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무라 상
1. 개요
沢村栄治賞
사와무라 에이지 상(賞), 통칭 '''사와무라상(沢村賞).''' 전설이자 비운의 투수였던 사와무라 에이지를 기리는 의미에서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매년 그 해의 최고 투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며, 그 대상은 '''선발 투수'''로 한정된다.
1947년 熱球라는 야구잡지에서 이 상을 처음 제정되었으며, 1956년 제정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사이 영 상보다도 먼저 생긴 상이다. 그러나 1988년까지는 센트럴리그의 투수만 대상으로 했다. 1989년부터 수상의 범위를 퍼시픽리그까지 확대. 아직도 리그별 시상은 하지 않고 양대리그를 통틀어서 최고의 투수를 뽑는다.[1] 1988년까지는 반쪽짜리 최고투수상이었던 셈. 다만 양대리그 모두 시상범위에 들어간 첫 해인 1989년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사이토 마사키가 수상했고, 이듬해인 1990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노모 히데오가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며 퍼시픽리그 최초의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나왔다.
2. 상세
2.1. 투표 기준
1982년 이전까지는 기자투표로 수상자가 선정되었다가, 1981년 에가와 스구루가 '''투수 5관왕 + MVP를 차지하고도''' 기자들의 안티 여론에 밀려 수상을 하지 못하면서 논란이 되었다.[2] 이에 1982년부터 아래의 7가지 자격 기준이 제정되며 전직 프로야구 투수들로 이루어진 '사와무라상 선정위원회'에 의해 수상자가 뽑히게 되었다.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 등판 - 25경기 이상
- 승리 - 15승 이상
- 완투 - 10경기 이상
- 승률 - 6할 이상
- 투구 횟수 - 200이닝 이상
- 평균자책점 - 2.50 이하
- 탈삼진 - 150개 이상
- QS+ - 등판 대비 비율 (2018년 신설)
2.2. 수상에서의 예외
그런데 사와무라상은 더 많은 항목을 만족한 선수가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선수가 뽑히기도 한다.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면,
- 1988년 - 4개 항목을 채운 오노 유타카(히로시마)가 5개 항목을 채운 마키하라 히로미(요미우리)를 누르고 수상했다. 1988년 오노의 평균자책점은 1.70으로 양대리그 1위.
- 1990년 - 사이토 마사키(요미우리)는 노모 히데오(긴테츠)와 함께 6개 항목을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탈삼진 수가 많을수록 사와무라상인 것 같다"는 이유로 노모 히데오가 수상했다. 사이토는 평균 자책점, 승률이 양대 리그 1위임에도 불구하고 노모의 287탈삼진에 밀린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 해 노모가 신인으로서 일으킨 돌풍이 너무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사이토 마사키는 직전 해 사와무라상 수상자이기도 했지만 너무 모범생스럽고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성격이라 2년 연속 20승을 올리면서[4] 리그를 평정한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임팩트가 큰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인기나 임팩트 면에서는 동료인 구와타 마스미, 마키하라 히로미보다 더 떨어질 정도.
- 1992년 - 4개 항목을 채운 이시이 다케히로(세이부)가 6개 항목을 채운 노모 히데오(긴테츠)를 누르고 수상했다. 노모는 이 해에도 어김없이 무지막지한 탈삼진을 뽑아내고 탈삼진 양대 리그 1위를 차지했지만... 이시이는 일단 1점대 평균자책점과 승률왕 타이틀이 있긴 했지만,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딴 것도 아닌데다가 불펜알바 때문에 148.1이닝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노모를 제치고 사와무라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건 일본시리즈 우승 프리미엄이 있었기 때문.
- 1994년 - 5개 항목을 채운 야마모토 마사(주니치)가 6개 항목을 채운 이라부 히데키(치바 롯데)를 누르고 수상했다. 이라부는 양대 리그 탈삼진 1위를 기록했지만, 야마모토는 이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 수상은 이해 시즌 내내 하위권이던 이라부의 소속팀 치바 롯데와 달리 야마모토의 소속팀 주니치가 이 시즌 최종전까지 우승다툼을 벌였고, 야마모토도 에이스 투수로써 팀을 상위권으로 이끈 것이 영향을 준 듯 하다. 당시 선정 위원 중 한 명이 호시노 센이치.
- 1996년 - 5개 항목을 채운 사이토 마사키(요미우리)가 6개 항목을 채운 니시구치 후미야(세이부)를 누르고 수상했다. 사이토의 경우 세리그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타이틀이 있었지만 니시구치의 경우 파리그 완투 타이틀 하나밖에 없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 2003년 - 5개 항목을 채운 이가와 게이(한신), 4개 항목을 채운 사이토 가즈미(후쿠오카 다이에)가 6개 항목을 채운 우에하라 코지(요미우리)를 누르고 공동으로 수상했다. 이가와의 한신과 사이토의 다이에는 양 리그 우승팀이었다. 그리고 사이토는 퍼시픽 리그에서 18년만에 나온 20승 투수였고 두 명 다 선발 20승 투수였다. 또한 전무후무한 양대 리그 공동수상[5] 이기도 하다.
- 2008년 - 6개 항목을 채운 이와쿠마 히사시(라쿠텐)가 7개 전 항목을 채운 다르빗슈 유(닛폰햄)를 누르고 수상했다. 이와쿠마는 1985년의 사토 요시노리 이래 23년만에 나온 21승 투수였고, 리그 2위인 닛폰햄 소속이었던 다르빗슈와 달리 리그 5위에 그쳤던 라쿠텐에서 21승이나 따내며 팀 승수(65승)의 거의 1/3을 책임졌다.
- 2013년 - 6개 항목을 채운 다나카 마사히로(라쿠텐)가 7개 전 항목을 채운 가네코 치히로(오릭스)를 누르고 수상했다. 다만 다나카는 NPB 역사에서 전무후무할 24승 0패 투수로, 시즌 내내 연승 행진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만장일치로 여유롭게 수상했다. 이 해 라쿠텐의 창단 첫 일본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한 것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평균자책점 1.27로 압도적인 리그 1위.
- 2016년 -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크리스 존슨이 외국인으로서는 진 바키 이후 52년만에 사와무라상을 수상했다. 다만 존슨은 다승은 팀 동료인 노무라 유스케[6] , 이닝과 탈삼진, 방어율은 스가노 도모유키(요미우리)[7] 에게 밀려 리그 타이틀이 하나도 없음에도 수상한 케이스가 되었다. 스가노는 비율로서는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물타선과 불펜의 방화로 인해 9승밖에 챙기지 못한 반면 존슨은 리그 우승팀 카프의 에이스로 15승을 거두었다는 것이 주효했다.
몇몇 예를 보면 알겠지만 단순히 성적을 기계적인 수치로 대입해서 뽑는 게 아니라 해당 시즌에 선수가 보여준 임팩트, 팀 성적 등도 같이 반영됨을 알 수 있다.
더 특이한 사실은, '''수상 자격에 걸맞는 선수가 없을 경우 시상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5번(1971년, 1980년, 1984년, 2000년, 2019년)이나 수상자가 없었는데, 리그 사무국이 주관하는 공식 연간 선수상에서 자격미달로 시상을 하지 않는 경우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가 없다.[8]
2019년에는 야마구치 슌(요미우리)과 아리하라 코헤이(닛폰햄)가 최종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두 투수 모두 완투 숫자과 최소 투구이닝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심사위원장인 호리우치 츠네오는 "더 이상은 (수상자의) 레벨을 낮추고 싶지 않았다"고 '수상자 없음'의 이유를 밝혔다. 노무라 카츠야는 ''에이스는 개인주의자일 수 있지만 이기주의자가 돼서는 안 된다"며 선발투수의 이닝이 갈 수록 줄어드는 세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선발투수라면 등판한 경기를 다 책임진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슈칸베이스볼에 쓴 칼럼에서 "어깨는 소모품이라고 하는데, 보통 100개 남짓인 투구 수 제한은 과학적 근거가 모호하다. 그걸 지켜서 투수의 수명이 늘었나. 반대로, 매일 같이 던지던 옛 투수들이 덜 다친 건 무슨 이유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신문기사
2.3. 기록들
- 최다 수상자는 총 3회를 수상한 가네다 마사이치, 스기시타 시게루, 무라야마 미노루, 사이토 마사키 등 4명이다. 그 중에서도 가네다 마사이치는 1956~1958년 3년 연속 수상했다.
- 2회 수상자로는 벳쇼 다케히코, 호리우치 츠네오, 고바야시 시게루, 키타벳푸 마나부, 우에하라 고지, 사이토 가즈미, 마에다 켄타, 다나카 마사히로, 스가노 토모유키까지 9명이 있다.
- 2년 연속 수상자로는 스기시타 시게루(1951~1952년), 무라야마 미노루(1965~1966년), 사이토 마사키(1995~1996년), 스가노 토모유키(2017~2018년). 여기에 3년 연속 수상한 가네다 마사이치를 포함해서 총 5명이다.
- 지금까지 남아 있는 구단 중에서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구단은 치바 롯데 마린즈가 유일하다. 그나마 이라부 히데키가 한 번 후보로 올라본 것 빼고는 후보로조차 거론된 선수가 거의 없었다. 다만 롯데의 경우는 1989년까지 센트럴 리그만 수상 범위였던 것 때문에 손해를 봤던 케이스다. 사실 롯데도 과거엔 고야마 마사아키, 나리타 후미오, 무라타 쵸지 등 리그 최고의 투수들이 많이 존재하던 강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뛰던 시기가 센트럴 리그만 사와무라상을 수상하던 때였고, 퍼시픽 리그도 수상범위에 들어간 시기부턴 이미 이런 투수들이 노쇠화로 다 은퇴해버린 데다가 팀이 약체화되어버려서(...) 사와무라상을 수상할 만한 투수가 없었던 것.[9] 만약 그 이전부터 시상을 했더라면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없는 구단이란 타이틀은 진작 버렸을지도 모른다.
- 참고로 역대 수상자 중 외국인은 한신 타이거즈 소속이던 진 바키(1964년 수상)가 유일했지만 2016년 히로시마의 크리스 존슨이 수상하면서 2명으로 늘었고 모두 센트럴 리그에서 나왔다.
3. 역대 수상자 명단
- 굵은 글씨는 정규 시즌 리그 1위.
4. 관련 문서
[1] 메이저리그는 1966년까지 리그전체에서 한 명을 뽑았다가 1967년부터 사이 영 상을 리그별로 뽑는다.[2] 그 해에는 에가와의 팀 동료 니시모토 다카시가 수상했다. 에가와는 1980년에도 다승왕-탈삼진왕을 차지했지만 사와무라상을 타지 못했고(심지어 이 해는 사와무라상 수상자가 없는 해다! 작정하고 뽑지 않은 것.), 1982년에는 모든 7개 기준을 충족했지만 역시 7개 기준을 만족시킨 리그 우승팀 히로시마의 키타벳푸 마나부에 밀렸다. 결국 은퇴하기까지 사와무라상과 인연이 없었다. 안티 여론이 생긴 이유는 본인 문서 참조.[3] 특히 완투 10경기 이상. 선발-중계 분업화가 확대되어가는 현대야구의 추세로 완투형 투수를 보기가 힘들게 되었다. 이 조건이 붙은 이유는 일본에서는 한 경기를 끝까지 책임지는 완투 능력을 이상적인 에이스의 조건으로 보기 때문. 다만 일본은 메이저리그보다는 로스터 운용이 자유로운 편이므로 선발이 좀 더 쉬는 대신 좀더 많은 이닝을 소화하는 6선발+ 로테이션을 구축하기도 한다.[4] 일본프로야구에서 사이토 마사키 이후로 2014년까지 2년 연속 20승을 거둔 투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게다가 통산 사와무라상을 3번이나 수상했고 다승왕 5번에 방어율왕을 3번이나 차지한 대투수이다. 이렇게 대단한 성적을 올린 요미우리의 에이스이면서 이 정도로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지 못한 투수도 없다. 이렇게 대단한 성적을 올린 요미우리의 에이스가 올스타전 출전은 고작 6번, 그나마 팬 투표로 선발된 적은 딱 한번이었다. 요미우리의 불가사의 중 하나.[5] 공동수상은 1966년에도 있었다. 무라야마 미노루(한신)와 호리우치 츠네오(요미우리). 이 때는 둘 다 센트럴 리그.[6] 존슨 15승 v 노무라 16승.[7] 존슨 180.1이닝(3완투) 141탈삼진 2.12 v 스가노 183.1이닝(5완투) 189탈삼진 방어율 2.01.[8] 매년 선정하는 상의 경우 경쟁수준이 낮을 경우 종종 수준낮은 수상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프로야구 2003년 신인왕 이동학 선수이다. 이동학 선수는 신인시절 투수로 27경기 8승 3패 평균자책점 5.35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지만 당시 경쟁자가 없어서 신인왕에 올랐었다. 사와무라상의 경우에는 '''그런 성적으로는 상 받을 자격 없다!'''라고 선정을 거부하는 셈. 더욱이 일본프로야구에서는 같은 이유로 신인왕을 뽑지 않은 전례도 있다. 가장 최근의 일은 2000년 퍼시픽 리그. 유례없는 신인 흉작이던 그해 퍼시픽 리그에서는 신인왕을 뽑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무려 32년만이었다.[9] 그나마 가능성이 보이는 선수가 이시카와 아유무, 후타키 코타 정도인데 둘 다 2019년에 폭망. 유망주 중에서는 타네이치 아츠키와 이와시타 다이키, 아리요시 유키 정도가 싹수가 보인다.[10] 이 해는 일본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기 전이다. 따라서 지금은 퍼시픽 리그 소속인 난카이의 벳쇼가 수상이 가능했다. 즉, 리그가 분리되기 전인 1949년까지는 진정한 최고 투수를 뽑는 상이었던 셈.[11]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되었다.[12] 양대리그 통합 첫 수상자.[13] 52년만의 외국인 선수 수상.[14] 역대 5번째이자 22년만의 연속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