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요하라 가즈히로
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 1986년 세이부 라이온즈에 고교 드래프트 1위로 입단하여 프로생활을 시작하여,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거쳐,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2008년을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거구이면서 호탕한 성격, 그리고 고교 시절부터 압도적인 활약으로 주목받던 선수여서 많은 팬을 가지고 있다. 함께 'KK 콤비'를 이루며 고교야구를 제압한 친우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쿠와타 마스미와의 관계도 자주 회자된다.
덕분에 별명이 특히 많은데 가장 유명한 별명은 '''야구계의 반쵸[5] '''와 '''무관의 제왕'''(...) 한국으로 치면 송지만의 상위호환
그러나... 2016년 2월 2일 각성제 소지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당하면서 이제는 일본프로야구의 약쟁이 논란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2. 프로데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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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우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쿠와타 마스미와 함께.[6]
오사카 최고의 야구 명문교인 PL학원에서 1학년부터 4번을 쳤을정도로 힘이 좋은 타자였었다. 그가 기록한 고시엔 통산 13홈런은 지금도 회자되는 대기록. 덧붙여 고교 통산 83홈런의 그야말로 일본 최고의 거포라 불릴만한 기록이였다.
오사카 출생인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 대부터 골수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으로 유명했었으며 야구를 시작한 것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대한 동경 때문일 정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인 V9[7] 이후, 주니치 드래곤즈와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밀려 2년 연속 우승을 놓치던 장면이 어린 기요하라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는 한신팬 어머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이었다고 한다. 한신 팬과 요미우리 자이언츠 팬의 결혼이나 교제는 상상도 못할 정도라는 일본 야구팬들에겐 굉장히 신기한 이야기. 그래서인지 기요하라는 어린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이긴날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잤고 한신이 이긴날에는 한신의 유니폼을 입고 잤다고 한다. 다음날 학교에 등교할때도 한신이 이긴날에는 한신모자,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이긴날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모자를 쓰고 등교하기도 했다고. 나이를 먹으며 오 사다하루의 활약과 V9로 대표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최전성기를 보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으로 굳어졌다.
그러나 그 자신은 고교 졸업 후 그토록 열망하던 요미우리에서 드래프트 1위로 지명받지 못하고 세이부 라이온즈에 지명되어 버렸다. 거기다 8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드래프트 1위 지명은 그와 오사카 PL학원의 동기이자 평생 친우였던 쿠와타 마스미. 운명의 장난도 이 이상이 없었다.
정확한 정황은 기요하라는 고교시절 인터뷰 내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겠다는 뜻을 밝혀왔고 구와타는 고교시절 내내 누가 날 지명하든 난 무조건 와세다대학에 진학하고 싶다고 대외적으로 말을 해 왔다. 고로 쿠와타를 지명해도 대학에 가버리면 1라운드 지명을 날려버리는 셈. 또한 당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 오 사다하루는 여러 인터뷰에서 쿠와타는 대학에 간다니 힘들고, 자신의 후계자인 거포 1루수로 기요하라를 지명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피력. 그리하여 쿠와타는 와세다대학 입학이 기정사실화 되었고 대학 야구부에서 쿠와타 입단 환영행사를 준비 할 정도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카우트 역시 구와타가 아닌 기요하라의 부모님에게 접촉하여 지명의사를 피력했다. 그리고 드래프트 당일 무려 6개구단[8] 이 기요하라를 1순위에 지명했으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은 기습적으로 쿠와타 마스미를 지명하여 단독으로 교섭권을 따냈다. 당연히 모두가 경악.
그러나 쿠와타는 여전히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날 지명한건 감사하지만 난 와세다 대학에 갈꺼라고 얘기했고, 당연히 야구계는 요미우리가 지명권 하나 날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했다. 와세다대학은 쿠와타 환영회를 준비했지만.. 정작 쿠와타는 환영회에도 안나타났다. '''쿠와타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모두의 뒤통수를 갈겨놓은것.'''
당시 여러 설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쿠와타와 물밑교섭을 통해 대학에 간다는 말을 흘려 아무도 지명 못하게 막은 후 단독 기습지명으로 교섭권을 획득했다는 설과 쿠와타는 정말 대학에 가려고 했으나 지명후 계약금에 흔들려 입단했다는 설이 있다. 일본에서는 전자의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 사실 요미우리 입장에서도 기요하라가 그렇게 급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 3루수엔 입단 당시 입단 5년차로 리그 MVP까지 수상했던 하라 다쓰노리가 버티고 있었고, 1루에는 84년에 32홈런을 때렸으며 매년 3할 언저리 타율과 20홈런 내외를 기록하면서 쇼맨십으로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나카하타 키요시가 있었다.
어쨌든 6개 구단에서 기요하라를 지명하였고, 일본프로야구 1차 지명은 모든구단이 자유롭게 지명을 한 후 지명한 선수가 복수구단과 겹칠 경우 제비뽑기를 하여 당첨된 팀이 선제 교섭권을 따내는 룰에 따라 기요하라는 복수의 구단에서 제비뽑기를 했고 세이부 라이온즈가 1차 교섭권을 갖게 되었다. 세이부와의 교섭에 안 나가려 하는걸, 모친의 거의 폭언에 가까운 설득(...)을 받고 프로에 들어갈 것을 결심하여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입단 기자회견에서 기요하라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쿠와타도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울면서 다짐했다. 구와타에게도 원한이 있음을 피력한 것을 보면[9] 쿠와타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물밑교섭론이 힘을 얻는다. 구와타에 대한 경쟁심을 사그라들지 않아, 88년 올스타전에서 구와타를 상대로 홈런기록 및 1994년 일본시리즈에서는 쿠와타를 상대로 홈런 두 방을 연달아 때려내기도 했다.
이러한 과거가 있어서 1987년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와 맞붙었을 때, 세이부의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인 6차전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기요하라는 갑작스레 눈물을 흘렸다. 당시 중계를 보면 카메라맨의 당황가득한 카메라워크가 일품. 우승 직전 상황에서 일본 야구 중계는 보통 선수 한 명씩을 비추면서 우승 직전의 설렘과 긴장어린 표정을 찍는 것이 관행인데, 이걸 찍다가 갑자기 1루에서 기요하라가 울기 시작하니까 카메라를 1루로 돌리고 허둥지둥 한다. 2루수였던 츠지 하츠히코가 기요하라를 다독이는 장면도 나왔다. 아무래도 과거 요미우리에게 당했던 심적인 아픔이 컸을 터. 그 요미우리를 자신이 기어코 이기고 있다는 긍정의 감정과,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요미우리가 일본시리즈에서 패배하는 상황에서 자신이 일종의 가해자가 되어버린 부정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힌 눈물이었을 것이다.[10]
고교시절 "KK콤비"라고 불린 키요하라와 쿠와타의 인기는 이미 고시엔 스타급을 넘어서서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스타였던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넘어선 수준으로 일본 스포츠신문에 오치아이가 그둘의 인기를 질투하는 인터뷰가 실릴 정도였다고 한다.[11]
이후 기요하라와 쿠와타는 화해를 했지만, 서로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라이벌 의식만큼은 내려놓지 않았다. 하락세가 완연했던 쿠와타가 은퇴를 선언했다가 번복하고 선수로 복귀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요하라가 술자리에서 은퇴하겠다고 말을 했다가 번복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먼저 은퇴하면 지는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서로를 의식했다. 결국 미국에서의 기록을 합쳐도 기요하라가 1년 더 하긴 했는데, 둘 다 말년의 성적은 처참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을 듯.
3. 선수생활
3.1.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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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의 붙박이 4번 타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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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일본 시리즈[12] 1차전에서 쿠와타와의 승부.
프로 데뷔를 함께 한 세이부에서의 활약은 곧 기요하라의 전성기였다. 첫 선발 출장일에 홈런을 때려내며 혜성같은 데뷔를 함과 동시에 그 해 31홈런으로 고졸신인의 루키 시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활약으로 신인왕을 획득하며[13] , 그 해 세이부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견인했다.
이후로도 꾸준히 팀의 주포로서 활약하며 1980년대 세이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당시 최연소 100홈런, 200홈런 달성(21세 9개월, 24세 10개월), 최연소 1억엔 연봉 도달(1990년, 23세), 여기에 전설적인 아키야마 코지-기요하라 가즈히로-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AKD포의 주역이 되는 등 시작부터 화려함의 연속이였다.
3.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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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와타[14] 와의 동료로서의 재회.
이후 1996년. 기요하라는 FA자격을 얻어 꿈에 그리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사실 그간의 행적을 보면 그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선택할게 너무 뻔한 상황이였기에, FA경합을 벌렸던 한신 타이거스의 당시 감독 요시다 요시오는 '''세로줄무늬를 가로줄무늬로 바꿔서라도 그를 데려오겠다''' 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기요하라에게 '''어서 내 품으로 날아들어오게'''라는 말을 했다. 물론 웃돈을 얹어준다고 할 지라도, 기요하라가 한신을 지명할 리는 없었다(...). 참고로 기요하라가 쓴 자서전에서 보면, '가고 싶었던 구단은 1위가 요미우리 자이언츠, 2위가 한신이였으나, FA를 얻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이 붙은 시점부터는 원래 꿈을 이룰 생각으로 이미 세이부 시절부터 FA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자신을 원한다면 다 던지고 갈 생각이였다' 라고 적혀있다. 그렇기 때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후 자신의 등장 테마곡으로 쓴 나가부치 츠요시의 とんぼ(잠자리)역시, 도쿄에 대한 자신의 열망과 좌절을 나타내고 싶어서 썼다고 한다.
이 과정은 기요하라의 자서전을 드라마화한 KINSMA란 프로그램에서는 한신에서 10년간 30억엔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배팅했고 고향팀이란 사실에 한신입단을 준비했으나 어머니의 너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왜 고민하냐는 조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행을 결심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결국 요미우리 입단후 쿠와타와 같은 팀이 되었고, 고교 시절의 KK콤비가 같은 팀으로 뭉쳤다는 사실은 일본 전역을 들썩이게 하였다. 입단후 3번째 경기. 부상으로 재활 중이던 쿠와타의 복귀전이 성사되었고 그 경기에서 쿠와타의 활약과 기요하라의 결승홈런으로 둘이서 10여년만에 승리를 합작하게 되었다. 그 경기 시청률은 25퍼센트가 넘었고 히어로 인터뷰 최고 순간시청률이 40퍼센트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슬슬 전성기를 지나 30대에 들어서면서 하락세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듯, 요미우리 입단 후는 들쭉날쭉한 타격을 보였다. 게다가 돈지랄로 최고의 선수만 사오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특성 때문에 타격이 약간만 부진해도 다른 쟁쟁한 강타자들[15] 에 밀려 그의 프라이드인 4번에서 내려가는 일이 많았다. 결국 요미우리에서의 순탄치 않았던 8년 간 팬들에게 이렇다 할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한 채 2003년부터는 급격히 타격 페이스가 저하됐다. 그리고 세이부 시절부터 문제였던 습관성 어깨 탈구 등으로 맨날 실려나가다 보니 2005년 시즌 종료 후 결국 전력외 통고를 받게 된다. 그가 홈런을 치고 난 후, 호리우치 츠네오 감독의 하이파이브를 거절하여, 구단 수뇌부의 눈에 거슬리게 만든 것도 한 몫했다. 기요하라를 쫓아내고 대타로 들어온 선수는 다름아닌 '''이승엽.'''[16]
그래도 특유의 호쾌한 인상 + 명문 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스타라는 점 때문에 인기만큼은 절정이었다. 기복이 꽤나 심했다지만 커리어 최다 안타, 타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 재적 시기였던 2001년에 기록했다.(139안타 121타점) 참고로 키요하라는 2001년 시즌을 빼면 한번도 100타점 이상을 기록한 시즌이 없다.[17] 게다가 140안타를 기록한 시즌은 단 1번도 없다(...)
그와 구단의 트러블은 '신사' 이미지를 강조했던 구단 수뇌부와 '반쵸'로 대표되는 그의 캐릭터 사이의 충돌로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또한 타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기요하라 군단"이라 불리는 파벌을 조직해 코치들 마저도 쩔쩔 매게 만들어서 순혈을 강조하는 요미우리 구단 이미지에 타격을 준것도 그를 내보내게 한 이유중 하나. 항목 참조
3.3. 오릭스 버팔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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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시즌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뒤, 당시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이자 기요하라의 친정팀 라이온즈의 대선배인 오기 아키라 감독이 '''오사카로 돌아와라! 너의 마지막 영광의 길은 내가 만들어주마'''라고 말하며 그에게 정식으로 오퍼를 넣었다.[18] 그 요청에 따라 2006년 오릭스에 입단하면서 그의 선수생활 마지막 3년을 고향인 오사카에서 보내게 된다.
팀 전력이 딱히 좋지 않았던 오릭스였지만 고향 팀에 온 대우를 나름 극진히 한 덕에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보다는 많은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도 부상 등으로 인해 시즌을 통째로 날리기도 했고, 노쇠화에 따른 기량의 완연한 쇠퇴로 전성기 때의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여담으로 피츠버그에서 방출당한 쿠와타 마스미가 오사카로 와서 기요하라의 베팅볼을 던져준 일화도 있다.
그리고 2008년 10월 1일, 수많은 팬들 앞에서 풍운의 남자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그가 평소에 좋아했고, 자신의 테마곡으로까지 썼었던 나가부치 쯔요시[19] 의 '톤보(とんぼ, 잠자리)'[20] 를 라이브로 들으며 현역에서 공식 은퇴했다.
그의 마지막 은퇴경기에는 20여년 전 드래프트 사건의 3인이 다시 모여 감동을 더했다. 상대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이 오 사다하루였으며 친우를 보러온 쿠와타 마스미가 관중석에 잡혔다.[21] 은퇴경기 3번째 타석에서는 적시 2루타를 기록했으며 현역 마지막 타석에서는 삼진으로 물러나면서 길고 길었던 현역생활을 마무리했다.[22]
오 사다하루는 기요하라에게 꽃다발을 건내며 "다음 생애에는 꼭 같은 팀에서 홈런 레이스를 펼처보자" 라고 기요하라에게 말했다고. 20여년전 드래프트 사건의 3인은 이 해에 모두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야구평론가, 스포츠 해설가(게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선수시절에 얻은 무릎통증으로, 장시간 앉아서 해설하는 데는 무리가 온다고 한다. 후일 코치로서 요미우리에 복귀할 가능성도 점쳐지고는 있으나 아직은 가능성 단계.
팬들은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은퇴나 요미우리에서 버려지다시피 한 상황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하며 일본 프로야구의 마지막 대스타인 이 두 명이 요미우리에서의 아름다운 은퇴가 아닌 팀과의 트러블로 팀을 떠난 점을 현재도 굉장히 아쉽게 생각한다. 후일 마츠자카 다이스케, 다르빗슈 유 등의 스타들이 탄생하지만 일본 전국을 들썩이게 만든 대스타였던 기요하라나 구와타에 비한다면 인기가 떨어지는 편.
4. 은퇴 이후
기요하라도 언젠간 지도자가 될수도 있겠는데, 워낙 자기가 위에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에 만약에 지도자를 한다고 쳐도 바로 감독이 되지 않는이상 본인의 성에 차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NPB 감독들도 그런 기요하라를 밑에 코치로 두기 껄끄러워 할 듯하다.
본인이 변하든가 하지 않는 이상 NPB에서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요미우리 시절에도 팀내에 파벌을 만들어서 기요하라 군단이라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로 팀 분위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평가이다. 요미우리 시절 코치에게 모토키 다이스케와 할 얘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키라고 대놓고 얘기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오다 코헤이를 괴롭힌 일화는 유명하며 공공연하게 편가르기를 했을 정도였다. 은퇴 후에도 일본 대표팀을 방문했을 때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자리를 피해줘야 했을 정도였다. 존경은 받지만 지도자감으로서는 분명 실격감이다. 본인 자신부터 야구계 선배를 존중해야 하는데 감독이 자리를 비키게 만들고 코치한테 자리 비키라고 하는데 과연 자신이 지도자가 된다면 선수들이 겉으로 따른다 해도 마음으로 따르진 않을 듯 하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까지 어떤 팀에서든지 팀의 구심점으로써 한 가운데에 있었다는 점을 보면 카리스마 있는 뛰어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그가 이기적인 선수였다면 세이부의 황금시대도 없었을 것이며 안좋은 상황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의 2회 일본시리즈 우승이나 오릭스에서의 후배들의 태도 등을 본다면 저런 나쁜 일화 속에서도 카리스마 하나는 확실하다 평가된다.
하지만 은퇴 이후에는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과거 그를 아끼던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고. 약물복용과 문신(야쿠자와의 관련), 불륜 등 스캔들이 터져나오더니 급기야 2014년 9월 22일 패션모델인 부인 키무라 아키[23] 와의 이혼을 공식 발표했다. 팬들은 KK콤비의 쿠와타나 AK포의 아키야마 코지도 건실하게 살고 있는데 왜 기요하라만 인생을 망치고 있냐고 안타까운 분노를 표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엄청난 커리어와 명성에도 프로야구 코치나 감독을 못하는건 기요하라 역시 선수 시절 코치들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후배들을 괴롭히고, 파벌을 만드는 등 부적절한 처신을 한 책임이 크기에 본인의 자업자득인 측면도 크긴 하다.
2014년 경부터 당뇨병에 걸려 인슐린 주사 처치를 받고 있다고 한다. 2015년경에는 해설위원 계약도 해지되고 방송에 출연하거나 파칭코 영업을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는 여전히 구원이 있는지 자이언츠 OB회의 초청을 지금까지도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2015년 중반부터 각종 주간지 등을 통해 마약[24] 투약 의혹이 불거졌으며, 2016년 2월 2일에 가택수사를 통해 자택에 소지하고 있던 마약이 발견되고, 본인의 소지품임을 인정하면서 체포되었다. 경찰측의 발표에 의하면 강제가택수사에 이르기까지 1년 이상의 면밀한 내정수사를 거쳤다고 한다. 이 사건이 TBS 테레비의 NEWS23[25] 을 통해 처음 보도된 이후로 일본 방송에서는 이를 연일 뉴스로 다루고 있다. 일본 제1스포츠인 야구의 슈퍼스타로써 대단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그 몰락이 주목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한 상황.
이후 쿠와타 마스미 등 야구계 인사들도 기요하라의 마약 사건에 대해 심각한 유감을 표시했다. 심지어 절친'''이었던''' 쿠와타에 의하면 3년 전 기요하라 측에서 돌연 "나에게 이제 참견하지 말아달라" 며 일방적으로 절연당했고, 그 뒤로 한 번도 만나거나 연락한 적이 없다고 한다. 유명했던 KK 콤비의 인기를 생각하면 꽤 충격적인 사실. 그 와중, TV 아사히의 보도에 따르면 과거 PL학원 선배에게 쿠와타와 기요하라가 직접 전동휠체어를 선물했다고. 나중에 쿠와타는 "야구는 위기 상황에서 대타나 중간 계투를 올릴 수 있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 기요하라는 그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며 갱생을 바라는 한 마디를 했다.
그리고 보도가 계속되며 '''기요하라가 현역 시절(!!)에도 마약을 했다''' 란 주장까지 나와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그 주장을 한 사람은 바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의 동료 노무라 타카히토.[26] 이게 사실이면 기요하라는 한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야구선수에서 '''약쟁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기요하라를 모델로 삼은 야구만화 "날려라! 기요하라 군"는 이 일 때문에 휴재하게 되었다.(...) #
기요하라가 마약 문제로 구설수에 오르기 직전 차게 앤 아스카의 멤버 ASKA도 마약 혐의로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ASKA의 운전수와 기요하라의 운전수가 동일인물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그 때문에 기요하라가 마약 혐의로 언론에 포화를 받던 중에 기요하라의 사무소에서 운전수 겸 매니저를 모집하는 광고를 싣던 구직사이트 DODA에 그 문제의 운전수가 누구냐는 문의가 엄청나게 쇄도했던 적이 있었다.
여담으로 기요하라를 비롯해 마약사건에 연루된 연예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의 마약 구매 출처가 거의 일치하는데 바로 한구레 조직중 한곳인 '기무라 형제' 일파와 협력관계이며 거대 술집 사장이 공식 직함이지만 실제로는 폭주족 '산겐자야 구렌타이'의 간부 출신이기도 한 '카와 타케시'와 그의 가게라는게 거의 정설. 음성적인 일본 먀약시장을 카와 타케시가 꽉 잡고 있기 때문. 참고로 카와 타케시는 몽골 출신 스모 스타였던 '아사쇼류'에게 봉변을 당하며 깨강정이 되게 얻어맞은바도 있었는데 일반 언론에는 그냥 술집 사장이라고만 소개되었었다. 나중에 술집을 찾은 어떤 손님이 아사쇼류에게 맞았냐고 카와 타케시를 약올리다 열받은 카와가 집기로 그 손님의 머리를 후리고 뒤지게 팼다고 한다.(...)
2016년 3월 17일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2016년 5월 17일에 첫공판이 열렸는데, '''방청석 20석을 두고 방청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3700명'''이나 재판소에 몰려들어 행렬을 이루었다. 일본에서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검찰은 징역 2년 6개월을 구형하였다. 여담이지만 재판 때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가 증인으로 나왔다.(이 둘도 고교 때부터 친했다) #
명포수-명감독 노무라 카츠야는 기요하라의 신인 시절 세이부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를 문제삼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에 입단하여 어린 나이에 성공을 맛 본 기요하라에게 인성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 기사에서는 짧게 언급되었지만, 일본 위키를 보면 알 수 있다. 기사재판에서는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일본 미디어에서 기요하라 마약 사건이 뉴스 방송분량을 잡아먹는 것은 물론이고 일개 마약 사건에 헬리콥터를 동원한 과잉취재가 문제가 되었다. TBS라디오 등을 비롯한 일부 미디어에선 이게 언론의 본분이 아니라는 비판이 있었으며, 마약중독자의 심리적 어둠을 과도하게 부각해 마약중독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조장한다는 의견 또한 제기되었다. 관련 방송내용
2016년 12월 24일 유죄 판결 확정 후 처음으로 TV프로에 출연해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며 팬들에게 사과하였다, 마약은 자신이 평생 싸워야할 적이라며 앞으로도 많은 노력을 할 것이라며 갱생을 약속했다.
2019년 10월 21일 공개 트라이아웃의 감독을 맡게 되어 야구계에 복귀.
2020년 6월 15일부로 집행유예 기간이 만료되었다. 이후에는 TV, 라디오, 유튜브 등에서 활동중이다.
5. 플레이 스타일
통산성적은 다음과 같다.
통산 2,338경기 출장, 타율 .272, 출루율 .389, 장타율 .520 OPS .909, 2,122안타, 1530타점, 525홈런(역대 5위), 1955삼진('''역대 1위'''), 1346볼넷, 몸에 맞는 볼 196개('''역대 1위''')
통산 성적을 보면 당연히 수많은 타이틀을 차지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타격, 홈런, 타점 1위를 단 한 번도 획득해 본 적이 없는 속칭 '''무관의 제왕'''이다.[홈런기록][타점기록]
게다가 우승 10회, 일본시리즈 우승 8회 등 여러 번 우승을 경험했음에도 시즌 MVP는 커녕, 일본시리즈 MVP도 뽑혀본 적이 없다. 다만 신인왕, 최고출루율, 최다승리타점, 일본시리즈 우수선수상(3회), 일본시리즈 감투상(2회), 골든글러브(5회) 등은 수상했었다.[28]
그래도 홈런만큼은 꾸준히 기록한 덕택에 25+홈런 시즌을 13번 기록했고, 부진을 거듭했던 요미우리 시절 통산 500홈런도 힘들지 않을까 평가했지만 결국 500홈런을 돌파, NPB 통산홈런 5위에 올라있다. 기요하라 위에는 안드로메다 급 먼치킨 급 성적을 내신 어르신들이 계신데, 투고타저에 교타를 중요시하는 현대 일본프로야구에서 기요하라의 저 어마어마한 통산 홈런 기록을 뛰어넘는 선수가 나오기에는 사실상 불가능한 수치다. 2012 시즌까지 현역 1위였던 카네모토 토모아키(은퇴)의 통산홈런이 476홈런인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기록임에 틀림없다.
통산 삼진 1위, 몸에 맞는 공 1위라는 아이러니한 기록이 있다. 통산 삼진 1위야 당연히 그의 호쾌한 타격스타일이 그대로 반영됐다고 할 수 있는데, 시즌 삼진 1위를 무려 세 번(1986, 1997[29] , 2001)이나 했고, 시즌 100삼진 이상도 9번 기록했다. 이런 삼진 생산능력(?)에도 불구, 무시무시한 타격을 보여줬던 이유는 세이부 시절 감독이었던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타력을 통한 위압감과 괜찮은 선구안 이 있어서 타율을 1할 이상 상회하는 출루율을 기록하고, 일단 맞춘 공은 확실히 강하게 때려낼 수 있었던 OPS 히터로, 역대 최고의 파워히터가 될 것이다라는 고교 시절의 설레발에 미치지는 못했어도 일본프로야구에서 역대로도 손꼽히는 강타자로 상당한 누적 기록을 쌓았다.
몸에 맞는 볼이 많은 점에 대해, 그의 타격 스승이었던 도이 마사히로[30] 는 코치 자신이 도박 혐의로 입건되는 바람에 루키 시절 기요하라에게 피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한 탓이라고 자책한 척이 있다. 도이는 코치 복귀 후 마쓰이 가즈오 등에겐 이를 철저히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도 전설의 강타자 중의 하나였던 도이였던지라 그래도 "루키 시절의 기요하라에게는 1군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부터 가르쳤다." 고 술회했을 정도.
6. 엔터테이너? 익살스런 반쵸?
- 선수 시절 초~중기에는 특유의 덧니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데 방송 출연 등을 고려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새 임플란트로 바꿨다. 본인 왈, "부상 재활치료하느라 시간도 좀 있고 해서 그냥 싹 갈아버렸죠."
- 요미우리 시절 오다 코헤이(小田幸平)라는 포수를 선수생활 내내 괴롭힌걸로 유명했다. 예능프로에서 기요하라가 오다의 팔에 암바를 걸고 오다가 괴로워하는걸 신 동물의 왕국의 약육강식으로 묘사하며 출연진들이 대폭소하는 장면도 있었다. 거기에 무려 치명적인 똥침을 두 번씩이나 놨다. 그 중 한번은 시즌 종료 후 선수단 납회식 때 TV로 생중계되는 와중에 놓은 것. 제대로 똥침 맞았는지 오다 코헤이는 정말로 고통스러워했다는... 2006년 기요하라가 요미우리를 떠난 해에 똑같이 요미우리를 떠나면서 찢어지기 성공. 나름 미트질 괜찮은 포수인데 기요하라의 이지메 때문에 연습에 집중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점.
7. 겁쟁이 기요하라?
기요하라가 반쵸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에 후배선수들이 무서워한다고 하지만, 의외로 기싸움은 몇 번 있었어도 몸싸움을 벌인적은 거의 없었다. 생각 외로 허당일 가능성도 있다.
1989년 9월 23일 VS 롯데 오리온즈 전에서는 타석에서 빈볼 위협을 당해 자신이 벤치 클리어링을 시도했는데 투수와 아이-투-아이를 하기도 전에 배트를 먼저 마운드 쪽으로 내던져 히라누마를 때렸다. 배트에 맞아 빡친 히라누마가 달려들자 기요하라는 투수에게 니킥을 날렸는데 이걸 보고 열받은 롯데 선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도망다니는 처지가 됐다. 결국 롯데 선수들이 집단으로 달려들어 다구리를 가했고, 결국 그때까지 진행됐던 연속출장 기록을 이 벤치 클리어링으로 마감하고 덤으로 출장정지 크리를 먹기까지 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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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걷어차이는 투수가 히라누마, 오른쪽의 걷어차는 타자가 기요하라.
사건 당시 영상
이 당시 롯데의 투수는 히라누마 사다하루(平沼定晴). 히라누마는 기요하라보다 3년 앞선 선배였는데, 이런 선배한테 배트를 직격으로 던졌다. 한국에서 후배가 선배에게 배트를 던지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완전히 찍혀서 프로에서 지도자 생활도 못 했을 것이다. 그 배트에 직격으로 얻어맞은 히라누마가 기요하라에게 달려들었고 기요하라가 무릎차기를 날린후 마구 도망가는 몸개그를 벌였다. 이게 일본의 쇼프로에서도 개그소재로 쓰일 정도. 2015년 10월 일본의 한 예능프로에 출연해 공식으로 사과하긴 했는데 이게 거의 25년도 더 된거라..
요미우리 시절 한신과 벤치클리어링 때 성질머리로 야구계 최강급이라는 호시노 센이치 감독한테 뒷덜미 잡혀 끌려나오고 나서 약간 쫀 듯한 표정과, 2003년 7월 23일 당시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이던 투수 톰 데이비에게 빈볼을 맞고선 평소완 달리 얌전히 나가다가 톰 데이비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면서 터벅터벅 오는데도 별 반응 없었다는 점... 그 이후에 승부에서 기요하라에게 삼진을 얻어낸 톰 데이비가 F자로 시작하는 욕설을 했는데도 무반응인 걸 봤을 때 기요하라가 의외로 자기보다 드세보이는 사람한테는 역시 약한 것 같다.[32]
기요하라가 한신전에서 데드볼을 맞고 세번이나 맞았다며 손가락 3개를 펼쳐보인데 대해 한신의 투수였던 야부 케이이치는 기자가 그걸 물어보자 '''연봉 3억을 받고 있다는 의미겠지''' 하면서 쿨하게 비웃어주기도 했다. 야부 역시 기요하라에게 데드볼을 많이 기록한 바 있는데 저렇게 자신있게 비꼰 것은 시비를 걸어와도 자신있다는 의미인 듯...
험악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일본 야구계에서의 이미지는 의외로 '''목소리만 큰 쫄보.''' 2005년 4월 한신전에서 후지카와 큐지에게 제멋대로 '''직구승부'''를 요구했는데 후지카와가 눈도 까딱하지 않고 변화구로 삼진을 잡아내자 악에 받쳐 '''후지카와를 공개 비난했다.''' 그리고 며칠 뒤의 승부에서 또다시 직구승부를 요구, 이번엔 정말로 직구로 삼진을 당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어린시절의 증언이나 정황 등을 봤을 때 어린 시절 골목대장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 자이언츠팬으로 오사카에서 살아간다는것은 거의 이지메를 각오하고 살아간다는 소리인데 이런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항상 무리의 중심에 서있던것을 보면 반쵸 이미지에 걸맞은 인물임은 확실하다. 또한 당시 주장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PL학원 시절 구와타의 요미우리 지명이 야구부에 전해졌을때 야구부원들이 왜 구와타냐고 격분하면서 교실을 조용히 나가버린 구와타를 손봐준다며 찾으며 돌아다닌 사실이나 지명소식이후 격분한 기요하라를 야구부 연습장에서 2시간동안 마음을 풀수있게 야구부 3학년 전원이 나서서 배팅볼을 던져준 일화등을 보면 무리에서 대장으로 군림하는 성격임에는 분명하다.
8. 기타
젊었을 때 가장 좋아했던 아이돌이 나카모리 아키나라고 한다.
대두 덕분에 헬멧이 크기로 유명한데. 그 헬멧은 사실 다름아닌 퍼시픽리그의 명포수 노무라 카츠야가 쓰던 것을 물려받은 것이다. 노무라도 대두여서 머리에 맞는 헬멧이 없었는데, 1970년 일미야구 친선경기 때 미국 측 덕아웃에 갔다가 찾아서 쓰게 되었다고. 1980년 노무라가 은퇴하면서 이 헬멧을 쓸 일이 없게 되었으니 세이부에 남겨놓고 떠난 걸, 훗날 입단 후 마찬가지로 머리에 맞는 헬멧이 없어서 곤란에 빠진 키요하라가 우연히 이 헬멧을 찾아 쓰게 된 것이었다.
반쵸 이미지를 대표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후지카와 큐지와의 대결. 2005년의 경기였는데, 실점 위기에서 타석에는 아직 잘나가던 시절의 기요하라가 들어섰다. 당시 점수는 후지카와가 속한 한신이 7회 시점에서 8점이나 앞서있었다. 하지만 2사 만루 상황이 만들어졌고 타자는 키요하라. 당연히 홈런을 날려도 4점차가 남기 때문에 던지는 후지카와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었을 테고, 젊은 녀석이 직구에 자신있어 하니 당연히 직구 승부를 하러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기에 직구 타이밍에 배트를 휘둘렀는데 들어온 공은 포크볼.
후지카와 입장에서야 아직 2이닝이 남았으니 4점차가 되면 위험하다는 판단이었을테고 시즌 초반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기선제압을 해 두는것이 유리하다고 봤을수도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상황이었는데, 직구승부 하나만 생각해도 들어갔던 키요하라는 상당히 화가 났었는지 기자들이 있는 앞에서 '''"너 거시기는 달렸냐 짜샤!( こ付いてんのか)"'''라고 말해 버렸고 그게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려버렸다.
기본적으로 강타자에게 변화구 던져서 삼진잡는게 문제될 일도 아니었고, 일본인의 정서상으로 봐도 그렇게까지 막말을 할 상황도 아니었건만 대놓고 저런소릴 했으니 당하는 후지카와 입장에선 참으로 황당한 상황이었을 듯. 여담으로, 4일후 비슷한 상황에서 이번엔 제대로 직구로 삼진을 잡은 후지카와는 '''"어쩌다 보니 그리 됐습니다(たまたまです. 타마타마데스)"'''라는 고급진 디스를 시전했다. 저 말은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매우 겸손한 표현이라 이것만으로도 쫄보에게 이긴 것일 뿐더러, 상황이 이상하다보니 저 말에 다른 의미도 담길 수 있었던 것. 일본어로 타마는 구슬을 뜻하는데, 그래서 남자의 그거 밑에 달린 두 개의 그거(...)이라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33] 타마를 두 번 말했으니 쉽게 말하면 부랄 두 쪽 다 잘 있다는 대답으로 받아친 게 된다.
2011년 일본 캠프에 왔던 LG 트윈스의 정의윤을 보고 "정말로 정의윤이 후보란 말인가?" 하며 놀랐다고 한다. 당시 정의윤은 만년 유망주에 머물렀기 때문에 야갤에서 정의윤은 '기요하라의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정의윤이 활약을 하면 기요하라도 덩달아 칭찬을 받고 부진하면 같이 욕을 먹는다. 하지만 정의윤은 2015년 7월 SK로 이적하며 돌풍을 일으키는 바람에 재평가 되었다.
재일 루머가 많은 유명인 중 한 명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재일 루머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근거는 전혀 없다.[35]
둘째 아들 카츠지(勝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주니어팀에서 뛰고 있으며 투타 양쪽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36]
2020년 유튜브를 시작한 오다 코헤이 유튜브 채널에 나와서 야구계 썰 및 소소한 에피소드를 풀었다. [37] 그리고 2019년에는 전 한신, 닛폰햄 선수 출신 카타오카 아츠시 유튜브 채널에 나와 마약의 위험성과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2020년 들어 야구 관련 유튜브 및 TV 예능에 많이 나오는데, 코로나19로 인해 일이 줄어들어 유튜브를 시작한 톤네루즈의 이시바시 타카아키와 가위바위보를 하기도 했다. 방송에서는 가족들에게 격려와 응원을 많이 받는다고 밝힌다. 톤네루즈 이시바시와의 가위바위보
9. 연도별 성적
10. 관련 문서
[1] 2016년 이후 머리를 길렀다. 출처는 스포츠 잡지 Number와의 인터뷰[2] 일본시리즈 등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리그 팀 홈 경기에서는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가 1루를, 기요하라가 3루를 보기도 했다.[3] 1981~1988년까지 양대리그에서 승리타점(결승 타점)이 가장 많은 선수에게 주던 타이틀로, 1989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타이틀을 폐지, 센트럴리그에서만 특별상 형식으로 시상하다가 2000년을 끝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4] 참고로 1985년부터 양대리그 모두 최고출루율 시상을 시작한 이래론 역대 최저 최고출루율 기록이다.[5] 대장, 캡짱, 대빵, 두목 등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듯.[6] 이들은 'KK 콤비'로 불리며 고교야구를 제패하고 프로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는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 H2에서 오마쥬되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7] 1965~1973 9년 연속 리그 재패.[8] 난카이 호크스, 긴테츠 버팔로즈, 닛폰햄 파이터즈, 한신 타이거스, '''세이부 라이온즈''', 주니치 드래곤즈가 기요하라를 1순위로 지명했다. 그리고 기요하라는 세이부行.[9] 쿠와타 뒤통수 사건때문에 기요하라는 학교에서 쿠와타를 죽여버리겠다고 이리저리 찾아다니고 동급생들은 진정시키려고 고생했다.[10] 당시 마운드에 있었던 투수 쿠도 키미야스가 회고하기를, 자신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어떤 세레머니를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울고 있는 기요하라를 본 순간 어떻게든 1루수 쪽으로 타구가 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아웃카운트는 중견수였던 아키야마 코지가 중견수 뜬공을 잡으며 시리즈를 마무리했다. 참고로 구도 기미야스는 요미우리에서 기요하라와 재회했다.[11] 그리고 오치아이는 기요하라가 FA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오자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해 거기서 은퇴했다.[12] 이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가 선수노조 파업으로 인해 월드 시리즈를 포함한 포스트시즌 일정이 전면 취소되는 바람에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도 관심이 쏠렸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 표지에 세이부 라이온즈의 와타나베 히사노부가 등장하고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전 경기가 중계되었을 정도.[13] 이는 1953년 작성된 고졸신인 시즌 최다 홈런기록 이던 토요다 야스미츠의 27홈런을 경신한 것이기도 하다. 토요다는 기요하라의 팀 대선배이다.[14] 말년에는 4번타자였던 이승엽과도 한솥밥을 먹었다.[15] 키요하라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했던 1990년대 후반에는 히로사와 카츠미+잭 하웰(전 야쿠르트 4번), 이시이 히로오(전 킨테츠 4번), 도밍고 마르티네스(전 세이부 4번) 등이 비슷한 시기에 요미우리로 이적했으며 , 커리어 하이급 성적을 1번 찍고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다 방출되었던 2000년대 초중반에는 에토 아키라(전 히로시마 4번), 로베르토 페타지니(전 야쿠르트 4번), 터피 로즈(전 킨테츠 3번), 고쿠보 히로키(전 다이에 4번) 등이 비슷한 시기에 요미우리로 이적한데다 마츠이 히데키, 타카하시 요시노부 등 요미우리 순혈 강타자들과도 경쟁해야 했다.[16] 여담으로 이승엽은 기요하라와 생일이 똑같다.[17] 앞타자들이 워낙에 강타자들이 즐비한것도 큰 원인이었다. 특히 세이부에선 팀 선배이자 함께 클린업을 이룬 호타준족 강타자 아키야마 코지가 앞 타순에서 타점을 적립했던 게 컸다. 요미우리 시절에는 부상 등의 여파로 성적의 기복이 다소 심했던 데다 마츠이 히데키와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대두했던 것도 크고...[18] 하지만 오기 감독은 2005년 12월 폐암으로 별세했다.[19] 'RUN(나가부치 쯔요시)'으로 유명한 일본의 가수. 기요하라와는 절친한 사이로, 은퇴사실도 그에게 가장 먼저 밝혔다고 한다.[20] 여담으로 나가부치 쯔요시 본인이 직접 출연한 드라마 이름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의 배경음악이 바로 나가부치가 직접 만들고 노래한 이 톤보라는 곡이다. 이 곡은 훗날 한국 가수 홍수철에 의해 '보고싶다 친구야'라는 곡으로 표절당하기도 했다. 표절 이후 장본인 홍수철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항목 참조.[21] 이날 관중석에는 쿠와타와 오 사다하루 뿐만이 아니라 고교시절 당시 야구부 감독이었던 나카무라 준지, 그의 현역 초창기 시절 은사였던 도이 마사히로를 비롯해 스즈키 이치로, 추성훈, 배우 후지와라 노리카, 시모야나기 츠요시 등이 관중석에서 포착되었다.[22] 이날 경기에서 키요하라의 타석마다 세이부, 요미우리, 오릭스시절의 응원가가 일제히 연주되었다. 타팀의 응원가를 은퇴경기에서 사용하는것은 매우 드문일인데 이런 점에서 당시 키요하라의 전국적인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부분.[23] 결혼했으니 정식 이름은 "기요하라 아키" 이다.[24] 일본 뉴스에서는 각성제라고 보도되었으나, 일본에서는 마약류를 각성제라고 표현하며, 대한민국의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해당하는 법률의 이름이 '각성제취제법(覚醒剤取締法)'이다.[25] TBS는 연일 독점영상을 보도 중인데, TBS라디오의 Session-22에서는 약물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약물중독자 치료시설 어드바이저를 초청해서 토론하기도 했다.[26] 참고로 그도 2006년 각성제취제법 위반죄로 경찰에 체포.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노무라에 따르면 그가 체포된 후 기요하라가 전화해서 '''나에 대한 걸 경찰에 말하진 않았지?''' 란 취지의 말을 했다고.[27] 사진은 2016년 2월 2일 체포되어 차로 연행되는 장면을 찍은 사진. 한 시대를 풍미한 슈퍼스타의 처참한 몰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씁쓸한 장면이라 할 수 있겠다.[홈런기록] 시즌 최고 홈런이 1992년의 37홈런인데 이해 리그 홈런왕은 팀 동료인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41홈런)였으며 1995년 다이에 호크스의 고쿠보 히로키가 28홈런으로 홈런왕을 차지했을 때에는 25홈런밖에 못쳤고(...) 1996년에는 31홈런을 쳤는데 당시 오릭스 블루웨이브 소속이었던 트로이 닐(2001년 두산 베어스에서도 뛰었으나 두산에서는 17경기 .193 1홈런 3타점만 기록하고 폭행사건에 휘말려 퇴출)이 32홈런을 쳐서 '''딱 1개차'''로 밀렸다...[타점기록] 상술했듯 시즌 최고 타점이자 유일한 100타점 이상 기록은 요미우리 시절이었던 2001년의 121타점, 하지만 그 해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로베르토 페타지니(127타점)에게 밀려 타점 2위에 그쳤다. 세이부 시절 최고 타점인 96타점을 기록한 1992년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부머 웰즈에게 '''딱 1점차'''로 밀려서 타점왕을 놓쳤고, 스즈키 이치로를 포함, 무려 3명의 공동 타점왕(그것도 고작 80타점)이 나온 1995년엔 타율 .245 25홈런 64타점으로 다소 부진했던 바람에..[28] 그 외에도 올스타전 MVP 통산 7회 수상으로 일본프로야구 1위 기록이다. 다만 일본프로야구는 올스타전을 시즌당 1경기만 하는게 아니라 2, 3경기를 한다. 한국 KBO 리그도 80년대에는 그랬던 적이 있긴 하다.[29] 특히 이해 각동님과의 맞대결은 전부 삼진으로 끝났다. 그때문에 요미우리는 9월초까지 꼴찌로 꼬라쳐박게 된다.[30] 이쪽도 기요하라처럼 고졸 신인 1년차때부터 4번타자로 뛰었다. 현역시절 400개 이상의 홈런과 2400개 이상의 안타를 기록한 강타자다.[31] 거기다 이 여파인지는 몰라도 이 해 세이부는 '''불과 승률 2리(.002) 차'''로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리그 우승을 내주며 리그 5연패에 실패하고 말았다.[32] 공교롭게도 톰 데이비와 기요하라는 2006년 오릭스에 입단하여 2008년까지 재적하여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오릭스시절에는 부상도 있었고 톰 데이비의 존재가 있었는지 요미우리 시절의 반쵸기질을 나타내지 못한거 같다.[33] 그럴 때는 보통 이라는 비속어가 쓰인다. 이 단어가 나오면 옆 사람이 그만 하라고 오디오를 물리면서 츳코미를 날리는 것이 일본 예능의 주요 패턴[34] 일본의 국민체육대회는 2006년부터 영주권을 가진 외국인도 참가할 수 있게 됐지만 그 이전까지는 외국인은 절대 참가할 수 없는 대회였다. 그래서 대만 국적의 오 사다하루는 고교생 시절에 국민체육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다.[35] 애당초 기요하라는 성인이 되기 전 고교생 시절에 국민체육대회[34] 에 참가한 적이 있고# 일본의 관보에 귀화자로 고시된 적도 없다.[36] 4번 타자로 나올 때도 있지만 주로 3번 타자로 나오고 있고 팀 내 에이스 투수이며 주장도 맡고 있다고 한다.관련 기사[37] 오다 코헤이 항목을 읽으면 알겠지만 모토키 다이스케와 더불어 선수시절 오다 코헤이를 가장 많이 괴롭힌 장본인이다. 이쯤되면 생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