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베르트 바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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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ert Backe
1896년 5월 1일 ~ 1947년 4월 6일 (향년 50세)
1. 개요
2. 생애


1. 개요


나치 독일정치가이자 친위대 대장. 히틀러 내각에서 식량농무장관[1]을 역임하였다.

2. 생애


헤르베르트 바케는 1896년 당시 러시아 제국에 속해있던 조지아바투미에서 독일계 기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발생에 따른 혼란을 피해 독일 제국으로 피신하였고, 1920년 괴팅겐 대학교에 입학하여 농업학을 전공하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잠시 동안 하노버 대학교에서 농업지리학을 가르치는 조교수로 근무하였다.
이후 1922년 나치당돌격대에 가입하였고, 이듬해에는 정식으로 나치에 입당하였다. 입당과 함께 그는 경력을 살려 나치의 농업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1933년 총리가 된 히틀러에 의해 식량농무부의 차관에 임명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당시 식량농무장관이었던 리하르트 다레 (Richard Darré)가 히틀러와의 의견 충돌로 인해 사직당하자, 바케가 다레의 후임으로 식량농무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장관이 된 바케는 강제수용소에 있는 유대인과 독일 점령지의 소련인들에게 지급하는 식량의 양을 대폭 줄이고, 대신 이를 독일군 장병들에 지급하는 '기아 작전'을 시행하여 무려 400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발생하였다.
그뒤 1945년 나치 독일의 패망과 함께 히틀러가 자살하고, 뒤이어 카를 되니츠를 수반으로 하는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수립되자 바케는 여기서도 식량농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플렌스부르크 정부가 해체되면서 그는 장관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앞서 언급한 기아 정책의 책임자였다는 이유로 연합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바케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1947년 4월 6일 수감 중이던 뉘른베르크 형무소 유치장에서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1] 정식 명칭은 '국가식량농무장관(Reichsernährungsmini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