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안열
[image]
邊安烈
(1334 ~ 1390)
고려 말기의 인물. 호는 대은(大隱).
원주 변씨[1] 의 시조로 고려 말의 무장이다. 변안열은 원나라 무과에 장원급제했고 그 무예가 뛰어났다고 전하며, 후에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귀국하면서 모시고 따라와서 그대로 고려에 정착했다.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이 되었던 기간 동안 많은 고려 사람이 원나라로 건너가서 정착하거나 벼슬을 하다가 그 자손들이 다시 고려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변안열은 그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이후 안우 휘하에서 홍건적을 토벌한 것에 종군해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었다. 계속 승진해 판소부감사가 되었다가 안우와 함께 개경을 수복해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예의판서가 되어 추성보조공신의 칭호를 받고 승진해서 밀직부사, 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했다.
잔치를 열 때 임견미, 염흥방과 함께 수박희로 겨루기도 했고 판밀직사사를 지내면서 최영과 함께 탐라의 몽골인들을 정벌하고 귀환해 지문하부사를 지내다가 평리가 되었으며, 1374년에 우왕이 즉위하고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의 칭호를 받고 양광전라도 도지휘사,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가 부령에 침입해 행안선에 올라가자 나세, 조사민, 유실과 함께 이들을 격파해 우왕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하사받고 도당에서 천수사까지 역신을 물리치는 의식인 나례를 벌였다.
문하찬성사로 승진했다가 왜선 5백 척이 진포 어귀에서 침입해 이산, 영동현, 황간, 어모, 중모, 화령, 공성, 청리, 상주 등 여러 곳을 공격했는데, 1380년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해 황산 대첩에 참전했다. 고려 조정으로 돌아가서 임견미, 이인임과 함께 정방을 맡았지만 서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공장이나 재력이 있는 자를 먼저 벼슬에 올렸고 왜구가 단양군을 공격하자 한방언 등과 함께 왜구를 격파해 80여 명의 목, 말 2백여 필을 얻었으며, 안동에서도 왜국를 격파해 30여 명의 목, 말 60필을 얻자 그 공으로 원천부원군에 봉하고 판삼사사로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나 우왕 폐위에는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당하자 크게 탄식하고 자신의 호를 대은이라고 지었다. 원주 변씨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이성계가 정몽주, 변안열을 초청해 아들을 시켜 하여가로 그 속을 떠보게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열은 불굴가를 지어 고려에 대한 충절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389년에 영삼사사가 되었다가 우왕이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탄로나 김저가 고문을 당하면서 계획의 공모자라고 발설하면서 변안열은 우왕을 맞이해 공모하려 했다는 것으로 이 계획에 연루되었으며, 사면령이 내리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 파직당하는 선에서 그쳤다가 다음날 상소가 나오면서 삭직해 한양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우왕은 강릉으로 추방되었을 때 어느 사람에게 자신을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라 탄식했고 김저를 고문해 자백하도록 해서 변안열이 그 죄에 연루된 것이고 유배를 당한 후에도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변안열은 설장수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우왕의 폭정을 보고한 일로 인해 김저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서 파직만 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변안열을 포함해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을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공양왕이 유배지에 가서 처형하라고 했으며, 1390년에 변안열은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될 때 우왕을 맞이하려는 사람이 어찌 자신 뿐이겠냐고 탄식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김백흥이 형리에게 명해 그를 참수하게 했으며, 그의 처의 일족은 죄에서 면하도록 했다.
1388년에 일어난 위화도 회군 때 그도 함께 참여하였기에 그 공적을 기록하도록 지시했지만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했다고 말한 윤이, 이초 등의 진술에서 변안열의 이름이 언급되자 변안열의 공신 칭호는 삭제되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그러나 그의 죄명에는 다소 의심스러운 정황이 존재했고 게다가 변안렬의 딸이 바로 이성계의 아들, 방번의 아내였기에 둘은 사돈지간이었다. 여러 상황이 참작된 것인지 조선 개국후에 그는 개국공신으로 복권되었고 그 아들도 후에 벼슬을 하게 된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에 있다.
이상하게도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는 한참 나오지 않다가 드라마 정도전에서 제법 비중있게 나온다. 송금식 배역. 자세한 것은 변안열(정도전) 문서 참고.
정도전에서 변안열을 맡은 배우인 송금식이 북두의권 실사판에서 레이 역을 맡은 적이 있다보니 정도전 갤러리에선 변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邊安烈
(1334 ~ 1390)
고려 말기의 인물. 호는 대은(大隱).
원주 변씨[1] 의 시조로 고려 말의 무장이다. 변안열은 원나라 무과에 장원급제했고 그 무예가 뛰어났다고 전하며, 후에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귀국하면서 모시고 따라와서 그대로 고려에 정착했다.
고려가 원나라 부마국이 되었던 기간 동안 많은 고려 사람이 원나라로 건너가서 정착하거나 벼슬을 하다가 그 자손들이 다시 고려로 돌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변안열은 그와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이후 안우 휘하에서 홍건적을 토벌한 것에 종군해 공을 세워 2등공신이 되었다. 계속 승진해 판소부감사가 되었다가 안우와 함께 개경을 수복해 그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으며, 예의판서가 되어 추성보조공신의 칭호를 받고 승진해서 밀직부사, 동지밀직사사 등을 역임했다.
잔치를 열 때 임견미, 염흥방과 함께 수박희로 겨루기도 했고 판밀직사사를 지내면서 최영과 함께 탐라의 몽골인들을 정벌하고 귀환해 지문하부사를 지내다가 평리가 되었으며, 1374년에 우왕이 즉위하고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의 칭호를 받고 양광전라도 도지휘사, 조전원수가 되어 왜구가 부령에 침입해 행안선에 올라가자 나세, 조사민, 유실과 함께 이들을 격파해 우왕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하사받고 도당에서 천수사까지 역신을 물리치는 의식인 나례를 벌였다.
문하찬성사로 승진했다가 왜선 5백 척이 진포 어귀에서 침입해 이산, 영동현, 황간, 어모, 중모, 화령, 공성, 청리, 상주 등 여러 곳을 공격했는데, 1380년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해 황산 대첩에 참전했다. 고려 조정으로 돌아가서 임견미, 이인임과 함께 정방을 맡았지만 서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공장이나 재력이 있는 자를 먼저 벼슬에 올렸고 왜구가 단양군을 공격하자 한방언 등과 함께 왜구를 격파해 80여 명의 목, 말 2백여 필을 얻었으며, 안동에서도 왜국를 격파해 30여 명의 목, 말 60필을 얻자 그 공으로 원천부원군에 봉하고 판삼사사로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 참여하였으나 우왕 폐위에는 반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이 강화도로 유배당하자 크게 탄식하고 자신의 호를 대은이라고 지었다. 원주 변씨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이성계가 정몽주, 변안열을 초청해 아들을 시켜 하여가로 그 속을 떠보게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를, 변안열은 불굴가를 지어 고려에 대한 충절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1389년에 영삼사사가 되었다가 우왕이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탄로나 김저가 고문을 당하면서 계획의 공모자라고 발설하면서 변안열은 우왕을 맞이해 공모하려 했다는 것으로 이 계획에 연루되었으며, 사면령이 내리기 전에 일어난 일이라 파직당하는 선에서 그쳤다가 다음날 상소가 나오면서 삭직해 한양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우왕은 강릉으로 추방되었을 때 어느 사람에게 자신을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라 탄식했고 김저를 고문해 자백하도록 해서 변안열이 그 죄에 연루된 것이고 유배를 당한 후에도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라왔지만 변안열은 설장수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우왕의 폭정을 보고한 일로 인해 김저의 계획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 해서 파직만 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변안열을 포함해 이 일에 연루된 자들을 죽이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공양왕이 유배지에 가서 처형하라고 했으며, 1390년에 변안열은 처형되었다. 그가 처형될 때 우왕을 맞이하려는 사람이 어찌 자신 뿐이겠냐고 탄식하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김백흥이 형리에게 명해 그를 참수하게 했으며, 그의 처의 일족은 죄에서 면하도록 했다.
1388년에 일어난 위화도 회군 때 그도 함께 참여하였기에 그 공적을 기록하도록 지시했지만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공격했다고 말한 윤이, 이초 등의 진술에서 변안열의 이름이 언급되자 변안열의 공신 칭호는 삭제되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그러나 그의 죄명에는 다소 의심스러운 정황이 존재했고 게다가 변안렬의 딸이 바로 이성계의 아들, 방번의 아내였기에 둘은 사돈지간이었다. 여러 상황이 참작된 것인지 조선 개국후에 그는 개국공신으로 복권되었고 그 아들도 후에 벼슬을 하게 된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 진건읍에 있다.
이상하게도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에서는 한참 나오지 않다가 드라마 정도전에서 제법 비중있게 나온다. 송금식 배역. 자세한 것은 변안열(정도전) 문서 참고.
정도전에서 변안열을 맡은 배우인 송금식이 북두의권 실사판에서 레이 역을 맡은 적이 있다보니 정도전 갤러리에선 변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 남송 말에 고려로 귀화한 농서 사람 변려(邊呂)를 시조로 황주 변씨가 이뤄졌다. 변려의 후손인 변순이라는 사람이 원나라 사신을 따라 원으로 건너가서 장수가 되었고 변순의 손자로 공민왕을 호종했던 것이 바로 변안열이다. 이 때 변안열을 시조로 삼아 황주 변씨에서 원주 변씨가 분파된다. 아무튼 변안열까지 내려오는 몇 대 동안 '''남송→고려→원→고려'''의 복잡한 국적 변경(...) 내력이 있는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