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와타 마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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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우완 투수.
입단 전부터 고시엔 대회를 통해 스타덤을 탔으며, 'KK 콤비'를 이루며 함께 고교야구를 평정한 PL학원의 동기생 강타자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쿠와타는 고교야구가 낳은 역대 최고의 스타들로 손꼽힌다. 프로 입단 후에는 사이토 마사키 ,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리며 강력한 선발진의 중심이 되었고, 선수 말년에는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선수생활의 최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입단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해설자,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는 중인데, 일본 아마야구계의 통념이나 관습 등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는 목소리로도 주목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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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 여름 고시엔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학제 개혁 후 최연소 우승투수의 기록을 세웠으며, 1학년 투수가 팀을 준우승까지 이끈 건 여러 차례가 있었지만, 우승으로 이끈 건 그가 처음이었다. 198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와 여름 고시엔 대회는 모두 준우승. 198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 4강, 여름 고시엔 대회는 우승하였다.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기도 힘든 고시엔 대회를 격전지인 오사카 지구에서 살아남아 무려 5번이나 출전하여 고시엔 통산 20승 3패를 기록했다. 학제 개혁 이후 고시엔 대회 최다승 투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타격 역시 뛰어나 KK 콤비를 이룬 키요하라의 뒤를 이은 고시엔 대회 통산 홈런 기록 2위(6홈런)를 가지고 있다.
1985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원래 요미우리에서는 1순위로 고교 동기생 키요하라를 고려하고 있었고 쿠와타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 건 쿠와타였다. 이에 격분한 키요하라는 크나 큰 배신감에 치를떨었고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세이부 라이온스의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키요하라의 성격을 아는 동급생들은 분노한 키요하라를 달래기 위해 배팅볼을 던져 주었고, 쿠와타를 손보려고 쿠와타의 행방을 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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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데뷔 시즌에는 수비와 타격 능력도 좋아 야수 전향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투수를 선택했다.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으며, 2년차인 1987년에는 15승 6패, 방어율 2.17의 성적을 기록하며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획득 및 사와무라상 선정의 영광을 안았다. 10대의 나이에 두자리수 승리를 기록한 건 팀 선배 호리우치 츠네오 이후 처음이었다.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되었다. 1989년 시즌은 한 시즌 개인 최다승수인 17승을 거뒀고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1] . 1992년 시즌까지 6시즌 연속 두자리수 승수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부진에 빠져 야수 전향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1994년에는 14승 11패, 방어율 2.52, 탈삼진 185개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 '국민적인 이벤트' 10.8 결전에서 다른 '세 기둥'인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의 뒤를 이어 구원 등판해 요미우리의 승리를 확정짓고 헹가레를 받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투수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2] 는 그때가 쿠와타의 "투수로서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95년 6월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플라이볼을 직접 잡다가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미국에서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1996년은 재활로 인해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개점휴업했고, 1997년에 복귀해 10승 7패 방어율 3.77로 부활하였다. 1998 년에는 9년만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됐으며, 16승을 기록해 1승차로 가와사키 겐지로와의 다승왕 경쟁에서 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본격적인 하락세가 시작되어 1999년은 8승 9패 5세이브, 2000년은 5승 8패 5세이브, 2001년은 4승 5패 2세이브의 성적을 거뒀다. 세이브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선발 뿐 아니라 구원이나 중간계투로 등판하는 횟수가 늘었다.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에서 물러나고 하라 다쓰노리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2년, 쿠와타는 사실 전 해에 은퇴를 결심했지만 하라 감독의 설득을 받고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재기에 성공해 12승 6패 방어율 2.22를 기록했으며, 4년만에 두자릿수 승리 달성 및 15년만의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같은 해 팀의 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2003년은 5승 3패 방어율 5.93, 2004년은 3승 5패 방어율 6.47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하라 감독의 후임인 호리우치 감독에게 은퇴 권고를 받기도 했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2005년은 무승 7패 방어율 7.14를 기록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본보기 역할을 기대한다는 이유로 2006년 현역 계속이 정해졌다. 2006년에는 통산 173승이자 마지막 승리를 기록했지만[3] , 주루 도중 발목 부상을 당했고 결국 1군에서의 더 이상 그가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2006 시즌 종료후 21년간의 요미우리 생활을 마감하고, 메이저리그 도전의사를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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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4]
2006년 12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개막전까지 메이저리그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시범 경기에서 베이스 커버 도중 주심과 충돌해 오른쪽 발목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트리플 A팀인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재활했으며, 재활을 마치고 2007년 6월 9일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됐다. 6월 10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 전에서 무려 3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을 했다. 승격 초기에는 패전 처리로 등판하다가, 짐 트레이시 감독이 중간 계투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시절부터 지적된 구위 저하에 쿠와타 최대의 무기인 컨트롤도 통하지 않아 19경기 등판 0승 1패, 방어율 9.43으로 부진해 팀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2008년 1월 8일 다시 피츠버그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구단 구상에서 벗어나 메이저 승격은 좌절. 결국 귀국 및 은퇴 의사를 밝혔다.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고교야구의 대스타였지만 일본식 야구관이나 일본 야구계의 통념에 비판적인 의견을 자주 내비쳤다. 2013년에는 아사히 신문 칼럼을 통해 체벌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며, 체벌에 의존하는 것은 지도자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고루한 체육 지도자들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고시엔 대회에서 나타나는 투수 혹사를 막기 위해 투구수 제한이나 엔트리 확대와 같은 개선 방안을 제언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더 강도높게 이른바 일본 야구의 정신적 토대라고 일컬어지는 "야구도"를 전면 비판했다.# 야구도를 단순히 일본 야구의 정신적 요소로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상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짚었다. 러일전쟁 등 일본의 팽창과 그 과정에서 겪은 서구 열강과의 대립을 겪으며 일본의 사회지도층 일각에서 미국의 '외래 스포츠'인 야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이 늘어났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군국주의와 반서구 감정이 강해지며 야구통제령 등이 내려지는 등 야구에 대한 통제가 거세졌다. 이에 발맞추어 토비타 스이슈 같은 야구인들이 당대의 국수주의, 군국주의적 시선에 맞추어 소위 사무라이 정신 등을 야구에 욱여넣어 야구를 일본적인 특성을 지닌 무언가로 포장해 지배계층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어낸 철학이라 분석했다. 그리고 이런 철지난 야구관을 대체하는 과학적 훈련과 스포츠맨십에 기반한 새로운 야구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앞서 2010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수석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5] 석사 논문으로 "야구도를 재정의함을 통해 일본 야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그해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책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 대중서로 낸 것.
2021시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에 임명되면서 13년만에 자이언츠로 복귀했다. 보직은 1군 투수 치프 코치 보좌이다. 그간 차기 감독은 현 2군 감독으로 현장에 있는 아베와 전임감독 다카하시, 사실상 둘의 경쟁으로 여겨졌었는데 이 둘의 대선배인 구와타가 오랜 공백을 깨고 현장에 복귀함으로서 하라 다음 차기 감독 인선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졌다.
해당 문서 참조
1994년 일본시리즈는 '거인 VS 세이부'라는 황금 카드[6] 였으며 양팀이 모두 2승씩을 기록한 채 5차전을 맞이했다. 거인의 선발은 그해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MVP였던 쿠와타 마스미였고, 타석에는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지탱하는 부동의 4번타자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들어섰다.
6회말 1사 거인이 5-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날 3번째 타석에 들어선 키요하라. 쿠와타는 "두 사람의 대결을 즐겨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트라이크 존 중앙으로 초구부터 스트레이트를 던졌으나 타구는 펜스를 아득히 넘어갔다. 이 날 컨디션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쿠와타는 "외야 플라이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던졌다"고 했으나 "역시나""그렇지"라고 마운드에서 납득할만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8회말 키요하라의 4번째 타석, 거인이 8-2로 더 달아나고 있었지만 쿠와타는 키요하라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볼카운트 1-2에서 던진 슬라이더를 키요하라가 다시 담장 밖으로 보내버리며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쿠와타는 "경기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키요하라와 승부에서는 2개의 홈런을 내줬기 때문에 지고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라이벌로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난 키요하라에게 체격도 기술도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키요하라에 대해 호평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팀 또는 경쟁자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큰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최대의 찬사를 선물했다.
고시엔 홈런 기록에 걸맞는 뛰어난 타격능력은 프로에서도 빛을 발해 통산 7개의 홈런과 ,216의 통산 타율을 기록했으며, 타율은 NPB에서 1950년대 이후 데뷔해 500타석 이상 들어선 투수 중 가장 높다. 또한 수비능력도 뛰어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8회 수상[7] 했는데, 이는 니시모토 타카시와 타이를 이루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이다.
쿠와타가 아직 약관의 나이이던 1987~1988년 요미우리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빌 걸릭슨과 친해져, 걸릭슨은 아들 크레이그[8] 의 미들 네임에 '쿠와타'를 넣었다. 이전에 메이저리그 여러 팀에서 뛴 베테랑 우완이었던 걸릭슨에게 쿠와타가 투구의 기술을 자주 물었고, 나중에 늦은 나이에 메이저에 도전한 것도 이 시기에 있던 걸릭슨과의 교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88년 6월 18일 나고야 구장 주니치전에서 7회까지 잘 던지다가 고카이 블루로 유명한 야마다 유우키 친아버지인 야마다 카즈토시[9] 에게 데뷔 첫 피홈런을 허용하고 8회에도 주니치 타선에 털리면서 패전을 먹은 적이 있다.
1991년의 사상 첫 한일 슈퍼게임 1차전에서 후루타 아츠야와 합을 맞춰 일본 올스타팀의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다시 말해 한국프로야구가 공식적으로 상대한 첫 일본프로야구 투수였던 셈. 1회초 한국 올스타의 1번 타자로 출장한 그 해 타격왕 빙그레 이정훈에게 초구 안타를 허용했지만, 후속타자들을 여유있게 처리했다.
미국에서 팔꿈치 수술을 받았을 때 와인에 맛을 들여 와인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한다.# 뉴질랜드에서 직접 와인 만들기를 체험하는가하면 본인의 서명이 들어간 와인도 나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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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로는 아들 두 명이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은 가수, 모델 등으로 활약중 인 탤런트 매트. 본명은 쿠와타 마사시. 한국의 탤런트 김기수처럼 진하게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여러 번 해서 좋게 말해서 중성스러운, 나쁘게 말해서 성괴스러운 외모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연예인이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제대로 받아서 키도 크고, 이제는 본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긴 하지만(...)본판도 잘생긴 편.
구와타도 아들의 영향으로 피부미백에 신경써야겠다며 기초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아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
아들이 잘생긴 걸로 보면 알겠지만 구와타도 젊었을 적에는 한 외모 했었던 선수. 함께 교진 산본바시라라고 불린 마키하라, 구와타, 사이토 셋 다 젊었을 때는 건장하고 잘 생긴 외모로 인해 80년대 말~90년대 초중반 교진의 중흥기와 맞물려 그 인기가 대단했었고 50대가 된 현재도 나이에 비하면 괜찮게 외모를 유지하는 중.
대학원 동기 중에 정치인 나카야마 야스히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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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한 우완 투수.
입단 전부터 고시엔 대회를 통해 스타덤을 탔으며, 'KK 콤비'를 이루며 함께 고교야구를 평정한 PL학원의 동기생 강타자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쿠와타는 고교야구가 낳은 역대 최고의 스타들로 손꼽힌다. 프로 입단 후에는 사이토 마사키 , 마키하라 히로미와 함께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리며 강력한 선발진의 중심이 되었고, 선수 말년에는 이승엽과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선수생활의 최후에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도전해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입단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은퇴 이후에는 야구해설자, 평론가 등으로 활동하는 중인데, 일본 아마야구계의 통념이나 관습 등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하는 목소리로도 주목받는다.
2. 프로입단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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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에이스로 활약, 여름 고시엔 대회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학제 개혁 후 최연소 우승투수의 기록을 세웠으며, 1학년 투수가 팀을 준우승까지 이끈 건 여러 차례가 있었지만, 우승으로 이끈 건 그가 처음이었다. 1984년 고등학교 2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와 여름 고시엔 대회는 모두 준우승. 1985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봄 고시엔 대회 4강, 여름 고시엔 대회는 우승하였다. 그라운드 한 번 밟아보기도 힘든 고시엔 대회를 격전지인 오사카 지구에서 살아남아 무려 5번이나 출전하여 고시엔 통산 20승 3패를 기록했다. 학제 개혁 이후 고시엔 대회 최다승 투수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한 타격 역시 뛰어나 KK 콤비를 이룬 키요하라의 뒤를 이은 고시엔 대회 통산 홈런 기록 2위(6홈런)를 가지고 있다.
3. 드래프트 지명
1985년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의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원래 요미우리에서는 1순위로 고교 동기생 키요하라를 고려하고 있었고 쿠와타는 와세다대학에 입학할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게 된 건 쿠와타였다. 이에 격분한 키요하라는 크나 큰 배신감에 치를떨었고 이러저러한 곡절 끝에 세이부 라이온스의 푸른 유니폼을 입었다. 키요하라의 성격을 아는 동급생들은 분노한 키요하라를 달래기 위해 배팅볼을 던져 주었고, 쿠와타를 손보려고 쿠와타의 행방을 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4. 프로 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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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데뷔 시즌에는 수비와 타격 능력도 좋아 야수 전향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투수를 선택했다.
데뷔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으며, 2년차인 1987년에는 15승 6패, 방어율 2.17의 성적을 기록하며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 획득 및 사와무라상 선정의 영광을 안았다. 10대의 나이에 두자리수 승리를 기록한 건 팀 선배 호리우치 츠네오 이후 처음이었다. 1988년과 1989년 2년 연속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되었다. 1989년 시즌은 한 시즌 개인 최다승수인 17승을 거뒀고 팀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1] . 1992년 시즌까지 6시즌 연속 두자리수 승수를 기록했다. 1993년에는 부진에 빠져 야수 전향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1994년에는 14승 11패, 방어율 2.52, 탈삼진 185개로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거머쥐는 등의 활약을 보였고 '국민적인 이벤트' 10.8 결전에서 다른 '세 기둥'인 마키하라 히로미. 사이토 마사키의 뒤를 이어 구원 등판해 요미우리의 승리를 확정짓고 헹가레를 받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투수코치였던 호리우치 츠네오[2] 는 그때가 쿠와타의 "투수로서의 절정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1995년 6월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플라이볼을 직접 잡다가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미국에서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1996년은 재활로 인해 1경기도 등판하지 못하고 개점휴업했고, 1997년에 복귀해 10승 7패 방어율 3.77로 부활하였다. 1998 년에는 9년만의 개막전 선발 투수로 지명됐으며, 16승을 기록해 1승차로 가와사키 겐지로와의 다승왕 경쟁에서 패했다. 하지만 그 이후 본격적인 하락세가 시작되어 1999년은 8승 9패 5세이브, 2000년은 5승 8패 5세이브, 2001년은 4승 5패 2세이브의 성적을 거뒀다. 세이브 숫자에서 볼 수 있듯이 선발 뿐 아니라 구원이나 중간계투로 등판하는 횟수가 늘었다.
나가시마 시게오가 감독에서 물러나고 하라 다쓰노리가 감독으로 취임한 2002년, 쿠와타는 사실 전 해에 은퇴를 결심했지만 하라 감독의 설득을 받고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재기에 성공해 12승 6패 방어율 2.22를 기록했으며, 4년만에 두자릿수 승리 달성 및 15년만의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을 획득했다. 같은 해 팀의 리그 우승 및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2003년은 5승 3패 방어율 5.93, 2004년은 3승 5패 방어율 6.47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으며, 하라 감독의 후임인 호리우치 감독에게 은퇴 권고를 받기도 했지만 현역 생활을 계속했다. 2005년은 무승 7패 방어율 7.14를 기록했지만 젊은 선수들의 성장에 본보기 역할을 기대한다는 이유로 2006년 현역 계속이 정해졌다. 2006년에는 통산 173승이자 마지막 승리를 기록했지만[3] , 주루 도중 발목 부상을 당했고 결국 1군에서의 더 이상 그가 등판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2006 시즌 종료후 21년간의 요미우리 생활을 마감하고, 메이저리그 도전의사를 표명했다.
5. 메이저리그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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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시절.[4]
2006년 12월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한다고 발표했다. 개막전까지 메이저리그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시범 경기에서 베이스 커버 도중 주심과 충돌해 오른쪽 발목 인대 파열 부상을 입었다. 트리플 A팀인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재활했으며, 재활을 마치고 2007년 6월 9일에 메이저리그로 콜업됐다. 6월 10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뉴욕 양키스 전에서 무려 39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을 했다. 승격 초기에는 패전 처리로 등판하다가, 짐 트레이시 감독이 중간 계투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시절부터 지적된 구위 저하에 쿠와타 최대의 무기인 컨트롤도 통하지 않아 19경기 등판 0승 1패, 방어율 9.43으로 부진해 팀으로부터 전력외 통고를 받았다.
2008년 1월 8일 다시 피츠버그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해 시범경기에서 호투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기용하는 구단 구상에서 벗어나 메이저 승격은 좌절. 결국 귀국 및 은퇴 의사를 밝혔다.
6. 은퇴 후
은퇴 후 야구 해설가와 평론가로 활동하며, 와세다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일본 고교야구의 대스타였지만 일본식 야구관이나 일본 야구계의 통념에 비판적인 의견을 자주 내비쳤다. 2013년에는 아사히 신문 칼럼을 통해 체벌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며, 체벌에 의존하는 것은 지도자의 게으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서 고루한 체육 지도자들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고시엔 대회에서 나타나는 투수 혹사를 막기 위해 투구수 제한이나 엔트리 확대와 같은 개선 방안을 제언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더 강도높게 이른바 일본 야구의 정신적 토대라고 일컬어지는 "야구도"를 전면 비판했다.# 야구도를 단순히 일본 야구의 정신적 요소로 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사상이 생겨난 역사적 배경을 짚었다. 러일전쟁 등 일본의 팽창과 그 과정에서 겪은 서구 열강과의 대립을 겪으며 일본의 사회지도층 일각에서 미국의 '외래 스포츠'인 야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이 늘어났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군국주의와 반서구 감정이 강해지며 야구통제령 등이 내려지는 등 야구에 대한 통제가 거세졌다. 이에 발맞추어 토비타 스이슈 같은 야구인들이 당대의 국수주의, 군국주의적 시선에 맞추어 소위 사무라이 정신 등을 야구에 욱여넣어 야구를 일본적인 특성을 지닌 무언가로 포장해 지배계층의 구미에 맞는 것으로 만들어낸 철학이라 분석했다. 그리고 이런 철지난 야구관을 대체하는 과학적 훈련과 스포츠맨십에 기반한 새로운 야구 정신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내놓았다. 앞서 2010년에는 와세다대학을 수석 졸업한 후 대학원에서[5] 석사 논문으로 "야구도를 재정의함을 통해 일본 야구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며 그해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했다. 책은 해당 논문의 내용을 정리해 대중서로 낸 것.
2021시즌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치에 임명되면서 13년만에 자이언츠로 복귀했다. 보직은 1군 투수 치프 코치 보좌이다. 그간 차기 감독은 현 2군 감독으로 현장에 있는 아베와 전임감독 다카하시, 사실상 둘의 경쟁으로 여겨졌었는데 이 둘의 대선배인 구와타가 오랜 공백을 깨고 현장에 복귀함으로서 하라 다음 차기 감독 인선은 순식간에 혼돈에 빠졌다.
7. 키요하라와의 친분과 라이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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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일본시리즈는 '거인 VS 세이부'라는 황금 카드[6] 였으며 양팀이 모두 2승씩을 기록한 채 5차전을 맞이했다. 거인의 선발은 그해 센트럴리그 정규시즌 MVP였던 쿠와타 마스미였고, 타석에는 세이부의 황금시대를 지탱하는 부동의 4번타자 키요하라 카즈히로가 들어섰다.
6회말 1사 거인이 5-1로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날 3번째 타석에 들어선 키요하라. 쿠와타는 "두 사람의 대결을 즐겨도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스트라이크 존 중앙으로 초구부터 스트레이트를 던졌으나 타구는 펜스를 아득히 넘어갔다. 이 날 컨디션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쿠와타는 "외야 플라이로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던졌다"고 했으나 "역시나""그렇지"라고 마운드에서 납득할만한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8회말 키요하라의 4번째 타석, 거인이 8-2로 더 달아나고 있었지만 쿠와타는 키요하라에게 연타석 홈런을 내줄 수 없다는 마음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볼카운트 1-2에서 던진 슬라이더를 키요하라가 다시 담장 밖으로 보내버리며 연타석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쿠와타는 "경기에서는 이기고 있었지만, 키요하라와 승부에서는 2개의 홈런을 내줬기 때문에 지고 있었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자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을 라이벌로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다", "난 키요하라에게 체격도 기술도 전혀 미치지 못했다"고 키요하라에 대해 호평했다. "그와 같은 시대에 같은 팀 또는 경쟁자로 싸울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큰 것이며, 그가 없었다면 난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그와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고 최대의 찬사를 선물했다.
8. 통산 성적
9. 기타
고시엔 홈런 기록에 걸맞는 뛰어난 타격능력은 프로에서도 빛을 발해 통산 7개의 홈런과 ,216의 통산 타율을 기록했으며, 타율은 NPB에서 1950년대 이후 데뷔해 500타석 이상 들어선 투수 중 가장 높다. 또한 수비능력도 뛰어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8회 수상[7] 했는데, 이는 니시모토 타카시와 타이를 이루는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 최다 수상이다.
쿠와타가 아직 약관의 나이이던 1987~1988년 요미우리에서 뛰었던 외국인 투수 빌 걸릭슨과 친해져, 걸릭슨은 아들 크레이그[8] 의 미들 네임에 '쿠와타'를 넣었다. 이전에 메이저리그 여러 팀에서 뛴 베테랑 우완이었던 걸릭슨에게 쿠와타가 투구의 기술을 자주 물었고, 나중에 늦은 나이에 메이저에 도전한 것도 이 시기에 있던 걸릭슨과의 교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1988년 6월 18일 나고야 구장 주니치전에서 7회까지 잘 던지다가 고카이 블루로 유명한 야마다 유우키 친아버지인 야마다 카즈토시[9] 에게 데뷔 첫 피홈런을 허용하고 8회에도 주니치 타선에 털리면서 패전을 먹은 적이 있다.
1991년의 사상 첫 한일 슈퍼게임 1차전에서 후루타 아츠야와 합을 맞춰 일본 올스타팀의 선발투수로 등판했다. 다시 말해 한국프로야구가 공식적으로 상대한 첫 일본프로야구 투수였던 셈. 1회초 한국 올스타의 1번 타자로 출장한 그 해 타격왕 빙그레 이정훈에게 초구 안타를 허용했지만, 후속타자들을 여유있게 처리했다.
미국에서 팔꿈치 수술을 받았을 때 와인에 맛을 들여 와인에 대한 조예가 깊다고 한다.# 뉴질랜드에서 직접 와인 만들기를 체험하는가하면 본인의 서명이 들어간 와인도 나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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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관계로는 아들 두 명이 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은 가수, 모델 등으로 활약중 인 탤런트 매트. 본명은 쿠와타 마사시. 한국의 탤런트 김기수처럼 진하게 화장을 하고 성형수술을 여러 번 해서 좋게 말해서 중성스러운, 나쁘게 말해서 성괴스러운 외모를 지닌 것으로 유명한 연예인이다. 아버지의 유전자를 제대로 받아서 키도 크고, 이제는 본판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긴 하지만(...)본판도 잘생긴 편.
구와타도 아들의 영향으로 피부미백에 신경써야겠다며 기초화장을 하고 다니는 등 아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
아들이 잘생긴 걸로 보면 알겠지만 구와타도 젊었을 적에는 한 외모 했었던 선수. 함께 교진 산본바시라라고 불린 마키하라, 구와타, 사이토 셋 다 젊었을 때는 건장하고 잘 생긴 외모로 인해 80년대 말~90년대 초중반 교진의 중흥기와 맞물려 그 인기가 대단했었고 50대가 된 현재도 나이에 비하면 괜찮게 외모를 유지하는 중.
대학원 동기 중에 정치인 나카야마 야스히데가 있다.
10. 관련 문서
[1] 킨테츠에게 3연패 후 4연승한 리버스 스윕 시리즈다.[2] 이 둘은 요미우리의 에이스 넘버인 등번호 18번의 계보를 이었다.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를 거쳐 FA로 이적한 스기우치 토시야가 은퇴 전까지 달았다.[3] 4/13 히로시마전. 이날 이승엽은 당연히 4번타자로 출장했으나 4타수 무안타로 삽을 신나게 펐다. 3번타자와 5번타자가 훗날 요미우리 감독, 일본국대감독을 지냈다.[4] 여담으로 뒤에 보이는 양키스 타자는 같은 일본인 선수이자 요미우리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마쓰이 히데키다.[5] 정확히는 와세다대 대학원 1년 석사 과정[6] 국내로서도 양대리그의 패자의 정상 결전에, 일본 야구계 대표 명문팀인 요미우리와 신흥 왕조 세이부의 대결, V9시절의 주역인 양 팀 감독 나가시마 시게오와 모리 마사아키의 대결에 고교야구 최대의 스타인 쿠와타 대 키요하라의 대결 등 상상할 수 있던 흥행요소들이 총집결한 시리즈였다. 심지어 1994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파업 사태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포스트시즌이 모조리 취소되며 갈 길이 없어진 일부 미국 야구팬들마저 대안으로 일본시리즈 중계에 눈을 돌렸을 정도였다.[7] 1987, 1988, 1991, 1993~1994, 1997~1998, 2002.[8] 플로리다 주 카디널 뉴먼 고교에서 야구를 하면서 플로리다 주 올스타 팀에 뽑힌 적도 있지만 그 이후 야구계와 관련된 소식은 없다. 걸릭슨의 다른 5명의 자녀들도 스포츠 활동에 진출했는데, 그중 딸 3명은 모두 테니스 선수로 활동했다.[9] 이해 홈런 2개를 쳤는데 죄다 나고야 구장에서 요미우리 상대로 뽑은거다. 구와타외에 털린 투수는 구와타와 동료였던 정민태와 불화가 매우 심했던 가토리 요시타카. 결국 이해 주니치 승점자판기 노릇하면서 우승까지 내주고 왕정치는 모가지가 짤려나갔다. 여담으로 둘다 1군데뷔날짜가 같은데 그날은 요미우리가 주니치를 먼지나게 털어먹었고 야마우치 카즈히로 감독은 얼마되지 않아 경질크리먹고 히로시마 우승확정된날 요미우리 타격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승리투수는 야마다의 동기뻘인 미즈노 카즈히토(現, 요미우리 자이언츠 순회코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