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팅겐 대학교

 




[image]
괴팅엔 대학교 공식 문장.
[image]
구 대강당(Auditorium). 현재는 박물관 및 미술관 등으로 사용 중이다. 지금은 중앙캠퍼스에 대강당컴플렉스(ZHG)가 따로 있다.
[image]
2013년에 새로 지어진 학습센터로, 정규 수업 시간 외에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인 일종의 독서실이다. 기존 중앙도서관의 자리부족으로 인한 불평사항에 따라 학생회가 강력히 밀어붙여 지은 건물.

In publica commoda (Zum Wohle aller, 공공의 선을 위하여)

1. 설립
2. 전통과 위상
3. 동문
4. 관련 문서


Wilhelmsplatz 1, 37073 Göttingen, 독일

1. 설립


괴팅'''엔'''[1] 대학교는 1737년 영국 왕이자 하노버의 선제후였던 조지 2세[2]에 의해 괴팅엔에 설립되었다. 현재 정식명칭은 괴팅엔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대학교(Georg-August Universität Göttingen). 이후 18세기를 거치면서 1000명이 넘는 학생을 보유하게 되며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면서 명성이 자자한 대학교 중 하나로 발전한다. 18세기 중반이라는 설립시기와 학교의 좌우명에서 확인되듯이 계몽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개혁대학교 중 하나였다.

2. 전통과 위상


설립 초기부터 박사학위를 받게 되는 학생은 괴팅엔 시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겐젤리젤(Gänseliesel)에 키스를 하는 전통이 있다. 학교에서부터 겐젤리젤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데, 이때 학교에서부터 박사 학위를 받게 된 학생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당사자를 수레에 태워서 끌고가주게 된다.
[image]
(대략 이런 모습)
20세기 초반 이후 폭발적으로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게 된다. 독일 내부에서는 '경제기적'(Wirtschaftswunder,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과 더불어 '괴팅엔의 기적'(Wunder von Göttingen)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구 10만 내외의 작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대략 44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 이러한 역사와 전통 때문에 유럽 내에서는 손꼽히는 명문 대학교로 명성이 높다. 2010년 타임즈지의 대학 랭킹에서는 독일 내에서 최고의 대학, 유럽 내에서 9위를 차지했다. 물론 영국을 제외한 유럽 내에선 대학 간 서열 자체가 큰 의미가 없기 때문에 대학 랭킹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학교 역사 초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물리학/수학 분야 교수를 맡으며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가우스가 직접 설립한 천문대가 지금도 멀쩡히 남아있다. 물리학에서 양자역학이 태동하고 현대물리학이 한창 개진되어기던 당시 막스 플랑크, 막스 보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등 내로라하는 학자들은 거의 모두 괴팅엔 대학을 거쳐갔고, 그래서인지 물리학과 수학과 커리큘럼이 굉장히 타이트하게 구성되어있다. 괴팅엔 대학교 노벨상 수상자의 대부분은 화학과 물리학 출신들이다.
대학교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학생단들이 지금도 일부의 형태로 남아있다. 근세에 괴팅엔 대학교 학생들은 학생단에 가입해 자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자신들을 상징하는 모자나 깃발, 옷 등이 존재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현대 미국의 주요 대학 문화 중 하나인 Fraternity의 원조격이다 싶은데, 술집 등에서 학생단 단위로 결투를 하거나 싸움을 하고 다녀 괴팅엔 시민들과 학교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하였다.[3] 현대의 학생단들은 공공단체격 기숙사 사교 클럽의 형태로 유지되어있는데, 선배들의 기숙사들을 그대로 물려받아 건물들이 하나같이 고풍스러운 석조/목조 저택이나 성처럼 생겼다.

3. 동문


노벨상 수상자에서 알 수 있듯이 셀 수 없이 많은 지성들을 길러내왔다. 괴팅엔 시내에서는 학자들이 살았던 집 하나 하나마다 거주 기간과 누가 살았는지를 표시해 놓은 명패를 설치했을 정도. 괴팅엔 근처의 공동묘지에는 여러 동문들의 무덤이 있는데, 이 곳에는 노벨상 수상자들만 8명이 잠들어 있다. 현재 유기화학 분야에서 유명한 루츠 애커만이 괴팅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다.

4. 관련 문서


[1] 괴팅엔이 현지 발음에 더 가깝지만 국립국어원이 일본식 발음(ゲッティンゲン)과 같은 표기를 표준으로 정하였다.[2] 독일식 명칭으로는 게오르크 2세[3] 대표적으로 나중에 철혈 재상으로 명성을 떨치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괴팅엔 대학 학생 시절 술집에서 싸움질 하고 다니던 날라리였다.[4] 한국 내에서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그림 형제는 단순한 동화작가들이 아니라 언어학과 낭만주의 문학의 거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