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고구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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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2.1. 농협 측의 농간
2.2.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3. 여담
4. 참고자료


1. 개요


고구마 수매 문제를 놓고 전남 함평군 지역의 농협이 농민들을 속이자 농민들이 이에 보상을 요구하며 투쟁한 사건.

2. 전개



2.1. 농협 측의 농간


“협동으로 생산하여 공동으로 판매하자”, “피땀 흘려 지은 농사 농협 통해 제값 받자” - 1976년 농협 표어

1976년 함평군 농협은 고구마 농사를 짓던 농민들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시중가격보다 높은 가격으로 고구마를 쳐주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농협이 농민들에게 제시한 고구마 수매 가격은 가마니당 1,317원[1] 이었는데, 평소 고구마 가격보다 높은 것이었다. 또 원래 고구마를 수확한 후에는 건조 과정을 거쳐 '빼깽이'로 만들어 팔곤 했는데[2], 그런 수고도 없이 생고구마를 사겠다고 했으니 그 또한 농민들에게는 편했다. 그리하여 농협의 제안을 환영한 7,000여 곳의 농가들은 고구마 농사를 열심히 지었고, 그 해 말 고구마 수확량은 전년 대비 25% 증가를 보였다.[3] 고구마가 수확되었다는 소식에 주변의 상인들이 농민들에게 접근해 고구마를 팔라고 했지만, 농민들은 농협과의 약속을 믿으며 팔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고구마를 농협에 팔려고 하자, 농협은 수확량의 40%만 구매하곤 더 이상 사지 않았다. 농민들이 농협에서 트럭으로 실어가라고 길가에 수십, 수백 개의 포대를 쌓아놓았으나, 포대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함평의 고구마 농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시장 출하시기도 지난 상태였건만 농협이 전량 구매를 하지 않으니, 모처럼 많이 생산된 고구마를 처리할 방도가 없었다. 결국 포대에 담아 놓은 '''고구마는 추운 날씨에 썩어가기 시작'''했고, 농민들은 뭐라도 건지기 위해 헐값에 포대를 팔아버리기도 했으나 손해를 메우는 데는 턱도 없었다.[4] 당시 시가로 '''농민들의 피해액은 1억 4,000만원''' 정도로 추산되었다.

2.2.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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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의하는 농민들
피해 보상금
농민들은 참으로 억울했지만, 힘이 없었고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 몰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민들이 그저 손해를 안고 갈 것이라고 여겼고, 농협도 그렇게 여겼는지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 일의 부당성을 깨달은 농민들과 농민운동가들은 보상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1월 23일 함평군의 한 식당에서 서경원, 노금노, 임정택, 김한경, 임재상 등 20여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들은 대부분 가톨릭농민회에 소속되어 있던 농민들과 사회운동가들이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피해 조사가 먼저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조사는 곧 농협의 방해에 직면'''했다. 농협이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농민들에게 농협과의 구매 사실에 아무 문제가 없으며 불만도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받고 다녔던 것이다. 농협 직원과 경찰서 형사가 와서 강압적으로 확인서 작성을 요구하는 탓에 많은 농민들이 두려움에 확인서를 써주었다. 그럼에도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일일히 농가들을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조사에 응해 달라고 부탁했다. 1달 동안 힘겹게 조사한 결과, 160여 가구가 조사에 응하여 그들의 피해신고액은 총 309만 원이었다.[5] 이 중 농협이 고시가격대로 수매하지 않아 발생한 손실금이 280만 원, 수매시기가 늦어져 고구마가 썩어 빚어진 손해가 223포대 29만 원이었다.

“그해 11월 말까지 각 마을별로 조사를 완료키로 했는데, 이런 사정 때문에 12월 31일에야 함평군 전체 7,300세대의 고구마 생산 농가 중 9개 마을 160농가만 조사에 응했어요. 그런 '''방해 책동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농가가 피해 조사에 응했을 거예요.''' 활동가들은 수적으로 적고 군 농협 임직원과 경찰, 행정 직원들은 천 명이 넘었으니까. 어쨌든 조사 결과 160농가 손해액이 총 309만원으로 나왔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추정해 보니 전라남북도를 합쳐서 고구마 농가의 손해액이 24억원 정도였어요.” - 농민운동가 노금노의 증언

1977년 1월 9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함평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가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대책위원회가 열렸고, 농협이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와 농협에 보상을 요청했다. 하지만 농협은 보상과 관련한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고[6] 경찰에 의한 방해공작[7]은 계속됐다. 4월 22일에는 활동가들과 농민들이 광주 계림동 천주교회에서 모여 기도회를 개최하고 보상을 위한 투쟁에 나서기로 했으나 경찰들이 들어와 큰 충돌이 벌어졌다. 농민들은 전라남도 농협 건물에 다시 모였으나, 다시 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가톨릭농민회는 타지의 천주교회나 단체들에 연대를 요청하면서 이 일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978년이 되자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가톨릭농민회는 이 '함평 고구마 사건'을 전국대의원대회에 특별의제로 올리면서 전국적인 투쟁을 실시하겠다고 밝혔고, 전국대책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전국대책위원회는 대규모 집회를 계획했다. 그리하여 4월 24일 광주 북동천주교회에 피해농민, 가톨릭농민 회원,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 천주교 신자들을 포함한 700여명의 인원이 모였다. 이들은 농민대회를 개최하고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고 외쳤다. 이들은 또한 거리시위를 하려고 했으나 경찰의 제지로 실패하자 모인 인원 중 73명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경찰은 성당의 문을 폐쇄하고 성당의 미사마저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신부들이 호소문을 발표하고 천주교 광주대교구와 농민회도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와 함께 전국의 민주화운동가와 천주교 인사들이 농성장을 찾아와 농성자들을 격려했다. 농민들이 처음 해 보는 단식에 지쳐 쓰러지자, 함께 단식을 하기도 했다.

* 함평 고구마 피해 농가의 피해액을 즉각 보상하라.

* 함평군 농협 조합장은 고구마사건에 관한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 농협 전남 도지부장은 즉시 농민들 앞에 나와 농민들의 요구에 답변하라.

* 감사원은 함평 농협 감사 결과를 공개하라.

* 조합장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철폐하라.

* 농민회 탄압을 즉각 중단하라.

- 당시 농민들이 발표한 6개의 요구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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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금을 받는 농민들
이렇게 되자, 정부도 더 이상 이 상황을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부는 단식 4일째인 4월 27일 사태해결을 위한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는 가톨릭농민회 회원 서경원, 전남도지사 고건, 중앙정보부 전남국장 김광호, 천주교 광주대교구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가 참석했다. 여기서 서경원은 해산 후 해결과 졸속해결을 지껄이는 김광호와 고건에 맞서 '''올바른 피해보상'''을 촉구했다.

김광호 지국장이 “머리띠나 풀고 얘기합시다”라고 해서 저는 “고구마 문제 해결해주면 머리띠를 풀겠다”고 맞받아쳤습니다. 그때 고건 도지사[8]

가 “309만원 중에서 100만원을 주겠다”고 했고 저는 '''“지금 돼지새끼 놓고 흥정하는 거냐. 이게 흥정의 대상이냐”'''고 따졌습니다. 사태의 본질을 파악한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는 저에게 “이제 내가 알겠다. 열심히 투쟁해라. 도와주겠다”고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 서경원의 증언

단식 5일째인 4월 29일이 되자, 쓰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항복했다. 농협 전남지부에서부터 '''309만원이 농민들에게 전달되었고, 농민들은 1인당 19,3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20개월 간의 투쟁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하지만 단식은 시위 중 연행된 2명의 회원이 석방될 때까지 계속되어, 5월 2일 이들이 석방된 후에야 멈췄다.
한편, 이 사건 이후 감사원은 농협과 주정회사 등에 감사를 실시했는데, 이를 통해 '''농협과 주정회사가 결탁하여 80억 원의 부당이득을 취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고구마를 구매할 때 농민들에게는 헐값으로 샀지만 중간 상인을 통해 비싸게 샀다고 장부를 허위로 조작하여, 그 마진으로 80억이라는 폭리를 취한 것이다. 이 일에만 600여명이 넘는 사람이 연루되어 옷을 벗어야 했다.#

3. 여담


2년이 지난 1978년에는 경상북도에서도 농민에 대한 농협의 기만행위와 당시 공권력의 농민 탄압, 천주교의 연대투쟁 등 유사한 사건이 '''또''' 벌어졌는데 이것이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이다.[9]
당시 사태 무마를 위해 협상에 나섰던 고건 도지사는 서울특별시장을 거쳐 참여정부 하에서 국무총리까지 올랐으며,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국정을 이끌었다.

4. 참고자료


첫 번째 승전고를 울리다 - 함평 고구마 투쟁
가톨릭농민회와 함평 고구마 사건
함평고구마사건 40주년 특별인터뷰 - 서경원 전 의원
고구마 피해를 보상하라

[1] 통계청의 화폐가치계산 시스템을 통해 조회해보면 2018년 현재의 12,000원은 1976년 당시 화폐가치로 1,356원으로 조회가 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통계상의 결과에 불과하고, 당시 한국 사회의 구매력 및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본다면 당시의 1,300원은 현재의 15,000원 내지 17,000원 정도 될 것이다.[2] 고구마를 말려서 빼깽이로 만드는 이유는, 수확한 고구마를 통해 술을 만드는데 이를 위해 보관기간이 길어야 해서였다.[3] 그 해 함평군의 고구마 생산량은 2만 5,000톤으로, 전년에 비하면 5,000톤 더 많은 것이었다.[4] 현재 물가로 14,000원 정도의 1,200원이었던 고구마 포대가격이, 현재의 5천원 수준인 200~300원까지 떨어지기도 했다.[5] 원래 가톨릭농민회가 예상한 피해액은 1억 4,000만원 정도였으나, 농협의 방해로 인해 그보다 훨씬 적게 집계되었다.[6] 농협은 농민들을 회유하는 공작을 실시했는데, 무이자대출을 권유하거나 "100만원을 주겠다"며 졸속타협을 요구하거나 "보상이 곧 될 테니 참아라"며 시간을 끌기도 했다.[7] 보상투쟁에 참여한 서경원의 증언에 의하면, "정보과 형사들이 나를 공산당원 혹은 간첩으로 몰아세웠다"고 한다.[8] 당시 38세로 젊은 도지사였다. 당시의 도지사는 주민이 선출하는 민선이 아닌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이었고, 고건이 박정희 정부가 실시하던 새마을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기 때문에 보은인사로 왔다는 카더라가 있다.[9] 농협에서 싹이 나지 않는 씨감자를 농민들에게 판매하고 이를 심은 농민들이 싹이 나지 않자 보상을 요구했으나 씹은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