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철수

 


1. 송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韓哲洙
2. 청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韓澈洙


1. 송화군 출신 독립운동가, 韓哲洙


[image]
성명
한철수(韓哲洙)
초명
한경우(韓敬愚)

야당(冶堂)
본관
청주 한씨[1]
생몰
1900년 11월 29일 ~ 1988년 10월 16일
출생지
황해도 송화군 중장양면 연산동[2]
(현 황해남도 삼천군 괴정리)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한철수(韓哲洙)는 1900년 11월 29일 황해도 송화군 중장양면 연산동(현 황해남도 삼천군 괴정리)에서 아버지 한여동(韓璵東)과 어머니 진주 류씨 류군심(柳君心)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고향 송화군에서 3.1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남만주 대한독립단에서 특별 파견된 강옥진(姜玉珍)과 함께 송화군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서 파견된 유건혁(柳健赫)과 함께 대한청년단연합회의 별동대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사령부에서 제2영 제1대대장 부관 및 대장(隊長)으로 활약하였으며 1921년 2월에는 특파원으로 김창곤(金昌坤)·신계관 등과 같이 국내에 진입하여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고 본부로 귀환하던 중 2월 28일 의주 교외에서 일본군 헌병과 맞닥뜨려 2명을 사살하였다.##2
결국 같은 해 6월 27일 만주에서 중국 관헌에 김창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2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이에 불복, 공소하여 1922년 4월 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형으로 감형된 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5년 출옥 후 오병섭(吳秉燮)과 같이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다 체포되었으며, 그 후 일본 교토로 가서 리츠메이칸대학에 재학하며 신간회 교토지부에 가입하였다. 또 비밀결사 철성단(鐵聲團)을 조직, 활동하다가 1929년 귀국, 1932년에는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기독교 장로로서 일하였다.
1937년 9월 1일에는 동아일보 길림지국장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12월 15일 사직하였다가 같은 날 겸이포지국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에 살다가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수여받았고 1988년 10월 16일 별세하였다.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청양군 출신 독립운동가, 韓澈洙


성명
한철수(韓澈洙)
본관
청주 한씨
생몰
1894년 6월 12일 ~ 1941년 6월 15일
출생지
충청도 청양현
(현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효제리)
추서
대통령표창
한철수(韓澈洙)는 1894년 6월 12일 충청도 청양현(현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효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청양군 운곡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았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1년 6월 15일 별세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 참판공파 30세.[2] 청주 한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