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서울 아시안 게임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제10회 아시안게임
1986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X Asian Games''' '''Seoul 1986

[image]
[image]
''' 대회기간 '''
1986년 9월 20일 ~ 10월 5일
''' 개최국 '''
대한민국/서울특별시
''' 참가국 '''
27개국
''' 참가인원 '''
3,345명
''' 경기종목 '''
27개 종목 - 296개 세부 종목
''' 개회선언 '''
전두환
대한민국 대통령
''' 선수선서 '''
김호철, 김진호
''' 성화점화 '''
장재근, 박미선
''' 개·폐회식장'''
서울올림픽주경기장
1. 개요
2. 유치과정
3. 역대 조직위원장
4. 경기장
5. 경기 결과
6. 메달 순위
7. 마스코트
8.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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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6년 서울특별시 등 수도권 등지에서 개최된 제10회 하계 아시안 게임.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였던지라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심혈을 기울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민적 기대가 컸는데 '''그 중 무엇보다도 2년 뒤 같은 장소에서 열리게 될 올림픽을 대비한 최종 리허설 성격이 강한 대회였기에''' 정부와 서울특별시 또한 성공적인 개최에 필사적으로 사활을 거는 등, 여타 하계 아시안게임에 비해 그 무게감이 훨씬 높았다.[1]

아시안게임 주경기장 또한 2년 후 올림픽이 열릴 장소를 그대로 썼으나, 선수촌의 경우에는 잠실종합운동장 건너편과 올림픽공원 동쪽에 각각 아시안게임 선수촌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를 건설했다. 그래서 아시안게임 때 잠실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은 그냥 도보로 이동하면 그만이었지만 올림픽 때는 선수/기자들을 위한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2. 유치과정


사실 서울 아시안 게임 개최는 제3공화국 시절이었던 1970년에 개최될뻔 했었다. 하지만 1968년 1월 21일의 김신조 사건을 비롯한 북한의 대남 도발사태로 인해 남북간의 긴장 상태가 거셌던데다, 아시안 게임의 직접적인 개최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서울특별시청은 정부 시책에 맞춰 각종 건설사업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재정 여건 또한 영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2] 이런 상황에서 동시에 아시안 게임을 개최하게 될 경우 서울시의 재정이 바닥날 수 있었고, 또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기 이전이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는 곧 '''대한민국 재정에 막대한 타격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올림픽의 유치권을 태국방콕에게 위임하면서 사실상 개최를 포기한다.[3]
그러다가 1977년 국민소득 1천 불과 수출 1억 불을 돌파하면서 신흥 개발 도상국으로서 발돋움하면서 엄청난 산업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다시 한번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여 개최해보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1979년에 마침내 공식적으로 유치에 도전하는 것으로 확정된다. 그것도 '''2년 후 열리게 될 하계 올림픽과 함께 말이다.'''
스포츠계에서 역사상 한 국가가 아시안 게임 유치와 올림픽 유치에 동시에 도전하는 일은 당시뿐 아니라 오늘날에 들어서도 굉장히 드문 일이지만, 과거 서울시에서는 대한민국이 종합 국제 스포츠 대회를 개최해본 경험이 없었던지라 '아시안게임을 통해 개최 능력을 보여준 뒤 올림픽까지 성공적으로 개최하겠다'는 명분으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두 군데에 동시에 출사표를 냈다.[4]
그렇게 1986년 아시안 게임 유치에 나선 서울의 경쟁 상대는 애초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하나였고[5] '''여긴 얼마 전부터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서울의 개최가 거의 유력해보였다.[6] 그런데 유치 확정 발표가 되지 않은 미적미적거리던 상태가 이어지다가 1980년 10월 말에 갑자기 뜬금없이 개최 신청서를 접수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북한평양직할시.''' 한마디로 대한민국이 아시안 게임을 바로 자기들 바로 밑에서 개최하는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다고 여겼던 예상치 못한 의외의 불청객의 등장이었고 이후 수많은 공작 활동으로 대회 운영까지 방해했다.(...)
그러나 서울이 1970년 대회 개최 포기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국가 차원의 높은 경제력과 실행력을 바탕으로 올림픽 개최까지 염두하면서 야심차게 경기장을 만드는 등의 여러 진전된 모습을 보인데다, 바그다드와 평양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전쟁 중이거나 그저 이념 대결에만 몰두하는 일그러진 민낯 일색이었기 때문에 표 대결로 갈 경우 서울이 유력했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개최지 선정을 한달여 앞둔 1981년 9월 30일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IOC 총회 때 '''1988년 올림픽 개최지가 서울로 확정됨에 따라''' 대세가 완전히 기울자 바그다드와 평양이 모두 유치를 포기해 서울이 1986년 아시안 게임의 개최를 확정한다.[7] 1982년에 서울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SAGOC)가 발족되었으며, 이듬해에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로 통합되었다.

3. 역대 조직위원장


  • SLOOC 위원장
    • 노태우 (1983~1986)
    • 박세직 (1986~1988)[8]

4. 경기장


당연한 얘기지만 2년 후 1988 서울 올림픽과 종목별 경기장이 거의 대부분 같다. 다만 유도, 태권도는 서울올림픽 때에는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5. 경기 결과


대한민국은 금메달 93개, 은메달 55개, 동메달 76개를 획득하여 금메달 94개, 은메달 82개, 동메달 46개를 획득한 중국에게 '''한 끗 차이로''' 밀렸다. 대한민국이 유일하게 아시안 게임에서 종합 우승을 할 수 있는 기회였으나 안습.[10] 금메달 수가 아닌, 전체 메달 수에서는 대한민국이 아시아 1위를 차지하게 되면서(대한민국 224개, 중국 222개) 역대급으로 엄청난 성과를 보인 아시안 게임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한 홈그라운드의 이점도 상당히 많이 또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이는 물론 편파 판정으로 변질되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시안게임은 올림픽에 비해 개최국이 경기종목을 선정하는 방식에 있어서 권한이 더 많은 편에 속한다. 특히 양궁 같은 경우, 이미 당시 세계대회가 그랜드피타 방식[11]으로 경기를 했었는데, 이와 반대로 서울 아시안 게임의 경우에는 과거의 방식이었던 더블라운드 방식[12]을 채택했었다.[13][14]
그리고 대한민국은 '''복싱 12체급을 전부 우승'''하는 기염을 토한다[15][16]. 도리어 태권도는 8체급 중 하나를 놓쳤다.
유도는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채택되었으며, 이때 일본 유도가 대한민국에 초전박살이 났다. 금메달 8개(7체급+무제한급, 남자부만 실시) 중 대한민국이 6개(+은 1, 동 1), 일본이 2개를 가져갔다. 그만큼 대한민국의 편파판정, 자국 버프가 강하게 작용했다고 비판을 받는 경기이기도 하다.
유치경쟁에서 밀려서 감정이 상한 북한에 동조한 아프가니스탄, 베트남, 라오스, 몽골, 남예멘, 시리아가 대회를 보이콧하였다.[17] 이처럼 시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회주의 관련 불참국들은 2년 전 올림픽에도 불참한 반면,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불참국들은 2년 후 열린 1988 서울 올림픽에 모두 참가하였다. 이에 따라 참가국 수가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직후 대회인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보다 적었다. 그냥 '''중국 빼고 공산권 몽땅 불참'''이라고 보면 맞다. 하지만 중국 하나 덕에 이들의 부재감이 사라진다.[18]
하지만 북한은 보이콧만으로도 모자라 이 대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아랍계 테러범에게 사주를 내려 1986년 9월 14일,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를 일으키는 바람에 5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또한 그러고도 모자라 서울 올림픽마저도 보이콧한 상태에서 약 1년 뒤인 1987년 11월 29일에는 1988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미얀마 상공에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화합이라는 슬로건으로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에 공동 참가하는 등의 아이러니한 행보를 보인다.

6. 메달 순위


순위
국가명



합계
1
[image]
중국
94
82
46
222
2
[image]
대한민국
93
55
76
224
3
[image]
일본
58
76
77
211
4
[image]
이란
6
6
10
22
5
[image]
인도
5
8
23
36
6
[image]
필리핀
4
5
9
18
7
[image]
태국
3
10
13
26
8
[image]
파키스탄
2
4
3
9
9
[image]
인도네시아
1
5
14
20
10
[image]
영국령 홍콩
1
1
3
5
11
[image]
카타르
1
0
3
4
12
[image]
레바논
1
0
1
2
12
[image]
바레인
1
0
1
2
14
[image]
말레이시아
0
5
5
10
15
[image]
이라크
0
5
2
7
16
[image]
요르단
0
3
1
4
17
[image]
쿠웨이트
0
1
7
8
18
[image]
싱가포르
0
1
4
5
19
[image]
사우디아라비아
0
1
0
1
20
[image]
네팔
0
0
8
8
21
[image]
방글라데시
0
0
1
1
21
[image]
오만
0
0
1
1

7. 마스코트


[image]
공식적으로 아시안 게임에서 따로 마스코트를 지정하여 사용하는 일이 없이[19] 대신 1988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홍보용으로 사용한다.[20] 또한 사실상 올림픽 리허설의 성격으로 치러진 대회였기 때문에 따로 아시안게임의 마스코트를 만들어봤자 비용만 지출되는 상황과 도리어 2년 후에 개최하게 될 가장 큰 규모의 하계 대회인 서울 올림픽 홍보에는 오히려 방해만 될 것으로 판단하여 그냥 만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올림픽 마스코트가 등장해야할 서울 아시안 게임의 개회식에서는 따로 아시안게임 관련 마스코트 없이 간접적으로 호돌이의 홍보와 묘사가 이루어지고 마지막 폐회식에서는 급기야 다음 베이징 대회 마스코트와 함께 등장했다.[21] 말 그대로 올림픽 리허설 대회라는 평가답게 아시안게임 홍보는 버리고 올림픽 홍보에만 집중한 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회를 앞두고 아시아경기대회에 관련된 기념품은 찾기 힘들다고 언급하면서 그저 아직 기간이 2년이나 남은 상태에서 후에 개최될 올림픽 마스코트인 호돌이에 관련된 상품밖에 없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
여담으로 기업 후원사 선정에서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통합해서 받았기 때문에 후원기업들도 호돌이를 광고에 사용하면서 86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동시에 내걸곤 했다. 이런 상황이니 설령 아시안게임 마스코트가 따로 있었다 하더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올림픽에 보다 무게를 두고 홍보했을 것이기 당연했기 때문에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는 호돌이에 밀려 별로 사용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image]
또한 이처럼 서울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는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리그베다/나무위키 이전 버전이나 혹은 외국사이트와 여러 검색엔진 등에서 1986년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라는 설명이 붙은 채로 떠돌아다니던 것이 바로 위와 같은 자료 사진이었다,
허나 이것은 제 10회 서울 아시안게임이 개최되기 바로 전년도에 개최되었던 1985년 태국에서 열렸던 제13회 방콕 "동남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였던 샴고양이. 태국어로 Wichien-maat 라고 부른다. # 그리고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공신력이 제일 높은 OCA 공식 홈페이지가 느닷없이 서울 아시안 게임 마스코트로 해당 사진을 올려버리는 오류를 범한 탓에 이러한 잘못된 정보가 마치 사실처럼 유포되었다.

8. 이모저모


  • 폐막식 끝나자 마자 바로, 그러니까 다음 날도 아니고 그날 저녁도 아니고 폐막식 끝나고 바로다. 전두환 대통령의 지도력 때문에 우승했다는 특별방송을 방영하는 바람에 바로 TV 끄고 시청료 안 내고 싶어졌던 사람들이 많았고, 실제로도 TV시청료를 일부러 안내는 가정이 급속히 늘었을때였다. 이때는 이미 전두환에 대한 국민감정이 극도로 나빠졌을 때인데 아시안 게임의 좋은 성적으로 고조되었던 기분이 저 방송들 때문에 순식간에 식어버리고 바로 TV 부숴버리고 싶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당시에도 한국 국민들은 스포츠와 정치를 연관시키는 건 좋아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에 한껏 고양된 감정이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원수에 대한 선전으로 이어져서 역효과만 난 방송이었다. TV를 보던 보수지향적 6,70대 노인들에게서도 쌍욕이 튀어나왔다는 증언이 있다.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시인 김용택<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마도 발음이 약하거나 어느정도 사투리 말씨가 흘러들어간 어느 서민을 화자로 하였기 때문에, 실감나는 구어체를 위해 서술한것으로 보인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어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 전두환제5공화국 정권은 1986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을 양대 행사로서 정권의 부족한 정당성을 땜질하고, 위세를 과시하며 국민들을 스포츠에만 눈에 돌리게 하는데 했다. 이때부터 내세운 슬로건이 "86・88".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항목 참조.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 대회 결승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2:0으로 꺾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는 대한민국의 아시안게임 출전 사상 3번째이자 20세기 마지막 우승이었다. 이후로는 결승전에도 못 간채 동메달(3위) 3번에 그쳤다가[22] 28년 후에야 금메달을 획득했다!
  • 한편 당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단에게 총 2억 5천만원의 포상금을 쐈다. 당시 물가를 감안하면 파격적인 액수였기에 화제가 되었다.[23]
  • 이 때를 계기로 철도 수송의 후진성이 다시 드러났다. 당시 여객철도차량의 노후화라든지, 70년대 초 지어져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물동량이 시작된 경부고속도로를 필두로 한 도로교통의 급성장으로 철도교통이 얼마나 쇠락해갔던 것. 이런 후진성을 혁신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새마을호 PP 동차나 무궁화호 NDC 동차 등이 속속 개발되었고, 나아가 1987년 12월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공식적으로 경부고속철도의 건설을 공약으로 내걸게 된다. 실제로 2010년대 기준으로 현재 볼 수 있는 여객 철도의 골격이 이 때를 전후해서 형성되었다. 그 이전의 것은 2004년을 기점으로 쇠퇴해 갔다. 그리고 아시안 게임 이후 탄생한 새마을호 PP 동차가 32년을 달리고 2018년에, 무궁화호 NDC는 24년을 달리고 2010년에 잠들었다.
  • 이시기 정부는 대한민국이 군사정권 치하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서울시와 수도권 내 군용 차량들의 운행을 최소화하는 등 모진 애를 썼다. 심지어 방위병들에게도 사복을 입히고 근무를 시켰다는 증언이 있다.
  • 가수 조용필1985년에 이 대회를 앞두고 낸 앨범에 "아시아의 불꽃"이라는 곡이 들어가 있다. 이 대회를 앞두고 조용필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 태권도가 최초로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이 되었다. 남자부만 8체급으로 실시하였고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7체급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땄다.
  • 대만은 당시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과 정식 수교한 상태였지만 정작 아시안게임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73년 11월 16일 AGF 총회에서 38:13 으로 중국 가입 및 대만 축출안이 가결됨에 따라 아시안게임 출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인데[24] 운명의 장난인지 서울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중이던 1986년 9월 25일 OCA 총회에서 대만의 복귀가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대만의 아시안게임 복귀는 바로 다음 대회였는데 하필 개최국이.....[25]
  • 이때 조직된 자원봉사자회는 그대로 1988년까지 이어져 계속 활동했다. 다만 1986년 아시안 게임 때는 자원봉사자들의 외국인에 대한 과잉친절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당시 1986 아시안게임은 국가 규모로 여는 최초의 대형 스포츠 대회였기 때문에, 시대 분위기상 자원봉사자들이 사명감과 긍지에 불타올라 경기를 관람하러 온 사람들을 좌석 앞까지 일일이 들어주기도 하고, 알아듣지도 못 하는 영어에 무조건 예스를 연발한다거나, 심지어 외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짐까지 들어주는 경우가 있었는데[26] 정작 내국인에 대한 친절은 이것보다 못하여 "비굴한 친절"이라며 조직위 내에서도 질타의 대상이 되었다. 이 점은 서울 올림픽에 가서야 다소 개선된다.
  • 개최일 전날이 추석연휴기간 마지막날이었다. 그래서 당시에 편성된 추석특집프로그램 중에서는 아시안게임 참가선수가 나오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1986년, 1989년, 1996년에 나온 TV광고 영상 중에서 1분 29초 ~ 6분 23초 사이의 영상을 보면 서울아시안게임 특집프로그램 예고, 아시안게임 중계프로그램 예고, 아시안게임기간 중에 방송되는 특집 예능프로그램 예고와 추석특집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이 나온다. 이중에서 추석특집 프로그램 오프닝 영상을 보면 '아시아경기대회 참가선수와 함께'라는 내용이 나온다.
  • 2018년 공개한 1987년분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의 일부 고위층 인사가 선수로 위장, 참가해 우리측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관련기사
  • 비인기 종목의 관중 동원을 위해, 주변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입장권을 나눠주고, 응원할 국가의 노래도 학교에서 가르쳤다. 해당 국가의 선수들은 뜬금없이 한국인 학생들이 자신들의 국가나 인기곡을 불러줘서 감동했을지도....당시 잠실 주변 중, 고등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은, 응원할 국가의 노래 한 곡씩 외웠던 기억이 있다.
[1] 올림픽 직전에 아시안게임을 그리고 아시안게임 바로 직후에 딜레이 없이 바로 올림픽을 개최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러한 유래를 깨버리고 개최된 것이 지금까지도 유일무이하게 제 10회 86년 서울 하계 아시안게임과 제 24회 88년 서울 하계 올림픽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2] 1960년대 후반에 김현옥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세운상가 건설이나 강변북로 건설, 여의도 개발 사업, 고가도로지하도 건설, 시민아파트 건설 등 각종 건설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는데 이중 상당수가 단기적으로 수익을 기대해볼만한 사업이 아니었던지라.....[3] 물론 여담으로 70년대 세계사적 관점에서는 ''''데탕트'''' 즉 '탈냉전'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언급이 차츰 늘어가는 국면을 보였지만 말이다. 물론 후에 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 침공등과 같은 사태를 통해 국면이 급속도로 당시 냉각된다.[4] 다만 이는 말 그대로 표면적인 주장이었을뿐, 실제 관계자들은 개최 가능성이 높지 않은 올림픽보다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보였던 아시안 게임 유치에 사활을 걸 작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올림픽 유치의 경쟁 상대는 이미 세 번이나 큰 대회를 유치해 본 이웃 국가의 대도시였기 때문.[5] 그런데 원래대로라면 1980년 4월에 서울로 확정났어야 했다. 왜냐하면 신청 마감일인 4월까지 유치 의사를 밝힌게 서울 하나뿐이었기 때문. 물론 앞서 언급했다시피 1970년의 개최 포기 전례가 있는데다 당시 AGF 자체가 한국을 비롯한 친서방 진영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제 3세계의 비동맹 국가들의 입김이 제법 셌던지라.....[6] 물론 이라크측은 전쟁을 일찍 끝낼 것이니 바그다드 개최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문제가 많았다.알다시피 전쟁은 1988년까지 이어졌다. (...)[7] [8]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 관련 총괄 역할을 담당.[9] 현재는 철거되어 두산아파트가 들어섰다. #[10] 승부가 마지막 날 밤에야 결정된 터라 그 날 밤에는 경기를 중계해주면서 금메달 숫자를 자막으로 속보 띄워주기도 했다. 우리나라로서는 허재가 중국과의 농구 결승전 도중 발목부상을 당해 5분밖에 뛰지 못해 금메달을 내준 것 등, 당일 중국과 금메달을 겨뤘던 경기들이 아쉬울 따름.[11] 요즘의 올림픽 양궁을 생각하면 된다.[12] 육상이나 수영처럼 거리에 따라 세부종목을 많이 두는 방식. 당연히 금메달 수도 훨씬 많아서 김진호 선수가 3관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개인전 단체전 2개만 있는 요즘 방식에서는 3관왕은 불가능하다.[13] 당연히 다른 나라도, 자국에서 개최하는 아시안 게임에 자국에 유리한 경기종목을 많이 집어넣곤 한다.[14] [15] 직전 대회인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는 7체급 우승한 엄청난 복싱 강대국이었는데(금 못 딴 5명도 은이나 동을 땄다.) 이러한 본래의 실력에 개최국 버프까지 받은 셈. 다만 이 경우는 편파판정 논란이 발생할 정도로 말이 좀 많았다.[16] 이 때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김광선, 문성길, 신준섭, 백현만 등 올드 복싱팬이라면 모두 알만한 이름이다.[17] 더군다나 당시 지구촌 전체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도 지배적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특히나 이에 극단적으로 보이콧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리고 당시 상황에 관하여 이야기해보자면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의 경우에는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유주의 진영이 모두 불참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동시에 소련군아프가니스탄의 영토를 점령 중으로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지시로 철수할 때까지 사실상 소련이 지배했었다. 또 몽골/남예멘/베트남/라오스는 당시 사회주의 국가였으며(베트남, 라오스는 지금도 사회주의 국가이다.), 시리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랍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당이 지배하는 나라.[18] 사실 중국은 소련과 반목하는 사실상의 독자적인 노선을 지향했던 공산 국가였던데다 한국과는 1983년 5월의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이 잘 해결되면서 관계가 그리 나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차기 대회 개최를 천명한 마당에 서울 대회에 불참하게 되면 모양새가 매우 안 좋았던데다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올림픽 개최까지도 노리고 있었고 또한 중화민국과의 역사적 마찰을 통해서 80년대 후반까지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다가 비로소 인정받기 되었기에 두 말하지 않고 서울에서 개최된 두 대회 모두 참가했다.[19]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백서에도 휘장만 올라와 있을 뿐 마스코트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았다. 다만 휘장사업 부문에서 88올림픽에서 사용할 마스코트인 호돌이를 사용했다는 것은 나온다.[20] 특히 호돌이는 올림픽을 상징하는 오륜 메달을 목에 걸고 있어서 이 부분은 바꿔 쓰지 않았을까... 생각하겠지만 그냥 썼다. 사실 아시안 게임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승인 하에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가 주관하는 올림픽의 지역 버전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륜 메달을 썼다고 크게 이상할 건 없다.[21] 해당 폐회식 영상에서도 호돌이를 88년 서울 올림픽의 대표 마스코트로 소개되었을 뿐이었으며 이를 아시안게임 마스코트라고 언급하지는 않았다.[22] 1990년, 2002년, 2010년. 그 외에는 4위로 메달을 놓치거나 아예 준결승조차 못갔다. (...)[23] 이때 당시 서울특별시에서 아파트 1채를 사려면 1,5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일반 기업에서 과장급 직장인의 평균 연봉이 600만원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보통 축구 대표팀의 엔트리 인원이 25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인당 1,000만원 정도의 포상금이 돌아간 셈이 된다.[24] 희한하게도 대만과 정식 수교 상태였던 대한민국조차 반대가 아닌 기권을 택했다. (...)[25] 사실 중국은 대만의 복귀가 확정되자마자 자국에서 열리는 1990년 아시안게임에 대만을 적극 초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뭐 대만의 출전 명칭인 Chinese Taipei를 중국어로 표기할 때 中國臺北(중국 타이베이)이라고 표기하라는 압박을 하는 등 뒷끝이 작렬하긴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냥 中華臺北(중화 타이베이)로 합의해주면서 최소한의 양보는 했는데, 사실 이는 중국이 아시안게임의 성공적인 개최를 통해 1993년 IOC 총회에서 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노렸기 때문이다. [26] 중동에서는 남의 짐을 들어주면 하인 취급을 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