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가수)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행복을 주는 사람 가사 中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사랑으로 가사 中
1. 소개
대한민국의 포크 듀오.
1977년에 이정선, 이주호, 한영애, 김영미의 4인조로 결성되었으나 1979년 2집에는 이주호가 탈퇴하고 이광조가 합류했다. 이후 1982년 이주호는 유익종과 함께 2인조 체제의 해바라기를 새롭게 결성했고, 1983년 정규 1집을 냈다. 이주호가 이끄는 듀오 '해바라기'와 이정선, 한영애가 주축이 된 4인조 '해바라기'는 별개의 존재.[1]
이주호, 유익종 2인의 원년 듀오 멤버가 1980년대 중반을 산 사람들에게는 가장 잘 알려져 있을 텐데, 해바라기의 대표곡인 '''행복을 주는 사람''', '''모두가 사랑이에요''', '''어서 말을 해''', '''내 마음의 보석상자''', '''너''' 등이 전부 이 두 명이 활동할 때 처음 발매된 노래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대표곡인 '''사랑으로'''는 유익종이 팀을 나와 솔로로 전향한 뒤 이주호와 이광준이 함께 활동할 때인 1989년 발매된 것이다.
상기했듯 유익종이 탈퇴한 이후로는 이주호가 팀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한 명의 멤버만 몇 번씩 바뀌었다. 이광준, 심명기, 그리고 자전거 탄 풍경의 송봉주가 팀을 거쳐갔으며, 1999년부터 지금까지 강성운이 이주호[2] 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지금이야 콘서트 7080의 단골 가수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통기타를 배우는 것이 하나의 통과의례였던 1980년대의 청춘들에겐 해바라기의 음악은 거의 바이블 수준이다. 서정적인 기타 음률에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약간 꿈을 바라는 듯한 노래는 그 당시 청춘들 뿐만 아니라 전 연령에 걸쳐 사랑받았고 그만큼 명곡들이 많다.
'행복을 주는 사람'은 경연 프로그램이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며 젊은 층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사랑으로'는 함께 살아가는 이상을 바라는 노래로 발매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적신 곡이며(풍자적인 억지 감동의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에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김범수의 진지한 리메이크도 이루어진 적이 있고 '어서 말을 해' 같은 경우에는 2012년 국카스텐이 잔잔한 마이너 포크 발라드를 사이키델릭 하드 락으로 편곡해 불러서 화제가 된 바 있다.
2. 대표곡 〈사랑으로〉에 대하여
해바라기의 대표곡 〈사랑으로〉의 가사에 관한 일화가 있다.
이주호가 작곡을 하고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때 발표하려 했으나 가사를 완성하지 못했고,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1989년 2월 27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에서 부모가 집에 없는 사이에 4자매가 생활고 등을 이유로 음독 자살을 시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어머니의 발견으로 병원으로 옮겨져 막내딸은 사망,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중태에 빠졌다가 나중에 회복해서 퇴원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을 신문에서 보고 채 2분도 걸리지 않아 가사를 완성했다고 한다.
이런 사연이 있어서인지, 나는 가수다에서 김범수가 리메이크를 할 때 리메이크는 허용했으나, 음원 발매는 허용하지 않았는데, 방송에서 김범수의 무대를 보고 음원 발매를 허용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연쇄진학 부모님부담" 어린 4자매 자살 기도'''
27일 하오(오후) 2시 30분쯤 서울 강서구 공항동4의43, 김원묵 씨(52) 집 지하셋 방에서 양태범 씨(44)의 큰딸 순미 양(14) 둘쨰딸 정미 양(10) 세째딸 은미 양(8) 막내딸 세원 양(6) 등 4자매가 생활고를 비관한 끝에 극약을 마시고 신음중인것을 어머니 김옥순 씨(36)가 발견, 병원으로 옮겼으나 막내딸은 숨지고 나머지 3명은 중태다.
어머니 김 씨에 따르면 하오 2시쯤 집근처 가게에서 쌀을 사갖고 돌아와보니 네 딸이 방안과 지하실입구 등에 쓰러져 신음중이고 막내아들(2)은 방안에서 울고 있었다는 것.
큰딸은 안방책상위에 묵은달력을 뜯어 「엄마, 아빠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걱정마세요. 나쁜딸 올림. 부모님께」라는 내용의 유서를 검은색 사인펜으로 써놓았다.
큰딸 순미 양은 병원에서 "집안 살림이 어려운데다 나는 중학교에 새로 입학하게 되고 네째도 올해 국민학교에 진학하게 돼 집안부담이 너무 커질 것 같아 동생들과 함께 극약을 마셨다"고 말했다.
아버지 양 씨는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비산업주식회사에서 공원으로 일하면서 월25만원 정도의 수입으로[3]
6명의 식구를 부양해 왔으며, 지난 87년 4월부터 이집 지하실방 2칸을 8백만원에 전세내 살아왔다.부모들은 경찰에서 "큰딸과 둘째딸은 어려움 속에서도 지난해 우등상을 탈 정도로 학교 성적이 우수했으며 평소 명량한 성격으로 이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진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