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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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lső Magyar Köztársaság. 1918년부터 1919년까지 헝가리 지역에 짧게 존속했던 공화국.
2. 역사
이중 왕국 체제하의 헝가리 왕국은 트리아농 조약(Treaty Trianon) 체결보다 18개월 앞서 실제적으로 붕괴하였다. 1918년 10월에 베케르 내각이 총사퇴한 후 헝가리 국내 정세는 막연하였다. 10월 25일에 부다페스트에서 국민 의회가 형성되고, 그 의장에 미하일 카롤르이가 선출되었다. 그는 전쟁 이전부터 헝가리가 전쟁에 참가하는 것에 반대하였고, 친협상국의 입장을 취한 인물이었다.
그런 가운데 부다페스트에서는 볼셰비키즘을 헝가리에 실현시키려는 혁명의 무리들이 활약을 하고 있었다. 국민 의회의 중심 세력은 사회 민주당이었다. 사회 민주당의 조직을 통해서 국민 의회는 노동자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0월 31일, 국민 의회에 의한 카롤르이의 인민 정부가 수립되었다. 카롤르이 정부는 곧 국내적, 국외적인 위급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였다. 그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였으나, 헝가리는 협상국들로부터의 진격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으며, 패전국으로서 가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카롤르이 내각은 소수 민족에 대해서 완전한 자치권을 약속하였으나, 상황은 헝가리의 양보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 소수 민족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자치가 아니라 독립이었다. 구 헝가리 영토의 축소화는 명백하였다.
1918년 11월 16일에 헝가리는 공식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게 분리를 선언하고 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 이어 곧 민주적인 선거법, 토지개혁의 실시를 비롯한 각종 정책이 발표되었고, 국내적으로는 공산당에서 극우파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당이 결성되었다. 그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1919년 봄에 구체제의 지도적 정치가들이 '반볼셰비키 위원회' 및 '반혁명 정부'를 조직하여 미클로스 호르티(Miklos Horthy) 장군 통솔하에 국민군(National Army) 부대를 창설한 것이었다.
전시 내각은 극좌 · 극우파를 동시에 억압하면서 정치 상황을 안정시키려고 했으나, 부다페스트의 실업자들이 일으킨 대규모 시위를 막지 못하였다. 또한, 약속한 토지 개혁의 실시는 그 복잡한 절차 때문에 효과적인 결실을 보지 못하였다. 농촌의 농민들은 폭력으로 대토지를 몰수하였고, 도시에서는 노동자가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무질서한 국내 정세에 이어 대외적인 새 충돌이 생겨났다. 협상국은 헝가리 군과 루마니아 군 사이의 중립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헝가리로부터 영토적 희생을 강요하여 왔다. 협상국의 이 같은 강요에 격분하여 민족적 자존심이 상하게 된 헝가리의 극좌파는 혁명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더욱이, 사회 민주당은 공산당과 협의하여 혁명 러시아와 외교적 협상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혁명 러시아와 동맹 관계를 맺고 혁명 정권으로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벨라 쿤(Bela Kun)은 전권을 쥐고 적군(赤軍)을 창설하고 경찰과 적위대를 조직하였다. 또, 2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은 모두 국유화되고 금융 기관, 교육 기관도 국유화되었다. 그러나 벨라 쿤 정권의 과격한 정책은 토지 개혁 부문에서 농민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처음부터 사회주의적 집단 농장의 건설을 목표로 한 공산 정부는 토지를 농민에게 재분배하지 않았다. 토지를 갈망하던 농민은 신정권에 대한 기대를 점차 포기하였다.
그런 한편, 1919년 4월에 국외적으로는 루마니아 왕국과 체코슬로바키아가 헝가리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위기 상황의 도래로 헝가리 인의 민족 의식이 크게 고조되어 벨라 쿤의 적군의 지원병이 배로 증가하였다. 적군의 반격은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군과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가져와 협상국측이 회담을 제의하게 되었다. 협상국은 티샤(Tisza) 강 이동(以東)에 점령하고 있던 루마니아 군과, 슬로바키아를 점령하고 있던 헝가리 군의 상호 철수를 제안하여 쿤(Kun) 정권은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쿤 정권의 적군(赤軍)이 슬로바키아에서 철수했으나, 루마니아 군은 철수에 동의하지 않고 티샤 강을 넘어 다시 공격했다.
이로써 적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하였고, 협상국이 쿤 정권과의 교섭을 거부하고 헝가리 농민이 냉담함으로써 쿤 정부는 붕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권력은 군대를 통솔하는 호르티(Horthy)에게로 집중되었고, 이들 극우파는 반혁명 정권을 수립하여 1920년 초에는 헝가리 전 영토에 극우파의 영향력을 행사하며, 협상국으로부터 합법적 정부로 인정받으려 하였다. 협상국은 이들 반혁명주의자들에게 헝가리 전국을 이양하기를 주저하고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임시 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협상국의 충고에 의해 루마니아 인은 다시 티샤 강을 넘어 철수하였다.
후자르(Huszar)를 임시 대통령으로 하는 임시 정부는 곧 사민당과 노조에게 반기를 들어 수천 명의 혁명주의자를 투옥시켰다. 이에 사민당은 선거 참여를 포기하고 정부에서 대표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1920년 1월 선거는 자유 선거이기는 하였으나, 전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를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중 다수파는 보수적 기독교 민족 통일당(Christian National Union)과 소지주당(小地主黨, Small - Holders')이었다. 그와 통일 농민당(United Agrarian)은 전쟁 이전부터 호민관이었던 이스트반 샤보(Istvan Szabo of Nagyted)에 의해 조직되어 소농의 이익을 대변하였으며, 특히 토지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당 역시 농업 프롤레타리아층의 대표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1920년 봄에 반혁명 임시 정권은 무한한 과제를 안고 정권 이양 작업에 착수하였다. 4년 동안의 전쟁으로 헝가리는 큰 사상자를 내었으며, 두 차례에 걸친 혁명, 루마니아의 점령 기간 동안의 약탈 등으로 인해 그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손실은 왕국의 붕괴와, 헝가리의 분할로 생겨난 경제적 탈구 현상이었다. 산업 실업자는 급증하였으며, 자본은 볼셰비즘 대두 이래 고갈되어 버렸다. 1921년의 국가 자본은 1910년의 그것의 2%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보유고는 4%를 넘지 못하였다. 통화 팽창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산업력의 저하는 곧 농업 생산에도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회적 불안과 분열은 격심해져 산업, 농업 프롤레타리아는 2차에 걸친 혁명에 희망을 걸고 그 이전의 체제로 돌아갈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회 계층, 즉 유산자층은 혁명을 비난하면서 여기에 헝가리의 불행의 책임을 돌렸다. 특히, 양 혁명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던 유대인에 대해서 강한 적대감을 표시하였다. 중산층 역시 인플레이션에 타격을 입고 혁명을 비난하였다. 헝가리의 분할 이후 모국으로 강제 귀국한 국민은 대부분 중산층들로서 그들의 생활상은 고용된 노동자보다 비참하였다. 이들은 좌 · 우 세력의 분열에서 우파에 가담하면서 전통적이고 과격한 민족적인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 중산층이 바로 백군 테러의 장본인들로서 과격한 변화를 요구하였다. 선거 후 헝가리 전 국가는 왕조 문제로 사회 계층의 위에서 밑바닥까지 분열되었지만 합스부르크 왕조의 부흥은 아무도 원하지 않았다. 새 의회는 카롤리 정부나 쿤의 정부가 시행한 모든 정책을 무효화하고 1867년 '타협'을 선포했던 입법안 역시 파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