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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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가수.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린 상징적인 인물이자[9] , 동시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대한민국 가요역사에 손에 꼽는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2. 어린 시절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배경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당시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고 할아버지 역시 충남 홍성에서는 알아주는 유지였다. 또 외할아버지 역시 만석꾼의 아들로 와세다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다. 위로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누나가 있고, 여섯 살 밑으로 역시 지금 뮤직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고 있는 동생이 있다. 1964년에 서울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학년 때 외가인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죽향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죽향초 동창의 말에 의하면 이 때부터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5학년때[10] 서울에 있는 삼청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당시 전인권이 삼청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나 당연한 소리지만 서로 누군지 모른 채 지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학군제의 시행으로 5학년 때 수유초등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굉장히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1970년에는 서울보성중학교에 전교 4등의 성적으로 입학했다.
그는 보성중학교를 다닐 때 처음으로 기타를 접한다. 사촌형인 양국정이 기타를 가르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지만 음악을 알아가면서부터 중학교에서 최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은 조금씩 하락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자 한동안 방황을 한다.[11] 중학교 3학년 때는 열심히 공부하여 당시 명문 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한다. 결국 1973년에 명지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명지고등학교에서도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였는데 선배의 악기에 손을 댔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하자 이에 대들어 뒤엉켜 싸운 사건으로(...) 밴드부에서 탈퇴를 당하게 된다. ( 김현식은 싸움을 아주 잘했다고 한다. 몸 체질 자체가 통뼈이고 두꺼워서 불주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 이로 인해 그는 고등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게 되었고 결국 1학년을 마치기 전이었던 1974년에 가족들 몰래 자퇴서를 냈다.
여담인데 1972년(당시 중3, 14세) 기타만 들고 인천 작약도로 친구인 김동환과 같이 음악 여행을 떠났고 3년 뒤에 둘이 다시 음악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자퇴 후에는 검정고시 학원을 다녔으며 1975년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더이상 공부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계속 방황하다가 기타를 메고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명동의 큰 무대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 ( 상당히 방황을 하던 시기였다고 한다. 동네 " 건달 " 김현식이라고 불렸다 한다. 이 시기에 기타에 흥미를 가지게 되고 인생의 전환점이라 볼수 있는 시기이다. ) 바로 이 당시에 사촌형 양국정의 소개로 종로에서 당시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에서 일하던 한 DJ를 찾아가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DJ는 바로 당시 20대 중반이던 개그맨 전유성이었다. 전유성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면서 어린 김현식이 부른 노래에 감탄하며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 거다!"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유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떠돌며 통기타를 연주하며 가수로서 길을 내딛고자 노력했다. 이때 나이를 5~6살은 올려 소개했다고[12] . 이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는 주목받는 신인으로 전인권, 한영애 등 선배 보컬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검은 나비, 동방의 빛, 신촌블루스 등의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했다. 이때 이장희의 남동생 이승희[13] 를 만나게 된다.
3. 가수 활동
1981년 KBS 가요대상(1981년 12월 30일 방송)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부르고 있는 모습, 말년에 보기 힘든 가성 영역을 들을 수 있다.
1978년 대마초 흡연 혐의[14] 로 몇달 간의 옥살이를 마친 후(대략 6~ 8개월 가량 옥살이.), 똑같이 대마초 경력때문에 가수 활동이 막혀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던 이장희의 주선으로 1집 앨범 녹음을 완료했으나 대마초 사건 직후의 상황임을 우려한 레코드사의 판단으로 앨범 발매가 계속 미뤄지다가 1980년[15] 자신의 이름을 내건 데뷔 앨범 봄여름가을겨울/당신의 모습을 내지만 처절하게 실패하고[16] , 이를 비관한 김현식은 또 다시 방황하지만 우연히 들른 신촌 옷가게의 여인에게 반해 1982년 결혼, 자신의 분신이라 부르며 사랑하던 아들 완제를 얻으며 구원을 받는 듯했다. 처자식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고모가 준 돈으로 피자가게를 열었는데[17] 잘 되는가 싶더니 프랜차이즈의 공습에 밀려 1년 만에 문을 닫고 투자금도 날린 후 다시 밤무대 활동에 전념한다.[18] TV에 출연한 김현식을 눈여겨 봤던 김영 사장에 의해 동아기획에 스카우트되어 1984년 심혈을 기울여 2집 <사랑했어요>를 발매, 좋은 반응을 얻으며 가수로 자리잡는데 성공한다. 이때는 '김현식과 돌개바람'이라는 6인조 밴드 체제로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였는데[19] . '돌개바람'에는 김현식 외에도 남녀 싱어가 한 명씩 더 있었다.[20]
그 후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21] 과 함께 제작한 3집은 수록곡 <비처럼 음악처럼>이 히트하며 3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리며 음악적으로도 호평을 받는다.[22] 그러나 방송 출연만은 녹록지 않아서 촬영 도중 PD와의 의견 충돌로[23] 촬영장을 박차고 나오는 등[24] 그의 비타협적인 태도[25] 는 전국적 인지도 형성에 걸림돌이 되었고, 흥행한 2집과 3집 관련 TV 출연 영상이 적은 이유가 되었다[26] . 이 무렵 이혼(or 별거)을 하며 아들과도 떨어져 지내게 된다[27] . 신촌블루스의 멤버로서 1집 앨범 준비 중이던 1987년 10월 전인권, 허성욱[28] 등과 함께 다시 대마초 흡연 및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되었다.[29]
1988년 2월에 김현식은 63빌딩에서 재기 콘서트를 열고 팬들을 실망시킨 데 대한 사죄의 뜻으로 삭발을 하고 무대에 올랐다. 이때 김현식은 관중석을 꽉 채운 6,000여명의 팬들을 보니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며, 그때의 콘서트는 잊혀지질 않는다고 회고했다. 음악활동에 대한 열의를 다시 불태우며 밤샘 녹음 끝에 그 해 9월 4집 앨범을 발표한다.
1989년에 첫 베스트 앨범을 발표한다(1991년 1월 20일에 골목길을 추가해서 다시 한 번 발매). 사랑했어요[30] 와 봄여름가을겨울[31] 을 재녹음했다.
1989년 3월 1일 발매된 신촌블루스 2집에서 바람인가/빗속에서, 골목길, 환상을 부른다.[32]
1989년 9월 28일 발매된 영화 '비오는 날 수채화' ost에 참여해 동명의 곡을 권인하, 강인원(작곡자 겸 프로듀서)과 같이 부른다. 길을 가다 우연히 마주친 강인원이 공동작업을 제안하자 재미있겠다며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원래는 권인하와의 듀엣곡으로 예정되었으나 김현식의 저음 부분이 곡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원작자인 강인원이 다시 녹음해 트리오곡이 됐다고 한다. 이때문에 당시 지명도와는 달리 김현식의 솔로 가창 분량이 권인하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고 김현식은 예상 외의 인기몰이를 하던 곡 홍보를 위해 사망 몇 달 전까지도 전국을 누비며 여러 차례 방송에 출연해 라이브 공연을 펼친다. 나빠지는 몸상태 때문에 적은 솔로 분량마저 강인원과 같이 불러야 했지만[33] 곳곳에서 터지는 김현식만의 애드립은 라이브 영상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이 곡의 묘미다. 강인원에 따르면 아픈 김현식을 부려먹는 것 같아 홍보를 조기에 마쳤다고 한다. 그 거리 그 벤취라는 솔로곡도 불렀다.[34]
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정이 많고[35] , 말은 거칠어도 꽤나 섬세했었다고 한다. 다만 가수 활동 중 폭력을 휘두른 일이 많았다던지, 위에서도 보이듯 자주 일탈했다던지 하는 일화를 보면 괴팍할 때는 상당히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과거에는 그런 연예인의 사생활이 잘 드러나지 않기에 엄청난 인기에 누가 되지 않은 것일 뿐이다. 대마초 역시 가수를 넘어 많은 연예인들이 손에 접할만큼 허들이 현재와는 많이 낮으며 동시에 대중들 역시 크게 신경쓰지 않던 분위기였고. 여하튼 혹자는 폭력을 일삼는 알코올 중독자라 얘기하기도 하지만, 요절 보정을 감안해도 그를 따르는 음악인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사람 자체는 매력적이었던 모양.
친한 후배인 유재하가 1987년 11월 1일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대성통곡하면서 한동안 술에 매달리며 슬퍼했던 걸 보면[36] 정이 있는 사람이긴 하다. 문제는 슬픔을 잊는다고 쳐도 술이 너무 과했던 것. 오죽하면 4집을 낼 당시 친구이던 이문세나 함춘호 같은 지인들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냐?"고 걱정했음에도 그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술을 들이켜 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그의 몸은 점차 피폐해져 갔다.
어머니조차도 2010년 사망 20주기 다큐멘터리에 나와 말하던 걸 봐도
1989년 영화앨범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1990년 5집 앨범을 [37]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38][39]"내가 가장 후회되는 게 현식이 그 놈을 밧줄로 묶어다가 알콜중독 치료시설에 보내던가 해서라도 술 못 마시게 해야 했던 거에요...술을 물 대신 마시고 밥 대신 마셔대니 그렇게 빨리도 가지...
하루는 신촌블루스 방송공연을 준비하던 아침, 객원보컬로 활동한 한영애가 김현식에게서 술냄새가 나는걸 알고 "아침부터 술을 마셔?? 방송공연 연습하는데!"라며 다다다 쏘아붙이자 김현식이 한영애를 멀거니 쳐다보다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몸이 떨려서 마이크가 입에 닿질 않아..."라고 했을 정도로 얼굴이 붓고 복수가 가득 찬 아픈 상태에서도 펑퍼짐한 옷으로 복수가 찬 배를 가리고 공연을 이어갔다. 이에 한영애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병원에 입원하기 전 김현식은 자신의 집에서 술과 담배로 오랜시간을 밥도 먹지 않고 지냈다. 마지막 6집 앨범을 낼 때에는 그를 이전부터 아끼던 동아기획의 김영 사장을 만나서 "언젠가 술 먹다가 죽고자 했는데..."라는 식의 말을 할 정도였고 후에는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입원한 동부이촌동 금강병원에서도 자주 탈출을 하여 지방까지도 공연을 다녔고[40] 술을 마시고 앨범 녹음을 했다. 녹음할 때 술을 그만 좀 마시라는 후배에게 술을 안마시면 아파서 소리가 안나와서 마셔야 한다고 얘기했을만큼 고통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생명을 소진하며 노래하였다. 그래도 그에겐 언제나 기타가 들려 있었고 병실에서도 항상 노래소리가 끊임이 없었다고 한다.
김현식의 음악 장르가 다양한데, 그중 <사랑했어요>을 트로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한국적 크로스오버 발라드라고 하는게 오히려 적합하다. 멜로디 라인이나 악기 구성등 전반적 곡의 흐름이 우리가 아는 트로트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4. 사망
결국 1990년 11월 1일[41] 에 자신의 자택 서울시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에서 간경화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나가 임종을 지켰다.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당일 불과 2시간 전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얘기해서 전혀 짐작도 못했다고.
다음 날 그의 누나에게 '갔어요' 한 마디로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이때 김현식은 겨우 32살이라는 젊은 나이였다. 2010년 김현식 20주기 기념 다큐멘터리에 나온 김영 사장이 회상하길, 전화를 받고 믿기지 않아서 "그럴 리가 없어! 겨우 두 시간 전에 현식이가 밝게 전화하면서 내일이라도 녹음 들어간다고 했다고! 그런데? 현식이가 죽었단 말이야?!" 라면서 소리쳤을 정도로 충격받았다고 한다.
사후 그는 벽제 화장터[42] 에서 화장 후 한 줌의 재로 돌아가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분당 메모리얼 파크[43] 에 안장된다. 그의 묘비에는 1집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의 가사와 할머니란 가사가 적혀있다.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를 제외한 실질적 유작인 5집 앨범 '넋두리' 앨범이 바로 이때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 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다. 김영 사장의 포기하자는 말에도 각혈을 하면서까지 엄청난 유작을 남기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5. 후일담
그의 유작이 된 6집 <내 사랑 내 곁에>는 100만장이 넘게 팔리는 대박을 거둬들였으며 가요톱텐 1991년 12월 25일 방송분에서 골든컵을 탄 김정수의 <당신>과 같이 공동 수상을 했다. 다만, 이 노래를 부른 가수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에 수상은 그의 아들 김완제가 대리 수상했다.[44]
1991년 골든디스크 대상을 차지했고 어머니와 아들 완제군이 수상을 했다. 원래 이 때 신인 시절의 김장훈이 무대에 설 예정이었는데, 이에 대해소속사 측에서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난(실제 사촌인 것은 아니다) 김장훈을 내세우면 대박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다는 뒷얘기가 있다. 하지만 김장훈은 그를 팔아먹으며 인기를 노린다는 부분을 영 내키지 않아 했고, 그래서인지 아예 생방송을 펑크내버렸다. 결국 위에 서술된대로 김현식의 아들인 김완제가 대리 수상을 하게 됐고 이 일로 김장훈은 한동안 방송금지를 당했다고. [45]
김장훈이 펑크낸 1991 골든디스크 시상식에서 장필순이 대신 '내사랑 내곁에'를 부르던 장면. [46]
대만에서도 리메이크된 바 있으며 대만에서 리메이크해 부른 가수가 바로 한국인 가수 장호철이다. 그는 개그맨 김한국과 초등학교 시절 친구라서 같이 90년대 중순 국내 방송에 나왔는데, 아버지가 중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어릴 적부터 그에게도 배우게 해서 중국어를 상당히 잘했다고 한다. 그 보기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집에 가서 이 가수가 중국어로 짜장면 달라고 하면 화교인 사장이 반가워하며 한가득 짜장면을 줘서 어린 김한국이나 다른 친구들도 실컷 배부르게 먹었다고 회고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인터넷 찾아보면 담영린(알란 탐)이 광동어로 리메이크한 노래만 나온다.
그밖에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한국계 화교인 강육항(姜育恒)도 리메이크했다.
Mnet 특집방송 '다시 한번'에 故 터틀맨의 뒤를 이어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관련 기사) 방송은 2020년 12월 16일. AI기술로 그의 모습과 목소리를 복원해, 생전에 그가 부를 수 없었던 노래인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를 부르는 모습이 연출되어 팬들의 관심을 모았다. 다만 결과물 면에서는 창법과 음색 면에서 실제 김현식이 불렀을법한 수준과 뚜렷한 거리가 있었고, 워낙 오래전 영상만 남은 상황이라 외모 복원에도 어려움을 겪었음이 역력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의 활동 시기상 AI화에 필요한 형태의 데이터를 확보하기가 어렵기에 어느정도 불가피한 부분이긴 했지만.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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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식 2집 커버. 가수로서 정체성은 블루스, 록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시 록밴드들의 스타일이자 주류였던 백두산, 시나위 등의 가죽바지, 장발 같은 스테레오타입 록커와는 거리가 먼 보이스와 비주얼로 2집 때부터 크게 인기를 얻었다.
- 데뷔할 때만 하더라도 굉장한 미성이었다.[47] 그러나 이후에는 음색을 바꾸려는 본인의 노력과, 평소에 즐겨 하던 술담배의 영향이 겹쳐 굵은 목소리 + 쇳소리가 나는 허스키한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다.
무릎팍 도사 김건모 편에서도 잠시 비교용으로 나온 적이 있는데 1집의 <봄 여름 가을 겨울>과 6집 <내 사랑 내 곁에>의 음색은 서로 다른 사람이라 생각될 정도로 1집에서는 정말 놀라울 정도의 미성이었다. 1집의 타이틀 <봄 여름 가을 겨울>, 2집의 <사랑했어요> 등에서 나타나는 그의 보컬은 특유의 미성과 가성의 능숙한 사용으로 쭉쭉 뻗어올라가는 고음을 보여준다. 2집을 내기 전인 1984년 3월, 7인치 LP판 싱글을 낸 적이 있는데 '사나이 노래' 라는 타이틀을 냈었다. 1집과는 달리 굉장히 굵지만 허스키와는 거리가 먼 창법으로 부른 적이 있었다. 다만 상업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먼 실험성이 돋보였던 앨범인지라 구하기가 매우 어렵고 고가에 거래되는 음반이 되어버렸다.[48][49]
이후 목소리가 상당히 바뀐 3집의 <비처럼 음악처럼>을 들어보면 미성이 상당히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는 다른 거칠거칠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목소리가 바뀐 것은 4집 이후로[50] 특히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의 인식이 거칠고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정됐다고 할 수 있다.[51][52]
- 김현식은 한때 국내 절들의 종소리를 들으러 다녔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소리에 대해 연구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 의외로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싱어송라이터다. 봄여름가을겨울, 사랑했어요, 추억만들기 등의 노래가 직접 작사·작곡한 노래다. 라이브나 녹음에서 노래 하다가 음을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음에 대해 이해가 뛰어나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이 그의 말을 인용한 것처럼 그냥 자기 멋대로 부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 당시 가요계에서 원펀치를 자랑했다고 한다. 멤버였던 장기호[53] 의 경우 뮤직비디오 찍다가 김현식이 너무 오래 찍는다는 이유로 "야! 악기 싸!'라고 하면서 가려고 하자 질책하듯 말리다가 김현식에게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라디오 스타에서 김종진&전태관이 이 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김종진과 전태관. 또한 한때 그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로 절친했던 김장훈[54] 역시 조금이라도 잘못한게 있으면 김현식한테 굉장히 많이 맞았다고 한다. 워낙 명곡들을 남기고 간 가객으로서의 평이 강해서 그렇지 사실 이 부분은 현재에는 꽤나 비판이 나올 수도 있는 부분들이다. 다만 이 당시 80년대는 분위기가 위계질서나 강압적인 면이 좀 강했던 것도 감안은 해야할 것이다. 당사자들도 고인이 떠난지 오랜 시간이 지났고 하니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일테고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당시 봄여름가을겨울 멤버 두 사람은 방송 내내 김현식을 칭송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어찌됐건 당사자인 후배들 입장에선 "존경하는 선배의 괴팍한 일면" 정도로 받아들였단 의미. 또 단순히 폭력으로 갈구기만 한게 아니라 자신이 동생들을 데려다주다가 아예 타고 다니라며 자동차를 주는 등, 놀라운 일화들도 많다. 비오는날의 수채화를 같이 부른 권인하는 김현식을 대인이라고 부르며 그의 베품과 후배들에 대한 사랑을 담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즉 당시는 "선배의 훈계"로 용인되는 한계가 80년대는 지금과 많이 다르단 걸 감안해야한다. 예를 들어 2021년 현재 학교에서 교사가 수업 중 학생의 뺨을 후려치면 사회적 문제가 되겠지만, 2000년대 까지만 해도 그냥 좀 심하게 혼을 낸 것으로 여겨졌다. 폭력을 행사했다지만 당사자들도 모두 그리워하고 그의 인간적인 매력을 강조하는데다 수많은 좋은 일화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전형적인 80년대의 스타일을 담은 가수였다고 볼수있다. 비슷한 시대보정이 필요한 인물로는 프로야구 김응용 감독이 있다.
- 1992년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비처럼 음악처럼이 개봉했지만 흥행이나 평은 그리 안 좋았다. 김형철[55] 이 김현식을 맡았지만 이젠 잊힌 영화가 되어버렸다.
- 1996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머나먼 나라 초반부에서 김현식이 자주 언급되었다. 초반부는 배경이 1990년도였는데, 극중 한수(김민종)가 김현식의 광팬이어서 운하(김희선)를 데리고 김현식 콘서트에 갔고[56] , 또한 한수는 김현식이랑 악수한 손을 영광으로 여겨 붕대를 감고 다녔다. 물론 김현식이 사망한 날 꽐라가 된채 노래방에서 <언제나 그대 내 곁에>만 20번 이상(...) 부르는 것도 모자라, 집에 돌아온후 울면서 깽판을 부리기도 했다. 어차피 드라마 오프닝 자체가 <언제나 그대 내 곁에> 리메이크 버전이고, 훗날 김민종도 따로 리메이크 버전을 불렀다.
- 그의 아들 김완제 씨 역시 아버지가 엄하고 무서우며 고집이 셌다고 한다. 어릴 때를 떠올리는 김완제씨.
- 이승철이 스승으로 모시는 가수라고 한다.[57] 이승철이 이를 언급한 맥락에 따르면 직접 가르침을 사사한 적은 없지만 그의 노래에 큰 감명을 받고 즐겨 듣고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고 여기는 듯 하다.
- 위에도 서술되어있다시피 김장훈과도 인연이 깊은데 김현식의 어머니와 김장훈의 어머니 두 분이 친자매처럼 친했고 이로 인해 김장훈과도 절친했었다. 오죽하면 김장훈은 김현식의 사촌동생으로 소문날 정도였었다.[58][59] 이 덕분에 김장훈은 음악적인 부분에서 김현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2002년 발매된 앨범 The Sickbed Live에 얽힌 사연이 있다. 1990년 여름 간경화가 악화되어 입원한 김현식은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역시 장기 입원 중인 한 여성과 면식이 생겼는데 그녀가 병원에서 생일을 맞게 된 것을 알게 되자 아끼는 기타와 녹음기를 찾은 뒤 다른 환자와 간호사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생애 최후의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21곡을 부르고 이걸 녹음했던 테이프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몇달 뒤 김현식은 사망했고 여성은 무사히 퇴원하였지만 들을 때 마다 계속 가슴아파하다 이민을 가면서 소중히 간직해 온 테이프를 김현식을 무지 좋아하던 후배에게 양도하였다. 10여년 동안 아끼며 듣던 후배는 TV에서 김현식 추모 방송을 보고 이걸 알리기로 결심해 세상에 나왔다. 김현식 어머니도 흔쾌히 동의하여 살려낸 17곡을 앨범으로 낼 수 있게 됐다.
- 2013년 10월 20일, 김현식의 미공개 노래 9곡을 포함한 "김현식, 2013년 10월"이 공개되었다. "그대 빈들에"[60] , "외로운 밤이면" 등의 미공개곡들과 6집 수록곡 중 김현식이 병상에서 재녹음한 11곡이 수록되었다. 죽기 직전 피를 토해내는 듯한 김현식의 노래를 확인할 수 있는 앨범. 음질은 깔끔하진 않지만 그걸 잊을 정도로 김현식의 보컬이 모든 걸 압도해 버린다.
- 1989년에 데뷔한 가수 김상아도 '사랑했어요'라는 노래를 발표해 히트시킨 적이 있다. 물론 서로 관계없는 별개의 곡이며, 김현식의 곡은 1984년에 발표되었고 김상아는 1990년부터 주로 활동했기에 시간차도 크다. 다만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동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혼동하는 사람도 없진 않은 모양. [61]
- 2019년 9월 그의 노래를 뮤지컬 넘버로 편곡하여 <사랑했어요>라는 제목의 뮤지컬로 개봉하였다. 인터파크 공연 정보
- 여기서 죽향초등학교시절 사진을 볼 수 있다. 동창의 말에 따르면 김현식의 집에는 커피와 통기타같은 신식 문물이 가득했다고 한다.
- 래퍼 빌스택스가 정규앨범 'DETOX'의 타이틀곡인 'Lonely Stoner'의 첫 마디를 비처럼 음악처럼의 가사에서 인용하였다.
7. 디스코그래피
정규앨범
- 1집 봄여름가을겨울/당신의 모습(1980.06.01)
- 2집 김현식 2 사랑했어요/어둠 그 별빛(1984.09.20)
- 3집 김현식 III(1986.12.05)
- 4집 김현식 VOL.4 (1988.09.30)
- 5집 김현식 5 KIM HYUN SIK (1990.03.01)
김현식 생전 마지막 앨범.[76]
- 6집 KIM HYUN SIK VOL.6 (1991.01.26)
라이브 앨범
- 김현식 In Live(1991)
신촌블루스와 함께한 계몽문화센터 공연(1990년 5월) 실황 음반. 골목길,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바람인가/빗속에서, 이별의 종착역, 쓸쓸한 오후가 수록되어 있다.
- 7집 Self Portrait (1996.09.02)
- Kim Hyun Sik Live(1997)
1986년 신촌 크리스탈 백화점, 숭의음악당 공연과 1988년 2월 재기콘서트 실황을 팬이 테이프로 몰래 녹음해 간직해 오다 기획사에 전해져 세상 밖으로 나온 음반. 이 테이프가 아니고선 절대 들을 수 없었을 라이브 곡들이 다수 수록돼 있다.
- The sickbed live(2002)
2002년에는 'The sickbed live (병상에서)'라는 음반이 나왔는데 음원싸이트에서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이제는 거의 잊혀진 음반이지만 들어보면 다 쉰 목소리가 깊은 인상을 준다. 유튜브에 전곡이 올라와 있다.
- 김현식 2013년 10월(2013. 10. 21.) [86]
Self Portrait과 같이 통기타 치며 부른 음성에 반주를 입혔다. 타이틀곡은 세상 떠나기 이틀 전에 불렀다는 '그대 빈 들에'.
- 싱글 사나이 노래 (1984.3.15)
사나이 노래 Rock&Blues
사나이 노래 GO GO
사나이 노래 March
그 외에 참여한 음반은 김정호 추모 앨범의 님, 한영애 2집 수록곡 [88] 코러스, 신촌블루스 2집의 골목길, 환상, 바람인가/빗속에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비오는 날의 수채화, 그 거리 그 벤취, 신촌블루스 3집의 이별의 종착역이 있다. 그 외에 다른 가수에게 곡을 준 경우도 있다.[89]
8. 관련 문서
[1] 1957년 음력 12월 30일생이다. 네이버 같은 포털사이트 등에는 호적 상 생일인 1958년 1월 7일생으로 되어 있다. 활동 당시에도 1958년 1월 7일으로 소개됐었다.[2] 현재는 아파트가 허물어지고 래미안 첼리투스가 들어서있다.[3] 과거에는 남서울 공원묘지라 불렸었다.[4] 부친의 출생지. 김현식의 할아버지는 홍성에서 알아주는 유지였다고 한다.[5] 네이버, 구글 등 웹사이트에서 180cm로 기재되어 있는데 영상 자료나 사진을 보면 실제로는 그다지 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키가 작은것이 콤플렉스라 늘 무대에서 제일 앞에 나와있을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다. { 키가 커보이기 위해서 } 추가적으로 김현식 키는 권인하보다 작은 걸로 보인다. ( 대략 1~2cm 가량 ) 참고로 권인하 키는 172~173 정도이다. 봄여름 가을 겨울 중 멤버 하나인 김종진이( 김종진 키 : 175cm ) " 현식이 형이 우리중에 키가 제일 작았거든요. " 라고 라디오 스타에서 밝힌 적이 있다. [6] 여담으로 원래는 마른 몸이었다. 김현식 앨범 라이브 중 하나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보면 알수 있듯이 원래는 마른 체형이였다. 다만 , 잦은 술 담배로 인해 건강이 악화 되면서 체중도 왔다갔다 한걸로 알고 있다. 최고로 올라갔을때는 80kg 초반대까지도 올라간걸로 밝혔다. ( 자서전 중에서 . ) 평소 기본 체중은 50kg 중 후반대였으나 잦은 술담배와 건강 악화로 인해 체중도 달라진듯 싶다. [7] 1982년 12월 3일 생으로, 아빠처럼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로 초창기 김현식과 똑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8] 봄여름가을겨울 뿐만 아니라 김현식의 마약 사건 이후 갈라져 나온 사랑과 평화-빛과 소금과도 관련이 있기는 하다. 빛과 소금과 봄여름가을겨울은 함께 유재하, 김현식, 전태관을 추모하기도 했다.[9] 동아기획에 소속된 뮤지션들과 함께 당대 한국 음악을 크게 발전시켰고 또 흥행했다.[10] 동문의 인터뷰 참고[11] 본래 꿈은 아이스하키 선수였으나 부친의 사업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다고 한다.[12] 당시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면 언더 가수로 받아주지 않았다. 이때부터 어린 나이를 높게 소개 하다 보니 잦은 술 담배를 하여서 건강이 악화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13] 2000년 3월 10일 암 투병 중 사망하였다.[14] 영화 '쎄시봉'에서 70년대 대마초 관련 사회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15] 1981년으로 보기도 한다. 1980년 발매 레코드가 실물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16] 3년을 묵혔으니 트렌드에도 뒤처졌을 것이고, 어하둥둥 내 사랑이라는 곡은 이미 다른 밴드가 불러 빅히트를 친 후였다. 특히 1번 트랙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전형적인 펑크/디스코 트랙인데, 특히나 '해가 바뀌어도~' 부분의 가성 창법은 1978년 어마어마하게 유행하던 비 지스의 배리 깁과 유사한 창법으로 당시 유행의 절정이었지만 디스코 폭파의 밤 뒤인 1981년에는 이미 지나간지 한참 된 창법이었다.[17] 김현식은 이때가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 회고했다.[18] 이 무렵(1983년) '봄여름가을겨울'과 '오늘을 즐겁게'라는 외국곡 (원곡은 Foxy의 Let's Be Bad Tonight)을 그룹싸운드 뿌리와 함께 부르는 젊음의 행진 출연분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19] 낮의 대통령은 조용필이지만 밤의 대통령은 김현식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20] 그 중 남성 싱어는 바로 세월이 가면의 가수 최호섭 이었다.[21] 김종진, 전태관, 장기호, 박성식, 최태완(공연에만 참여)[22] 3번에 걸친 대한민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리스트에서 3번 다 10위권에 들었다.[23] 당시엔 PD가 가수에게 반말하는 게 기본일 정도로 방송국과 가수의 관계는 철저한 갑을관계였다고 한다.[24] 한 번은 김현식 땜빵으로 1집을 갓 발매한 부활이 출연해서 대박이 났다고 한다.[25] 본인은 정의감이 있는 것이라고 표현했다.[26]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으로는 1984년 12월 KBS 가사 대상 시상식 '바람인 줄 알았는데 ', 1985년 청소년록콘서트 '비오는 어느 저녁', 1986년 봄여름가을겨울 결성 후 첫 콘서트 홍보를 위한 연예가중계 영상(변덕쟁이, 눈 내리던 겨울밤 전성기 라이브를 짧게나마 들을 수 있다. ), 1988년 골든디스크 시상식 '비처럼 음악처럼 ' 네 개다.[27] 이혼 사유는 주벽와 지나친 자유분방함이라고. 다만 이혼 후에도 아내와는 친하게 지냈고 죽기 1년 전에는 다시 한 집에 살았다 한다.[28] 들국화의 키보디스트로 1997년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36세로 요절했다.[29] 김현식의 어머니가 아들의 탈선을 막기 위해 신고했다는 설이 있는데 진위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은 김현식의 비극적 운명의 시작이 되었다.[30] 6집 수록곡과 동일[31] 전혀 다른 노래가 되었다. [32] 리더 엄인호는 김현식에게 달라던 곡을 주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한다. 투병의 와중에도 5집과 6집을 준비 중이던 김현식은 극심한 창작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엄인호의 곡이 김현식의 목소리를 입고 그럴싸하게 나오면 엄인호에게도, 팬들에게도 좋은 일이었을 테니.[33] 자신도 권인하처럼 건강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만 목이 아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담담하게 인터뷰하는 영상이 남아 있다.[34] 5집 수록 시엔 재녹음[35] 기획사에서 보수를 받으면 후배들에게 나누어 주느라 반이나 집에 가져갈까 싶을 정도였고, 길가다 추위에 떠는 사람이 있으면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주는 사람이었다. [36] 본인 피셜 유재하와는 좋은 술친구였고 그와 동시기를 살았던 가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현식은 후배들을 구타와 욕설로(...) 군기를 잡으며 끌고 가는 스타일이었는데 유재하는 항상 그 군기에서 열외였다고 한다.[37] 타이틀 곡으로 넋두리가 수록되어있고 김현식이 생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앨범이다.[38] 술을 떠나서도 간이 안 좋은 사람이 88년 2월 재기 콘서트 이후 사망 시점까지 2년 10개월의 기간 동안 유작 앨범 포함 3장의 정규앨범, 2장의 객원보컬 참여 앨범, 1장의 컴필레이션 앨범을 녹음한 건 엄청난 강행군이었다.[39] 허진호 감독의 '행복(2007)'에 간경변에 걸리고서도 술과 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남자(황정민) 이야기가 나온다.[40] 말리는 어머니께 "무대 위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 했다고 한다[41] 공교롭게도 김현식이 그렇게나 아끼던 후배 유재하의 기일이다.[42] 현 명칭 서울시립승화원[43] 당시에는 남서울공원묘지라 불렸다.[44] 참고로, 가요 프로그램에서 또다른 공동 1위 수상은 SBS 가요 20 1995년 8월 20일 방송분에서 R.ef의 고요 속의 외침, 솔리드의 이 밤의 끝을 잡고가 공동 수상을 한 적이 있다.[45] 이에 대해서는 김장훈이 디시인사이드와의 인터뷰에서 해명을 한 적이 있는데, 계속 안 한다고 거부했기 때문에 본인은 엄밀히 말하면 펑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단지 사무실과 방송국이 막다른 곳까지 본인을 몰고갔기 때문에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46] 김장훈도 나중에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른 적이 있기는 하다.[47] 3옥타브 레(D5) 까지의 고음을 깨끗하게 낼 수 있었다.[48] 당시 한 소주 광고로 쓰였던 곡이다.[49] 이 말은 김현식을 좋아하는 팬들 중에서도 정말 깊은 팬심을 가진 분들만이 대체적으로 앨범을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50] 허스키함에 더불어 1984년 발표곡 '사나이 노래' 의 굵은 목소리 위주로 창법을 변경했다. 그러나 4집 시절에도 변덕쟁이 라이브, 우리네 인생 등은 3집 목소리로 부르지만 술과 담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서인지 허스키함이 더욱 가미되어 있다. 특히 느린 템포의 곡에 있어 목소리를 굵게 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51] 단, 내 사랑 내 곁에의 목소리는 김현식의 몸상태도 고려해야 한다. 죽기 직전인 최악의 몸상태로 녹음을 한 노래였기에 고의적으로 허스키한 목소리를 낸 것이 아니다. 녹음된 노래에서도 곡을 다듬었음에도 음이탈이나 심하게 갈라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몇몇 부분은 절규로 느껴질 정도의 부분도 있다.[52] 사실 이런 식으로 살아생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작이 본인 사후 본인의 스테레오타입으로 고정된 케이스는 또 있다.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입었던 노란 트레이닝복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쪽은 이소룡의 말년의 몸상태와는 무관하게 단순히 이소룡이 맡은 배역의 콘셉트였으므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와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힘든 감이 있다.[53] 나는 가수다에서 자문위원단장으로 나온 바로 그 사람이다. 당시에는 베이시스트로 활동했었다.[54] 물론 당연히 둘은 사촌지간은 아니다. 이런 소문이 날 정도로 둘이 그만큼 친했다는 뜻이다.[55] 신촌블루스의 객원 보컬로서 김현식과 한 무대에 자주 올랐으며 뒤에 영화 노랑머리#s-2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2007년 4월 3일 급성 간암으로 사망했다.[56] 김현식이 노래 부르는 장면은 당연히 과거 영상으로 대체했다.[57] 슈퍼스타K4 에피소드 7에서 심사위원 이승철이 직접 언급.[58] 특히 둘의 성이 같았기에 더욱 그런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59] 또한 둘다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했다.[60] 참고로 이 곡은 그가 숨지기 이틀 전에 부른 노래다.[61] 김상아도 전성기때에는 나름대로 인기 가수로 활동했다. '사랑했어요'를 발표한 이듬해 '꼬마청바지'를 크게 히트시켰으며, '엔젤리나', 'Yes or no' 등 중박 히트곡을 꾸준히 발표했고, 연말 가요대상 단골 초대가수였다. 1991년 KBS가요대상을 수상한 현철의 바로 옆에서 먼저 축하포옹을 했던 가수도 그였다.[62] 들고양이들 2집(1979년 12월 발매)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보이나 1집이 1978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김현식이 먼저 부른 것이다.[63] 후에 방미가 다시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64] 사실 이장희가 작사, 작곡 한 것인데 이장희가 대마초 문제로 활동이 금지되어서 가명(정확히는 자신의 아들 이름)을 쓴 것이다.[65] 김현식의 초기 미성을 들을 수 있다.[66] 1집에서는 김현'''수'''라 표기 되었으나 2집에서 정정되었다[67] 손색없는 포크넘버다. 김현식의 넓은 음악 스펙트럼을 엿볼 수 있는 곡.[68] 30년 전으로의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2016년 개봉 영화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 OST에 김윤석, 변요한이 같이 부른 버전이 수록돼 있다. 영화 속 김윤석이 김현식과 닮아 있다.[69] 이 노래는 사랑스러운 본인의 아들인 김완제의 재롱을 보며 단숨에 지은 곡이다.[70] 1집의 곡을 다시 녹음했다.[71] 원래 가수 문관철이 1984년에 먼저 녹음을 하였다. 문관철이 녹음한 곡을 듣고 김현식이 작사 작곡가인 박성식한테 자신이 부르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문관철의 앨범 발매가 미뤄진 사이 김현식이 문관철 보다 2개월 먼저 발표하게 된다. 결국 김현식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된다. 훗날 김현식이 사망한 후 문관철은 “강탈당한 느낌이었다”고 회고했다.[72] 김종진의 첫 자작곡이다.[73] 윤상의 가요계 데뷔곡이기도 하다. 이후 윤상이 직접 부른 커버곡이 발매되기도 했다. 아이유, 김건모(원곡보다 반키 높게 불렀다)도 리메이크했다.[74] 신촌블루스 1집 수록곡을 리메이크했다.[75] 유재하가 사망하자 유재하를 추모하기 위해 이 노래를 수록했다.[76] 이 앨범을 내고 김현식은 정확히 8개월 뒤에 사망했다.[77] 김현식의 5집에 있는 노래이며 김현식의 처절함과 절망적인 느낌이 살아있는 곡이다. 김현식이 간경화에 걸렸을 때 불렀던 노래이며 사망 8개월 전에 5집 앨범이 나왔다. 이 노래를 리메이크해서 무대에서 불러도 원곡 자체를 소화할 수 없다는 평이 대다수인데 국카스텐의 하현우가 이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에 떨리는 건 처음이었다고 한다. 박완규가 이 노래를 양보한 이유도 원곡 자체가 어렵다지만 원곡의 처절함과 절망적인 느낌을 잘 살라지 못할 것 같아서 였다고 한다.[78] 이 곡 때문에 그가 크리스천이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 그는 어떠한 특정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남편과는 달리 실제로 크리스천이었던 그의 아내가 김현식이 알코올 의존증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불러주길 원해 특별히 수록한 것이다.[79] 당시 무명이던 오태호가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다가 김현식이 그 노래가 뭐냐고 묻자 오태호가 본인이 작사 작곡한 노래라고 답했고 김현식은 이 노래를 달라고 했고, 오태호는 혼쾌히 수락했다. 5집 앨범에 수록되어 있지 않자 실망하며 '얘기라도 해 주시지'라고 생각했었고 6집을 듣고 미안해졌다고 한다. 자기가 상상한 것과는 다른 곡이 나와 놀랐다고도 한다.[80] 2집의 수록된 노래를 리메이크 했는데 편곡과 느낌은 매우 다르다. 게다가 후반부의 "눈물이여" 부분을 들어보면 가슴을 찌르는 처절함을 느낄 수 있다.[81] 원곡은 1960년에 손시향이 최초로 녹음했던 곡이다. 여담이지만 이 곡의 가사 중의 '푸른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이 부분의 원래 가사는 '흐린 달빛 아래 나는 눈물진다' 다. 그러나 손시향이 최초에 녹음할때 가사를 잘못 불렀고, 이후에 이 곡을 리메이크하여 부른 가수들도 모두 가사를 잘못 불렀는데, 김현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현식 버전의 '이별의 종착역' 은 1990년에 발표된 신촌블루스의 3집 앨범에 먼저 수록되었으며, 1991년 1월에 발표된 김현식의 솔로 6집에도 같은 곡이 수록되었다. 아마도 앨범의 곡수를 채우다보니까 수록이 된 듯...[82] 김장훈이 후반부를 녹음[83] 이 노래도 문관철의 1집 앨범에 있는 곡이다. 김현식, 전인권, 김장훈의 동명의 곡중 원곡이다. 김현식의 미완성 앨범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여담으로 이 곡은 2절이 있지만 리메이크하였던 가수들이 1절만 불러서 그렇지 2절이 존재했다. 2절 자체도 들어보면 엄청 좋다 여담으로 김장훈의 오페라도 원래 문관철의 1집 앨범 곡이었다. 한마디로 문관철이 원곡자이나 김장훈이 코믹한 창법으로 불러서 그렇지 문관철이 부른 것이 엄청 좋다. 사람들은 문관철을 비운의 가수라고 평가 하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유재하의 그대와 영원히,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김장훈의 오페라라는 레전드 명곡들이 앨범이 미뤄지다 보니 발표가 안됐고 그 사이에 이문세, 김현식이 가져가 버렸으니 그런 평가를 받아도 할 말 없다. 결국 문관철은 앨범을 낼 때마다 히트가 되지 않았으니 비운의 가수라고 부를 만도 하다.[84] 박정운이 후반부를 녹음[85] 음악다방 첫 오디션 첫 곡으로 같은 가수의 한때 사랑이었네(Once there was a love)를 불렀다고 한다.[86] 김영 전 동아기획 대표는 이 앨범을 발표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내적 갈등을 오래 겪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 김현식이 나타나 '대장(김현식이 김영 대표를 부르던 호칭) 앨범 왜 안 내?'라고 하자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87] GO GO리듬으로 연주됨[88] 바라본다라는 곡으로 전인권 등과 같이 불렀기에 김현식 목소리를 특정해내기는 힘들다.[89] 1981년에 발매된 이화 1집에 눈 내리던 겨울 밤이 실려 있다. 여성 보컬이 불러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