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가

 


1. 개요
2. 시 전문
3. 그 외


1. 개요



태종 이방원이 포은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서 지었다는 시조.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를 통해 거절의 뜻을 전달했고,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와 고여에게 개성 선지교(善地橋)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후에 그가 숨진 자리에서 대나무가 자라 선죽교(善竹橋)라 했다.
한국사에서 중요하고 유명한 시조. 단심가와 묶어서 배우는 경우가 많다.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처럼 고려 말~조선 초를 다룬 사극에서 무조건 나온다.
이 시조는 단순히 정몽주 하나만을 상대했다기보다는 고려조 신하전체를 향한 경향이 있는데 위화도 회군에 동참했던 변안열 또한 불굴가라는 시로 고려에 대한 충성이 변치 않음을 표현했다.

2. 시 전문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하여가-

3. 그 외


어쩌다 어른에서 설민석은 '항우의 하여(何如), 유방의 여하(如何)'를 운운하며 이 시에서 쓰인 하여를 '답정너'라고 해석하여 하여가를 읊으면서 쇠망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한역된 판본을 보면 하여와 여하 둘 다 적혀있다. 애초에 '하여'와 '여하'는 설민석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까지 양자 사이에 차이가 있는 의미가 아니다.
설민석은 이 하여가/단심가 외에도 항우와 유방의 예를 들어 항우는 '하여'를, 유방은 '여하'를 많이 썼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그런데 실제 기록에서는 유방이 '하여'를, 항우가 '여하'를 많이 쓰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설민석과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참조. 사실 설민석과 링크글 둘 다 틀린 셈인데, 이처럼 서로 정반대의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을 만큼 '하여'와 '여하'의 구분은 큰 의미가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여'와 '여하'는 '여지하(如之何)'와 함께 상고중국어에서 서로 공존하다가 현대중국어에 이르러 '여하'로 통일되었다. 이것만 봐도 양자를 엄밀히 구분하기 어렵다... 이에 관해서는 한경숙 교수의 <'如何', '如之何', '何如'의 통사적 변천 고찰>과 같은 논문 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