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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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竹橋 / Sonjuk Bridge'''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습니다.
1. 개요
개성특별시 선죽동에 있는 돌다리이다.
2. 상세
북한의 국보 15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로도 등재됐다. 정몽주와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옛 주소는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 262번지. 관련 일화는 정몽주 항목 참조.
고려시대에는 난간이 없는 다리였으나 조선시대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막고 옆에 새로운 돌다리를 설치했다.기사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2] 였는데, 말 그대로 '좋은 땅의 다리'라는 뜻이다.[3]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때에 숭인문으로 들어온 이성계가 선지교를 지나서 황룡대기를 날리며 개성 자남산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다리가 유명해진 이유는 정몽주가 1392년 여기서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정몽주가 이 곳에서 이방원의 지시를 받은 조영규에게 죽은 뒤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 가지가 솟아 자랐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정몽주의 혈흔은 일제강점기 때까지 남아 있었으며 현재는 희미한 무늬만 남았다고 한다.그런데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좀 다른 듯. 다만 이때 찍은 사진은 혈흔으로 추정되는 것에 물을 부은 직후의 모습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2차 왕자의 난 때에 전투가 일어난 곳도 이곳 선죽교 부근이었다고.
다만 정몽주가 죽기 4년 전(1388) 위화도 회군 관련 기사에서 선죽교라는 이름이 이미 나온다는 점을 들어서 정몽주가 죽은 뒤에 대나무가 솟아서 이름을 선죽교로 바꿨다느니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고 용비어천가, 송경록 등의 기록을 볼 때 정몽주는 실은 개성 시내인 태묘동에서, 철퇴가 아닌 칼로 목이 베여 죽었다는 지적도 있다.기사 이미 선죽교의 혈흔에 대해서 조선 후기 정동유가 지은 백과사전인 <주영편>에서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왜 선죽교 혈흔이나 혈죽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후대의 설화나 이야기를 배제하면, 당대 기록에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언급이 없다.[4] 사실 전해져오는 기록도 정확한 내용은 '선죽교에서 죽였다.'가 아니라, ''''선죽교부터 따라붙었다가 정몽주가 말 타고 도망치자 쫓아가서 말을 베고 떨어진 정몽주를 죽였다.''''이다. 즉, 선죽교에서 공격한 건 사실이지만 거기서 정몽주가 도망치는 바람에 죽인 곳은 다른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
선죽교 서쪽에는 정몽주를 제향(祭香)하기 위해 세웠다는 숭양서원(崇禳書院)[5] 이 있으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와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지금은 선죽교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지만 과거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는데 김일성이 "'''다리 밑인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 하며 지금처럼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6]
참고로 '''경상북도 영천시'''에 가설 선죽교가 하나 더 있다. 영천이 다름아닌 정몽주의 고향이기 때문.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한 임고서원 옆에 있다.
[1] 1921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철장철학'을 주제로 강연할 때 강연 말미에 덧붙인 말이라고 한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등장했다.[2] 이것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3] <고려사>에는 무신집권자 최이가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선지교('''選'''地橋)였다는 언급이 있는데 선지교와는 한자 하나만 다르고 발음이 같아서 사실은 서로 같은 곳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4] 하지만 이것도 반론이 가능하다. 일단 기사 자체가 40년 전 기사이고 후속편이 없으며, '송경록' 이라는 책은 육신전이라는 소설을 쓴 남효온이 지었다는 책인데 육신전 자체의 허구가 드러난 이상 송경록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를 모른다. 용비어천가도 본문에 없고 부록에 있다. 용비어천가와 고려사가 편집되던 시점에 계유정난 등 정치적 혼란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이 사건에 대한 견해도 오락가락했을 테니 선죽교 전설을 뒤집기에는 불충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으로, 전설이 사실이라고 확증할 근거 역시 부족한 게 사실이다.[5] 무려 '''정몽주 자신이 살던 집''' 자리라는 전승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이후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에 들어갔다.[6] 출처: <개경의 생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