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공희
한국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세례명은 빅토리노. 사목 표어는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 2020년 현재 한국 가톨릭 생존 주교 중 최고령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6] 또한 2021년 1월 현재 생존 사제 중 사제 수품일이 제일 빠르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지학순 다니엘 주교, 김재덕 아우구스티노 주교, 두봉 주교,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주교 등과 함께 70~80년대 교계 내외에서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특히 인권 보장과 민주화 운동에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어 유명하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7] 에 입학해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북한 정권의 가톨릭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친구 지학순 다니엘과 월남해 학업을 계속하며 1950년 3월에 서울의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동시에 사제품을 받았다.
4월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해 사제 생활을 시작했지만, 2달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난해야 했다. 전쟁 중에는 부산의 UN 포로수용소에서 군종 신부로 사목 활동을 했다. 전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1954년에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와 성신중고등학교[8] 라틴어 교사로 잠시 재직하다가 교황청으로 유학해 1957년에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60년에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친 윤공희 신부는 귀국하여 1960년 5월부터 다시 중앙협의회 총무로 복직했다. 그러던 중 1963년 10월 7일 주한 교황 대사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수원교구를 신설하며 그 교구장으로 윤공희 신부를 임명한다는 소식을 윤공희 신부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라, 불과 13일 후인 1963년 10월 20일 로마에서 윤공희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주례한 주교 서품식을 통해 주교로 수품되고 수원교구장 주교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7년 3월 23일에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은퇴하며 서울대교구장이 공석이 되자 이날부터 1968년 4월 9일까지 1년 넘는 기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노기남 대주교가 은퇴할 당시 서울대교구의 재정 형편은 매우 나빴는데, 윤공희 주교는 이러한 서울대교구의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후임자인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을 맡을 즈음에는 이러한 재정 문제가 말끔히 사라질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비서 정진석 신부(훗날의 추기경)가 회고한 그때의 상황
1973년 10월에 광주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교구 업무와 동시에 광주가톨릭대학교 이사장과 주교회의 의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임기 중 정부에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을 빌미삼아 천주교 안동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두봉 주교를 파면토록 교황청에 청원하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의논한 끝에 파면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겪었는데, 처음에는 가톨릭센터 바로 앞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당하던 시민들을 보고 아무 것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구 사제들의 호소에 힘입어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시민수습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던 당시 남동성당 주임 김성룡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몰래 광주를 빠져나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1981년부터 매년 5월마다 광주광역시 남동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폭도로 몰린 부상자와 구속수감자들의 명예 회복을 정부에 탄원했다.
2000년 11월에 정년이 되자 교황청에 사임 청원을 했고, 청원이 수리되면서 교구장 직책을 후임자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며, 총 37년간의 교구장 생활을 마감하였다. 은퇴 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 거주하며 원로사목자로 활동하고 있고, 광주대교구의 주요 행사나 광주가톨릭대학교의 특별 강의에 가끔 참석하고 있다.
2013년에는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이해 임동성당에서 감사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가톨릭센터 건물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개축되면서 당시 윤 대주교가 사용했던 집무실이 관내에 복원되었다.
2020년 3월 20일에는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하였다. 2001년에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한 서울대교구 임충신 마티아 신부(1931.5.30 수품, 1907-2001.9.18)에 이어 한국 천주교 역사상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한 지낸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가 된 것이다.[9]
이 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기에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의 5.18 40주년 특집대담 '윤공희 대주교를 만나다'에 직접 출연하였다.
또, 5월 17일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미사에도 참여하였다. 이렇듯 1924년 11월 8일생인 윤공희 대주교는 2020년 5월 기준으로 만 96세이지만, 고령이라는 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9:53초에 최창무 대주교 바로 옆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이 윤공희 대주교이다.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함경남도 덕원신학교[7] 에 입학해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북한 정권의 가톨릭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자 친구 지학순 다니엘과 월남해 학업을 계속하며 1950년 3월에 서울의 성신대학을 졸업하고 동시에 사제품을 받았다.
4월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부임해 사제 생활을 시작했지만, 2달 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난해야 했다. 전쟁 중에는 부산의 UN 포로수용소에서 군종 신부로 사목 활동을 했다. 전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1954년에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총무와 성신중고등학교[8] 라틴어 교사로 잠시 재직하다가 교황청으로 유학해 1957년에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1960년에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을 마친 윤공희 신부는 귀국하여 1960년 5월부터 다시 중앙협의회 총무로 복직했다. 그러던 중 1963년 10월 7일 주한 교황 대사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수원교구를 신설하며 그 교구장으로 윤공희 신부를 임명한다는 소식을 윤공희 신부에게 전하였다. 그에 따라, 불과 13일 후인 1963년 10월 20일 로마에서 윤공희 신부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주례한 주교 서품식을 통해 주교로 수품되고 수원교구장 주교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7년 3월 23일에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은퇴하며 서울대교구장이 공석이 되자 이날부터 1968년 4월 9일까지 1년 넘는 기간 동안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노기남 대주교가 은퇴할 당시 서울대교구의 재정 형편은 매우 나빴는데, 윤공희 주교는 이러한 서울대교구의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후임자인 김수환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을 맡을 즈음에는 이러한 재정 문제가 말끔히 사라질 수 있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 비서 정진석 신부(훗날의 추기경)가 회고한 그때의 상황
1973년 10월에 광주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교구 업무와 동시에 광주가톨릭대학교 이사장과 주교회의 의장 겸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임기 중 정부에서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을 빌미삼아 천주교 안동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두봉 주교를 파면토록 교황청에 청원하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교황청을 방문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의논한 끝에 파면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198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겪었는데, 처음에는 가톨릭센터 바로 앞에서 계엄군에게 무차별 구타당하던 시민들을 보고 아무 것도 못할 정도로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구 사제들의 호소에 힘입어 진실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시민수습위원회에 참가하기도 했던 당시 남동성당 주임 김성룡 프란치스코 신부에게 몰래 광주를 빠져나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게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1981년부터 매년 5월마다 광주광역시 남동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집전하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폭도로 몰린 부상자와 구속수감자들의 명예 회복을 정부에 탄원했다.
2000년 11월에 정년이 되자 교황청에 사임 청원을 했고, 청원이 수리되면서 교구장 직책을 후임자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에게 물려주고 은퇴하며, 총 37년간의 교구장 생활을 마감하였다. 은퇴 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주교관에 거주하며 원로사목자로 활동하고 있고, 광주대교구의 주요 행사나 광주가톨릭대학교의 특별 강의에 가끔 참석하고 있다.
2013년에는 주교 수품 50주년을 맞이해 임동성당에서 감사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가톨릭센터 건물이 5.18 광주민주화운동기록관으로 개축되면서 당시 윤 대주교가 사용했던 집무실이 관내에 복원되었다.
2020년 3월 20일에는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하였다. 2001년에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한 서울대교구 임충신 마티아 신부(1931.5.30 수품, 1907-2001.9.18)에 이어 한국 천주교 역사상 사제 수품 70주년을 맞이한 지낸 두 번째 한국인 성직자가 된 것이다.[9]
이 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이기에 광주가톨릭평화방송의 5.18 40주년 특집대담 '윤공희 대주교를 만나다'에 직접 출연하였다.
또, 5월 17일에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미사에도 참여하였다. 이렇듯 1924년 11월 8일생인 윤공희 대주교는 2020년 5월 기준으로 만 96세이지만, 고령이라는 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정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29:53초에 최창무 대주교 바로 옆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이 윤공희 대주교이다.
[1] 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남포특별시.[2] 주교 수품은 동년 10월 20일에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3] 수원교구장과 겸직.[4] 당일 김수환 당시 마산교구장이 서울대교구장 임명.[5] 광주대교구장 전보일.[6] 2번째 최고령 주교는 1926년생인 박정일 미카엘 주교이다.[7]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던 곳. 베네딕토회는 1909년 한국에 진출하여 서울 백동(現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 정착했다가, 함경남도로 갔다. 그러나 남북이 분단되고 북한 공산당 정권이 종교들을 탄압하자 월남, 현재는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 수도원이 있다.[8] 소신학교로, 지금은 폐교되었다. 성신중고등학교의 시설은 동성중학교와 동성고등학교에 흡수되었다. 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 중에서 중고등학교 과정을 소신학교, 학부와 대학원 과정을 대신학교라고 한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을 보면, 중고등학교까지도 소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다. 1982년 성신고가 폐교된 후로는 각 교구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만들어, 사제를 지망하는 남학생들 및 남자 청년들을 관리해 오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동성고에서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9] 대구대교구의 이기수 야고보 몬시뇰(1926.5.29 수품, 1898.12.21-1996.3.12)과 부산교구의 최재선 요한 주교는 70주년 기념일을 불과 몇 달 혹은 며칠 앞두고 선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