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1. 개요
유신 정권의 통치 기간에 벌어진 사건으로, 일명 오원춘 사건이라고 하며 박종상 가브리엘 신부 구타 유기사건과 함께 1970년대에 벌어진 대표적인 한국 가톨릭과 정부 사이의 충돌 사건이다.
참고로 똑같이 오원춘 사건이라 지칭되는 수원 토막살인 사건과는 '''다른 사건'''이며 본 사건의 오원춘은 한국인으로 70년대 유신 정권의 피해자이며, 살인마 오원춘(중국명 우위엔춘)은 중국인(조선족)으로 2012년에 발생한 살인 사건의 가해자로 둘은 동명이인이다.
2. 사건의 발단
1978년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농민들은 군청과 농협에서 알선한 씨감자를 심었으나, 싹이 나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었다. 이때 가톨릭농민회 임원이었던 오원춘(1950년생)이 당국을 상대로 피해 보상을 받았고, 이 사실을 토대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피해 농민들에게 어떻게 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알릴 목적으로 강연을 했다. 덕분에 농민들의 보상 신청이 확산될 것 같게 되자,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해진 당국은 오원춘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다. 그러다가 한창 바쁜 농사철에 오원춘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다.
3. 공방 및 과정
보름 만에 나타난 오원춘은 영양 본당 신부를 찾아가, 자기가 기관원들에게 납치되어 포항시와 울릉군 지역으로 끌려 다니면서 모진 폭행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이에 분개한 천주교 안동교구 신부들이 주축이 되어 '짓밟히는 농민운동'이라는 문건을 제작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조직을 통해 7월 17일 전국에 이 사건을 폭로했다.
그러자 경상북도청의 경찰국은[1] 안동교구가 농민운동을 탄압했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정호경 루도비코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들과 가톨릭농민회 간부를 구속했으며 이때 주교관에 들이닥쳐서 사람들을 끌고 가기까지 했다. 심지어 오원춘은 자신과 안면이 있었던 다방 아가씨와 여행 갔던 일을 납치라고 왜곡, 조작했다는 증언까지 했다. 가톨릭은 빨갱이라는 말도 이 때 나왔다고.
이어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조사령이 발포되었고, 가톨릭농민회와 교회에 대한 비방과 음해가 거세지면서 이 사건은 전국적 정치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8월 6일 안동교구 주교좌 목성동 성당에서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안동교구장인 프랑스인 두봉(본명 르네 뒤퐁) 주교를 비롯한 120여 명의 사제, 600여 명의 가톨릭농민회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를 열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순교자 찬가」[2] 를 부르며 성당에서 나와 안동시청 분수대까지 구속자 석방과 농민운동 탄압 중지, 긴급조치ㆍ유신헌법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안동 최초로 가두 촛불시위를 벌였다.
시위 후 사제단과 가톨릭농민회원 80여 명은 목성동 성당으로 돌아와 무기한 항의 농성에 들어갔다. 당시 언론 매체들은 이들을 죽창으로 무장한 폭도들이라고 보도했지만 안동 시민들은 저녁이면 거리에 나와 농성장에서 나오는 옥외 방송을 들으며 더위를 식혔고,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격려 방문을 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움직임은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8월 9일 강원도 원주시와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8월 20일에는 서울특별시 명동성당에서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가 주최한 전국 최대의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는 인천시를 비롯해 수원시, 광주시, 전주시, 마산시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적인 교계와 농민운동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태는 불리하게 전개되었는데, 당사자 오원춘은 변호인들에게는 자신이 납치되었다고 말하다가 법정 심문에서는 눈치를 보면서 딴소리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동의 원인은 이후 수사관들의 강압적인 심문과 고문에 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4. 결과
오원춘은 재판에서 긴급조치 위반죄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았고, 1979년 12월 8일에 긴급조치가 해제된 뒤 석방되었다.
이때다 싶었던 제4공화국은 두봉 주교를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하고, 프랑스 출신이라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기에 대신 바티칸에 외무부 장관을 보내 외국인이 국내 정치에 간섭한다고 항의 하였다. 마침 두봉 주교도 취임시(1969년)에 '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10년 동안 교구 기반만 닦고 퇴임하겠다.'고 말한 상태라서 이미 사임서를 내놓고 재가를 기다리던 상태였다.
교황청이 쉽게 결정을 못 내리자, 당시 교황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과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이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를 소환해 이 문제를 논의했다. 이때 나온 말이 "지금 두봉 주교님을 사임시키면 결과적으로 한국 정부의 주교 추방에 협력하는 셈이 됩니다. 사임을 반려해 주십시오."였다. 결국 두봉 주교는 10년 정도 더 교구장직을 수행하다가 1990년에 은퇴했다.
5. 그 외
이 사건의 중심 인물이었던 오원춘 씨는 아직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으며 고막이 파열되어 귀가 안 들리는 등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이 크다고 한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가톨릭농민회(약칭 가농)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농민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향후 2004년 실화극장 죄와벌에서도 74회의 에피소드로 방송되었다. 다만 이 사건의 중심 인물인 오원춘은 재연 배우가 연기했다.
[1]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은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한민국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2] <가톨릭성가> 283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