3]

노기자카46에서 멤버로서 발표한 모든 싱글의 복신에서 빠져본 적이 없는 2인 중 한 명이다.[4]
데뷔 초부터 꾸준히 차기센터 떡밥에 주기적으로 소환되었다가, 2016년 10월 16일, '''16th 싱글 센터를 맡았다.''' 그리고 16년 10월 20일 새벽 올 나이트 닛폰에서 '''졸업을 발표했다.''' 졸업 발표 이후에는 연예계 자체를 은퇴하였으며 현재는 일반인이다.
2017년 2월 20일 노기자카 5주년 콘서트에서 졸업 콘서트를 끝으로 노기자카46을 졸업했다.

2. 노기자카46에 들어가기까지



2.1. 유년 시절


'''▲어린 시절의 나나미'''
1993년 2월 20일 홋카이도 아사히카와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예정보다 8일 빨리 부모의 희망대로 아빠의 생일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두상이 예뻐지길 바라며 어머니가 머리를 신경써서 굴려줬다고 한다. 덕분에 지금도 뒤통수는 가장 자신있다고[5].
2015년 4월 20일,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첫 회에서 '나나미'라는 이름의 유래를 공개했는데, 이것이 상당히 재미있다. 나나미의 아버지는 처음에 딸의 이름을 『나나』라고 부르고 싶어서 『奈々』를 생각하셨는데, 나나미의 어머니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일본어의 아행부터 순서대로 나나아, 나나이, 나나우 등 하나하나 짜맞췄고, 그 중 나나미가 가장 느낌 좋다고 판단했는지 奈々未가 되었다고 한다.
유치원 때는 소극적인 성격이면서도,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을 할 땐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4살 아래인 남동생이 생기며 부모님이 남동생만 챙기자 자신도 챙겨달라고 맹렬하게 어필했지만, 결국 별로 챙겨주지 않아 섭섭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용돈과 세뱃돈으로 역사상 인물들의 전기를 사서 읽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시험에선 거의 100점, 나빠도 90점이란 성적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땐 전국시험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리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해서 초등학생 회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키가 163cm가 되어서 농구부에 소속되었고, 농구대회에 레귤러 출장했다고 한다.
이 당시의 나나미는 꽤나 지기싫어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카쟌쟌[6] 에피소드가 대표적. 처음엔 매워서 먹기 싫었는데, 어머니가 '맛있는 건데 역시 어른들밖에 모르는 맛인가보다'고 말하자 맵지만 맛있다면서 엄청 먹었다는 것. 또한, 홋카이도의 대도시인 삿포로에서 학생 6명이 전학 온 뒤로 전교에 청바지붐이 불었는데, 일반적으로 츄리닝을 입고 등교하던 아사히카와의 유행을 잃고 싶지 않아서 혼자서 끝까지 츄리닝을 입고다녔다고. 시간이 지나고 전학생 중 한 명과 친해져서 결국 청바지 시류에 굴복하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혼자서라도 츄리닝을 계속 입고 다닐 작정이었다고 한다.
중학교 때는 농구부 '부'부장을 맡았다고 한다. 스포츠 캐스터가 된다면 만나고 싶은 인물로 일본여자 농구대표이자 홋카이도 출신인 마치다 루이와 타카다 시오리 선수를 꼽았는데, 이유는 중학생 때 출장했던 시합에서 졌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고. 본인 말에 따르면 당시에 센터 포지션이라 몸을 꽤 썼다고 한다.[7] 중학교 1학년 겨울에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선물로 커튼을 받았다[8].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갑자기 남자농구부의 매니저로서 부활동에 몰두했다.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의 문화제는 3학년 때 단 한 번 참가했다고 한다. 1, 2학년 때는 부활동이 엄격해서 '문화제에 열중할 틈이 있으면 연습이나 해!'라는 느낌으로, 모두가 문화제에 들떠있을 때 부러워하면서 산에 올라 다리근력운동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3학년 때 참가한 학교 축제에서는 코스프레를 하고[9] 초코바나나 포장마차를 했다고 한다.
2016년 4월 블로그로 고교시절에 친한 친구들이 생일선물로 만들어준 사진집 형식의 문자메시지를 공개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미인이지만 사진발 안 받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해당 메시지에는 'AKB48을 뛰어넘는 예약률', '모델 하시모토 나나미상'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는데, 5년 뒤에 이렇게 연예계에 있을 줄 몰랐다며 인생은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덧붙여 자신의 모테키[10]를 고2때로 꼽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아이들과는 계속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졸업식 날에는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선물하며 고백하는 일본의 문화가 있는데, 하시모토는 여자후배가 와서 단추를 달라고 하자 그 아이에게 선물해버렸다고.[11]
농구부가 인터하이에 참가하며 처음으로 홋카이도를 떠나 오사카에 잠깐 가게 되었는데, 이후 그녀는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고 한다. 외국으로 가고 싶지만 일단은 그 첫걸음으로 도쿄로 상경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무작정 가겠다고 하면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에, 도쿄의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홋카이도소재 대학들에는 없는 학과로 진학해야만 했다. 철저한 조사끝에 홋카이도에는 미술대학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후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목표로 했다. 수험이 반 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미대입시를 시작하고, 아사히카와에서 2시간 거리의 삿포로의 학원을 다녔다.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뛰며, 열공한 결과 무사시노미술대학의 공간연출디자인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12]

3. 노기자카46에서의 활동




4. 취향


  • 취미는 목욕. 목욕용품도 수집하고 있는 듯. 이외에도 문학방송에 캐스팅될 정도로 독서광이며, 농구경기관람과 산책을 즐긴다.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는 것도 취미로 꼽은 적 있다.
  • 특기는 냄새맡기, 켄타마하기, 휘파람불기. 특히 켄타마를 굉장히 잘한다. 바나나맨이 "홋카이도에서 할게 별로 없었겠지" 이런 드립을 쳤다. 원래 이 켄타마는 하타나카의 모친께서 하타나카의 재주라고 제작진에게 귀띔한 것이었는데, 하타나카는 잘 못하고 갑자기 나나밍이...
  • 입버릇은 "뻬잇."
  • 좋아하는 농구팀은 NBL은 레반가 홋카이도, BJ리그는 하마마츠 히가시미카와 피닉스. 그러나 2016년부터 B리그로 통합되면서 마음이 창단 때부터 응원했던 레반가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도 레반가 관련 FM홋카이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 좋아하는 패션 스타일은 에스닉계.
  • 좋아하는 음악장르는 Rock으로 큐소네코가미의 광팬이다. 그 외에도 SUCHMOS, 후지패브릭 등 다양한 밴드의 음악을 즐겨듣는다. 어렸을 때는 Bump Of Chicken의 팬이었는데, 이들이 진행하던 TOKYO FM의 SCHOOL OF LOCK!을 듣게 되며 라디오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3]
  • 좋아하는 색은 카키와 네이비. 상경하기 전까지 살았던 훗카이도 본가의 하시모토의 방은 짙은 오렌지색과 갈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고 한다.
  • 보유자격증은 색채검정3급, 주산검정준2급, 어휘&독해검정준2급, 자동차운전면허, 오토바이운전면허, 아로마테라피검정 등이 있으며 요리검정취득도 생각중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맥북프로를 이용해서 미대 시절에는 수업을 통해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트와 같은 프로그램을 다뤄본 적이 있다.
  • 벌레를 싫어하는데, 그 중 매미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한다. 도쿄에 상경해 자취를 하기 시작했을 때, 밖에 널어놓았던 빨래를 정리하다가 빨래와 빨래 사이에 살아있는 매미가 있었다고 한다. 하시모토는 그것을 모르고 그냥 방으로 빨래들을 들고 왔는데, 매미가 방 안으로 들어와 엄청 시끄럽게 울었던 기억이 있다고.
  • 요미우리 자이언츠 투수인 쿠와타 마스미의 팬이다. 관련 굿즈까지 갖고 있을 정도. 인터넷에서 그의 일화와 명언들을 찾아보면서 감동했다고 한다. 노기도코 눈물의 여왕 편에서 쿠와타의 명언을 보면서 울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그 장면을 쿠와타의 장남(나나밍과 동갑내기)이 보고 "아버지 얘기를 하면서 우는 여자 아이돌이 있어요"라고 쿠와타 본인에게 전달, 이후 쿠와타와 나나밍의 대담이 잡지에 실리게 되었다. 이 대담에서 나나밍이 미대를 중퇴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좋아하는 문구는 쿠와타 마스미의 야구는 마음의 야구.[14]
  • 저스틴 비버를 좋아한다. 2015년말에 저스틴 비버의 엠스테 출연이 결정되었을 때, 자신도 보러 가고 싶다는 모바메를 보내기도 했다. 비버의 출연 당일에 다시 한 번 애끊는 덬심을 적은 모바메를 보내기도 했다.
  • 악수회에서 한국어를 구사한다 '카더라'. 한국오타들을 저격했던 멘트는 '나꿍꼬또기싱꿍꼬또'
  • 오와라이 콤비 언터쳐블의 시바타 히데츠구의 열열한 팬이다. 노기빙고6의 6화에서 언급하였다.
  • 점 보는 것을 좋아한다. 유료 인터넷 사이트에도 몇 개 가입해서 받아보고 있다고. 카레그릇에 가방끈이 떨어진다던가 하는 것이 오늘의 운세에 나와있었는데 맞혔다고 레포할 정도.[15] 그리고 2016년 2월, 4주년 기념으로 라이브 방영한 '46시간 텔레비전'의 '사유링고의 만져서 점보기'라는 말도 안되는 코너에서도, 자신은 점 보는 거 좋아하니까 어디든지 다 만져도 된다고 말하기도 핬다. 점보기를 핑계로 엉덩이를 계속해서 만지고 있는 마츠무라 사유리 앞에서도 미동조차 없이 진지했다. 이어서 마츠무라가 요즘 코감기에 걸리지 않았냐는 점괘를 내놓자 신기하다며 정색하기도 했다. 그 외에 히구치 히나와 똑같은 타로카드점에 간 것이 통했을 정도로 미신을 좋아하는 듯. 오시도코의 수록 에피소드 또한 2013년의 운세 에피소드를 골랐을 정도니, 말 다했다고 보면 된다. [16]
  • 2013년부터 매년 새해목표를 영어회화 독파하기라고 말했다. 실제로 블로그에 영어회화책 사진을 올리는 등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에 관해 '마음은 먹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고 발언. 이후 캔캠에서 2016년의 목표는 스페인어 회화하기로 바꿨다. 이유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 가고싶으니까'라고 말했다.
  • 일본의 유명한 순정만화인 너에게 닿기를 (君に届け) 이라는 작품의 원작자인 시이나 카루호가 하시모토 나나미의 외가쪽 친척이라고 한다.

5. 오디션 지원 계기


연예계에 관심이라곤 전혀 없었던 여대생 하시모토가 아이돌 오디션을 보게 된 계기는, '''항상 돈이 궁하고 허기진 상황에서, 연예인들은 로케를 할 때 제공받는 도시락(ロケ弁)을 보고 자신도 연예인이 된다면 저런 도시락을 먹을 수 있으니까'''라는 이유였다.
노기자카의 다큐멘터리 영화 '슬픔을 잊는 방법'에서 하시모토는 자신이 도쿄로 상경할 때 집안에서 지원해줄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스스로 부모님의 지원이 필요없다며 끊었다기보다는 가정 형편 자체가 좋지 않았다.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설마 그 정도로? 라고 하겠지만, 정말로 그 정도로 돈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시모토가 2013년 16인의 프린시펄 오디션을 받으면서 읽었던 작문에서 그 형편을 가늠해볼 수 있다.
저는 비교적 방임주의인 가정에서 자라왔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 적었던 졸업 문집의 작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직업은 공무원.
선생님은 초등학생 때부터 공무원이 장래희망이라니 꿈이 없어! 라고 말했지만,
공무원은 금전적으로도 안정적이고 큰 부자는 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제대로 된 생활도 가능하다'

이 무렵의 저는 굉장히 안정지향이었습니다.
하지만 19살의 저는 도무지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 무대에 서있습니다.
뮤지컬의 오디션을 받고 있습니다.
안정의 '안' 자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목표로 해야 할 곳은 이곳이었습니다.
결국 학비와 생활비 전부를 본인이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겨우 도쿄에 오게 되었는데 정말 최악의 생활고로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 데뷔 직전 긴생머리의 나나미'''
본인 말로는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뼈빠지게 일을 해도 여자 아이 하나가 제대로 생활하기엔 도쿄의 물가는 어마무시했다. 상경 후, 허리까지 길어버린 머리카락 자를 돈도 없었을 정도. 고심 끝에 헤어잡지 모델에 지원하게 되었는데, 이후 지금의 숏컷 나나밍이 탄생하게 되었다.
'슬픔을 잊는 방법' 내용 중에는 돈벌이와 학업을 병행하며 피폐해지는 자신에 대한 증언도 있다.
대학 생활의 추억은 화려했다기보다는...
그저 생활이 힘들었던 게 전부네요.
주먹밥을 사서 걷다가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서
그 자리에서 주먹밥을 바닥에 확 집어던지는 이상한 짓도 했고…
부모님한테서 완전히 자립할 거라면서
단언하고 나왔으니까 우는 소리도 못 하겠고…
그런 부분에서 점점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졌어요.
같이 상경한 친구들과 상황을 보러 온 부모님께서는
못 봐주겠으니까 일단 돌아오라고 하셨어요.
홋카이도로 돌아와 버리면 편하겠지만,
의미가 없어진다고 생각했어요.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돈도 모아서 상경했는데
지금 돌아가 버리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로 끝나버린다고 생각했으니까
다시 도쿄로 돌아간 걸지도 몰라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어떻게든 도쿄에서 스스로 생활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때에
연예계의 로케벤이 생각났어요.
연예인이 되면 로케벤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아마도 이런 삶의 궤적 때문에, 금전적인 문제에 민감해지는 듯 하다. 하시모토의 돈 타령은 방송에도 종종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노기빙고 3의 4화에서 이상형의 남자를 물을 때, "빚이 없는 사람"을 꼽았다. 돈이 있는 만큼만 쓰는 견실한 사람이 좋은 것도 있고, 빚이 있을 경우 상대방의 때문에 자기까지 말려들어버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는데, 노기자카 공사 중에서 이쿠타와 사회자 히무라가 물건을 자주 잃어버려서 고민이라고 하자,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는 사람은 그만큼 돈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잃어버려도 새 것을 살 수 있다는 잠재의식이 있으니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고 잘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인 즉슨 나나밍 본인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해서 미묘하게 슬프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굉장히 짜증나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슬픔을 잊는 방법'에서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로 동생의 학자금을 일정 부분 마련하는 것을 꼽기도 했다. 본인의 괴로웠던 대학 시절에서 발현된 목표일 것이다.

6. 대인관계


  • 하시모토군과 나나밍
남동생 '하시모토군'에게 애정을 쏟아붓고있다. 엄청난 브라콘(브라더 컴플렉스)이다. 어느 정도냐면 휴가 기간에 홋카이도에 돌아갈 때마다 손수 남동생의 머리카락을 잘라줄 정도. 데리고 다니면서 쇼핑도 자주하고, 밥도 직접 해서 먹인다고 한다. 노기자카의 다큐영화에서는 남동생의 학비를 마련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하시모토家는 아빠, 딸, 아들이 전부 얼굴이 똑같다고 한다. 악수회장에 교복을 입고 오는 남학생들을 보면, 남동생 생각이 나서 와이셔츠를 사주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 자신의 전담 매니저'였던' 마유코와 절친하다. 마유코는 나나밍의 졸업발표 한달 전에 퇴사했다고.
  • 싱어송라이터인 세가와 아야카가 아사히카와니시고등학교 동창이다. 블로그나 잡지에서 몇번 공개했던 고교시절의 사진 속 나나밍 옆에 서있었던 사람이 바로 세가와 아야카였다. 세가와 아야카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 둘의 투샷이 자주 올라온다.

6.1. 관계자 평


'''어느 사이엔가 흘러들어온 예술계 소녀[17]

'''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촬영한 4번째 개인PV'''
노기자카46의 실질적 프로듀서인 콘노위원장은 하시모토의 '아이돌 답지 않고 의외성이 있다[18]'는 부분에 관해 종종 언급한다. 애초에 아이돌을 목표로 하던 애도 아니었고, 아이돌 팬은 더더욱 아니었던 하시모토가 일본여자아이돌의 전형적인 특성이 없는 자연체라는 분석이다. 데뷔 직후부터 쿨뷰티한 완성형 비쥬얼을 보여주며, 미술대학에 다니는 예술가의 아우라를 풍기는 그녀의 존재는 ‘아이돌 업계의 새로운 스트라이크 존’이라 불리며 주목을 받을 만큼 이색적이었다.
따라서 데뷔초 노기자카 운영 측에서는 하시모토의 아티스트적인 측면을 상당히 어필해왔다. 대표적인 사례는 하시모토가 직접 총괄제작한 4번째 개인PV. 멤버가 직접 개인PV의 감독으로 참여한 것은, 그룹 결성 이후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하다. 이 작품으로 그녀가 가진 재능의 스펙트럼이 재평가받게 되었다.
또한, 아키모토 야스시 사단에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의 아이돌이라는 평이다. 사실 아이돌 노선보다는 성향상으로도 모델, 배우계열에 가깝다는 것. 아이돌을 졸업하고라도 모델이나 배우로서 잘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아예 연예계 은퇴라서 아쉽다는 반응이 많다.
오디션에서도 한껏 꾸민 모습이 아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자서전을 읽고 감명받았던 것을 이야기할만큼 독특한 애티튜드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평소 겸손하고, 성실한 성격으로 함께 작업한 감독이나 주변 스탭으로부터의 평판도 좋다. 하시모토의 첫번째 개인PV를 제작했으며,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텐텐>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미키 사토시 감독은 하시모토를 이렇게 평했다.

'''"하시모토군은 근성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부야의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도 포복전진하는 극도로 힘든 '난제'를 어렵지 않게 응해주는 모습에 조금 감동했습니다. 제 현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았던 사람은 출세하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하시모토군의 장래도 기대가 됩니다…랄까 이미 출세했으려나?"'''

미키 사토시 감독이 하시모토를 캐스팅한 이유는 '몸이 건강하고 여배우 같은 얼굴이다'라는 것. 그러나 자신은 '사실 몸도 건강하지 못한데다가, 애초에 여배우 같은 얼굴은 뭐지?'라고 생각했다고...참고로, 미키 사토시가 제작한 '''전진하라! 하시모토 나나미'''는 노기자카46 공식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된 개인PV 예고편 재생 순위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19]
데뷔싱글 '''구루구루커텐'''의 크리에이터인 미야오카 슌스케도 MdN 총력인터뷰에서 하시모토를 언급했다. "감독이 현장에 갑작스레 눈물을 흘리라고 주문한 연기를 해냈다. 내심 너무 갑작스럽지 않나? 연기자도 아니고 무리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런 주저없이 눈물을 흘려서 놀랐다."
'''오이데샴푸'''의 감독을 맡은 타카하시 에이지 감독도 하시모토의 올곧은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언급을 두차례 한 적 있는데, 그룹 결성 초반에 왜 하시모토를 여배우 노선으로 밀려고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2번째 싱글 수록곡인 '''날개의 기억'''의 PV를 제작한 오카가와 타로 감독은 하시모토의 경우 갭을 만드는 편이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코멘트했다.
전설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에반게리온의 작가인 사다모토 요시유키도 4th 싱글부터 하시모토의 오시라고 자처하고 있다.

7. 졸업 이후



7.1. 주간문춘


2017년 4월 25일에 주간문춘이라는 잡지에서 위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大手レコード会社「ソニー・ミュージックエンタテインメント(SME)」の取締役、村松俊亮氏(53)が、アイドルグループ「乃木坂46」を今年2月に卒業したばかりの人気メンバー・橋本奈々未(24)と、卒業後も密会を繰り返していたことが「週刊文春」の取材でわかった。村松氏が橋本を送り、橋本の自宅マンションの建物内に入る姿も複数回確認している。

대형 음반사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SME)" 이사 무라마츠 슌스케 씨(53)가 아이돌 그룹 "노기자카 46"을 올해 2월에 갓 졸업한 인기 멤버 하시모토 나나미(24)와 졸업 후에도 밀회를 거듭하고 있었다. 무라마츠 씨가 하시모토를 보내고 하시모토의 아파트 건물 안에 들어가는 모습도 여러 차례 확인하고 있다.

주간문춘은 여전히 일본에서 연예계 뒷얘기를 캐는 언론[20]으로 신뢰성이 매우 높은 언론사(?) 중에 하나이며, 마츠무라 사유리, 카와무라 마히로 스캔들을 터트려서 적중시켰던 적이 있어서 밀회를 했다는 것은 팩트임에는 분명하다.[21]
하지만 후술하다시피 연예계와 관계 없는 일반인이 직접 가정사까지 들먹이면서 해명한 걸 보면 주간문춘의 추측과는 다르게 전혀 문제 없는 일이다. 한편, 노기자카 몇몇 멤버와 SME 관계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2ch부터 떠돈 적이 있었지만 2ch인 만큼 걸러 들을 필요가 있었지만, 그게 현실이 되어버린 셈이다.
4월 27일 이번 일과 관련해서 본인이 직접 입장을 밝혔다.

想像や憶測があたかも事実であるかのように巡っていくことが怖いですし、それによって私のファンでいてくださった方達が動揺させられるのが悔しいです。最後の日、最後のブログ、最後のモバイルメールを本当の私の最後にしたかったのですが、このような形でまた言葉を残さなくてはいけないのはとても悲しいです。重ねて申し上げますが、村松さんとの間に後ろめたいことは何もありません

상상과 억측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둘러싸고 나가기가 무섭고, 그것에 의해서 저의 팬이셨던 분들을 동요시키는 것이 분합니다. 마지막 날 마지막 글 마지막 모바일 메일을 진짜 나의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다시 말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매우 슬픕니다. 거듭 드리지만, 무라마츠 씨와의 사이에 꺼림칙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하시모토 나나미의 말을 믿자는 쪽, 주간 문춘을 욕하는 쪽, 하시모토의 말뿐이라며 욕하는 쪽 등으로 나뉘고 있지만, 정작 일본 국내에서는 무관심의 회의적인 반응이 제일 많은 편이다. 하지만 팬이든 안티든 '''기사 내용의 사실 여부에 관계 없이 연예인도 아닌 이미 은퇴한 일반인의 사생활을 함부로 들추는 건 100% 잘못임에는 분명하다. 설령 주간문춘의 기사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주간문춘이 100% 잘못했다'''는 의견이 가장 많다.

7.2. 이후


사건이 있고 난 이후에는 노기자카 46의 레이블이었던 소니뮤직에 조용히 입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역시 소니뮤직의 이사인 무라마츠 슌스케의 도움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나나미에 대한 소식이 원체 적어 알 수 없는 상황.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음악과 연을 이어나가려는 것은 확실하기에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2019년에 뜬금없이 결혼설이 떴다. 물론 나나미는 이제 일반인 신분이기에 결혼해도 아무 문제 없지만 팬들은 너무 갑작스러운 결혼설에 놀라는 분위기[22]였다. 당연하지만 본인은 어떤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았고, 결혼설의 출처도 찌라시 수준조차도 안되는 개인 트위터 계정의 트윗 한개 뿐이라 거짓이라는 게 정설이다.
시라이시가 졸업을 발표하기 전에 관계자들과 이야기 하는 자리에 하시모토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덕분에 팬들은 시라이시의 졸업 콘서트에 하시모토가 나와줬으면 하는 마음을 비추고 있다.
2020년 7월 1일 졸업 이후 3년만에 근황이 올라왔다. 아는 지인의 미용실 오픈 기념으로 방문했다가 지인이 하시모토에게 허락받고 사진을 찍어 올린 것이다.#

[1] 기본적으로 불리는 애칭.[2] 2015년 7월 3일 이후로 중단 상태.[3] 시노모토634(篠本634, 시노모토 오사무)는 라이터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오타쿠 관련 글을 많이 써서 '오타쿠 저널리스트'로 불리고있다. 2016년 10월 현재 연재가 있는 잡지는 주간소년챔프, 스트리트잭, CD&DL데-타 등이 있다.[4] 나머지 한 명은 시라이시 마이다.[5] 2015.9.7 퍼스트 사진집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내용. 사진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컷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머니께서 예쁘게 굴려주신 두상이 잘 나온 페이지가 찍힌 사진이 좋아요. 사랑을 느꼈어요"라고 답변했다.[6] 매운 맛을 내는 조미료[7] 캔캠 2016년 9월호 인터뷰[8] 하시모토의 집은 부모님에게 갖고 싶은 것을 말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트리 아래에 놔두고 가는 시스템이었다고 한다. 당시 핑크색 커튼을 갖고 싶었던 나나미에게 어머니는 통신판매의 카탈로그를 건네면서 이 중에 고르라고 하셨다. 그러나 당일 아침 선물이 담긴 골판지 상자를 열어보자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강렬한 쇼.킹.핑.크.의 커튼이었다고 한다. 선물이니까 일단 방에 걸어놨더니 그것만으로도 조금 야한 분위기의 방이 되어버렸는데, 할 수 없으니까 중고등학교 6년간 쇼킹핑크의 방에서 지냈다. 도쿄에 상경해서 처음으로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평범한 오렌지색 커튼을 걸었을 때 정말 안정되었대나 뭐래나.[9] 데뷔 전 프리쿠라에서 공개된 양키...코스프...레...[10] 인기가 가장 많았던 시기[11] 2016.06 캔캠 인터뷰 발췌[12] 그러나 데뷔 이후 바쁜 스케줄로 인해 대학을 중퇴하였다. 2014년 FLASH 인터뷰.[13] 그 전 프로그램은 'MOTHER MUSIC RECORDS'였는데, 스폰서 미츠비시자동차의 결함문제로 인해 종영되었다.[14] 구와타 마스미 항목까지 가는 게 귀찮은 야구에 관심이 없는 위키러를 위하여 간단하게 어떤 사람인지 적어두자면,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오사카 PL학원고등학교의 동급생이며, 둘은 고시엔 역사상 최강의 콤비로 일컫어지는 KK콤비를 결성해, 역사상 처음으로 고시엔 오사카 지역예선을 3년연속 우승했으며, 재학 3년기간 열리는 5번의 고시엔 대회에 모두 출장에 우승 2번, 준우승 2번, 4강 진출 1회라는 말도 안되는 기록을 쌓았고, 학제개편 이후 고시엔 역대 최다승(20승)기록을 가지고 있는 전설적인 선수다. 이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1순위로 입단했으며, 이후 사와무라 상, 베스트나인 각 1회(1987년), 리그 MVP,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 최우수 배터리상 1회(1994년), 골든글러브 8회 등 요미우리의 에이스로 군림한다. 줄곧 요미우리맨으로 살았고 2006년에 은퇴한 뒤, 돌연 미국으로 떠나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입단하여 빅리그 마운드를 노렸으나, 미국에서는 2007 시즌 1년간 19게임에 등판하여 방어율 9.43, WHIP은 1.90으로 다시 은퇴했다. 이때 나이가 만 39세였으니 이 기록으로 폄하될 일은 아니다.[15] 손금에 '노년에 대기만성', '만혼할 팔자'라는 것이 나오자 괴로워하기도 했다.[16] 뿐만 아니라 어렸을 적엔 영감이 있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 본가에서 모르는 할머니가 집 안에 있다고 어머니께 말한 적이 있다나 뭐래나. 또한, 에토 미사의 증언에 따르면 방송국에서도 하시모토는 종종 '이곳은 위험하다'며 멤버들에게 주의를 준다고 한다. 노기도코의 미공개 DVD에서 하시모토는 노죠 아미에게 귀신이 붙었다며 몰카로 속이기도 했다. 하시모토가 노죠에게 '최근에 어디 이상한 곳 가지 않았냐'는 진지한 질문 한마디만 던졌을 뿐인데, 노죠는 경악+공포에 질리기도. 귀신을 없애는 의식까지 훌륭하게 마쳤음에도 끝까지 몰카를 눈치채지 못했다. 후에 '나나미라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코멘트했다.[17] 2015년 11월 주간플레이보이의 정기연재 코너인 '노기자카이야기'가 합본으로 발행되었다. 이 책에 나온 하시모토 파트의 소제목을 인용했다. 덧붙여, 이 섹션에서 서술하고 있는 관계자 평의 출처는 '노기자카이야기', 'MdN 총력인터뷰', 'MdN 노기자카46 영상의 세계'에서 중점적으로 다뤄진 '아이돌 하시모토 나나미'에 관한 분석이다.[18] 출처:MdN 총력인터뷰[19] 2016년 6월 기준[20] 디스패치와 비슷[21] 물론 일반적인 황색언론의 보도라면 대부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주간문춘은 오토타케 히로타다베키 등 2016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불륜사건은 대부분 주간문춘이 최초로 보도를 했고, 처음에는 찌라시 언론이라고 무시하다가 후에 사실로 밝혀진 일들이 많아서 불륜 기사 하나만큼은 일본국내에서 꽤나 신뢰도가 높은 편이다. 하지만 그 정확도를 위한 취재방식이 거의 스토커급인지라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지들딴에는 팩트체크 제대로 한다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완벽하진 않아서 별에 별 병크를 저지르고 고소드립쳐먹기도 하고, 추하게 글삭튀를 한 적도 꽤 된다. 대표적으로 미야자키 미호의 스캔들을 보도했다가 이게 구라로 밝혀지자 글삭튀를 하는 추태를 보였다.[22] 어느 정도냐면 은퇴한 지 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야후재팬 트렌드 5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