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 서울 올림픽

 


''' 1988 서울 올림픽 '''
제24회 올림픽 경기대회
1988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

[image]
[1]
''' 대회기간 '''
1988년 9월 17일 ~ 1988년 10월 2일 (16일)
''' 개최국 '''
[image]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경기도, 대전광역시, 대구광역시, 부산광역시, 광주광역시
''' 슬로건 '''
화합과 전진
Harmony and Progress
''' 마스코트 '''
호돌이
''' 주제가 '''
손에 손잡고 - 코리아나#s-1
(Hand in Hand - KOREANA)
''' 참가국 '''
160개국
''' 참가선수 '''
8391명
(남자: 6197명, 여자: 2194명)
''' 경기종목 '''
27개 종목
(263개 세부 종목)
''' 개회선언 '''
노태우
대한민국 대통령
''' 선수 선서 '''
허재, 손미나[2]
''' 심판 선서 '''
이학래[3]
''' 성화 점화 '''
정선만, 김원탁, 손미정
''' 개·폐회식장'''
서울올림픽주경기장
[4]
1. 개요
2. 대회 상징
4. 성화 봉송
7. 자원봉사
8. 경비 활동
9. 종목
10. 시범 종목
11. 특징
14. 개최 의의 및 결과
14.1. 기묘한 위상
14.2. 올림픽 유치 열기의 시작
14.3. 대한민국의 발전상 및 각종 영향
14.3.1. 냉전 종식의 밑거름
14.3.2. 독재정권의 종식 및 정치적 변화
14.3.3. 올림픽에 따른 각종 변화
14.3.4. 제3세계 세력과의 외교를 통한 저변 확대
14.3.5. 한국 전산 기술의 발전
15. 총평
16. 논란
16.1. 강제 이주 및 여러 논란
16.2. 편파 판정
16.3. 도핑 사건
16.3.1.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
16.3.2. 기타 선수 논란
17. 방송
18. 한국 측 중계진
19. 역대 조직위원장
20. 스폰서
21.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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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분 만에 보는 1988 서울 올림픽 - MBC 스포츠탐험대 2020. 1. 18.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88/18 - KBS 스포츠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

1988 서울 올림픽 공식 캐치프레이즈[5]

1988년 9월 17일[6]부터 10월 2일까지 16일간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일부 수도권 지역 및 각 종목별로 주요 도시 지역[7]에서 개최된 하계 올림픽. 대회의 정식 명칭은 '제24회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Games of the XXIV Olympiad Seoul 1988)'이다.
대한민국 최초이자 아시아 대륙에서 개최된 2번째 하계 올림픽,[8][9] 특히 대회 운영방식면에서 대륙별 종합 스포츠 제전 이후 곧장 2년 만에 치러졌던 전무후무 유일한 올림픽이며 그간 역사에서 아테네, 로마, 런던 등과 같이 여러 모종의 사정을 비롯하여 오랜 기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개최를 거두었던 일부 유럽의 도시들과도 그 의미가 엄연히 다를정도로 역사상 전례가 없는 대회로도 기록된다.
거기에 일제강점기6.25 전쟁을 거치면서 세계 최하의 빈국으로 전락했던 대한민국이 불과 30여년 만에 한강의 기적으로 일궈낸 눈부신 발전상을 자랑하는 '국위선양'의 장이었고, 특히 올림픽의 단순한 취지 및 보통적인 의미의 범주를 벗어나 여러 국가, 나아가 세계적으로도 냉전 종식의 밑거름이 되는 등 세계 역사의 흐름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몇 안 되는 큰 의미를 지닌 대회이다.

2. 대회 상징



2.1. 마스코트



[image]
대회 마스코트의 이름은 '''호돌이.''' 로마자로 Hodori로 표기되었고. 동물 모티브는 당연하게도 호랑이. 그리고 당시 디자이너였던 김현의 작품이었다. 오로지 88년에 열릴 서울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진 상징적인 마스코트였고 이로 인해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의 마스코트 표기를 포기했으며 마지막 폐회식에서도 후에 올림픽의 대표 마스코트가 될 호돌이를 더욱 부각시키면서 강조했을 정도로 엄청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2008년 미국의 MSNBC 2008 베이징 올림픽 특집 방송에서는 `역대 올림픽 최고의 마스코트’를 선정했는데, 20년 전 서울 올림픽의 마스코트였던 호돌이가 무려 '''3위'''를 차지했다. 이 순위는 당시의 시대적 혹은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오로지 외관으로만 평가한 기준으로 매겨진 순위였다.

2.2. 주제가








'''1988 서울 올림픽 경기대회 - 공식 음악'''
'''코리아나''' - '''손에 손잡고 '''

다만 미국에서는 중계권자인 NBC[10]가 이와는 별도로 휘트니 휴스턴'One Moment in Time'존 윌리엄스[11] 작곡의 'The Olympic Spirit'을 중계방송 주제곡으로 사용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NBC는 주제곡을 앨범으로 발매하면서 이후 타국에 판매하여 수익을 창출해냈다고 한다.

3. 유치 과정




4. 성화 봉송


1988년 8월 23일 오전 그리스 올림피아#s-1 헤라 신전 마당에서 채화돼 그리스 지역 봉송을 마친 후 8월 24일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12] 성화 인도식을 치르면서 성화가 조직위원회 측에 인계됐다. 8월 25일 아테네를 출발한 성화는 8월 27일 오전 11시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면서 대한민국 국내 봉송을 시작했다.
제주도 일주 봉송을 마친 성화는 대형 크루즈선인 올림피아호를 통해 부산항까지 해상 봉송됐고 8월 28일부터 올림픽 개막 전날인 9월 16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올림픽 개막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당시 올림픽 성화봉송이 이뤄진 코스는 아래와 같다. 굵게 표시된 지역은 성화가 하룻밤을 묵으며 문화축제를 치렀던 곳이다.

  • 제주국제공항서귀포제주부산김해창원[13]진주사천고성통영[14]여수순천목포광주담양대구영천경주울산포항영덕안동영주문경[15]상주구미김천대전순창정읍[16]전주익산[17]군산논산공주보령[18]아산[19]천안청주충주제천태백삼척동해강릉속초고성인제춘천원주평택[20]수원성남과천안양안산광명인천부천임진각동두천의정부[21] 서울시청서울올림픽주경기장

5. 개회식




6. 참가국




7. 자원봉사


레슬링 경기 자원봉사를 했던 어느 분이 사진과 같이 봉사도중 있던 일들을 블로그에 올렸다.

8. 경비 활동


서울시 경찰국은 1988년 5월 17일부터 1986 서울아시안게임 경비경찰조직 '88경비단'을 '88올림픽경비단'으로 개편했다. 이들은 요인경호대, 참가단 신변보호대, 제1~6지역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경비대원은 근무복, 신변보호대원은 정장형 제복 및 목걸이형 신분증을 착용하였고, 공통적으로 가슴에 훈장형 기장을 달았다. 주 업무는 경기장 주변 경비, 선수단 신변보호, 대테러 작전수행 등으로 서울 및 지방 경기장 35개소, 선수촌 및 보도시설, 지정호텔, 주요 철도역 등 관련 시설 67곳, 연습장 73곳에 대한 시설경비와 각종 문화행사와 국제회의 경비 등을 담당했다. 대회 당시 투입된 경력은 전체 경찰관 중 총 47,194명이었으며, 예산은 국고에서 353억원, 조직위에서 47억원을 각각 보조받아 약 4백억원으로 전담부대 창설 및 운영, 장비보강 등에 투입했다.
치안본부는 치안 대책기구로 치안대책위원회, 실무대책위원회, 간사위원회 등을 운영하며 자문기관으로 자문위원회를 운영했으며, 대회치안대책의 집행 주관은 제2차장 산하에 6개 실무대책부 및 7개 지원단으로 각각 짰다. 특히 서울시경은 종합치안대책위원회, 실무대책위원회, 간사위원회 등을 두고 집행기구로서 특별대책위원회(대책본부)를 두되 핵심시설 전담 경비는 88경비단장이 맡으며, 관할서의 3선 경비는 제2부장, 각 기능별 지원은 각기 다른 부서장이 맡도록 했다. 대회를 전후해 올림픽상황실을 운영하며 모든 진행상황을 올림픽상황실에만 보고토록 했고, 대책본부는 소관기관별 문제발생 시 해결책을 강구토록 했다. 상황실은 상황처리반 및 일보생산반으로 나누어 2교대 격일근무제로 하고 1988년 7~10월까지 운영토록 했다.
올림픽 개/폐회식 동안 철저한 안전을 위해 개최 12시간 전부터 경찰, 소방, 통신, 대테러 등 합동검측반을 동원해 안전검측을 실시했고, 경기장 주변 도로 등지에는 교통정리를 위해 순찰차 52대, 사이카 74대를 각각 배치해 단계별 교통통제, 입/퇴장 승하차선 지정, 입/퇴장 시차제, 지정주차장제 등을 실시했다. 각종 우발적 사고에 대비해 대테러 특공대, 폭발물처리팀, 한전차, 구급차, 진압부대 등을 근접 배치해 출입문과 관람석에 관중 안전감시요원을 투입했다. 지방 선수분촌 경비는 선수, 임원 등 관계자 신변보호를 위해 시설주와 긴밀히 협조하며 안전활동을 수행하되 군/경 전담지역 책임한계를 구분해 경비를 맡았다. 공항/항만 경비도 군 주관 하에 군경합동으로 진행해 공항 내 청사, 화물청사, 자유지역 등은 경찰이, 기타 2~3선 지역은 군이 각각 맡았다. 그 외에 11개 기능 분야 경력의 집중 운용체계로 확립해내 전문성과 적응력을 고려해 핵심 경비 대상별로 배속/배분시켜 잔여 경력으로 중요도에 따라 증감/지원했다. 각 경비 대상별로 운용되는 경력은 해당 부대 지휘관이 맡았다.
올림픽 기간 중 북한의 방해공작이나 국제테러단체, 국내 반정부/반체제세력 등의 테러행위, 무장공비 침투 등에 대비키 위해 안전본부 산하에 군경합동 대테러 대응팀을 만들었으며, 시/도 대테러 대응팀은 시/도 국장이 맡아 운용했다.

9. 종목



10. 시범 종목


  • 야구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태권도 - 장충체육관
  • 배드민턴 - 서울대학교 체육관
  • 볼링 - 로얄볼링장(서울시 중랑구의 중화동의 현 로얄스포츠센터. 리모델링을 하면서 볼링장은 사라졌다.)[24]

11. 특징


  • 태권도가 처음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태권도는 이를 발판으로 2000 시드니 올림픽 때 처음으로 올림픽 정식 종목에 합류한다.
  • 탁구테니스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탁구는 올림픽 역사상 최초이고, 테니스는 1988년 당시 기준으로 64년만의 합류였다.
  • 배드민턴이 전시종목으로 채택되었고, 4년 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정식 종목이 되었다. 야구 역시 이 대회 시범종목이었다. 당시 한국은 야구에서 4위를 달성했다. 이때 금메달은 미국, 외팔 투수로 유명했던 짐 애보트가 결승전 선발에서 맹활약하면서, 한국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신문에도 오르내렸다. 은메달은 일본, 동메달은 푸에르토 리코.
  • 한국은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사상 최초로 종합 순위 4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1위 소련, 2위 동독, 3위 미국).
  • 미국의 맷 비욘디는 남자 수영에서 5관왕을 차지했다. 다만 이 중에서 세계신기록이 없다는게 흠.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는 여자 수영에서 6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며, 한 대회에서 가장 많은 금메달을 차지한 여자 선수가 되었다.
  • 비욘디의 6관왕을 저지한 남자 접영 100M 금메달리스트는 남미의 소국 수리남의 안소니 네스티다. 그의 조국에는 당시 수영장이 단 하나였다고 한다. 그는 올림픽 역사상 첫 흑인 수영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 일본 수영선수 스즈키 다이치는 배영 100m에서 30m를 잠영으로 헤엄쳐 금메달을 땄다.
  • 헝가리의 수영 선수 타마스 다르니는 한쪽 눈이 실명인데도 남자 개인 혼영 200m와 400m에서 2관왕을 차지하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 여자 중장거리의 절대 강자로 등극하는 미국의 재닛 에번스가 처음 금메달을 딴 대회이기도 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6세.
  • 역도의 나임 술레이마놀루는 자기 몸무게의 3배가 넘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당시 체급이 -55Kg이었던 그는 자기보다 더 위 체급의 선수의 1위 기록을 능가하는 기록으로 우승하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그 전까지는 3배 넘는 무게는 들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기 때문인데, 이 선수는 용상에서 자기 몸무게의 3.18배인 190kg을 들어올려 당시의 과학적 통념을 깼다. 이 선수의 키는 겨우 147cm(...)였기 때문에 '포켓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 여자 테니스 단식 금메달 리스트인 슈테피 그라프는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 올림픽 금메달. 이때까지 이를 모두 이룬 선수는 그라프만이 유일하다. 2013년 현재까지도 한 해에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선수는 그라프가 유일하다. 애초에 한 해에 4대 메이저 테니스 대회 우승이라는 캘린더 슬램을 달성한 사람이, 오픈 시대 이후 마거릿 코트, 그라프와 남자부의 로드 레이버 외에는 없는데, 거기에 4년에 한 번씩 하는 올림픽 금메달까지 겹치기란...
  • 대한민국 여자 핸드볼 팀은 한국의 구기 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했다.[25] 남자팀은 은메달.
  • 레슬링에서는 그레코로만형에서 김영남이, 프리스타일에서는 한명우가 금메달을 차지했는데 김영남은 이 대회 후로 은퇴 예정이었고, 한명우는 국대 선발전에 탈락했다가 대회 직전에 최종 선발된 것이었기 때문에 두 선수 개인에게도 매우 뜻깊은 메달이었다.
  • 양궁에서는 17세의 나이로 국가대표가 된 김수녕이 여자 개인, 여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여 2관왕에 올랐고 혼자 세계 신기록 3개를 갈아치웠다. 여자 개인전은 금, 은, 동 모두 한국이 가져갔다(...). 그리고 12년 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도...
  • 소련동독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이 해당 국호를 사용한 마지막 대회로 기록되었다. 소련의 경우 다음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독립국가연합으로 참가하였다가 1996년 애틀랜타 대회 때 각각 러시아와 후신 독립국들로 분할하여 참가하였고 동독서독 그리고 북예멘과 남예멘은 1990년 각각 동서 및 남북 통일화로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부터 통일 국가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 여자 4×400미터 계주에서 소련의 세계신기록이 나왔는데 그 기록이 3분 15초 17이었다. 이 기록이 놀라운 이유는 2012 런던 올림픽까지도 깨지지 않는다는것 이다. 참고로 2012 런던 올림픽 해당 종목 1위 기록은 3분 16초 87(미국)이다. 스포츠 과학도 엄청나게 성장했을 텐데 그때 그 기록이 어떻게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 당시 여자 펜싱은 플뢰레만 시행했다. 에페는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사브르는 2004 아테네 올림픽에 도입되었다. 또 사브르는 2004년에는 개인전만 진행했고, 단체전은 2008 베이징 올림픽 때 처음 시행되었다. 펜싱 여자 플뢰레는 개인전에서 서독 선수 3명이 모든 메달을 휩쓴데 이어 단체전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이 부문에서 2관왕을 한 선수는 아냐 피히텔(Anja Fichtel)인데, 그녀는 당시 불과 20세였다. 여자 플뢰레 석권에 힘입은 서독은, 아언트 슈미트(Arnd Schmitt)의 남자 에페 금메달까지 합쳐 펜싱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동독 또한 남자 플뢰레의 우도 바그너(Udo Wagner)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독일은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펜싱에서 종합 1위를 달성하였다.
  • 복싱 미들급 금메달리스트였던 한국 박시헌의 결승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상대였던 미국 선수가 누가봐도 긴 리치와 빠른 스피드로 경기 내내 박시헌 선수를 압도하였으나 결과는 박시헌 선수의 승리였다. 모로코와 우루과이의 부심은 박시헌 승리, 소련과 헝가리의 부심은 존스의 승리, 우간다의 부심이 동점이지만 박시헌의 우세로 판정하였다. 당시 기록. 이 판정은 올림픽 복싱 역사상 최악의 편파 판정 중에 하나로 꼽힌다. 박시헌 선수도 다소 당황해했으며, 마음놓고 기뻐하지도 못했다고. 당시 그 미국 선수는 프로로 전향해서도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했으나 메달이 바뀌지는 않았고, 후에 그는 90년대 초특급 스타가 된다. 그 선수가 바로 로이 존스 주니어.
  • 승마의 경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방역 규정이 없어 승마만 다른 나라에서 개최할 뻔했다. 어떻게 보면 멜버른 대회[26] 이후 희대의 굴욕, 즉 흑역사가 될 뻔했다. 그러나 과천 경마공원을 짓고 또 방역 규정을 새로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서 승마 대회까지 개최하는 데 성공하였다.
  • 컴퓨터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첫번째 올림픽이기도 했다. 1984년도 경기까지만 해도 기록을 문서로 기록해 보관했으나, 1988년도 경기부터는 컴퓨터에 기록을 입력하고 컴퓨터 데이터로 기록을 관리하였다. 또한, 계측 부문에도 컴퓨터 측정 기술이 도입되어 1/100초 단위까지 측정하는 첫 번째 경기가 되었다.
  •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과 1988년 캘거리 동계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 1,000미터 2연패를 차지한 동독의 크리스티나 루딩 로텐부르거는 1988년 서울올림픽 싸이클 개인추발에 출전해서 은메달을 차지했는데 이로써 동,하계 올림픽에서 모두 메달을 획득한 최초의 여성선수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12.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88년 24회 서울 올림픽 (1988 Summer Seoul Olympics)
  • 기간: 9월17일~10월2일
  • 규모: 160개국 13,600(여)명 참가.
  • 종목: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 야구(시범종목), 태권도(시범종목)
  • ▶대한민국 참가 현황: 임원 125명, 선수 477명 참가.(근대5종,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양궁, 역도,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
  • ▶대한민국 참가 성적: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 획득. 종합순위 4위.
  • 금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74kg) 김영남
  • 금메달: 레슬링(자유형 82kg) 한명우
  • 금메달: 복싱(라이트급) 박시헌
  • 금메달: 복싱(플라이급) 김광선
  • 금메달: 남자 양궁(단체) 박성수, 이한섭, 전인수
  • 금메달: 여자 양궁(개인) 김수녕
  • 금메달: 여자 양궁(단체) 김수녕, 왕희경, 윤영숙
  • 금메달: 유도(60kg) 김재엽
  • 금메달: 유도(65kg) 이경근
  • 금메달: 남자 탁구(단식) 유남규
  • 금메달: 여자 탁구(복식) 양영자, 현정화
  • 금메달: 여자 핸드볼
  • 은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68kg) 김성문
  • 은메달: 레슬링(자유형 68kg) 박장순
  • 은메달: 복싱(헤비급) 백현만
  • 은메달: 남자 사격(소구경 소총 복사) 차영철
  • 은메달: 남자 양궁(개인) 박성수
  • 은메달: 여자 양궁(개인) 왕희경
  • 은메달: 역도(52kg) 전병관
  • 은메달: 남자 탁구(단식) 김기택
  • 은메달: 여자 하키
  • 은메달: 남자 핸드볼
  • 동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52kg) 이재석
  • 동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62kg) 안대현
  • 동메달: 레슬링(그레코로만형 82kg) 김상규
  • 동메달: 레슬링(자유형 57kg) 노경선
  • 동메달: 레슬링(자유형 90kg) 김태우
  • 동메달: 복싱(페더급) 이재혁
  • 동메달: 여자 양궁(개인) 윤영숙
  • 동메달: 역도(82.5kg) 이형근
  • 동메달: 유도(무제한급) 조용철
  • 동메달: 남자 체조(도마) 박종훈
  • 동메달: 남자 탁구(복식) 안재형, 유남규
대한민국은 종합 4위의 성적을 거뒀다.
[image]
참고로 소련 및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 이전까지 미국, 소련(현 러시아), 동독, 서독(현 독일) 4개국이 전통적으로 매우 강세였고 빅4를 형성했지만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이 4위를 차지하고 서독이 5위로 밀려나면서 올림픽 빅4 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었다.

13. 폐회식




14. 개최 의의 및 결과



14.1. 기묘한 위상


사실상 실패했다고 간주되었던 대회와[27] 그간 반쪽짜리 올림픽들에 비해 동서 진영이 화합한 대회였지만 이와는 별개로 완벽하게 모든 IOC 국가가 참가한 것은 아니라서, 쿠바에티오피아[28]를 비롯해 알바니아[29], 마다가스카르[30], 세이셸[31], 니카라과[32] 등 올림픽 보이콧을 선언한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일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에 대한 참가를 거부하거나 포기하면서 총 7개국이 불참했다. 이들 외에 불참 국가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는데 여긴 냉전과는 별개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인종적 문제가 대두되면서 촉발되었던 사태로 인해 IOC에서 제명된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적 면에서 동서화합의 올림픽이었던 동시에 마지막 보이콧이 벌어진 대회라는 기묘한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33][34]
하지만 1987년 KAL기 폭파 등 북한의 온갖 방해와 로비에도 겨우 6개국 정도만 북한의 입장의 동조했을 뿐이고, 당시 대한민국과 외교관계가 전무했던 국가들이 오히려 대거 출전해 처음에 우려했던 것에 비하면 그래도 참가국을 늘리는데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14.2. 올림픽 유치 열기의 시작


서울 올림픽 전까지 본래 올림픽 유치는 국가적인 취지라기 보다는 '''도시간의 경쟁'''이었다. 경쟁 상대였던 나고야 역시 일본 정부가 나서서 유치전을 지휘했다기보다는 체육계 인사와 나고야 시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 위원회를 꾸리고 활동했다. 물론 실제 개최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많은 신경을 쓰기는 했다. 그리고 물론 1936 베를린 올림픽이나, 1964 도쿄 올림픽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회를 주관하는 사례는 있었다.
그러나 유치 초기서부터 중앙정부에서 대규모 계획을 수립하고, 범 국가적인 역량을 동원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즉, 이전까지의 올림픽은 유치하면 정말로 좋지만, 실패하면 크게 문제가 되는 마치 양날의 검과 같은 사업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캐나다에서 열렸던 1976 몬트리올 올림픽이 사상 최악의 적자를 내면서 파산하게 된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거 뮌헨 올림픽에서 엄청난 테러사건과 또한 반쪽 올림픽에 따른 당시까지도 전반적으로 만연했던 올림픽 개최에 관한 부정적 회의론이 급부상하고 이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더더욱 부정적인 시선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당시 빈곤에서 막 빠져나와 고공으로 성장하던 개발도상국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을 보고, 상황이 반대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즉 과거 빈민국에서 엄청난 성장을 통해 이제는 선진국 수준의 비슷한 경쟁력을 가지게 된 입장으로 단숨에 급부상한 한국을 바라보면서 다른 많은 국가들은 이제는 회의론을 벗어나 올림픽 개최 자체가 이제는 ''''나름대로 해 볼만한 시도로 여겨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과거에 이루어진 단순 수도 혹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 차원에서의 계획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적인 차원에서 올림픽 유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또한 이것이 유치의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던 서울 올림픽의 사례들을 통해서, 한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던 개발도상국의 여러 국가들 혹은 기타 한국 이상의 경제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있던 여러 선진국들은 이제 올림픽 유치의 성공을 위해 국가적인 역량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비슷하게 개도국이면서도 훗날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중국이었는데 이는 본격적으로 국가로서 인정받은 80년대 후반 이후로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개최와 무려 2000년 올림픽이 개최되는 시드니와 유치전을 벌여 연장전까지 가는 박빙의 경쟁구도를 이루었으며 결국 그들의 올림픽 유치에 관한 노력은 후에 2008 베이징 올림픽으로 그 결실을 맺으면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다.
이런 추세는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가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2014 동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는 유력 도시였던 소치와 평창의 각 유치 지역별 국가 대표였던 블라드미르 푸틴과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진다. 급기야 IOC에서 "국가 원수의 프리젠테이션 금지를 명문화하자"는 이야기가 언급되었을 정도로 올림픽 유치 열기가 '''과열'''된 것이었다.
여하튼 서울의 이러한 성공적 올림픽 개최의 사례를 통해서, 이제는 국가적 위신을 높일 수 있다는데 착안한 다른 신흥 개발도상국들, 심지어 소위 선진국들까지도 개최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결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이로써 올림픽 유치를 단순 도시 수준이 아닌 국가적 차원에서 개최 지원을 시작하게 된 것은 서울 올림픽이 최초는 아니었지만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고 그간 흔들리던 올림픽 개최 운동의 일대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4.3. 대한민국의 발전상 및 각종 영향



14.3.1. 냉전 종식의 밑거름



1980 모스크바 올림픽1984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이 냉전[35]으로 인해 각각 진영에서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그저 반쪽 대회가 된 것과 비교하여 서울 올림픽은 사상 최다의 참가국(160개국), 최대 참가인원(8,465명)을 자랑했다. 이 대회는 특히나 과거 6.25 전쟁,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진영/자본주의 진영간의 첨예한 대립을 벗어나 냉전시대가 녹아가고 화해의 무드와 진정한 의미의 데탕트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의미로 확실하게 탈냉전 시대의 도래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었다.[36] 비록 북한은 올림픽을 반대하면서 불참을 선언 및 테러를 일으켰지만 남한에서의 올림픽 개최, 그리고 이후 냉전의 종식을 고하는 주제곡 '''"손에 손잡고(Hand in Hand)"'''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37]
한편으로는 서울 올림픽이 동유럽 공산 정권 붕괴에 간접적인 기여를 했다고도 해석이 가능한데, 특히나 북한의 악의적인 선전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헐벗고 굶주린 나라'''로 그동안 익히 알고 있었던 동구권의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서울 올림픽을 통해 오히려 자국보다도 더 풍요로운 자유주의 진영이자 시장 경제 체제를 도입하면서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데서 시작된 것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38]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공산 국가인 중국과 베트남 역시 마찬가지로, 서울을 '''거지 떼가 득실거리고 판자촌이 난무하는 빈민가 천지'''로 여겼는데 정작 개회식 및 여러 보도를 통해 접한 서울의 모습이 도리어 자국의 번화한 도시보다 넘사벽급 이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특히 당시의 중공2년 전에 이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한국'''·'''중국 수교 이후에 만난 한국인들에게 서울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언급한 중국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여담으로 사실 이 시기 1인당 GNP를 보면 1987년 기준으로 소련과 동독 모두 한국보다도 높으면서도 거기에 2배 이상인 8,000달러~9,000달러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동구권 유럽 국가들은 '''과거 미국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봉쇄정책과 80년대에 들어서 등장한 오일쇼크와 관련된 여파를 겪으면서 10년 넘게 경제가 침체 중이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그나마 유일하게 살만했다는 소련도 1980년대 중반 유가의 하락으로 경제가 하락세에 접어들었고,[39] 그나마 소련에 이어 2번째로 잘살고 있던 동독은 그나마 서독과의 교류를 통해 경제를 유지한 상태였다.
여기에 공산권 국가 특유의 '''고정환율'''에 의해 GNP 수치가 표기된 것도 고려해야 하는데, 일례로 1989년 당시 동독의 1인당 GNP는 무려 13,000달러로 같은 시기 6,000달러에 조금 못 미치는 (IMF 통계 기준 5,927달러, 세계은행 통계 기준 5,817달러) 대한민국의 2.2배 남짓이었지만 이는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를 1:1로 환산한 결과에 불과하였고[40] 비공식 환율대로 환산하자면 4,500달러 수준으로 오히려 한국보다 더 낮았다. 물론 동독의 생필품이나 공공요금, 임대료가 월등히 싸다는걸 감안하면 동독의 구매력이 형편없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사치품을 사려고 한다면 발품을 팔아야 했다. 실제로 이 무렵 동독을 다녀온 서독 국민들은 '''"1인당 GNP 13,000달러의 나라가 왜 이리 못 사는가?!"'''라고 의아하게 여겼다고 한다. 즉, 동구권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형편이 좋았던 소련과 이러한 소련을 제외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위성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경제력이 부흥했던 동독의 실질적인 경제 상황도, GNP 지표 수치와는 다르게 오히려 한국보다 우세한 상황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지정학적으로 아시아의 조그마한 반도 국가이면서, 그것도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긴 식민지 강점기를 지난데다가 이에 그것도 모자라 올림픽이 개최되기 무려 30여년 전 6.25 전쟁으로 인해 결국 온 나라가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면서 동시에 세계 최고의 빈민국가이자 더 이상 소생이 불가능한 상태로 전락했던 대한민국이 오히려 공산주의 이념의 국가보다도 더 부유한 경제를 꾸려가는 것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41]
고로 그간 수십여 년간 고수해오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감과 환멸감은 절정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 국가들 역시도 이와 같은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유시장 경제체재를 받아들이는 움직임을 보이게 되는 행보[42]를 이어가면서부터는 결과적으로 공산정권의 붕괴의 신호탄과 소련의 해체로 말미암아 이념의 대립 경쟁에서 사회주의의 패배라는 결과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어 한국이 폴란드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체코, 슬로바키아[43] 등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위시한 동구권(동유럽) 유럽 국가들과도 대대적인 수교를 펼치기 시작했던 시기 역시 1989년부터였으니, 사실상 88년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후부터 일이 수월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고로 이는 즉슨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로 인해 선진국과 기타 후진국들을 비롯한 정반대 이념을 가졌던 적성 국가들에게까지도 전쟁과 기아, 가난이라는 키워드로 그간 알려져 있던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크게 달라졌다는데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었고, 도리어 국제 무대에서 한국의 외교력과 위상을 높이는데 큰 핵심을 담당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4.3.2. 독재정권의 종식 및 정치적 변화


또한 전두환 5공화국 정권의 종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44]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민주화 운동을 '좌경폭동'으로 매도하며 탄압했으나, 6월 항쟁 이후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였고, 이후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였다.'''
전두환 정부는 올림픽을 정권 정당성을 홍보하는 데 사용했다. 유치 성공 이후 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준비를 하면서 이를 이유로 야당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논의되던 민주화 논의를 무시하고 있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을 때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이유가 들어가 있었다.
정작 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전두환 정부는 계엄령 선포 및 시위대 유혈진압을 계획한 바 있다. 그러나 이미 올림픽때문에 외신들이 많이 들어와 있고 김수환 추기경,정의구현사제단과 같이 가톨릭계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에 계엄령을 선포했다간, 올림픽 개최가 취소와 더불어 개최지가 변경되면서 지금껏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정부는 6.29 선언을 발표해 민주화 개헌을 추진해야만 했다. 정권 도움 되라고 유치한 서울 올림픽이 오히려 정권의 명줄을 끊은 셈.[45] 알쓸신잡에서 유시민이 언급하는 올림픽이 6월 항쟁에 끼친 영향
전두환 정권이 시민들의 유혈진압으로 6월 항쟁을 끝났다면, 교황청유럽남미가톨릭 국가들에게 서울에서의 올림픽 개최에 관한 전면적인 보이콧을 호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상술했듯 IOC에서도 당시에 개최국 변경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가뜩이나 공산권에 대한 견제 효과를 노리던 같은 자유주의 진영이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서울 올림픽이 무산되면 뒷목잡을 일이라, 과거 5.18 민주화운동 때와는 다르게 묵인 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두환을 압박했고, 또한 올림픽 때문에 외신 기자들도 잔뜩 방문한 판국이라, 이처럼 올림픽만큼은 어떻게든 개최해야만했던 전두환은 결국 유혈진압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다.
어찌되었든 전두환 정권 때 올림픽이 유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태우가 '관중들이 전두환을 보고 야유를 하는걸 외국인들이 보면 국제망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올림픽 개최식에 참석못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발생한다. '''이처럼 결국 전두환은 자기 집에서 TV로 노태우가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것을 그저 지켜만 봐야했다.'''[46] 그리고 이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험악일로를 걷게된다. 이는 결국 화합의 대제전인 올림픽이 오히려 대한민국 군부 독재의 거물이었던 두 사람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던 것. 그리고 또한 이것이 결국 백담사행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시작은 불완전하였으나, 동시에 5공화국 종식과 더불어 독재 정권의 청산, 대통령 직선제와 비밀 투표 그리고 더 이후에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문민 정부 시절에 들어서는 아예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움직임으로까지 불씨가 거대하게 타오르며 번진다.[47]
그리고 이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는 국내의 일부 강경했던 좌파 그룹들의 속성을 더불어 크게 변화시켰다. 이후 사회주의보다는 사민주의를, 사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속성이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가장 격렬한 변화는 민중당 계열에서 일어났다.[48] 운동권 출신 재벌총수 이의범 SG그룹 창업주도 해당 올림픽을 계기로 노동운동을 접었다고 밝혔다.
5공에 반대했던 인사들도 서울 올림픽에 대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1990년에 낸 자서전 <장정> 4권에서 올림픽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 한편, 3년 전 자신을 총장직에서 쫓아낸 전두환에 대해서도 "독재자로서 죄가 많지만, 올림픽 유치와 물가안정 등 공로도 있다"고 평가했다.[49]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도 19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기념 특별 서면회견에서 "올림픽으로 고양된 국민의 자부심과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들의 쿠데타 및 좌경 민중혁명을 없앨 수 있다"고 발언했다.[50]

14.3.3. 올림픽에 따른 각종 변화


공산권뿐만 아니라 서방 세계에서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경이로운 발전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예외적으로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70년대부터 중고등학생 수학여행단을 비롯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방한했기 때문에 그야말로 알거지 수준이었던 광복 직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지만[51] 미국이나 서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캐나다 등의 북미/유럽은 여전히 대한민국에 대한 정보가 한참 모자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 올림픽은 서양인들에게 그야말로 엄청난 임팩트 그 자체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들어서는 3저 호황에 따라 자산시장이 활성화되고 자가용이 차차 보급되기 시작했을때였고, 사실상 서울 올림픽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공산권이든 서방권이든 가리지 않고 대외적으로 세계에 광범위하게 알린 대회이자 기폭제였다는 사실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52] 서울 올림픽 이후 도래한 1990년대 대한민국은 1997년 외환위기에 직면하기 이전까지는 마치 7~80년대 일본처럼 그저 미래가 긍정적이던 국가였다. 그리고 그만큼 당시 수많은 국민들이 이를 전부 깨닫지는 못했지만 지난 이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번영을 누렸다고 회자되었던 시기였다.
사실 이 하계 올림픽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지에 대한 여부는 해외에서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미리 서두에서 부분적으로 설명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정부 당국에서도 올림픽 개최에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다.[53]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시기에 성공적으로 올림픽이 개최되고 끝나면서,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 신화의 큰 이정표가 되었다. 즉 일본이 24년 전에 먼저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누린 것과 거의 똑같은 효과를 본 것이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으로 독립한 지 고작 반 세기도 안 되었고, 그나마도 한 차례 전 국토가 폐허가 되는 끔찍한 전쟁까지 겪은 국가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고 올림픽까지 개최했다는 것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54][55][56]
서울 올림픽의 성공과는 반대로 1989년 동구권 유럽 국가들의 붕괴, 1990년 서독과 동독의 통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공산진영은 자유진영과의 그간 체재 대결 구도에서 완전히 패배하면서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공중분해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의 운동권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57] 또한 본격적으로 혁신적인 정책보다 보수 안정을 추구하는 중산층이 늘어난 것도 올림픽의 여파라고 분석하는 경우도 있다.
당시 국내적으로는 80년대부터 엔화의 고점 현상과 3저호황도 함께 몰아닥쳤고 이 시기를 전후해 내수경제가 급신장했다. 기본적으로 3저호황의 영향이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으로 1988년 최저임금법 제정이 되어 임금이 높아진 영향도 있다.
특히 상업적인 부문에 있어서 광고시장이 크게 성장하고 가처분소득이 크게 늘어나며 자가용 승용차가 1988년에 100만대를 돌파한것을 시작으로 본젹적으로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외식부분도 괄목할 성장을 기록했으며 또한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가 이루워지면서 여가산업이 크게 번창하여 많은 부분에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삼저호황으로 이른바 1인 1차 시대라 부를수있는 마이카 시대가 열렸고 이에 따라 레저산업과 부동산 경제 활성화 및 각종 경제가 급성장한다.
올림픽 개최와 더불어 장발과 미니스커트 착용에 대한 단속이 중단되고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전면 해체되는 등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이전에 비해 문화에 대한 제한이 상당부분 풀리고, 이미 앞서 언급된 내용처럼 프로 스포츠의 성행과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지하철과 도로, 경기장 건설, 서울 외곽지역 재개발 및 한강정비사업 등 각종 인프라 공사를 진행했기 때문에 올림픽 자체만으로도 문화적인 부분에서 변화가 컸지만, 때 마침 올림픽을 앞두고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간 한국 언론과 문화계를 억누르던 각종 정치적인 검열과 법적인 규제가 부분적으로나마 철폐되거나 완화되었다.
90년대 중반 IMF이전까지 당시의 생활 환경부문에서 상당하게 변화했다. 사실 이 시기부터 대한민국이 일반 개발도상국을 넘어 선진국으로서 도약을 위한 변화를 많이 준비했다. 예를 들면, 그동안 경제발전에 집중했던 대한민국의 대기오염에 대한 실태와 개선 노력에 국가적으로 나선 계기가 이 올림픽 준비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IOC에서 올림픽에 관련하여 대기오염 문제에 대한 개선 및 각종 요구사항이 내려오기도 했다.[58]
또한 서울 올림픽 유치 이전부터 이미 신군부 세력의 제5공화국은 정부 출범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한 우민화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중 특히 스포츠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59][60] 국풍81 등 각종 대형급 문화 행사들을 연달아 기획했다.[61][62][63]

교통, 통신 면에서도 느낄 수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서울 지하철 3호선, 서울 지하철 4호선. 부산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1기 지하철 계획을 성공적으로 완성하였으며 동차형 새마을호 열차가 올림픽 대비용으로 제작되었다. 카드형 공중전화도 서울 올림픽을 위한 중요한 시설이었다.
또한 민주화에 따른 언론기본법의 폐기에 따라 신문발행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어 각종 신문과 잡지들이 신규로 창간하거나 복간되었고 12면으로 묶여있던 지면제한도 폐지되어 16면으로 발행면수가 증가했다. 특히나 기존 신문기본법이 적용되었던 1987년까지는 자원 및 외화낭비 방지라는 명목으로 신문지면 제한을 해서 특정한 날이 아니면 신문지면을 1일 12면씩만 발행할 수 있었고, 신문과 잡지도 마음대로 발행하지 못했지만 이러한 규제가 풀려버림에 따라서, 언론계 입장에서는 광고비를 잔뜩 챙겨먹을 수 있는 철호의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한겨레를 뺀 주요 언론매체들은 올림픽 특수를 광고 수익과 연결시켜 신문 쪽수를 하루 8면씩[64] 증면시켜 막대한 광고비로 짭짤한 수익을 올렸으며, 올림픽 특수의 맛을 본 주요 신문사에서 광고수익의 증가를 위해 신문지면을 적극적으로 늘리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중반에 이를러서는 조중동한[65]에서 발행부수를 48면까지 늘리고 다른 여타 언론사에서도 기본 20~30면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서 신문광고 시장이 크게 번창했으며 신문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급속히 늘어났다.
다만 방송광고시장은 생각보다 성장을 못한 축이기는 한데 토요일 낮방송 허용을 제외하면 올림픽 이후로도 TV 방송시간 연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못했다는 것이지 자가용 보급으로 라디오 방송 수요가 다시금 늘어나면서 풍선효과로 라디오 광고시장은 크게 성장했고, 종교방송이 개국되기 시작했다.
또한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공중 화장실 시설이 열악하기 짝이 없었던 데다가 설치했다 하더라도 관리가 잘 안되어 불결하기까지 했기 때문에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매우 불편했는데, 올림픽을 앞두고 공중화장실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시켜놓았다.[66][67]
올림픽을 앞두고 5월 20일에 도입된 바코드의 국가코드 880의 의미가 바로 이 서울 올림픽이 개최된 연도를 모티브로 하였다.
또한 패스트푸드가 활성화되어가기 시작하는 등 외식문화가 진화단게에 접어들었고, 자국에 찾아올 외국인 관광객이 우리나라 음식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국 전통 음식에 대한 홍보를 위해 서울시의 음식점 대부분에 필수적으로 점포밖에 음식 샘플을 비치하라는 당시 정부의 지시가 내려졌다.[68] 특히 9월에 올림픽이 개최되었기에 당시 날씨가 날씨였던지라 실제 음식을 두면 부패하기 때문에, 음식에 왁스를 넣고 가열하여 굳힌 모형음식 일명 '밀랍 음식모형 기술'을 일본에서 들여와 최초로 도입시켰고 거기에 커피 자판기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게다가 올림픽 특수를 크게 탄 건 요식업, 숙박업, 관광/레저, 스포츠/여행장비 등 여가산업들이었는데, 당시 재벌기업들은 관광호텔 및 레저시설 건축 등 관광/레저사업과 스포츠용품/의류 등에까지 뛰어들었다. 당시 쌍용 계열인 용평리조트가 그간 10년 적자를 내다가 살아난 게 그 대표적인 예시였다. 이러한 대대적인 붐은 90년대 중반까지의 국민소득 향상에 근거한 '여가의 상품화'에 편승했다는 견해도 있지만, 당시 기업들이 급증하던 노사문제로 리스크를 겪을 제조업 대신 인력 적고 관리가 편한 레저산업을 택했다는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골프장 개장/허가 수도 1988년 들어 16개월 간 99개로 급증해 기업가들의 부동산 투기 열풍을 조성했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를 기반으로 80~90년대부터는 스포츠 기업인 아디다스,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나이키 및 외국 의류 기업 FILA, GUESS. 요식업계 기업인 맥도날드, 피자헛 등등을 포함해 분야를 막론하고 각종 수많은 외국 브랜드 기업들이 대규모로 새롭게 입점하기 시작한다.[69]

14.3.4. 제3세계 세력과의 외교를 통한 저변 확대


미국과 같은 서방 세력과의 교류와 협력이 돈독해지고 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던 것과 그간 '적성국가'로 여겨지던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 국가들 및 중공과 같은 공산주의 체제 국가들과의 수교 뿐만 아니라 반대로 중동 지역의 경우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중동 건설에 관한 대대적인 붐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1980년대 초에는 이미 우리나라의 다수의 유수 기업들이 대거 진출하여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과 끈기로 현지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를 대개 부지런한 국민성을 거론시킬 정도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고 있었다.
거기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은 서울 올림픽 유치에 이바지하면서 성공을 도와주었던 국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데 이는 즉 당시 미국과 유럽과 같은 선진국 및 강대국들 못지 않게 새롭게 중동아프리카 등의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에 저변활동을 늘리는 것과 같은 상당한 공을 들이게된다. 물론 박정희때에도 체제경쟁과 석유수급을 이유로 제3세계 국가들에게 손을 내밀었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축제를 개최한 만큼 더욱 공을 들이게 된것도 사실이었다. 또한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등장했던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중심으로 당시 국내 정세 및 현안이 너무 복잡했었던 까닭에 당시 전두환은 일정에 잡힌 제3세계 관련 순방외교를 취소하려고 했으나,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었던 노신영이 이들 제3세계 국가 덕분에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한 것을 생각하여 볼 때 절대 무시할 수 없다고 전두환을 설득해 결국 순방외교를 이어가게 한다. 심지어 북한과 수교국이었던 버마(미얀마) 순방 도중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라는 초유의 참사가 있기도 했지만 순방은 계속되었다.[70][71][72] 그리고 이와 별개로 국력 신장과 더불어서 이후 동남아시아권 국가나 서남아시아권의 국가들과도 교류가 이어지고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외교력은 한층 더 성장하였다.

14.3.5. 한국 전산 기술의 발전


'자이온스'란 이름의 올림픽 전산 시스템을 국내에서 개발해 사용했다. 카이스트 부설 시스템 공학센터에서 개발을 결정. 당시 88 올림픽까지는 5년 정도의 기간이 주어진 상황이었지만, 올림픽 조직위원장 노태우를 설득하기 위해 3개월 만에(…) 거의 완성된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64회 전국체전을 운영해 냈고 그리하여 올림픽 전산 시스템의 개발을 승인받았다. #1 #2 #3
다만 아쉽게도 이 전산 시스템은 올림픽이 끝난 후 관심도가 빠르게 사라졌고, 개발 인원들도 하나 둘 대기업 등으로 흩어지면서 사실상 일회성 시스템으로 끝나게 되었다.

15. 총평


이처럼 서울 올림픽은 국가적 차원에서 수많은 다변화의 과정을 가져왔다. 물론 과거 도시 재개발에 따른 철거민에 관한 문제와 노동자의 노동착취, 부동산 투기 등 당시 만연했던 한국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과 각종 부정적인 문제점들을 모두 감추면서 묻어버렸다는 비판이 이어지기도 하나,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올림픽이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안전한 지지대와 사회 발전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또한, 서울 올림픽은 그동안 치러졌던 역대 올림픽 가운데서도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녔으면서, 대한민국의 역사, 올림픽 역사 나아가 세계사까지 송두리째 뒤바꿔놓은 올림픽으로 남게 되었다.
참고로 1970년대 말, 실제로 추진되었던 충남지역 신행정수도 건설 도시에 관한 계획에, '''1996년 올림픽 주 경기장 부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초 계획은 새로 지어질 행정수도의 정책에 따라 1988년, 1992년 유치전에 참여하여 국가신행정수도의 인지도를 높인 이후 1996년 올림픽 유치에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만약 자국 내부의 사정에 따른 상황과 IOC의 의견을 수용해 1990년 중반대로 올림픽 개최를 연기했더라면, 그리고 1992년도 올림픽 개최지1996년도 올림픽 개최지, 2000년도 올림픽 개최지가 어디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당초 계획보다 경쟁을 피해 대회를 빨리 유치했었던 선택이 오히려 여러 방면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는 관측이 많다.[73] 서울이 1988년 개최에 도전하지 않고 1996년 개최에 도전했으면 1981년보다 1990년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더 좋았겠지만, 무조건 밀렸을 거라는 가설을 내세울 수 있다. 그리고 만약에 이를 더 미루었다면 역사가 바뀌지 않는 이상 엄청난 사건에 직면했을지도 몰랐을 것이고 거기에 더 이상 개도국의 후보지로서 여러 강점 및 메리트와 경쟁력이 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때문에, 당시 노신영 외무장관은 적극적으로 올림픽 유치를 시도하는데 특히 올림픽의 대륙 간 안배원칙을 고려할 때 구미권 즉 서양의 선진 국가들은 12년 만에 아시아에서 다시 올림픽이 열리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라는 점과 20세기가 지나면 중국이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견해는 21세기인 지금에 와서 보면 '''단순 예언 수준이 아니라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운 엄청난 혜안이었던 것으로도 평가가 가능하다.'''
2020년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면, 중국은 2000 시드니 올림픽 유치전에서 과거의 만행 때문에 유치 실패로 발목을 잡혔지만 마지막 4차 투표에서 두 표 차로 뒤집히기 전까지 계속 선두를 유지했었다. 또한 2008 베이징 올림픽과 이후 일본의 2020 도쿄 올림픽 재유치, 게다가 21세기 들어 중국과 마찬가지로 급부상하는 국가인 인도와 지금까지 2번이나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을 유치해오면서 이제는 올림픽 유치 전쟁에도 뛰어들 준비가 된 인도네시아가 이를 검토 중에 있고, 또한 타 메이저 대회에서 오일머니라는 엄청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하여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가 된 카타르와 같이 여러 중동 국가들마저도 국제대회 유치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1981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레 겁먹고 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면 사실상 '''한국에서의 올림픽 유치는 요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은 최악의 경우에는 21세기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에 서울 올림픽이 한국 스포츠계의 발전과 단순한 국제 대회라는 의미의 범주를 넘어, 대한민국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다시 상기해본다면, 올림픽 개최가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더라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판도와 역사가 또 어떻게 바뀌었을지(...) 실로 아찔한 대목이 아닐 수가 없다.

16. 논란



16.1. 강제 이주 및 여러 논란


[image][74]

'''허울 좋은 86, 88올림픽이 없는 사람 다 죽여요. 살고 있는 주민들 다 쫓아내고 어쩌겠다는 거예요? 이건 재개발이 아니고 투기개발이요, 투기개발.'''

- 1986년 7월 31일자 p49. <투기 개발에 저항하는 오금동 세입자들>.

허나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방면으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는데, '86, 88'이라는 마법의 주문 아래 경기장 건설 및 달동네 환경정비 및 재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수십만에 가까운 주민들이 한순간에 길거리로 내몰렸다. 심지어는 "성화봉송 중에 불량주택이 보이면 곤란하다"며, 전국 성화봉송 루트 주변 경관에 보여지는 판자집이란 판자집은 전부 무단으로 철거해버렸다. 또한 부랑자, 거지,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에서 보이면 잡아다가 부랑자/장애인 보호시설에 수용시켰다. 사실 올림픽 개최 이후 장애인 올림픽인 패럴림픽이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과 같은 인권 침해 문제도 발생했다.
이미 1982년부터 대규모 건설자본을 끌어들인 대대적 재개발사업 '합동재개발'이 실시되면서 올림픽 선수들이 입국하는 관문 공항인 김포국제공항과 주 간선도로가 되는 국회대로 주변의 판자촌 및 빈민가는 이때 모두 철거되어 자취를 감췄다.[75][76] 아울러 사격 경기가 열리는 태릉 국제사격장 인근의 빈민가 등 황량한 부지도 '''있어 보이기''' 위해 개발되었다. 이는 오늘날 각각 목동상계동아파트 단지로 재개발되는 곳인데, 이 과정을 통해 허허벌판&공장 지대이던 양천구노원구는 급격하게 풍경이 달라져 대규모 주거 단지이자, 8학군에 버금가는 명문 학군, 높은 인구밀도를 자랑하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아울러 부천시원미, 오정 일대도 역시 개발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처럼 빈민가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점점 밀리고 밀려나 난곡이나 시 밖으로 쫓겨났다.[77] 이를 다룬 다큐 영화가 송환을 만든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이다. 이때 상계동 천막촌의 철거 이유는 '''성화 봉송이 이쪽으로 지나갈 수도 있으니까 보기 좋으라고.'''[78] 심지어 전국 도시 노점상도, 성남 모란시장 역시 폐쇄 대상에 올랐다.
철거민, 노점상 등 도시빈민들을 쫓아내면서 겉보기에는 도시 미관이 좋아졌지만, 이미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통해 1970년대부터 끓어오르던 하층민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말았다. 이로 인해 1986년 10월 31일 신당 6동 강제철거 당시 철거민 2명이 분신을 기도했고, 12월 4일에는 철거민 1명이 자살하기도 했다. 1986년 한 해 동안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5명이었으며, 1986년 4월부터 1988년 2월까지 사망한 철거민은 모두 14명이었다.[79]
그러나 철거민 문제가 비로소 본격화된 것이 된 계기가 바로 88올림픽 준비 과정이었다. 결국 그 분노는 그대로 폭발하여 올림픽 개막 1년 전인 1987년에 서울지역철거민협의회(서철협)을 탄생시켰고, 이는 1993년 전국철거민협의회, 1994년에는 분파인 전국철거민연합으로 이어진 것이다. 1988년 6월 29일에 수도권 등 30여개 지역 주민들이 '반민중적 올림픽으로 탄압받는 도시빈민 규탄대회'를 열었고, 오후 8시 서울 정동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서 서민주택 보장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전개했으나, 올림픽 열기에 밀려 파급되지 못했다.
게다가 1988년 8월 5일부터 제정/시행된 '올림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법률'에 따라서 현월 17일부터 올림픽 기간 중 전국 주요도시 특정구역에 '평화구역'이 선포되었고 해당 구역 내에서는 어떠한 집회/시위가 금지되었다. 그 증거로 8월 18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광주지역 8개 재야단체들이 5.18 진상규명 투쟁을 벌이다 평화구역이란 이유로 경찰에 강경 진압되었고, 서울시내(당시 종로, 을지로, 충무로) 극장에서 열린 미국 영화 직배반대 투쟁도 휴관 형식으로 경찰과 대치해가며 시위를 펼쳤으나 이후 마찬가지로 무산되었다.
서양의 이목을 의식해 주요 도시에서 개고기가 금지된 때도 이 때. 수많은 서울 시내와 경기가 열리는 곳 주변, 대로변 보신탕 집들이 문을 닫았고, 보신탕이라는 이름 대신 사철탕, 영양탕, 보양탕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위성 도시나 변두리로 쫓겨나 음지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개고기 반대론자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한국의 개고기 문화가 근절되지 않으면 올림픽을 보이콧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동물보호 운동가인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농촌장터에서 개를 도살하는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한국인은 야만인”이라고 공격한 이후, 1995년 3월 한·불 정상회담 당시 파리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에게 “개고기 판매를 금지하라”고 요구했다. 1996년에는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에 “월드컵 기간 동안에 개고기 판매를 금지한다는 각서를 써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2001년 MBC라디오 ‘시선집중’ 프로그램에서 손석희 진행자와의 국제전화 인터뷰 도중 “개를 먹는 사람에 대해 결코 존중해 줄 수 없다. 아무리 차이점을 인정한다고 해도 거기에 한계가 있다”며 문화의 상대성을 인정하라는 손 씨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했다.
군대도 보여주기식 정책을 폈다. "군인들이 거리에 보이면 위압적이고 남북이 심각한 대치 상황인 것처럼 보여 안 된다"고 하여 군복 입고 출퇴근 하던 당시 방위병[80]은 대회 기간 동안 평상복을 입고 다니게 했고, 군용 차량은 서울 시내 다니는 게 전면 금지되었다. 주둔지가 서울시내라 꼭 다녀야 하는 수방사 소속 차량은 얼룩무늬 위장색 위에 파란색이나 회색, 황토색 등 단색을 칠해 다니게 했고, 수도권 부대 병사들의 휴가 외출 외박도 안 줬다고 전해지고. 지역 부대 소속 장병들 또한 군복을 입고 서울시 주변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아예 금지시켰다고 한다.
위의 여러 가지 일들은 1988년 올림픽 직전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사실 올림픽의 예행 연습이라 할 1986년 아시안 게임 말고도 1983년 IPU 총회, 1986년 IMF 및 IBRD 총회 등의 국제행사가 우리나라에 개최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도시 빈민들과 힘 없는 이들에게 장기간 고통을 주고, 외국인들에겐 쌍수 들어 환영하는 저자세를 보여줬다. 그러나 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 시절이라 월간 말이나 한겨레신문같은 재야 언론을 제외하고는 보도되지 못했고, "올림픽을 잘 치러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특히 중산층)가 너무나 강해 사회 구성원 중에 운동권에 가담한다든가, 자신에게 이러한 해당 사항이 직결되지 않는 이상 정부가 내세운 정책의 부당함과 힘 없는 이들의 고통에 관해 잘 직시하지 못했다.[81]
또한 서울 올림픽은 경제적 성공만 있었던 것이 아닌 문제도 분명히 있었다. 올림픽 개최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풀게 됨에따라 부동산 투기가 횡행하게 되었고 노태우 정부의 200만호 건설 공약으로 서울 근교지역 및 지방 대도시 지역으로까지 투기열풍이 확산되었으며 대기업들도 비업무용 부동산 대량매입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1987년부터 1990년까지는 부동산 가격은 매년 20% 이상 올랐으며 전월세비도 급속하게 치솟아 서민들의 삶을 짓눌렀다. 서울올림픽 이후로는 만연한 부동산 투기로 엄청난 사회문제가 되면서 신도시 추가 건설 등[82] 부동산 투기억제 정책을 폈지만 당장의 부동산 투기를 짓누르는 데 실패했으며 부동산 가격 상승에 따라 물가도 급속히 올라 1990년과 1991년에 걸쳐 물가상승률이 오일쇼크 이래 최고 수준을 기록하기도 했다. 다만 올림픽 이후에 부동산 가격을 억제할려고 토지 공개념 3법을 도입한다거나 신도시 건설 규모를 확대하는 방책이 1991년부터 약효를 얻기 시작하면서 김대중 정부 초기까지 약 10년간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 될 수 있었다는 점은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물론 올림픽으로 인한 거품 경제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주가지수가 올랐다가 폭락하는 등[83] 자산에서 버블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또한 이 문제는 대규모 신도시 건설 등으로 일단 간신히 모면하기도 했으나 이때의 거품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하고 기업들도 기술투자 대신 무리한 사업다각화와 부동산 투기 등에 정신을 팔다 보니 결국 9년 뒤 1997년 외환 위기로 경제주권을 잠깐 잃었다.

16.2. 편파 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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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에서는 편파 판정 문제는 늘 끊이지 않을 정도로 논란이 일어난다. 특히 당시에는 주관적인 요소가 컸던 복싱에서 이 문제가 더욱 불거졌고, 복싱 역사상 가장 큰 이슈 중 2가지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발생했다.
먼저 한국 복싱선수 변정일이 편파 판정으로 탈락했는데 당시 32강 2회전에서 변정일은 2회 경고만으로 2점 감점됐지만 상대방 불가리아 선수는 8회 경고를 받았으나 일절 감점되지 않았다. 변정일의 탈락으로 관중들의 분노가 폭발해버렸다. 당시 경기 영상 그러나 이때 한국 코치진이 링에 난입하여 심판진에 폭력을 행사하며 아수라장을 만드는 촌극을 벌였고, 변정일은 67분 동안이나 링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한 번 내려진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무식하게 주먹부터 쓰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변정일은 경기 진행을 방해한 이유로 국제복싱연맹으로부터 5년간 자격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한국은 국제적 비난과 망신을 당하게되면서 당시 한국복싱연맹 회장과 김종하 대한올림픽협회장이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도 변정일의 경우는 1990년대에 프로로 전향하여 선수로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유지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그보다 더욱 논란이 되는 사건이 나오고 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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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대에 올라서 금메달을 받고도 멋쩍게 존스의 손을 들어주는 박시헌.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중 불거진 논쟁 등과 같은 경우에 "한국은 스포츠계에서 비열하게 장난친 전례가 있으므로 편파판정 당해도 싸다"라고 주장하는 측이 흔히 드는 예가 바로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결승전이다.[84] 1988 서울 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서 9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권투 선수인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가 한국의 박시헌을 상대로 압도적인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진은 박시헌의 손을 들어줘 존스는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받게 된다. 당시 경기 영상 1부 2부
이는 "88 서울 올림픽 복싱 강탈(robbery) 사건" 이라 불리고, AFP가 역대 올림픽 최악의 판정 2위에 선정된 바가 있다.[85] 당시 한국이 종합순위 4위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타국들이 흔히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이 사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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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시헌은 안 그래도 16강전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이탈리아 선수를 꺾고 올라왔는데, 결승전에서도 훗날 전설적인 복싱 선수로 거론되는 로이 존스 주니어에게 철저히 농락 당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을 포함한 대다수의 관중들은 물론이고 박시헌조차 존스의 우승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심판진 5명의 판정 결과 2:3으로 박시헌이 금메달을 따는 역대 최악의 판정이 나와버렸다.'''[86] 이에 패배한 존스는 말할 것도 없고 얼떨결하게 금메달을 차지하게 된 박시헌조차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존스 선수는 그 이후 지속적으로 IOC에 제소했으나 1997년 5월에 IOC 조사위원회가 이를 최종 기각했다. 우선 조사 결과 한국 측의 심판매수 흔적이 없었으며 비디오 분석에서도 로이 존스에 딱히 손을 들어줄 만한 결과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 존스의 유효타가 2배 더 많았다고 하지만 존스가 확실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스텐딩 다운 판정 역시 박시헌이 바로 항의하고 나섰을 정도로 존스에 대한 판정 또한 석연치 않았다.
거기에 이때는 박시헌이 밀어붙이고 있었으며 마지막 라운드, 특히 종료 1분을 남겨두고는 박시헌이 경기를 주도하며 상당수 유효타를 성공시켰다. 거기에 홈 어드벤티지까지 감안하면 박시헌이 이기는 판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즉 박시헌 선수 본인 잘못이 아니라 심판 잘못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경기에 대한 미국의 항의가 아마추어 복싱의 룰을 더욱 객관적으로 개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도 당시 19살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로이 존스 주니어는 이를 계기로 미국 전체의 관심과 격려를 받았고 절치부심하여 이듬해 89년에 프로로 데뷔하면서부터 90년대 ~ 2000년대 복싱계를 미들급 타이틀 정복부터 시작하여 헤비급까지 평정하면서 복싱계에서 대스타로 발돋움하였고 이후 당대를 넘어 역대급 복서로도 평가받는 선수로 거듭난다.[87] 그리고 여담으로 2001년에 랩가수로 데뷔하였다.
박시헌 본인도 "조국이 나의 은메달을 뺏어갔다"며 자신의 패배를 시인했으나, 그에 대한 세상의 시선은 차가웠으며 그는 한참이나 죄인 취급을 당해야 했다. 우리나라 여론은 미국에 공식 사과를 해야 한다는 둥 모금으로 금메달을 만들어서 보내주자는 둥 박시헌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그 이후로 복싱 인생이 꼬여 국내외로 비난에 시달리다 조기에 은퇴하였고 결국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면서 자살 고민까지 했다고 한다. 근황... 지못미. 다행히 2014 인천 아시안게임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복싱팀 감독으로 활동하는 등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미국 언론에선 틈만 나면 이 사건을 들먹이며 부당함을 주장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양태영 오심 사건이 벌어지자 귀신같이 태세전환하며 입을 닫았다.[88]

16.3. 도핑 사건



16.3.1.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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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존슨약물 복용 사건이 적발된 대회가 바로 서울 올림픽이다. 칼 루이스와 벤 존슨의 대결과 관심이 높았던 100m 결승에서, 1위로 골라인을 통과한 것은 벤 존슨이었다. 하지만, 우승 직후 약물 검사에서 약물 복용 사실이 적발되면서 금메달을 박탈당하고, 금메달은 칼 루이스에게 넘어갔다. 다만, 그만 약물을 복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칼 루이스도 약물을 복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남자 100m''' 경기는 올림픽에서 마라톤, 축구와 함께 가장 많은 세계적 관심이 쏠리는 핫 이슈 종목[89]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만약 남자 육상 100m가 아닌 다른 일반 종목이었으면 상대적으로 잠잠히 넘어갔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90] 그만큼 남자 육상 100m가 올림픽의 꽃이란 의미다.'''
조선일보 2012년 6월 1일 관련기사에 의하면 당시 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이 "루이스의 음모로 인해 박탈당했다"고 주장에 따라 논란이 일었다.
다만 벤 존슨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던 것이 80년대까지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국가대표 체육인들의 약물 복용이 만연했으며 한때 동독에서는 이를 적극 권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약물의 힘으로 금메달을 차지하려고 한 시도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벤 존슨의 경우는 서울 올림픽 당시 국내외 언론에서 지나치게 집중 포화를 퍼붓다 보니[91] 그 이후에도 전세계적으로 유명스타에서 졸지에 약물 스프린터라는 오명이 붙으면서 몰락하였고 출전한 대회에서도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받게 되었으며 90년대에는 선수 자격까지 박탈당하여 다시는 트랙 위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우여곡절이 많은 육상 커리어에 대해 반성을 많이 했는지 벤 존슨은 반(反) 도핑 전도사로 활약하며 자신의 금메달을 박탈당했던 곳인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찾아오기도 했다. 최근에는 트리비아의 샘, 퀴즈 탤런트 명감, 수요일의 다운타운 등의 일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빨리 달리기와 관련된 것이 나오면 땔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쓸데없이 거창한 소개에 비하여, '''순방향으로 움직이는 무빙워크 위에서 달려도 10초대를 못 넘거나, 거대 송풍기를 등지고 달렸음에도 11초를 기록하는 등''' 최후에 고통받는 모습 같이 용두사미로 끝나버리는 게 다반사.
역으로, KIST에서 벤 존슨의 약물 복용 사건을 밝혀내어 우리의 도핑테스트 기술을 전 세계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냥 듣보잡 선수 하나 잡아낸 수준이 아니라 올림픽 최고의 스타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리고 다시는 나와서는 안 될, '''역대급 월척'''이다. 사실 100m 경기 자체가 올림픽에서 중계권료와 광고료를 및 시간 비율과 주목도까지 모두 포함해보면 가장 비싼 종목임을 감안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건(!) 덕분에 2002 월드컵, 2011 대구 육상선수권등의 주요 대회에서도 도핑테스트를 우리 손으로 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벤 존슨의 유죄를 밝혀낸 당시 수장인 박종세 박사는 이후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3월에 식품의약품안전청장까지 올라갔는데 1999년 1월에 제약회사에 뇌물수수(...)로 인해 집행유예를 받아 흑역사가 되었다.# 이후에는 2000년에 바이오 벤처기업을 열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검색되는 근황은 없다.#

16.3.2. 기타 선수 논란


여자 100m 우승자인 그리피스 조이너에 대한 약물 복용 의혹도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100m 올림픽 미국대표 선발전 기록인 10초 49는 여자의 기록이라고는 믿기 힘든 엄청난 기록이었으며, 아직까지 깨어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 하지만, 조이너 선수가 98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이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외에도 역도 선수들의 약물 복용 적발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대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대회 수영 6관왕을 차지했던 동독의 '크리스틴 오토' 역시 약물 복용 논란이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있다.
10종 경기에 출전해 금메달을 수상했던 동독 선수 크리스티안 솅크2018년 9월에 도핑 사실을 자백했다. 그런데, 공소 시효가 끝나서 메달이 박탈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당시 소련 (현 러시아) 선수들에 대한 도핑 의혹 역시 끊이지 않았는데, 88올림픽 뿐만 아니라 이후의 2014 소치 동계 올림픽과 2016 리우 하계 올림픽까지 약물복용을 했다는 게 확실시되고 있다. 그리고, 그 의혹은 2016년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이 발각되면서 더욱더 힘을 얻고 있다.

17. 방송



NBC 올림픽 엔딩
  • 원래 대부분 개회식은 밤에 하는 것이 관례인데, 한국의 오전 11시가 미국의 프라임 시간인 저녁 시간대라서 NBC 방송의 요구로 대낮에 열렸다는 이야기가 많이 퍼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서울올림픽까지는 모든 올림픽의 개회식이 낮에 열리는 것이 관례로 당장 바로 직전인 LA 올림픽 개회식도 현지시간 정오에 시작하였다. 이 관례는 2년 뒤에 열린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때 개회식을 저녁에 열면서 깨지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계속 개회식이 밤에 열리고 있다. 사실 밤에 개최하면 다양한 조명 효과를 연출할 수 있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다. 중간에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개회식이 낮에 열렸기 때문에 서울올림픽은 개회식이 낮에 열린 마지막 하계 대회이다. 하지만 NBC의 요구로 주요 결승전이 한국의 프라임시간보다 약간 뒤인 오후 9시에 치러지진 것은 사실이며, 미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몇몇 종목은 자정이 지난 후 결승전이 끝나기도 하였다.
  • 1988년도 BBC Olympic Grandstand는 서방세계 제도권 방송사 타이틀에 한글이 등장한 거의 유일무이한 사례. 붉은색 한글로 '한국'이라고 써놓았는데 이 로고는 대회 내내 전 영연방에 방송되었다. 관련 영상
  • 미국 프로그램 젠장뉴스에서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강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도중에 군인들을 동원했는데 군용 헬리콥터가 장비를 운반하다가 추락하면서 폭발하여 군인 4명이 사망했다는 내레이션과 같이 동영상(33초부터)을 방영한 바 있다. 그런데 이건 올림픽 이전이 아니라 2001년 5월 29일에 올림픽대교 위에 성화모양 상징물을 올려달라는 서울시의 협조 요청에 군이 응하여 치누크 헬리콥터로 장식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다리 위에서 하강 기류가 발생하여 뜨지 못하고 계속 하강하다가 결국 다리 구조물과 장식에 충돌하여 추락 및 폭발한 사건이다. 이 프로그램이 잘못된 정보를 보여준 경우이다.

MBC의 개회식 당일날 ID 서울올림픽 개막 시간인 오전 10시 맞춰 북소리를 내는 것이 포인트.
  • KBS 뉴스 9의 경우 올림픽 기간동안 아예 올림픽 경기/행사 장면을 배경으로 오프닝을 내보냈다(위 영상). 특히 이 때 쓰인 오프닝 음악은 오히려 1990년대보다도 더 낫다는 평을 받는지라 올림픽 기간에는 더욱 그 간지를 자랑한다.
  •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대회 기간에는 방송 2사가 뉴스와 한두 개 정도의 드라마, 교양프로를 제외하고 하루 종일 올림픽 경기를 보여줬다. 심지어 올림픽 기간 중에는 교육방송인 KBS 3TV(현재 EBS의 전신)조차도 매일 정규방송 말미에 외국인을 위한 올림픽 안내프로그램을 영어와 불어로 송출하고, 정규방송이 없던 아침~낮시간대에 사이클 도로경기, 승마 종합장애물 같이 경기시간 한참 걸리는 비인기 종목을 중계해 줄 정도였다. 케이블조차 없던 시절이다 보니[92] 휴방러시 때문에 드라마광인 아줌마들도 짜증냈고,[93] 양 방송사 통틀어 <메칸더 V>나 <또래와 뚜리>, <별나라 손오공> 같이 당대에 방영하던 만화영화 및 어린이 드라마를 못 봤던 국딩들도 짜증을 냈다. 하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는 이에 내색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터라...[94] 근데 거꾸로 평소에는 안 하던 낮 방송을 계속 해주니 낮에 AFKN 말고 우리말 방송을 볼 수 있다고 좋아하던 사람들도 있긴 했다. 당시에는 평일엔 아침 6~10시, 저녁 5:30~새벽 1시에만 방송을 하였다. (KBS 3TV는 오전방송 없이 4:30~12:00).
  • 방송계 역시 서울올림픽 방송실시본부(SORTO)가 올림픽 방송제작용으로 신형 방송장비들을 개발해 방송기술 발전에 공헌했고, 방송사 내부에서도 올림픽을 앞두고 각종 방송시설을 들이면서 방송기술과 화면을 개선했다. 비디오 시장도 올림픽 전이던 1988년 4월 기준 VCR 보급대수 180만 대를 연말에 220~250만 대로 증가시켜 영화산업을 초월시켰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세계 최초로 HD방송을 한 올림픽이다.[95][96] 분명 영상을 보면 HD 영상소스가 존재한다. 출처,[97] 아카이브, [98]
  • 2018년 9월 16일 14시 KBS1 88 서울올림픽 3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88/18' 방영. 자세한 내용은 88/18 항목을 참조.

18. 한국 측 중계진



19. 역대 조직위원장



20. 스폰서



21. 기타


  • 소련이 붕괴 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올림픽 경기이다.
  • 일제의 강제징용등으로 소련으로 넘어갔다가 살게되었던 소련 측 선수단의 통역관들이 몇십년 만에 고향을 방문해 혈육들과 재회한 일들도 화제가 되었다.
  • 다이빙 종목 우승자인 그레그 루가니스는 당시 AIDS 보균자였다. 그는 다이빙 시합 도중 머리를 보드에 부딪혀 피를 흘렸는데, 이 당시 응급처치를 위해 의사가 별 보호장치 없이 그대로 그를 치료했다. 훗날 그가 AIDS 보균을 고백하면서 큰 파문이 일었다. AIDS 약도 당시 가지고 다녔는데, 한국을 떠나 출국할 때, 검역장에서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니 공항에서 검역을 면제해 줬다고. 훗날 루가니스는 공식적으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LGBT 운동가로 활동중이다. 참고로 루가니스를 키워낸 코치가 바로 한국계 미국인이자 올림픽 영웅 새미 리.
  • 부대행사처럼 여겨지던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기틀을 잡은 것이 바로 서울 대회였다. 이 때부터 장애인 올림픽이 비로소 올림픽의 곁가지가 아니라 장애인들의 체육 행사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에, 서울 장애인 올림픽은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제 서울 장애인 올림픽의 심볼 마크가 그대로 국제 장애인 올림픽 기구의 심볼로 1994년까지 쓰였으며, 그 이후 모양은 바뀌었으나 태극 무늬는 2004년까지 심볼 모양에 남아있었다.
  • 1988 서울 올림픽의 한국 선수단 유니폼은 한국 의상 디자이너계의 거장으로 유명했던 앙드레 김이 디자인을 했다. 하늘색 재킷과 흰색 바지/스커트 형식이다. 여기에 소품으로 태극선(태극 무늬의 둥근 부채)을 접목했다.
  • 서울 올림픽도 흑자를 봤는데, 순수 입장 수입으로 인한 흑자보다는 올림픽 복권 수입 및 선수촌 아파트 분양을 통해 적자를 메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올림픽 개최로 인한 경제적 이득은 약 4,300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에 파견된 공무원, 기업체 직원들은 막상 올림픽이 끝난 후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이미 그들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서 일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고 그들을 실업자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나서서 새로운 공공기관을 설립한다. 바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이다.
  • 당시 소련 대표팀은 놀랍게도 엄청난 응원을 받았는데 특히 일본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관중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받았다.[100] 당시에는 아직 냉전이 끝나지 않은데다 소련이 KAL 007기를 격추한 지 5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가시키기 위해 국제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비난을 중단하고 국내적으로는 소련에 대한 우호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노력했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로 결국 소련이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국민들도 소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물론 당시 미국 NBC 취재진들이 한국의 집창촌이나 PX 유출 같은 것에만 사실상 한국을 폄하하는 식의 편파보도를 한데다가 주한미군들에 의해 벌어진 사건사고, 미국 선수들의 추태 그리고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이 겹쳐서 상대적으로 소련에 대한 감정이 괜찮아졌던것도 있다고 알려졌었지만 그 실체는 당시 운동권에 의한 조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황순원의 손자이자 당시 운동권에서 활동하던 황성준의 주장에 의하면 미국과 소련의 농구경기가 치러질때 자신이 현장지휘하는 운동권 인원을 대거 투입해서 현장에서 소련팀을 응원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성공하여 일방적인 소련응원분위기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실제로 황성준은 그후 소련팀 응원이라는 사건을 자기 성과로 상부에 보고한 소련측 요원의 초청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되고 그 것이 계기가 되어 소련에 몇년간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증언영상
하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당시로써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소련이 불참한 명목상의 이유가 '선수들의 안전'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소련을 올림픽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기로 결정한 이후 언론은 KAL 007기 격추사건을 보도하지 못했다. 올림픽이 코앞이던 1988년 9월 1일은 KAL기 격추사건 5주기였지만 언론은 KAL기 격추사건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소련이 북한을 버리고 올림픽 참가를 결정하면서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남한이 승리했음을 알게 되고 충격을 받은 운동권 학생들도 많았다. 특히 정통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PD계열이 그러했는데, 사실상 이 때와 이후 진행된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PD계열이 약화되었다. 김문수, 이재오 등의 PD 출신 보수 정당 정치인들이 사민주의를 거쳐 우파로 전향한 것도 이때쯤. 결정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한국인들이 일방적으로 소련을 응원하는 모습은 사회적으로 미국의 의미와 소련의 의미에 대한 고찰을 하게 만들었다.
  • 1989년에 북한측은 서울 올림픽을 쫓아가려고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했으나, 엄청난 비용부담 때문에 경제난으로 이어져 훗날 3대 실정 중 하나로 손꼽힌다.
  • 소련 올림픽 농구 대표팀은 당시 아마추어인데도 세계 최강으로 인정받던 미국 농구 올림픽 대표팀[101]을 준결승에서 꺾고 결승에서도 승리해 금메달을 획득한다. 패배에 충격받은 미국은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프로농구(NBA) 스타 선수들을 총출동시켜 우승을 차지한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소련 농구팀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해 소련 농구팀에게 설욕은 하지 못했지만 이 때부터 미국 농구 대표팀은 '드림팀'으로 불리게 된다. 이 때문에 1992년과 1988년 남자농구는 1-3위가 뒤바뀌었다. 1988년에는 소련, 유고슬라비아, 미국 순서였는데, 1992년엔 미국, 유고슬라비아의 후신 중 하나인 크로아티아, 소련의 후신 중 하나인 리투아니아가 나란히 1, 2, 3위를 차지했다.
  • 개막 1개월 전에 소련 외무부의 영사급 외교관들이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102] 올림픽 폐막 후인 10월 10일까지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 머무르면서 소련 선수단과 관광객을 위한 영사관 업무를 진행했었다.[103] 미수교 상태인데다 대표부조차 없는 일체의 미교류 관계였기 때문에 이렇게 임시로 영사관을 만들었던 것. 소련 외 공산권 국가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국민의 영사 업무를 진행했다.
  • 이 당시 미국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감정은 상당히 안 좋았는데, 안 그래도 미국정부에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노태우 당선에 대해 대놓고 축하 논평을 낸 것과[104] 경상수지 적자가 벌어진다면서 감내놔라 배내놔라 하는 참견질, 일방적인 영화시장 개방, 미국정부의 한국 노태우 정부에 대한 정경유착 및 내정간섭 등으로 시달린 데다, 서울올림픽 직전에 주한미군 자녀가 임산부를 폭행하고 주한미군 병사가 택시운전사를 폭행하는 사건이 보도가 난데다가, 개회식 입장에서 미국 선수들이 자기 안방인 것 마냥 무질서한 분위기[105]를 보여주었고, 거기에다가 올림픽 방영권을 지니고 있는 미국 NBC 방송국이 올림픽 기간 내내 집창촌이나 미군 PX 물품 유출같은 한국의 안 좋은면만 집중적으로 조명하면서 한국을 폄하하는 보도를 한데다가 변정일 사건이 터졌을때도 마찬가지로 일방적으로 편파중계를 했고, 거기에 미국 선수 일부의 태극기 모욕, 그리고 미국 수영선수단이 절도를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당연히 NBC와 미국 선수들의 이러한 행태에 국민들은 "미국이 한국을 아직도 후진국으로 생각하면서 내리깔고 무시한다!!"고 분노했고, 안하무인격인 미국에 대한 비난여론이 급속히 증폭되었다. 거기에다가 이 상황에서도 NBC 제작진이 한국과 변정일을 비웃는 티셔츠의 제작을 문의하는 일까지 알려지자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준결승전에서 한국관중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사태가 터졌다. 그제서야 심각성을 깨달은 미국은 급히 한국인 달래기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정부와 정치권에서 무분별한 반미감정은 한미관계에 도움이 안된다면서 자제에 나서달라고 부탁했으며 미국 선수단이 폐회식 때 한국을 달래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겨우 무마되었지만 그래도 NBC가 사고를 치는 일만큼은 30년 뒤 한국에서 다시 평창 올림픽이 열렸을 때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 당시 공산권 국가들은 적극적인 체육 선수 육성을 통해 국제 스포츠 무대에서 제법 선전한 편이었는데, 이 대회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 여자 기계체조 단체전에서는 소련이 금메달을 따내면서 소련 국가가 연주되고 소련 선수 일부가 이를 대놓고 제창한 것도 모자라, 은메달과 동메달마저 각각 루마니아동독이 차지해서 유럽 공산권 3개국의 국기가 대한민국의 경기장에 휘날리는 풍경이 펼쳐졌다. 물론 정치와 스포츠는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올림픽 정신인데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무려 12년만에 공산권과 서방권이 한 자리에 모여서 당대 최대 규모의 올림픽이 치러진만큼 당시의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이나 공산권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념하고, 서울 올림픽의 평화와 동서 화합의 정신을 살린다는 취지 아래 서울평화상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초기 수상자들은 완전 엉망이었다. 오늘날에는 좀 잠잠했지만, 수상 초기에는 정말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수상 재단도 내분에 시달렸다. IOC 위원장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가 있질 않나...
  • 정부가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정치 선전 자료로 지나칠 정도로 이용해 먹자 시인 김용택은 <팔유팔파>라는 시를 지어 이를 비판했다. 팔육팔팔의 오타가 아니고 진짜 제목이 팔유팔파다. 아래 내용은 그 중의 일부다. 과장된 내용 같지만 진짜 저렇게 팔육팔팔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선전해댔다.
>얘야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우리덜은뭐시그리좋다냐소값이나쌀값이나객지서노동일허는니동생임금이라도올라간다냐……그나저나오림픽이끝나며는저텔레비전속사람들이나왼갖치사와축사속의사람덜은무신소리로안정된선진조국과정의복지를위하여침을튀길까그러고우리덜은무신재미로살끄나무신희망으로와와절망하끄나. 해가떠도오림픽달이떠도오림픽빚이져도오림픽소값개값되어야도오림픽죽으나사나오림픽인디아아아아아그때는참말이제무슨절망으로아아대한민국아아대한민국허여무신재미로살끄나……그나저나팔유팔파오림픽이열리며는그누구의말대로거시기뭣이냐민족사의왼갖질곡과시련을극복하여그종지부를꽉찍을까그럴까우리하늘이저쪽끝에서저쪽끝까지훤하게갤까
  • 서울 올림픽에 관련된 지명들이 서울특별시 시내에 여럿 남아 있다. 올림픽대로, 올림픽대교, 올림픽공원, 송파구 오륜동, 올림픽선수기자촌, 올림픽로[106], 88올림픽고속도로 등. 88올림픽고속도로는 대구와 광주를 잇는 고속도로로 물론 서울시에 위치하지는 않지만 이 고속도로 명칭 역시 서울올림픽을 기념한다는 취지로 명명되었다. 2015년 12월 22일 대격변급의 개량공사 완료 및 4차로 확장 개통과 함께 광주대구고속도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 내부에는 올림픽체육관 이란 이름의 체육관이 존재하는데 88올림픽 당시 학교측이 부지를 제공하는 대신 국비로 체육관을 짓기로 해 실제 올림픽 당시 경기장으로 활용되었다. 현재는 예술/체육대학 단과대 건물로 활용중이며 교내 행사 등에 자주 사용된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단 주경기장이 송파구에 있는데다가 처음 송파구가 분구되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당시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올림픽을 기념한다며 송파구의 명칭을 올림픽구로 변경하려고 추진했지만 대부분의 지역주민들이 "5백년 역사가 담긴 많은 유적지와 송파 산대놀이, 송파 답교놀이, 송파 나루터 등으로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진 ’송파‘라는 이름은 구 이름으로라도 마땅히 남아 있어야 한다"며 맹렬하게 반대를 해 무산된 바가 있다. 다만 송파구는 1992년부터 서울올림픽의 개막일인 9월 17일을 송파구민의 날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 당시 올림픽 기간에 추석연휴가 겹쳤는데(9월 24일~26일) 공교롭게도 30년 뒤에 한국이 개최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에도 설 연휴(2월 15일~18일)가 겹치면서 한국은 자국에서 열린 올림픽 동안 자국 최대의 명절을 함께 하게 되었다.
  • NIKE에서 1988 서울 올림픽 30주년을 기념하여 에어 조던 3 서울을 더 드로우 방식으로 발매할 예정이다. 3월 7~8일 동안 나이키 공식 홈페이지에서 응모를 하면 되고, 3월 9일에 발표를 한다. 대한민국(우리나라)에서만 발매하기에 외국인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 여의도 63빌딩 주차장 쪽으로 가면 올림픽 때 대한생명이 세운 성화대가 있다.
  • 이후 KBS스포츠국은 유튜브에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곳곳에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개최 당시 기준으로 UN 비회원국에서 열린 몇 안 되는 하계 올림픽이다. 나머지는 1952 헬싱키 올림픽1972 뮌헨 올림픽.[107]
  • 2019년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중국이 서울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단을 열차에 태워 한국에 보내려 했으나, 북한의 반대로 무산됐다"는 중국 외교관의 증언이 나왔다.
  •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학생 시위를 이유로 개최지를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 의회에서 제기됐고, 당시 우리 정부가 이 같은 주장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통상 올림픽은 개최지 이름을 먼저 표시하는 것이 관례이다. 런던 올림픽, 평창 동계 올림픽 등. 그러나 웬일인지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은 유난히도 대중들 인식이나 매체에서도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과 같이 개최지를 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1] 이른바 '삼태극'으로 불리는 휘장이며, 이 엠블럼은 KBS 신관 정면에도 붙어 있다.# 올림픽 당시 국제 방송센터로 사용되었기 때문. 휘장 도안은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前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인 양승춘이 맡았다.[2] 1964년생 핸드볼 선수.[3] 유도[4] 한국어 관련 홈페이지(입장권, 스토어, 안내, 뉴스, 등등)는 폐쇄되었으며, 올림픽 위원회 공식 홈페이지만 남아있다.[5]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1984년 12월 표어를 공모했으며 총 48,019개의 응모작품 중에 홍재훈씨가 제출한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가 심사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혔으며 서울올림픽의 공식 문구로 선정되었다. 기사[6] 1970년대 이후 열린 하계 올림픽 중 가장 늦은 날짜에 열린 개회식이었다. 남반구에서 열린 2000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보다도 이틀이 늦다.[7] 축구 종목은 당시 수도권 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경기가 열렸고 요트 종목의 경우는 부산 수영만에서 경기가 진행된다.[8] 첫 번째 대회는 일본1964 도쿄 올림픽이며, 3번째 대회는 중국2008 베이징 올림픽이다.[9] 동계 올림픽을 포함하면 아시아에서 3번째로 개최된 대회. 그리고 서울 올림픽 이전 1972년 삿포로 동계 올림픽이 있었다.[10] NBC는 올림픽이 최초로 국제 중계된 1964 도쿄 올림픽 이래로 IOC에 있어 대회마다 10억달러 이상을 부담하는 최대의 돈줄이다. 이 때문에 서울 올림픽의 경기가 미국에서 보기 좋은 오전에 편성되기도 하는 등 상당한 압력을 행사한다. 이로 말미암아 다른 미국 방송사가 올림픽 중계에 나서는 것이 어려울 정도.[11] 미국에서 개최된 1984, 1996 (하계), 2002(동계) 대회의 공식 주제곡을 작곡하였다. 곡명은 각각 Olympic Fanfare and Theme, Summon the Heroes, Call of the Champions이다.[12] 제1회 하계올림픽 주경기장.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양궁 경기장이자 마라톤 최종 골인 경기장으로 쓰였다.[13] 현재의 창원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에는 진해시로 성화가 들어와서 창원시를 지나친 뒤 마산시로 향했다.[14] 현재의 통영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는 통영군충무시로 나뉜 지역이었는데 성화는 통영군으로 들어와서 충무시로 향했다.[15] 당시 명칭은 점촌시. 1995년 문경군과 통합돼 문경시가 됐다.[16] 당시 명칭은 정주시. 1995년 정읍군과 통합돼 정읍시가 됐다.[17] 당시 명칭은 이리시. 1995년 익산군과 통합돼 익산시가 됐다.[18] 당시 명칭은 대천시. 1995년 보령군과 통합돼 보령시가 됐다.[19] 당시 명칭은 온양시. 1995년 아산군과 통합돼 아산시가 됐다.[20] 현재의 평택시로 통합되기 훨씬 전이다. 당시는 평택시송탄시가 나뉘어졌는데 성화는 평택시로 들어와서 송탄시를 거쳐서 나갔다.[21] 의정부에서 서울로 오는 봉송로에는 동일로가 포함돼 있었고 그 길가에는 상계동 빈민촌이 있었다. 당시 서울특별시는 외국인들의 눈에 이 거리가 깨끗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빈민촌에 대한 강제 철거를 단행하는데 그 이야기는 아래에 후술하고 있다.[22] 축구 경기가 열린 광주 무등경기장도 사실상 전면 철거되고, 현재는 아예 야구장으로 바뀌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가 되었으나, 이쪽은 예산상의 문제로 성화대 주변의 극히 일부를 남겨놓고 구조 변경으로 처리해 만든 것이라 엄밀히 말하면 법적으로는 전면철거가 아니다. 동대문운동장도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조명탑 2개가 남아 있으므로 역시나 전면 철거는 아니며, 2018년 현재 대구 시민운동장이 이 전철을 비슷하게 밟고 있는 중이다. 또한 문화재 문제로 인해 태릉 국제 사격장이 철거 예정이다.[23] 정확히는 1번 국도-356번 지방도-39번 국도를 이용해 당시의 구파발-원당-벽제를 순환하였다. 현재 신도시 개발로 도로의 선형이 많이 바뀌어(특히 구파발역 인근) 당시의 도로와는 많이 다르다.[24] 건물 입구에 올림픽 볼링 경기를 개최한 기념비가 있다.[25] 참고로 남자 단체 구기 첫 금메달은 20년 뒤인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에서 나온다.[26] 오스트레일리아가 아닌 유럽인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별도 개최[27] 1972년과 1976년은 올림픽 운영상 실패한 대회가 맞다.[28] 1974~1991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내전으로 인한 불참이었다.[29] 1945~1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공산권 가운데서도 폐쇄적인 정책을 펼쳤고 1980년대 후반에 다소 완화되었지만 그래도 공산권에서 폐쇄적인 정책이었다. 이때 4회 연속 올림픽 불참국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올림픽 참가에 관심이 없었을 가망성이 많다.[30] 1975~1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당초 참가 의사를 밝혔으나 마감 시한까지 선수단 명단을 제출하지 않아 최종 불참 처리됨. 북한의 로비가 있었으며 불참 해주는 조건으로 북한에게 쌀 1만톤을 요구했다고 함. 응답하라 1988에서 성덕선(혜리)의 올림픽 피켓 걸 출현이 좌절될 뻔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후에 벌점자들의 대타로 우간다 선수들과 입장한다.[31] 1979~1992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이쪽은 당대에도 경제 상황이 괜찮았는데도 굳이 불참한 예이다. 다만 다당제 전환 이후로는 대전 엑스포에는 정상적으로 참여했다. (집권 정당이 교체된 것은 아니고 정권이 교체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32] 쿠바의 지원으로 1979~1990년까지 사회주의 공화국. 사실 명목상으로는 다당제 민주국가였고 여타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르게 야당 세력이 합법적으로 존재했던 나라였기에 참가가 가능했겠지만 콘트라 내전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했던 상황에 따른 불참에 가깝다.[33] 물론 모든 IOC 국가의 참가가 실현된 것은 다음 대회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34] 이들 중 북한과 알바니아, 마다가스카르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는 선수단을 파견하게 된다.[35] 사실상 그간 데탕트의 분위기가 깨지고 갑작스럽게 냉전이 다시 촉발되던 시기였다.[36] 그동안 이데올로기적 냉전의 연대기: 중공의 탄생과 6.25전쟁 => 도리어 동구권 국가들의 공산화와 이에 대한 미국의 유럽에 대한 마셜 플랜과 동시에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 실시와 쿠바사태 => 베트남 전쟁 => 탈냉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탕트 논의와 자본주의 미국 & 공산주의 소련 세력과 별개인 제3세계의 출현 =>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중국의 대립 & 공산 진영간의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 => &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이에 대한 미국의 공작, 이후 소련의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한 소련의 급진적인 변화와 북한과 중국을 제외한 동구권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직전의 변화가 시작되던 시점이 바로 서울 올림픽의 개최와 시기적으로 맞물린다. 실제로 90년대에 들어서 북한과 중국, 쿠바와 같은 일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소련 & 유고슬라비아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전부 무너졌다.[37] 손에 손잡고 가사중에 '''벽을 넘어서~'''라는 가사가 있다. 그리고 2년뒤인 1990년, 독일에서 진짜로 벽을 넘게된다.[38] 다만, 올림픽 개최 전부터 동유럽에서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올림픽이 개최되기 몇 년 전에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어느 동유럽의 체육인이 한국 코치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 며칠 후 갑자기 다시 한번 식사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에 당황한 한국 코치가 그 요구에 응한 이후 부랴부랴 부인에게 연락해서 다시 식사 자리를 함께 했는데, 그 동유럽 체육인이 매우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무리한 요구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로는 한국이 헐벗고 못사는 나라인데 일개 체육인의 집이 너무 호화로워서 한국 정부가 선전을 위해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례를 알면서도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39] 여담으로 소련 지금의 러시아 또한 여전히 막대한 땅덩어리에서 나오는 석유를 주 수출 상품으로 외화벌이를 하는 상황이다.[40] 당시 서독은 '''유럽 2위,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었는데,(순위로는 미국, 일본, 소련, 독일 순서였다.) 바로 한 단계 높은 순위였던 소련의 경우는 그 특유의 '''통계 뻥튀기'''까지 겹쳐서 단지 시장 규모라는 몸집만 컸을 뿐 내실이 별로 좋지 않았기에 실질적으로는 서독이 유럽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니 서독의 화폐에 감히 동독 마르크가 대등하다는 주장하는 것은 감히 있을 수도 없는 일.[41] 여담으로 과거 6.25전쟁 이후의 대한민국에 대한 평가는 21세기에 들어선 시점에서부터 지금의 아프리카 빈민 국가들만큼이나 혹은 그 이하 수준의 경제력과 동시에 전 국토가 초토화 상태에 이르렀을 정도로 매우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랬던 국가가 후에 개도국으로 성장하면서 선진국 문턱에 진입하면서 G20에 가입하고 또 세계 경제 면에서도 순위권에 있는 국가가 되었으니 말이다.[42] 대표적인 예로는 루마니아 혁명과 동구권 각 국가의 혁명 그리고 사실 훨씬 그 이전에 벌어졌던 프라하의 봄이 있다.[43] 당시의 통일 체코슬로바키아[44] 올림픽 개최 시도 자체는 박정희 정권 말부터 시작됬다.[45] 세계적인 축제를 개최하는 것은 곧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음에도 이를 전두환은 너무 늦은 시기에 깨달았다.[46]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노태우가 개회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번다더니"라며 분개해 하는 이순자, 착잡한 표정의 가신들, 그리고 회한으로 눈시울을 훔치는 전두환의 모습은 덤. 전임 대통령이자 개최에 큰 도움을 주었기에 전두환은 귀빈석에 위치시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47] 하나회 해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48] 민중당 계열 그룹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다.(애초에 민중당이 창당된 것이 1990년도였고...) 이들이 보수로 돌아서게 된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이 이들 인사를 영입하면서부터였다.[49] 원 출처: <장정 4: 나의 무직 시절> p309~310.[50] 원 출처: <김영삼 회고록 3: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p157.[51] 물론 직접 대한민국에 와본 경험이 없는 일본인들은 2년 전에 이어서 또 다시 TV에 비친 서울과 그 외 대도시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한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일본에 감히 견줄 수준이 아닌 빈국으로 여겼는데 말 그대로 격차가 확 줄어버렸으니. 게다가 이때는 버블경제가 절정에 달한 시기라서 일본 경제가 최전성기 시절이었다.[52] 엄청난 의의를 지닌 올림픽 개최의 성공과 동시에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눈부신 성장은 수많은 국가들의 성장의 대표적인 본보기이자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국가적 위상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되었다.[53] 1987년에 나온 대체역사물 소설 <비명을 찾아서>를 보면 저자인 복거일이 어떻게 서울 올림픽을 부정적으로 인식했는지를 알 수 있다.[54] 서독, 일본, 대한민국, 중국이 바로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55] 서독은 세계대전 후에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어 내었고 일본은 64년 도쿄올림픽 이후 선진국으로 진입, 대한민국 또한 일본과 독일과 같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중국은 모택동 사망 이후 등소평의 주도 하에 국가적으로 개혁 & 개방 시장 경제체재의 부분적 도입하였고 이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하여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에 들어서면서 초강대국 미국과의 양강 구도를 토대로 G2체제를 성립한다.[56] 애초에 일본과 독일, 그리고 중국은 처음부터 꽤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전통적인 유럽의 강자이고, 중국은 동아시아 전체를 휘어잡은 지역패권국이었으며, 2차대전 승전국이기도 했다. 일본은 말할 것도 없이 홀로 그 미국과 맞짱을 시도했던 나라였다. 다시말해 옛날부터 강대국이었던 나라인 것. 그러나 한국은 그야말로 듣보잡 그 자체인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올림픽을 개최할 수준까지 올라섰다는 것 만으로도 그 당시의 외국인들에게는 굉장히 놀라웠을 것이다.[57] 운동권은 특히 올림픽 개최를 3s정책의 일환으로 보고 반대 운동도 전개하고, 남북공동개최까지 주장했었던지라 그 충격이 더 컸던 것이었다.[58] 실제로 통계상 이 시기의 미세먼지 농도가 지금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추정되고 심지어 이 때문에 몇몇 외국인 선수들은 일본에서 기다리다가 개막 직전에야 한국으로 왔다고 할 정도. 그러나 86년 아시안 게임 이전부터 중앙정부는 환경오염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였고 관련 법 제정 및 자체적으로 개최 기간 내에 차량 이용 자제를 부탁과 거기에 길거리 쓰레기 및 각종 규칙을 지켜줄 것을 신신당 당부하면서 언급하면서 당시 국민들이 이러한 규칙을 성실히 이행함에 따라서 이후 오히려 인식이 굉장히 좋아졌다.[59] 집권 3년차에 야구에서는 아마추어 스포츠를 규합하여 프로리그의 성격인 바로 프로야구를 급조해서 출범시켰고, 연달아서 K리그의 전신이었던 슈퍼리그, 민속씨름, 다만 농구의 경우에는 당시에 프로농구라는 의미로 넘어가기 이전까지는 대학 농구와 실업 농구팀을 필두로 농구대잔치를 출범시켰다. 또한 여기에 스포츠 인재 양성을 위해 예술체육요원의 선발 범위를 더 넓히는 정책을 실시하여 수많은 스포츠인들을 양성한다.[60] 지금이야 세월이 지나 나라가 발전해서 국가적으로 스포츠 시설 건설을 지원하지만 올림픽이 열리기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그야말로 스포츠 시설들이 부족한 국가였다. 현재를 기준으로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은 낙후되었겠지만 서울 올림픽 개최 전만 하더라도 여러 비인기 종목들의 시설들이 부족은커녕 없는 것도 많았었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로 모든 올림픽 종목시설들이 건설되면서 현재도 이 때 당시 지어진 시설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봤을 때, 서울 올림픽은 스포츠 발전에 많은 이바지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61] 이처럼 전두환 정권의 올림픽의 성공은 곧 3S정책의 달성해야 할 최대의 목표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62] 이렇듯 프로 스포츠의 시대가 열렸고 비록 국민 우민화를 위한 기반으로 실시되었던 3S정책의 영향이지만 지금껏 적지 않은 프로구단들이 올림픽 당시에 지어진 시설을 썼거나 쓰고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한국 스포츠계 및 문화계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63] 아이러니하게도, 위에 서술했듯이 이 올림픽이 발목을 잡아 그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64] 경제지는 +4면.[65] 1990년대까지는 한국일보가 발행부수 200만부를 넘어서는 메이저급 신문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과도한 투자를 한데다가 IMF 외환위기로 직격탄을 맞고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한겨레와 경향에도 밀리게 되었다.[66] 물론 이용자의 의식 수준이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이 아닌지라 공중 화장실 자체의 불결 문제는 그로부터 14년 뒤인 2002 한일 월드컵 때를 앞두고 나서야 비로소 개선되었지만, 그 이전까지 시설 자체가 매우 열악했던 것에 비하면 상전벽해 수준으로 개선되었다.[67] 이는 과거 시골의 푸세식 => 도시의 현대식 화장실로 격변하는 과정이었다.[68] 그래서 당시 점주들이 이를 갖추느라 고생했다고 한다.[69] 이러한 현상은 서울 올림픽 이후였던 1990년대부터 급속도로 나타난다.[70] 물론 이는 전두환이 국내를 비롯해 미국 등의 강대국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입지에 관한 지지기반을 잘 다지지 못해, 안 좋은 국내 여론을 잠식시키고 제3세계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이를 만회해 보려는 속셈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의 국제적 지위향상과 더불어 외교노선 다변화에도 도움이 되는 등의 성공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올림픽 유치 당시 참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저가로 전세기를 띄워주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은 서울 올림픽 당시에 지켜졌다.[71] 이전까지 아프리카 지역의 경우 한국 대통령이 현지 국가에 공식 방문한 사례는 전두환이 최초였다.[72] 전두환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의 아프리카 국가 정상들과의 만남은 2006년 3월 노무현 대통령에는 아프리카 3개국 (이집트, 나이지리아, 알제리)의 국가 정상들이 종종 방한함으로써 이루어진 것뿐, 현지 방문은 없었다.[73] 애틀랜타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고, 바르셀로나는 당시 IOC 위원장인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의 고향이었던데다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에서 벗어나 다시금 약진하던 스페인이었기 때문에 만일 올림픽 유치를 놓고 맞붙었다면 한국으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였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그리고 1996년 올림픽의 경우에는 비록 미국의 상업적 로비에 놀아난 이유로 인해 애틀랜타가 유치했지만 경쟁국가 및 도시들 중 하나가 그리스아테네였다. 하필 1996년의 올림픽은 1896년에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아테네에서 올림픽이 부활하여 다시 아테네에서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한 근대 올림픽이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즉, 명분만 놓고 보면 당시 미국 월드컵을 개최한지 얼마 안된 상황에서 욕심을 내면서 유치전에 끼어들은 애틀랜타는 상대가 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거기에 실제로 전세계적으로 근대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명분상 아테네에서 개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아 큰 지지를 얻었던 상황이었으며 실제 유치전의 흐름도 아테네가 주도했던 적이 있었다.[74] (<상계동 올림픽>의 캡처영상)[75] 애석하게도 이 문제는 이후의 올림픽 때도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8 베이징 올림픽 때도 서울올림픽 때와 비슷하게 올림픽을 명분삼아 베이징 도심지와 그 근교를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150만 명이 넘는 서민들이 당국과 철거용역에 의해서 내쫓겼다. 민주국가들에서 펼쳐진 올림픽이라도 이러한 문제점에서 그리 자유롭지 않아서 이후에 치러진 2012 런던 올림픽2016 리우 올림픽 때도 경기장 근처에 있는 빈민촌을 재개발하고 거기서 살던 빈민들은 어쩔 수 없이 이사를 가든지 해야 했고, 심하면 당국과 건설업체에 의해 고용된 철거용역에 의해서 강제로 다른 곳으로 내쫓긴다거나 했다.[76] 게다가 당시 달동네 터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조차도 서민용이 아니라 중산층 등 가진 자들을 위한 주택이었는데, 당국이 재개발 계획에 10평 미만짜리 소형 아파트까지 추가시킬 시 입주 예정자들이 집값 떨어진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투기꾼들이 달동네에 몰려와 불량주택을 사서 세입자를 내쫓고, 건설업체 사주를 받는 재개발조합 임원들까지 달동네 공동체사회까지 침해해가며 가담했다.[77] 이제 난곡도 2000년대 난곡뉴타운으로 재개발되었다. 여기 살던 빈민들은 '''아예 서울특별시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78] 그러면서 정작 주공아파트가 지어지고 나서 동일로에 신호등 설치도 안 하는 등 사건사고가 잇따라 터졌다.[79] 출처: <가짐없는 큰 자유: 빈민의 벗, 제정구의 삶(제정구를 생각하는 모임 저.)> 학고재. 2000. p180.[80] 현재의 공익근무요원이나 상근예비역에 해당[81] 영화 홀리데이의 모티브가 되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당시 희대의 키워드를 곰곰히 생각해보자.[82] 일산신도시분당신도시도 이때 건설이 추진되었고 1991년부터 분양되기 시작했다.[83] 1000까지 가는 기염을 토하지만 금세 바로 무너졌다,[84] 물론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일 뿐이다. 후술할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이 편파판정의 수혜를 받은 박시헌 선수는 오히려 이 일로 인해 한국 복싱계에서 매장당했고, 무엇보다 '''편파판정의 수혜를 입은 선례가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후의 후배 선수들이 편파판정을 받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85] 5위가 신아람 선수의 2012 런던 올림픽 1초의 기적, 4위가 2008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 급 8강전, 3위가 2000 시드니 올림픽 남자 유도 100kg 이상급 결승전, 1위가 1972 뮌헨 올림픽 남자 농구 결승전[86] 당시 헝가리 심판의 노골적인 판정이 문제였는데, 실제로 이 대회에서 미국의 순위를 떨어뜨리려고 동구권 심판이 담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7] 다만 나이 들어서도 은퇴하지 않고 꾸준히 경기를 뛰면서 전적에 흠이 많이 가긴 했다.[88] 당시 미국 선수 풀햄이 마지막 크게 착지 실패를 하고도 0.049점을 양태영보다 더 얻어 금메달을 가져갔다. 이 오심으로 관련 심판3명이 징계를 받았으며, 체조종목 체점 체계까지 바뀌었을 정도로 대사건이었다.[89] 육상 인기가 태생부터 좋지 못한 우리나라에서조차 2011년 대구 육상 선수권의 남자 100m 결승전은 가장 빨리 매진되었으며 암표가 가장 많이 들끓었던 종목이었다.[90] 위에도 나오는 당시 소련 팀이 낸 여자 1600미터 계주 신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모른다.[91]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한국은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던 나라여서 흑인인 벤 존슨이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00m 종목은 칼 루이스를 비롯하여 상위권에는 죄다 흑인 선수들이 포진해 있다. 흑인이라서 피해를 입었다는 건 어불성설.[92] 다만 케이블TV의 프로토타입이라고 할 수 있는 중계유선방송에서 당대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이나 비디오 같은 것을 틀어주기는 했다.[93] 다만 으로 팬이 된 남성 시청자도 좀 있었다.[94] 그래서 비디오점이나 만화방, 만화잡지 파는 서점, 전자오락실 등의 매출액이 크게 증가했다는 후문이 있다.[95] UHD의 경우 같은 국가에서 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세계 최초이다.[96] NHK에서 MUSE 방식으로 시범방송한 것이 그것. 참고로 일본에서 아날로그 HD방송을 개시한 시기는 1989년이다.[97] NHK 공식 홈페이지 50주년 연표에 서울 올림픽을 HD로 제공했다고 영어로 적혀있다[98] 원래는 NHK의 영상을 올린 유튜브가 존재하였으나 저작권 문제로 해당 영상은 삭제되었다. IOC측의 영상 링크는 35mm 영화필름으로 촬영된 것으로, 당시 주로 사용되던 VHS보다는 고화질이지만, 필름을 스캔해도 화질이 좋은 편이라 HD급 화질로 업로드 된 것일 뿐 실제 NHK의 MUSE Hi-Vision HD영상은 아니다. 실제 NHK 영상은 거의 요즘의 HD영상과 같은 수준.[99] 패럴림픽은 서울신탁은행(現 하나은행)이 스폰서였다. 30년 뒤 평창올림픽에서는 우연히도 두 은행이 합쳐져 하나의 같은 은행으로서 스폰서가 되었다.[100] 당시는 일본 문화 개방도 되지 않은, 반일 감정또한 컸을때임을 감안해야 한다.[101] 당시 해군 의무 복무 때문에 NBA 진출이 늦춰졌던 데이비드 로빈슨이 속해 있었다.[102] 이들의 입국 비자일본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발급되었다.[103] 단, 전적으로 소련인들의 영사 업무만 진행했을 뿐,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의 소련 접촉은 일체 받지 않았다.[104] KBS, MBC 미국정부, 노태우 대통령단선 축하논평[105] 카메라에 대고 술취한 눈빛으로 욕설을 한다던지, 트랙을 벗어나 이상한 곳으로 걸어간다던지 등등[106] 올림픽 주경기장에서부터 암사동 선사유적지를 잇는 도로. 테헤란로에서 이어지며, 서울 지하철 2호선, 8호선이 이 도로 지하를 달린다.[107] 핀란드는 1955년 12월 14일에, 독일(당시 서독. 동독도 같은 날에 가입했다.)은 1973년 9월 18일에 각각 UN에 가입, 그리고 대한민국은 북한과 같은 날 1991년 9월 17일에 UN에 회원국으로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