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마켓 사건

 


1. 개요
2. 상세
3. 존 알트겔드의 사면
4. 평가
5. 관련 문서


1. 개요


The Haymarket affair
노동절의 유래가 된 사건. 미국 노동운동계에선 그 해에 AFL(미국노동총연맹,America Federation of Labor, 2020년 현존)이 탄생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미국 노동운동 역사의 전환점으로 기념하고 있다.

2. 상세


1886년 '''5월 1일''' 토요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에서는 8만 명의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아나키스트들이 연대해 미시건 애비뉴에서 총 파업 궐기대회를 열었다. 8시간 노동을 보장받기 위한 집회는 이날 미국 전역에서 노동자 30~50만이 동참했다.
5월 3일 시카고 인근의 맥코믹 공장에서 경찰이 발포해 사상자가 나왔다. 공식적인 사망자의 수는 4명이라고 하며, 6명이라고 적은 언론에 대한 언급도 있으나, 일부의 주장처럼 어린 소녀가 사살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음날인 5월 4일,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증언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평화 시위였으나, 오후 10시 30분 경찰의 해산 시도에 누군가가 경찰 쪽으로 사제폭탄을 던졌다고[1]. 폭탄은 경찰 한가운데서 폭발, 경찰 측에는 1명이 즉사, 그 외 6명이 중경상이었다. 경찰은 즉각 대응 사격을 해, 노동자 측에 사상자 70명 이상을 낸다.
주동자 8명이 폭동죄로 체포돼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런데 충분한 수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부는 그 중 7명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최종 형이 집행된 것은 5명이었고 폭탄 제조자 루이스 링그는 집행 전날 자살했다.

3. 존 알트겔드의 사면


[image]
1893년 6월 26일 민주당 출신 일리노이 주지사 존 피터 알트겔드는 헤이마켓 사건 주동자들의 전면 사면을 1만 8천 단어짜리 장문의 글과 함께 선언했다. 그 덕택에 그나마 무기징역형에 놓여졌던 세명의 노동자는 자유는 물론 목숨까지 건질 수 있었다.
그는 당대 미국에서 가장 노동 이슈에 대해 진보적이었던 인물로, 1894년 벌어진 풀맨 철도노조 파업 사건(The Pullman Strike)에서도 그는 주 방위군 투입을 반대했으며, 심지어 같은 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연방군 파견에 동의했음에도 이를 결사적으로 막았다. 이 사건은 민주당을 친기업 보수파와 윌리엄 J. 브라이언 등의 진보파로 분열시켰다.
알트겔드는 당시 노동 운동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중산층과 그 공포를 타겟으로 한 공화당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고, 이후 선거에 연거푸 패배하면서 그의 정치 커리어가 끝나고 만다. 그럼에도 알트겔트는 '''"전혀(Never)! 내일 다시 이 사건을 다룬다고 해도 난 똑같이 행동할거요."'''라면서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알트겔드는 미국사에 자신의 모든 커리어를 걸고 신념을 지킨 정직한 정치인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

4. 평가


헤이마켓 사건 이 후로도 시카고의 노동 운동은 오히려 성장했고, 8시간 노동도 현실화 되지만 그건 이 후의 이야기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1889년 7월 세계 여러나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5월 1일을 국제적 기념일로 결정한다.
정작 미국과 캐나다에서 노동의 날은 9월 첫째 월요일이다(...)
헤이마켓 사건의 진범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자본가 측의 음모라는 주장은 음모론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가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형당하거나 금고형을 받은 8명의 노동운동가들이 참사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었기 때문에 이 판결은 세계적으로 많은 노동 운동가들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으며, 미국 역사상 가장 중대한 오심 중에 하나로 평가 받는다. 물론 미국의 역사 학자 중에서는 거기에 대한 반론[2]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식적인 학계의 주류는 헤이마켓 사건으로 기소된 8명 대부분은 현장에 있지도 않았으며 결국 재판 자체가 졸속에 누명씌우기였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헤이마켓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노동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지만, 미국의 급진적 노동운동은 반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 이후 급진적 노동운동단체였던 노동기사단은 해당 사건에 엮여 '반국가 폭력집단'으로 몰려 국민들의 반감을 사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고, 결국 미국 노동운동계는 1886년에 새뮤얼 곰퍼스(1850~1924)가 창설한 온건 산별노조연합 '미국노동총연맹(AFL)'의 주도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상돈 교수[3]는 국내에 헤이마켓 사건이 심하게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시카고에서 30만 명이 모여서 시위를 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건 미국 전역에서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지 시카고에서 시위에 참여한 인원수가 아니다. 이 파업은 시카고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당시 시카고에서 파업에 참가한 인원은 3~4만명에, 시위 참가인원은 그 2배에 달하는 8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관련 기사 몇몇 수치가 종종 잘못 인용되기는 하지만 SAT 대비할때도 헤이마켓 사건은 생사람 잡은 조작이라고 외운다.

5. 관련 문서



[1] 금속 공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채워넣고 불 붙이는 퓨즈를 연결한 물건이다. 터지면 파편 수류탄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이걸 만든 사람은 독일인인 루이스 링그(Louis Lingg)라는 아나키스트였고, 사건 이후 그의 집에서 같은 종류의 폭탄과 폭탄을 만들던 재료가 발견되어 체포되었다. 아래 사형선고를 받은 7명의 노동운동가 중에는 이 사람도 포함되어 있었다.[2] 노동 운동가들은 명백하게 유죄라는 주장.[3] 보수우익적인 경제사고 방식을 가진 인물로 19대 총선의 박근혜 후보 캠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있었다. 제3공화국 헌법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했고, 투발루가 바다로 가라앉는다는 주장은 좌익적 조작이라고 문화일보에 기재한 바 있다. 그러나 진짜로 투발루가 바다로 가라앉는게 드러나자 이에 대하여 어떤 대꾸도 하지않아 많은 비난을 받았다. 반면 보수진영의 주장을 반박하는 상식적인 주장도 제법 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