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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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 1세가 1881년 3월 13일에 즉위함으로서 생긴 왕국. 치열한 독립 전쟁 후에 독립하였으며, 프랑스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2. 독립 과정
근대에 이르러, 루마니아는 인접한 오스트리아 제국 덕분에 발칸 국가들 중에서 가장 일찍 서구화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결과 1848년 혁명의 물결 속에서 분열되어 반목하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통일을 지향하는 대세에 동참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의 통일을 도모하기 시작하였고, 11년이 지난 1859년, 오스만 제국에게 러시아 제국이 패한 크림 전쟁의 뒷처리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국으로서 루마니아 공국 혹은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이 탄생하였다.
이후 1878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과 함께 루마니아 왕국으로서 완전 독립하게되는데, 이 때가 루마니아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영웅인 카롤 1세[1] 가 등장한 시기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때 루마니아 성립과 통일(왈라키아-몰다비아)을 이루었고 국력 신장으로 인해서 당시 발칸 쪽에서는 거의 프랑스급 국가로 인식되었다고 한다.[2]
3. 제1차 세계 대전
독립한 루마니아는 화약고 같은 발칸 정세 속에서 자연스럽게 전쟁에 뛰어들었다. 제1차 발칸 전쟁으로 얻은 마케도니아 지역을 둘러싼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의 갈등이 폭발, 제2차 발칸 전쟁으로 비화하자 루마니아는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고 불가리아의 뒤통수를 날렸다. 결국 패전한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에게 도브루자를 할양하는 굴욕을 당해야 했다. 1년 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루마니아는 중립을 지켰으나, 러시아가 브루실로프 공세로 일시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박살내자 이에 고무되어 협상국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진공이 곧 멈추고, 독일 제국이 서부 전선의 병력 일부를 빼어 동부 전선을 보강한 후 겨울의 휴지기를 틈타 침공해 오자 순식간에 전 국토가 날아갔다. 영토는 점령당하고 '''사방이 동맹국(Central powers)에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어렵게 버텼으나 결국 종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18년 5월 7일 동맹군에 항복하며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따라 도브루자를 다시 불가리아에 넘겨주었으며, 카르파티아 산맥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통제하에 두었다. 거기에다가 루마니아 정부를 감독할 독일인 고문을 두었으며, 루마니아의 철도와 우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동 관리하에 두었다. 거기에다가 독일이 유전을 90년간 임대하고 농산물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바쳐야 한다는 등 사실상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루마니아를 반쯤 지배한다는 내용의 조약이었다.''' 물론 금세 동맹국이 패전한 덕에 루마니아는 도브루자를 찾아옴과 동시에 생제르맹 조약으로 부코비나[3] 를, 트리아농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 대부분을, 그리고 러시아 제국이 가지고 있던 베사라비아[4] 를 얻어 국토가 엄청난 크기로 불어났다. 본래 '''┘''' 형태였던 국토가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습이 된 것이 이 때며, 이 시기를 가장 루마니아가 영토가 넓었던 시기로 기록하고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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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40년의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
4. 양 대전 간의 루마니아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독립 국가 루마니아는 국가적 희망에 크게 부푼 나라로 등장하였다. 인구와 영토 면에서는 2배로 증가하였고, 이러한 새로운 지역은 산업과 자연적 요건, 자원에서 풍부하였다. 전후 철저히 실시된 토지 개혁은 농민층의 번영과 사회 안정의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1930년대에 루마니아는 발칸 국가에서 유대인 배척 운동을 가장 격심하게 일으켰으며, 유일하게도 대중적 파시스트 운동을 벌인 나라가 되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역시 동일한 문제, 즉 농촌의 저생산성, 과잉 농촌 인구, 낮은 산업화 수준으로 인한 갈등을 가져오게 되었고, 정치적 측면에서는 야심가였던 국왕 카롤 2세의 농간으로 독재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제 문제에 있어서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일과 소련 양측으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5. 자유주의적 통치
최초의 루마니아 정치 제도는 서유럽의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1866년에 채택된 헌법은 벨기에의 것을 본따 수정된 것이었지만, 실제 루마니아 정치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었다. 선거는 부패한 것이었고, 그 결과는 쉽게 조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는 민중의 소원대로 정권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의 루마니아 정치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보수당이 사라지고 민족 농민당이 탄생한 것이었다. 지주층의 이익을 대변하던 보수당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친독일적 경향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대영지의 분할 때문에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로 1922년에서 1928년 기간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였다가 1928년에서 1930년의 짧은 기간 동안 농민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인근 발칸 반도 국가들의 경우처럼 1930년에 거의 모든 정당은 해체되고 독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카롤 2세의 독재는 1940년에 그 절정에 다다랐다.
사실, 전후 자유주의자들이 루마니아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협상국을 지지하였고, 국왕 페르디난드 1세가 협상국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군부 출신인 아베레스쿠(Averescu) 장군을 수상으로 임명하여 토지 개혁과 대규모의 파업(Strike)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았으나, 그 폭동이 가라앉자 자유주의자들은 장군을 해임시키고 자유주의자 계통의 이온 브라티아누(Ion Bratianu)를 수상으로 대치하였다. 루마니아의 자유당이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왕이 그들을 후원했기 때문이며, 야당이 분열되어 있었고, 대체로 선거 조작과 탄압적 경찰력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집권 기간 동안 언제나 농민당의 강한 반대와 부딪혀 싸워야 했다.
신정부는 선거 후 1923년 헌법을 채택하여 루마니아 왕국이 중앙 집권적 국가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새로 통합된 모든 지역에서의 분리주의 경향을 거부할 것임을 뜻하였는 바, 가장 강한 반발은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에서 나왔다. 특히, 이 반대는 부쿠레슈티 은행들이 이 지역의 산업계를 통제하려는 데서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 반대파에서 민족 농민당이 결성되었는데, 이것은 트란실바니아의 민족당과 구 왕국의 농민당이 융합된 것으로서, 그 지도자는 이울리우 마니우(Iuliu Maniu)였다. 페르디난드 1세의 죽음 이후 이들 농민당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부쿠레슈티에서 격렬한 시위 끝에 섭정들은 굴복하여 농민당이 새 정부를 구성하고 선거를 주재할 수 있게 양보하였다. 이때가 루마니아 역사에 있어서 가장 자유로운 정치 시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6. 농민당의 집권
그러나 마니우 정부는 전후 루마니아의 농업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농민층에게 큰 실망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에 그는 수출 농산물의 과중한 수출세를 철폐하고 국내 곡가를 올리면서 조합의 운용을 장려하였다. 또, 재분배받은 토지 매매를 허락하는 법률을 시행하였는데, 이로써 토지 집중 현상이 다시 일어나고 중산층 농민 계급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다수 농민들은 붕괴하고 농업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였다. 1930년에 찾아든 세계 대공황은 마니우 정부가 농산물 가격을 올려 농민을 보호하려는 계획을 좌절시켰으며, 농민 보조금을 충당하기 위한 각종 계획에 자금을 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농민당이 외자 도입을 결정함으로써 농민층에 가한 국내 산업화의 부담을 완화하였으나, 대신 정부의 상당수 요인들이 서유럽 세계와의 암흑 거래에 연루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28년의 수확은 흉작이었고 곡물 수출은 크게 뒤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카롤 왕자는 왕권을 요구하면서 섭정단과 왕위에 올라 있던 자신의 아들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마니우의 실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경제 정책, 특히 농업 정책에서 실패한 것 이외에 '루마니아 민족 농민당' 자체의 성격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민족 농민당은 트란실바니아의 민족당과 구 왕국의 농민당이 결합한 것이었는데, 트란실바니아 민족당은 농민당보다 훨씬 더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농후하였고, 주로 마자르(Magyar) 지주층에게 적대적이었다. 이에 반해 농민당은 부르주아적인 자유주의자들을 지배층 이익의 대변자라고 비난하였다. 다시 말하여 농민당은 횡적인 조직이었으나, 민족당은 종적인 조직이었다. 이와 같이 2개의 상이한 집단의 융합은 필연적으로 정강의 모호함과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였던 것이다.
7. 카롤 2세의 정권 장악
카롤 2세는 정치적 권모술수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각 정당 간의 불화를 조작하여 분열을 일으키게 한 후, 다시 하나씩 분쇄하였다. 농민당이 내분으로 흔들리고 있을 동안 그는 상당수의 젊은 농민 지도자를 끌어들여 마니우에게 등을 돌리게 하였다. 이 방법을 자유당에게도 적용하여 브라티아누를 고립시켰다. 농민당 정부의 몰락 후, 자유주의자들이 내각을 형성하고 있을 때, 파시스트 조직인 철위대가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이 새로운 움직임은 발칸 반도에서 유일하게 민중적인 지지를 얻었다. 철위대의 성공의 이유 중 하나는 루마니아가 슬라브인에게 둘러싸여 있는 도중에 느낀 소외감에서 비롯된 인종적 민족주의의 발생 때문이었다. 게다가 위협적인 공산 국가인 소련의 팽창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욱 가중되었다.
이 같은 파시스트적 운동을 위해서는 반유대주의가 절호의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공황에서 온 타격으로 절망감에 빠진 많은 루마니아 인들은 구 정당에서 돌아서서 철위대를 지지하였다. 카롤 2세는 은밀히 철위대의 성장에 상당한 자금을 대었다. 철위대의 창시자는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Corneliu Zelea Codreanu)로서, 1930년대에 들어와서 민중들에게 갖은 선전으로 그 지지를 확보하였다. 먼저 그는 기존 직업 정치가들의 실정에 종지부를 찍고 행정직 부패를 일소하며, 인기 없는 유대계 중산층을 제거하며, 모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하였다. 많은 루마니아 유권자들은 그의 약속에 현혹되었고, 과격한 젊은 학생 조직이 파시스트 대중 운동에 비례하여 성장하였다.
이리하여 루마니아의 기존 정당의 서열이 무너지고 군소 정당 간의 파벌 싸움이 계속되자, 카롤 2세는 의회 정치의 무능함을 핑계삼아 군주 독재정을 수립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는 1933년 헌법을 폐지하고 1938년 2월에 조합주의 헌법을 선포하였다. 이 새 문서는 그의 특권을 크게 부각시켰으며, 철위대를 비롯한 각 정당에게는 아무런 역할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민족 재건 전선이라는 그 자신의 조직을 만들어 권력 행사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카롤 2세의 주위에는 무능하고 무정견한 정치가들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국제 정세가 나날이 위험해져 가고 있을 무렵에도 그의 부하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국가적 위기가 마침내 도래했을 때도 국민들은 응집력이나 사기를 가지지 못했고, 루마니아는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쓰러졌다.
8.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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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
영토 문제는 1940년에 재발했다. 루마니아는 헝가리, 불가리아와 추축동맹에 가담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나치 독일의 협박에 가까운 중재로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헝가리에 할양하였다. 또한 크라이오바 조약으로 남부 도브루자[6] 를 '''또''' 불가리아에 넘겨줘야 했고,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한창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던 소련의 협박으로 베사라비아를 반환하며 북부 부코비나까지 얹어줘야 했다. 결국 혼란한 사정에 1940년 9월 14일 쿠데타가 터져 권력을 잡은 이온 안토네스쿠 장군은 철위대와의 협상을 통해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미하이 1세를 복위시킨다. 안토네스쿠는 국민군단국가(Statul National Legionar)[7] 를 선포하고, 독일의 종으로 변신해 플로에이슈티 유전의 기름을 무상으로 퍼주는 것뿐만 아니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 침공을 개시하자 자국 병력을 대량으로 파견해 독소전쟁 내내 독일 국방군과 함께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 그래서 한 때는 소련에게 빼앗겼던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8] 를 수복하기도 했다.
안토네스쿠의 루마니아는 더 나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오데사를 비롯한 소련 영토를 루마니아 영토로 병합하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가담하여 전쟁터에서 유대인 등 소수민족 집단들에 대한 학살을 벌였다.
그러나 독일이 수세에 몰리고, 1944년 루마니아 본토로 소련군이 밀어닥치자 국왕 미하이 1세가 쿠데타를 시도해 정부가 전복, 추축국 전투서열에서 사라진지 몇 주 되지 않아 소련군 전투서열에 등장,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축선에서 소련군을 보조하였다. 하지만 종전 후 루마니아는 패전국으로 분류되었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독일에 그렇게나 충성하여 50만이 넘는 사망자를 냈지만 루마니아에게 돌아온 대가는 피폐한 국토였다. 그나마 2차대전 당시의 영토변경이 거의 인정되지 않아서 헝가리에 빼앗겼던 북부 트란실바니아나마 되찾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9]
9. 공산화
1946년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루마니아 농민당이 70%의 의석을 차지하자, 모스크바에서는 선거조작을 명령했고, 다음날, 블록 세력인 루마니아 공산당이 70%를 득표했다고 조작되었고, 이에 따라 1947년 12월 30일에 왕정 폐지가 결정되어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된다.
10. 왕사
- 호엔촐레른 왕조 (슈바벤계)
11. 국가
합창 버전인 'Trăiască Regele'
[1] 호엔촐레른지그마링엔 가문이다. 즉, 독일 태생 국왕으로 이후 루마니아의 친 독일적 성향에 큰 영향을 끼쳤다. 참고로 2014년에 취임한 클라우스 요하니스 대통령 역시 독일계(중세 이후 트란실바니아에서 살아온 트란실바니아 작센인)이다.[2] 지금도 루마니아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면적이 넓은 국가이다.[3] 북부 부코비나는 2차대전 이후 소련->우크라이나 영토로 넘어간다. 현재의 체르니우치 주의 서쪽 절반 정도.[4] 몰도바 중에서도 드네스트르 강 서쪽에 한정된다. 국제법상 몰도바 영토로 인정되는 미승인국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대체로 러시아-소련 영토로 남아 있었다. '대체로'라는 표현을 쓴 것은,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실질 영역이 드네스트르 강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 원래 트란스니스트리아 영역(강 동쪽) 중 일부를 몰도바 정부가 점령하고 있고 반대로 원래 몰도바 정부 영역(강 서쪽) 중 일부를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점령하고 있다.[5] 당장 위의 지도만 봐도 옆의 유고슬라비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위쪽 폴란드에게도 꿀리지 않는 위엄을 자랑한다.[6] 한국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 영어 위키백과의 관련 문서 참조.[7] 그러나 1941년 안토네스쿠와 철위대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철위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안토네스쿠가 이를 진압하여 국민군단국가는 해체된다. 하지만 안토네스쿠의 독재는 1944년까지 계속된다.[8] 현재의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제외한 몰도바 전역, 우크라이나의 체르니우치 주, 우크라이나 오데사 주의 일부인 부자크 지방.[9] 허나 도브루자 같은 경우 제2차 발칸 전쟁에서 루마니아 영토가 되기 전까진 원래 불가리아가 실효지배하던 지역이었고 불가리아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지역이었다. 게다가 1940년 영토 교환 당시 북부 도브루자의 불가리아인과 남부 도브루자의 루마니아인을 맞교환하는 인구교환을 통해 향후 분쟁의 소지를 원천 차단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