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백제 제25대 건길지'''
'''武寧王 | 무령왕'''
[image]
'''시호'''
무령왕(武寧王)
'''별호'''
사마왕(斯麻王)[1]
'''성씨'''
부여(扶餘)
''''''
사마(斯麻)[2] / 사마(斯摩) / 융(隆)[3] / 세마(嶋)[4]
'''왕자'''
부여사아(扶餘斯我)[5], 부여명농(扶餘明襛)[6]
'''왕후'''
왕대비(王大妃) / 대부인(大夫人)
'''부왕'''
[7] / '''개로왕(蓋鹵王) / 부여곤지(扶餘昆支)'''[8]
'''능묘'''
무령왕릉
'''생몰연도'''
음력
461년 6월 1일[9] ~ 523년 5월 7일 (62세)
'''재위기간'''
음력
501년 12월 ~ 523년 5월 7일
(21년 5개월)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즉위와 전쟁
2.3. 왕권 강화
2.4. 외교
2.5. 스다하치만신사 인물화상경?
2.6. 최후
3. 연대 문제
3.1. 생년
3.2. 초기 기록
4. 삼국사기 기록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5.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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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제의 제25대 국왕이자 건길지. 고구려에게 위례성을 잃고 쇠락해가다가 동성왕에 의해 제법 회복된 백제를 무령왕이 크게 중흥시켰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키가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망이 두터웠다고 한다.[10] 키가 8척이면 한척(漢尺)으로도 190cm라는 뜻인데 무령왕릉에서는 뼛조각만이 몇 개 출토되어서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다.

2. 생애



2.1. 출생


손자 위덕왕과 함께 생몰년이 알려진 몇 안 되는 백제 왕이다. 《일본서기》에서 461년에 태어났다고 전하고 있으며 실제로 무령왕릉 발굴 결과 523년에 사망할 당시 62살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교차검증까지 확실히 마쳤다. 즉위도 40살에 했으니 늦은 편이었지만 장수했다. 만약 동성왕 대신 바로 즉위했으면 44년을 재위할 수도 있었고 그렇다면 재위 44년의 위덕왕과 맞먹는다.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고려충숙왕, 조선현종, 대한민국이명박 대통령과 더불어 외국에서 태어난 몇 안 되는 한반도의 지도자이다. 동성왕이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다는 통설에 따른다면 동성왕의 출생이 부여곤지의 도왜 이후가 되므로 정황상 동성왕 역시 외국에서 태어났다고 봐야한다. 다만 무령왕은 일본 본토 출생은 아니고 중간에 기착했던 섬에서 태어났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부여곤지의 큰아들이다. 부여곤지가 왜국으로 파견나갈 때 임신한 개로왕의 부인을 데려갔고 그때 낳은 아이가 사마 무령왕이었다고 전한다. 한때 거의 무시되었지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출생 연대와 《일본서기》에서 전하는 부여곤지의 왜국 파견 시기가 일치하고 유사점이 보여 이를 지지하는 입장도 늘어났다. 《일본서기》 유랴쿠 덴노 5년(461년) 조에 따르면 개로왕은 아우인 부여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부여곤지의 간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11]을 부여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이자 부여곤지의 새 아내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인 카카라노시마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다.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461년) 6월 병술삭(1일)에 임신한 부인이 카스리키시(加須利君)의 말처럼 츠쿠시(筑紫)의 카카라노시마(各羅島)[12]

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아이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 하였다. 이에 코니키시(軍君)가 곧 배에 태워 세마키시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이가 무령왕(武寧王)이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니리무세마(主島)라 불렀다.

'''《일본서기》 권14 유랴쿠 5년'''

부여곤지가 일본으로 넘어가던 중 카카라노시마(各羅島)에 정박하여 무령왕을 낳았는데 섬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사마왕이라 하기도 한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이름을 세마키시(嶋君)라고 전하는데 고대 일본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백제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13] 무령왕이 태어난 섬의 동굴에는 관련 설화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덧붙여서 서동요에 나오는 서동으로 추정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사실 무령왕의 출신은 불분명하다.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 혹은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의 기록이고[14]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동성왕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왕사 문서에 있는 가계도나 한국사 교과서 등의 왕계표는 《삼국사기》 기록에 따른 것이라 일단 이리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이나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현재는 《일본서기》의 기록 쪽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일본서기에서도 2가지 전승에 대해 어느 쪽이 맞는지 우리도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구절이 나오며 동성왕은 문주왕의 아들이라는 가설도 있어서 무령왕과 동성왕의 혈연 관계가 정확히 어떠한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2.2. 즉위와 전쟁


선왕이었던 동성왕은 왕권 전제화 정책을 무리하게 시행한 탓에 반기를 든 위사좌평 백가에게 시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는데 동성왕의 반대파에 의해 추대된 무령왕은 가림성(加林城)에서 저항하던 백가를 502년 정월에 한솔 해명과 함께 토벌했다. 의문스러운건 백가는 토벌군이 오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고 그대로 처형당했다는 점인데 백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백가의 뒤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일각에서는 동성왕 암살의 배후가 무령왕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하는데 무령왕이 백가를 사주해 동성왕을 시해하고는 배후임을 감추기 위해 백가를 처단했다는 토사구팽을 주장한 것이나 근거가 빈약하기 때문에 진실은 알 길이 없다. 부여곤지에게는 무령왕과 동성왕 외에도 3명의 아들이 더 있었고 이들이 각각 사씨, 백씨, 연씨와 혼인하였다고 가정하면 동성왕이 3남의 외척이었던 사씨의 세력 기반인 사비성으로 천도를 계획해 사실상 3남을 왕태자로 책봉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부여곤지의 4남을 즉위시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인 것 같다.
503년 고목성에 쳐들어온 말갈족을 격퇴시켰고 달솔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했다. 507년 고구려의 사주를 받은 말갈족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남쪽에 2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점거하고 약탈을 일삼자 군사 3,000명을 이끌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로 하여금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통해 북방에서 세력의 균형을 이룬 무령왕은 전라남도 지방의 침미다례 등 구 마한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고 512년에는 《일본서기》 기록상[15] 가야(반파국) 세력하에 있던 동부로도 진출하여 임실, 남원 방면에서 내륙으로 동진하여 섬진강 일대를 확보하고 낙동강 서부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무령왕은 새로 확보한 지역에 군령과 성주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으며 전라도 동부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던 대가야는 이 시기 백제한테 밀려서 고립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고대에는 교역이 농업 생산력만큼 국가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사업이었는데 섬진강을 통해서 광양만에 이르던 길을 고스란히 백제에게 빼앗기면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이후로도 대가야가 이런 섬진강 침입에 매우 강하게 반응하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지만 체급의 차이로 여의치 않았던 모양. 섬진강의 물산과 교통로 확보로 백제가 이후 신라와의 싸움에서 이 길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근간이 되기도 했다.
북쪽으로는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한강 유역까지 다시 진출했다는 설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근거는 무령왕기에 보이는 수곡성, 한산, 한수 이북 등의 명칭으로 현재 당시 백제 영역이 어디까지였는지, 한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의 중에 있다. 고고학적으로 보아서는 이 시기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을 빠르게 포기한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이 때 고구려는 안장왕 치세인데 안장왕이 경기도 고양시 북부 지역의 고봉산 관련 미녀 한씨 설화가 있는 것을 봐서 동성왕~무령왕~성왕 당시 고양시 일대까지 백제가 수복한 것으로 본다. 《삼국사기》에도 기록된 흥안 태자와 미녀 한씨 설화를 보면 무령왕 시기의 백제가 지금의 강화도인 혈성과 경기도 고양시인 계백현까지 태수를 두고 직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안장왕이 태자 시절이었던 이 시기는 무령왕의 재위 말년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백제는 한강 이북까지 탈환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이 한강 유역을 재탈환한 시기는 백제 성왕 재위 초기에 해당하는데 이에 따르면 한강 유역은 이미 성왕 이전에 백제가 일시적으로 되찾은 것이 되고 안장왕이 다시 빼앗은 것을 백제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힘을 합쳐 재탈환한 것이 된다. 그래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한강 유역을 잃은 동성왕~무령왕 시기에 한강 유역 관련 지명이 자주 나오는 것이다. 부여에서 갑자기 고구려식 온돌과 그릇 등이 출현하더니 곧 백제 영역 전반으로 빠르게 전파되는 양상이 바로 무령왕 시기에 관찰되는데, 무령왕이 일시적으로 수복한 경기도 등지에서 고구려인들 혹은 고구려 문화를 익힌 옛 백제인들을 부여와 부여 인근 지역에 사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유역을 영역화했는지는 아직 논의 중이지만, 적어도 백제군이 일시적으로 옛 위례성까지 치고올라갔던 건 거의 사실이었던 걸로 보인다. 무령왕 시절의 백제군이 개성을 비롯한 황해도 지역까지 치고 올라간 적 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2.3. 왕권 강화


무령왕은 즉위 후 동성왕을 시해한 귀족들의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양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22개로 운영되던 담로에 왕족을 보내 통치하도록 하여 중앙 집권적 질서 하에서 정치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왕족을 지방 통치에 이용하여 대 토목 공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동원할 수 있게 되었고, 왕족은 경제적인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최고 관등급인 좌평제를 개편하여 신·구 세력을 통제하였고 직책이 없는 좌평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귀족 세력을 국왕 중심으로 서열화하고 국정을 책임있게 분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고 제방을 구축하고 농사를 권장하는 등 민생 안정에도 힘썼다. 무도포학하다고 할 정도로 전제 군주적인 모습을 보여온 동성왕과는 꽤 대조적인 모습이다.

2.4. 외교


무령왕은 백제의 문화 발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령왕은 512년과 521년에 중국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16]
521년 양무제(梁武帝)로부터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 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이는 으레 나오는 명목상의 책봉 기록이지만 은근히 의미가 있는 기록이기도 한데, 양나라는 앞서 502년에 고구려왕을 차기대장군, 백제왕을 정동대장군으로 봉했다. 둘 중 고구려 쪽이 더 위계가 높았다. 그런데 520년 양나라는 고구려 안장왕을 영동장군으로 책봉한 반면 이번에는 백제 무령왕을 그보다 더 높은 영동대장군으로 책봉했다. 중국이 백제의 위계를 고구려보다 높게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름뿐인 관작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젠 바다 건너 제3자인 중국이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한때 위기에 몰렸던 백제가 무령왕 때쯤부터는 역전에 성공해 고구려의 위상을 뛰어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즉위 6년에 왜에 이미 보내어진 마나군이 왕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아군과 교체를 하여 왕족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여 정치를 안정시켰다. 513년 오경 박사 단양이(段楊爾)와 516년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어 백제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기도 하였다. 민생의 안정에도 힘써 제방을 수축하고 유랑민들을 구제해 농사를 짓게 했다.

2.5. 스다하치만신사 인물화상경?


癸未年八月日十大王年男弟王在意柴沙加宮時斯麻念長寿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取白上同二百旱作此竟

계미년(443년? 503년?) 8월 10일(日十)(?) 대왕년(大王年)(?),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斯麻)'''가 장수를 염원하여 카와치노아타이(開中費直)와 예인(穢人) 금주리(今州利) 2명 등을 보내어 백상동(白上同→銅, 양질의 구리) 200한(旱)을 가지고 이 거울(竟→鏡)을 만들었다.

현전하는 일본 금석문 중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 소재의 인물화상경(人物画像鏡)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무령왕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여기 등장하는 사마(斯麻)를 무령왕으로 보는 의견이 매체를 통해 많이 다루어지지만 실제로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는 남제왕(男弟王)을 '무령왕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면서 무령왕이 일본에 동생을 파견해 지배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위 기사의 작성자는 그 악명 높은 김운회 교수이다.
우선 '남제왕(男弟王)'이 '무령왕의 남동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백제의 한문 실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고 밖엔 할 수 없다. 한문에서는 여동생의 경우 '매(妹)'로 나타내므로 '제(弟)'에는 이미 남동생이라는 뜻만 있으며, 중국에 보냈던 외교 문서에 근거해볼 때 백제 정도의 한문 지식이 있는 나라에서 남동생을 말하고자 '남제(男弟)'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남제왕'은 고대 일본식 훈독으로 '오호도노오키미'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이름이 '오호도(男大迹)'인 케이타이 덴노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걸 가지고 아예 '사실 무령왕의 남동생이 케이타이 덴노였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고대 한국어를 표기하는데 쓰인 향찰이나 고대 일본어를 표기하는 데 쓰인 만요가나의 경우 훈을 나타내는 한자와 음을 나타내는 한자는 분명히 구분되어 하나가 둘을 동시에 나타내는 경우는 없다. 따라서 '남제왕(男弟王)'이라는 표기는 일반적인 관습상 당연히 훈이나 음(앞서 기술한 이유로 훈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음) 중 하나만 취한 것인 데도 대책 없이 난 둘 돠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남제왕'이 '무령왕의 남동생'이라고 하게 되면 케이타이 덴노일 리가 없고, 케이타이 덴노라고 하게 되면 무령왕의 남동생일 리가 없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사마(斯麻)'의 표기 방식이다. 이 거울의 제작 연대인 '계미년(癸未年)'은 60으로 나누어 23이 남는 해이고, 유물의 특징을 고려하면 이는 443년 또는 503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무령왕은 462년생이므로 '사마(斯麻)'가 무령왕이라고 보려면 503년에 이 거울이 제작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명문에서는 제작 경위와 관련된 인물로 '대왕(大王)', '남제왕(男弟王)', '사마(斯麻)'가 등장하는데, 전근대 기준에서 일국의 국왕에게 아무런 존칭 없이 이름만 부르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으며, 이 금석문을 새겼을 인물은 당연히 왕족보다 지위가 낮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17] 대표적으로 무령왕릉 지석에서도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고 하여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호와 '왕'이라는 칭호를 붙여 쓰고 있다. 쉽게 말해 원래는 외교부 공무원들이 '문재인 대통령께서 선물하심'이라고 써야 하는 것을 격식 다 치우고 '문재인이 선물함'이라고 쓴 격이다. 만약 이것이 성립하려면, '사마'가 '대왕'과는 다른 인물이고 '대왕' 또는 '남제왕'보다 하위 인물이거나, 아예 무령왕을 '사마'라고 기록한 인물이 백제의 국왕 칭호를 신경 쓰지 않는 외부 인물이어야만 자연스럽다. 당연히 백제가 일본 열도를 정복했느니 하면서 양자가 정치적으로 분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김운회 식의 논지를 따르면, 정작 백제가 케이타이 덴노의 하위 인사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이를 무령왕과 관련 지으려면 이 유물이 백제와 정치적으로 완전히 구분된 일본 열도 내 정권의 유물임을 인정하여야 하며, 이것이 고고학적으로나 문헌상으로나 보이는 국제 정세와도 들어맞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명문에 의문점이 남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오호도노오키미(男弟王)가 오시사카궁(意柴沙加宮)에 있었다'고 해석하면 또 기록과 모순이 생기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케이타이 덴노부레츠 덴노가 폭정을 일삼던 키나이 지역이 아닌 에치젠에 머물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서기》의 기년 오차를 들어 503년에 이미 케이타이 덴노가 즉위했을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통치자로 보이는 대왕과 케이타이 덴노여야 할 오호도노오키미가 일단 다르게 표기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기년 조정을 하더라도 《일본서기》의 기술과 완전히 어긋난다고 볼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오시사카노오나카츠히메(忍坂大中姫)라는 황후가 있었던 인교 덴노 시기를 《송서》 왜국전에 맞추어 443년 전후로 가정하여, 443년에 이 거울이 제작되었고 사마의 혈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완전히 일본의 신료라고 보는 의견도 있으며[18] 이것이 503년설에 못지 않게 유력하다.[19] 게다가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적성국도 아니고 동맹국의 왕을 존칭도 없이 그냥 쓰는 건 이상하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도 백제 왕족이나 귀족들은 거의 꼬박꼬박 관등이나 존칭을 붙여준다. 한국에서는 무령왕과 어떻게든 관련 짓는 것이 잘 팔리기 때문에 503년설만 TV와 신문에 나오지만 443년설을 취할 경우 무령왕은 태어나기도 전이므로 당연히 이 명문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게다가 이 명문에서 앞서 실컷 말했던 남제왕(男弟王)의 정확한 판독이 사실 '부제왕(孚弟王)'이라는 설, 일반적으로는 '10일'로 판독하는 일십(日十)과 대왕(大王)을 이어붙여 일십대왕(日十大王)으로 봐서 특정한 덴노의 이름과 맞추는 설, 일(日)을 왈(曰)로 판독해 앞의 경우처럼 왈십대왕(曰十大王)으로 봐서 특정한 덴노의 이름과 맞추는 설이나 '일하(日下)를 초(草)의 간자로 보아 5세기 중반의 인물인 오쿠사카 황자(大草香 皇子)에 대응시키는 설 등 이설이 많아 아직 이 명문에 대해서는 일관된 의견이 없는 상태이다.
무슨 말인지 복잡해서 모르겠다 싶으면... 그냥 다 생략하고 '''무령왕의 대일 외교와 관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무령왕이 남동생을 일본 열도에 보내 지배하도록 했다는 설은 기초적인 한문 해석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만 알아두어도 좋다. 이 사료가 있건 없건 무령왕이 일본과의 동맹 관계를 이용해서 충분히 단물을 뽑아먹었던 기민한 인물이었음이 《일본서기》를 통해 분명히 확인되므로, 만약 503년 무령왕설을 취한다면 이를 설명할 때 쓸 수 있는 자료일지도 모른다.

2.6. 최후


웅진 시대의 군주들 중 '''유일하게 천수를 누린''' 왕이다. 웅진 시대의 백제 왕들은 문주왕(암살), 삼근왕(암살 유력), 동성왕(암살), 그리고 무령왕과 아들 성왕[20]이 있다. 사실 그 앞으로도 개로왕(전사), 비유왕(암살,전사 유력), 구이신왕(암살 유력) 등... 천수를 누린 백제 왕으로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2.7. 무령왕릉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왕이었던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무령왕의 무덤 때문이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며,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출토된 금제 관장식 등의 호화로운 유물 덕에 급속히 유명해졌다. 1971년 무덤이 통째로 묻혔다가 배수로 공사 중에 발굴된 탓에 다른 무덤에선 오랜 세월 이어진 도굴을 전혀 안 당하고 발굴된 것. 다만 졸속 발굴이라는 오명이 붙기도 했다.
무령왕릉에서 무령왕의 부인 역시 합장되어 발견되었다. 무령왕의 사망 3년 뒤인 526년 12월 사망했다고 한다. 무령왕릉 지석에서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로 표현했는데 아쉽게도 성과 이름이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3. 연대 문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이 남았지만, 재위 초기의 기록과 수명에 부정합이 존재한다.

3.1. 생년


무령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묘지석, 《일본서기》, 《삼국사기》가 모두 서기 523년 5월로 일치한다. 묘지석에 따르면 62세로 죽었고, 《일본서기》에 따르면 '''461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즉 461년에 태어나 523년에 62세로 죽었으므로, 이 나이는 연 나이로 계산된 것이 된다.
옛날 사람이니 당연히 세는나이를 썼을 것이리라고 생각하는 측에서는, 생년을 461년이 아니라 462년(=523 - (62 - 1))으로 설정하고, 더 나아가 63세 생일이 되기 전에 죽었으므로 62세로 처리했다고 보기도 한다.

3.2. 초기 기록


《삼국사기》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성왕이 501년 12월 피습으로 인해 승하하고, 그해 1월에 무령왕이 백가를 죽이는 상황이 나온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 연표에서는 501년 동성왕이 사망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501년 12월 동성왕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21]
《삼국사기》가 유월 칭원법[22]을 따른다고는 하나 이는 고구려에만 해당한다. 장수왕은 491년 12월에 승하했기 때문에 문자명왕 기록의 시작(원년)은 492년 1월이다. 그러나 백제 구이신왕은 427년 12월에 죽었는데 차기 왕인 비유왕의 원년이 427년이다. 신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으며, 태종 무열왕이 661년 6월에 죽었으나 다음 왕인 문무왕의 기록은 661년 6월부터 원년으로 하여 시작한다. 동성왕이 501년 12월에 죽었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무령왕의 원년이 501년으로 기록된 것이다. 다만 비유왕은 원년의 기록이 없고 2년(428년)부터 기록이 시작되는 반면, 무령왕은 분명 원년이 501년 12월인데도 불구하고 501년 1월부터 시작되는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백가의 처형은 무령왕 2년(502)의 사건'''인데, 모종의 원인으로 인해 '''기록에서 연도가 빠졌고''', 후대에 이것이 '''2년이 아닌 원년으로 잘못 기록된 셈'''이다. 원년이 501년인 것은 변함이 없다.
《삼국사기》의 무령왕 기록은 (기록된) 순서대로 원년 1월, 원년 11월, 2년 봄(1~3월), 2년 11월, 3년 9월, 3년 겨울(10~12월)이다. 백가의 처형이 원래 2년 1월인데 이것이 1년 1월로 잘못 기록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니 앞서 적은 4개의 기사를 1년씩 미루어서 무령왕 2, 3, 4년에 일어났다고 보면 참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결정적인 오류를 발생시키니, 바로 대(對)고구려 전쟁 기록의 연도 문제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무령왕 원년 11월에 달솔 우영(優永)과 군사 5천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했다고 되어 있다. 고구려본기에도 이 사건이 똑같이 나오는데, 그 시기가 문자명왕 12년('''503년!''')이다. 또 무령왕 2년 11월에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고구려본기에는 동일한 사건이 문자명왕 11년('''502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 초기의 기록을 1년씩 뒤로 미룬다면, 동일한 두 기사가 서로 엇갈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 오류를 해결하는 방법은 대단히 간단하며 단순하다. 우선, '''무령왕 원년이 501년'''이며 '''백가의 토벌이 무령왕 2년'''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제 무령왕 원년 11월로 기록된 수곡성 침공을 '''무령왕 3년 11월'''로 수정해 보자. 놀랍게도 어떠한 모순도 발생하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기사들이 기록된 순서를 기준으로 서술하면, '''수곡성 침공 기사의 순서 변경'''하면 6개 기사들의 순서를 올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원본의 "무령왕이 즉위했다. 정월에 (···). 11월에 (···). 2년 봄에 (···). 11월에 (···). 3년 9월에 (···). 겨울에 (···)."라는 순서가, "무령왕이 즉위했다. '''2년''' 정월에 (···). ( ) 봄에 (···). 11월에 (···). 3년 9월에 (···). '''11월에 (···).''' 겨울에 (···)."로 정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논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괄호 안의 숫자는 사건이 발생한 달에 해당한다.
'''서기'''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본)'''
'''삼국사기 백제본기
(수정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501'''
동성왕 시해(12)
무령왕 즉위 원년
백가 토벌(1)
수곡성 침공(11)
동성왕 시해(12)
무령왕 즉위 원년

'''502'''
기근(봄)
고구려 변경 침공(11)
'''백가 토벌(1)'''
기근(봄)
고구려 변경 침공(11)
백제 변경 내침(11)
'''503'''
말갈 마수책 침공(9)
물이 얼지 않음(겨울)
말갈 마수책 침공(9)
'''수곡성 침공(11)'''
물이 얼지 않음(겨울)
수곡성 내침(11)
한편 《일본서기》에는 부레츠 덴노 4년(502)에 말다왕(동성왕)이 시해되고 무령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23] 501년 12월에 일어난 일을 전해 듣는 과정에서 착오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확실하지는 않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무령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무령왕이 즉위하다
一年[24]春一月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一年[25]冬十一月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하다
二年 백성들이 굶주리고 전염병이 일어나다
二年冬十一月 고구려의 변경을 공격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이 침입하여 마수책을 소각하다
三年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六年 봄에 전염병이 유행하다
六年三月 봄에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이 굶주려 구제에 나서다
六年秋七月 말갈이 침입하여 고목성 함락하다
七年夏五月 장령성을 축조하여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다
七年冬十月 고구려와 말갈이 연대하여 침입하다
十年春一月 제방을 튼튼히 하고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다
十二年夏四月 양나라에 조공하다
十二年秋九月 고구려가 가불성을 습격하여 함락시키다
十六年春三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홍수가 일어나다
二十一年秋八月 누리 떼가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리다
二十一年冬十一月 양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하다
二十一年冬十二月 양 고조가 조서를 보내 책명하다
二十二年秋九月 호산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三年春二月 한수 이북의 백성을 징발하여 쌍현성을 쌓다
二十三年春三月 한성에서 돌아오다
二十三年夏五月 무령왕이 죽다
'''백제 후기의 왕답게 초기 왕들에 비하면 기록이 많은 편이다.'''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5.1. 드라마


백제 사극이라고 해봤자 황산벌, 서동요, 근초고왕, 계백이 전부인데 뭐 등장할 건덕지도 많이 없었다가 MBC의 전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수백향의 아버지로 등장했다. 일본 황녀를 무령왕의 딸이라고 어림짐작한 역사 왜곡도 문제가 있었고 배우이재룡이 단신인 데다 문관 이미지라 우려가 됐지만, 드라마 자체는 재미가 있고 배우가 예상 외로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잘 해내서 호평을 받았다.

[1] 무령왕릉 지석(誌石). 이름을 그대로 사용.[2] 무령왕릉 지석.[3]양서》.[4]일본서기》.[5] 《일본서기》. 아버지인 무령왕보다 먼저 죽어 즉위하지 못했다.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것 때문에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덴노의 어머니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 新笠)의 조상인 순타태자와 동일인물로 추정된다. 순타태자도 무령왕의 아들이기 때문.[6] 삼국사기엔 태자가 됐다는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기록.[7] 무령왕릉 발굴 결과 무령왕이 동성왕과 삼근왕보다 나이가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8]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부여곤지의 손자에 해당하나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개로왕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사촌이거나 부여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이복형에 해당한다.[9] 무령왕릉 지석에 보이며, 일본서기와도 교차 검증이 된다.[10] 무령왕의 선왕인 동성왕이 폭군 짓을 벌이다 피살되어 무령왕이 옹립된 것을 감안하면 동성왕이 가진 악역 이미지와 대조되어 보이게 하기 위해 집어넣은 띄워주기식 수사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11] 여기서 부인(夫人)은 삼국시대 당시 왕비를 일컫는 호칭.[12] 현 카카라시마(加唐島).[13] 중세 한국어 천자문에서 왕을 가리키는 훈으로 긔지라는 말이 있는 걸로 볼 때 현대어로 역하면 '섬기지' 정도가 될 듯 하다.[14] 부여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복형이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의 기록이며 개로왕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사촌이라는 전승은 일본서기의 다른 권에 실려 있다.[15] 원문은 '백제가 일본한테 임나국의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多唎)·사타(娑陀)·모루(牟婁)의 4현을 달라고 청했다'는 것인데 이는 백제가 대가야 영토인 4곳을 빼앗았다고 해석된다. 고고학적으로도 5세기 호남 동부는 고령 대가야계 토기가 출토되고 있어 한동안 가야 세력권이었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16] 이 때 나제동맹 동맹국인 신라 사신을 양나라에 같이 데려갔는데, 신라는 진흥왕 이전까지는 서해안에 항구가 없었으므로 중국과 직접 교류가 거의 없었고 사신단에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제 사신은 신라가 백제의 속국 중 하나라고 양나라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 이용해 먹은 것. 그리고 호남 동부 주도권을 두고 백제와 다투던 대가야 반파국까지 백제의 부용국이라고 양나라에 언플을 하기도 했다.[17] 만약 김운회 식으로 일본 열도의 정권이 백제의 분가였느니 하는 식으로 해석하려면, 당연히 '대왕'이 무령왕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등장한 '대왕'을 존칭 없이 이름으로 재차 적었다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아예 처음부터 '사마대왕(斯麻大王)'이라고 썼다면 모를까.[18] 예를 들어, 악명 높은 진구 황후기에서도 '시마노스쿠네(斯麻宿禰)'가 등장하는데 '스쿠네'는 카바네(姓)이므로 '시마'가 이름이다.[19] 물론 503년설을 취하더라도 사마를 일본의 신료로 보는 덴 모순이 없다.[20] 성왕은 재위 중반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했으며,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21] 사냥터에서 백가가 보낸 자객에게 습격당했던 시기보다 좀 지나서인데 아무래도 중태에 빠졌다가 얼마 뒤 승하한 것으로 보인다.[22] 한 왕이 죽으면 그 다음 달부터 차기 왕의 치세로 세는 방식. 예컨대 선왕이 11월에 죽으면 그해 12월부터 원년이고, 선왕이 12월에 죽으면 이듬해 1월부터 원년이다.[23]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國人)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嶋王)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이라고 한다."[24] 바로 위 문단에 있듯, 실제로는 2년(502)의 일이다.[25] 바로 위 문단에 있듯, 실제로는 3년(503)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