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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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회사 문화일보'''
株式會社 文化日報
The Munhwa Ilbo 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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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23352><colcolor=#fff> '''국가'''

'''설립'''
1990년 8월 29일 (현대문화신문)
'''사명변경'''
1999년 3월 17일 (문화일보)
'''창간'''
1991년 11월 1일
'''본사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2 (충정로1가)
'''대표자'''
이병규
'''임원진'''
'''발행·편집·인쇄인 · 대표이사 회장''' 이병규
'''업종명'''
신문발행업
'''상장여부'''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중소기업'''
'''임직원'''
296명 (2019년 12월)
'''매출액'''
652억 3,235만 원 (2019년 연간)
'''영업이익'''
8억 383만 원 (2019년 연간)
'''순이익'''
39억 8,216만 원 (2019년 연간)
'''최대주주'''
'''문화일보 우리사주조합 (지분 38.75%)'''[1]
'''사이트'''
<colbgcolor=#c23352><colcolor=#fff> '''홈'''
www.munhwa.com
'''SNS'''

1. 개요
2. 사시
3. 지배 구조
4. 사옥
5. 역사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외설시비
6.2. 신정아 누드사진 공개
6.3. 노무현 대통령 연설 왜곡 사건
6.4. 정청래 의원 관련 가짜뉴스 보도
6.5. 뉴데일리 수준의 보도
6.6. 철도 사진 도용 사건
6.7. 삼성 혈맹 일보
6.8. 문재인 정부에 대한 중국의 반응 왜곡 보도
6.10. 주한미군과 한국군 갈등 조장 가짜뉴스
6.11. 그 밖의 사건사고
7. 관련 문서
8. 역대 임원 및 간부
8.1. 회장
8.2. 사장
8.3. 부사장
8.4.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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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석간 종합 일간 신문. 1990년 8월, 현대그룹 계열의 '현대문화신문'으로 출발하여 1991년 11월 1일에 정식 창간했다. 다른 네임드 신문사들이 조간으로 전환하는 가운데도 꿋꿋이 석간을 유지하고 있으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발행한다. 1998년 11월, 공식적으로 현대그룹에서 계열분리 되었으며, 지금은 현대중공업이 설립한 동양문화재단과 문우언론재단이 지분 합계 61% 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현대중공업이 지배하는 언론이다.[2]
신문의 논조와 정치적 성향은 강경한 보수 우파 반공주의. 2000년대 중반에는 조중동과 함께 ''''조중동문''''으로 불리기도 했고, 심지어 문화일보 내부에서도 스스로 ''''살굿빛[3] 조선일보''''라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지금까지도 이른바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 언론'들 중에서 말단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매체 영향력 면에서는 조중동 등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신문 유료부수 순위에서도 문화일보는 10위 언저리 수준이며, 신문 구독률이나 열독률 관련 조사에서도 좀처럼 통계에 잡히지 않는 정도의 미미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 심지어 신뢰하는 언론, 불신하는 언론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거의 통계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매체 소비자들에게 존재감이 없다.
2020년 기준으로, 극심한 인력 유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3년간 무려 기자 16명이 연이어 퇴사를 한 까닭에 남은 기자들의 업무가 과중되고 있고, 다른 종합 일간지들에 비해 정치부나 사회부 등 주요 취재팀의 규모가 절반 또는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상황에서 인력 충원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회사의 경영 사정이 나빠져서 기자 공채도 진행하지 않고 있었다고.#
산하에 IT 전문 매체인 디지털타임스를 두고 있다.[4] 한때 'AM7'이라는 무가지를 발행하기도 했으나, 2013년 4월 1일자로 폐간했다.
노조는 미가맹.

2. 사시


'''빠른 뉴스의 신문, 젊고 미래를 개척하는 신문, 착한 시민에게 희망을 주는 신문'''


3. 지배 구조


'''주주명'''
'''보유주식수'''
'''지분율'''
우리사주조합
4,174,635
38.74%
문우언론재단
3,300,000
30.63%
동양문화재단
3,300,000
30.63%
총계
10,774,635
100.00%
출처: 2019년 감사보고서

4. 사옥


창간 당시 무교동에 사옥이 위치해 있었으나, 1995년 현재의 서대문사옥에 정착했다.
한편, 초창기에는 큰 인쇄시설이 없는 관계로 지방으로 배송하는 신문은 용인 현대그룹 연수원에 윤전기를 두어 신문을 찍어내기도 했다. 현재는 서울 충정로 사옥 지하에 자체 윤전기를 두고 있는 몇 안되는 언론사 중 하나이다. 2006년에 광고 물량 수주 확대를 꿈꾸며 신형 윤전기를 도입했는데, 마침 그 시점이 신문시장의 몰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였던지라, 돈은 돈 대로 쓰고 윤전기 교체의 효과는 거의 보지 못했다. 인쇄 매출을 위해 다른 신문사의 신문을 많이 찍어낸다고.

5. 역사


창간 배경은 1980년 현대-삼성((주)중앙일보-동양방송) 간 매스컴 전쟁 때 정주영 회장이 신문사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껴서라고 한다. 문화일보의 이름은 현대그룹 '''문화실''', 즉 그룹 홍보부에서 만든다고 문화일보라는 이름을 달았다.
당시의 '현대-삼성 매스컴 전쟁'이란 1980년에 두 재벌이 벌인 희대의 병림픽이었다. 당시 현대와 삼성의 규모가 엇비슷해지면서 재벌 1위 싸움이 치열해지자, 삼성 계열신문 중앙일보가 현대그룹를 헐뜯는 기사로 도배하면서 시작되었다. 온갖 비리와 부실공사, 소비자 불만 등을 포장해서 현대그룹을 천하의 개쌍놈처럼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에 언론 계열사가 없던 현대는 중앙일보를 제외한 모든 신문의 광고를 사서 공격했지만 오히려 삼성의 공격 때문에 해외수주가 무산되는 것은 물론 엄청난 손해를 입고 있었고, 이 때문에 재벌이 언론사를 소유하면 안된다고 공격했다. 결국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과 중앙매스컴 홍진기 사장, 김덕보 대표이사가 만나서 전격 화해하고 끝냈다. 한마디로 돈과 영향력을 가진 재벌 간의 추잡한 개싸움.
문화일보는 창간 때부터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의 정치적 목표에 의해 '급조된' 신문사라는 말이 많았다. 창간 당시 현대 계열사의 전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제 구독 정책을 시행하는 등 현대그룹 차원에서 엄청난 물량 공세를 펼치기도 했는데, 심지어 1992년 제14대 대선정주영 회장이 대선 후보로 출마했을 때는 문화일보 1년 무료 구독권을 현대그룹 임직원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특히 제14대 대선 기간 중, 문화일보는 노골적으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의 당선을 위해 뛰었는데, 그동안 휴간해왔던 일요판을 3차례씩 발행하는가 하면, 대선 직전에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무려 1백만부 이상을 발행하면서 이슈 몰이에 힘썼다.#
1998년부터 외환위기로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후 본사 사원주주로 구성된 우리사주조합이 신문의 경영권을 인수했을 때는 도올 김용옥 교수가 명예기자로 활동하면서 진보적인 논조의 칼럼과 기사를 쓰면서 조중동 등의 네임드 보수 우익 언론들을 비판하기도 했고,[5]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후보 시절 조중동과의 인터뷰는 거부하면서도 문화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는 승낙하기도 하는 등, 한때 2000년대 이후의 경향신문과 비슷하게 진보적인 논조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비슷한 논조를 보이던 기독교방송과 문화일보가 제휴를 맺어 기독교방송에서 주로 문화일보 기사로 뉴스 보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신문사 제휴 뉴스 시간만에만 그랬고, 나머지 뉴스 시간은 자사 기자들의 리포트로 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2004년부터 현대중공업 측에서 다시 문화일보의 경영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 신호탄은 2004년 3월에 있었던 이병규 사장의 부임이었는데, 이 때를 기점으로 문화일보는 사실상 점점 뉴데일리의 신문 버전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문화일보 논조 전환의 단적인 예가 바로 '김광원 논설위원 징계 사건'이었다. 2004년 당시 문화일보의 논설위원 김광원은 본인의 기명 칼럼들에서 조중동의 보수성과 신문시장 독과점 문제, 미국의 이라크 전쟁 등에 대해 비판하는 등, 상당히 진보적인 내용의 칼럼들을 문화일보 지면 뿐만 아니라 몇몇 외부 매체에 기고하면서 한창 언론계의 이슈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2004년 12월에 갑자기 '외부 매체 칼럼 기고에 대한 기간 연장 허가를 서면 형식으로 받지 않았다'는 사소한 트집을 잡아 사규 위반 명목으로 사측에서 김광원 논설위원에게 징계를 때려버렸다. 이는 말 그대로 '시범 케이스'가 되었고, 마침 당시 문화일보에서 임직원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었던 것과 맞물려, 문화일보 구성원들이 해당 징계에 대해서 제대로 반발도 못하고 '큰소리 나게 해서 불안을 키우지 말자'는 소극적 태도로 그냥 조용히 넘어가도록 만들었다. 경영진이 신문의 보수 색채를 분명히 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사태에 대해 사내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당시 만평을 연재하던 이재용 화백의 그림이 보수적 논조의 신문 사설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잘리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만평 담당 작가이던 이재용 화백은 "편집국에서 '사설에 만평을 맞추라'고 주문하고 있다"면서, "만평은 기명 코너여서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만 사설은 무기명이다. 사설에 맞추라는 말은 만평이 아니라 삽화를 그리라는 뜻이다"라며 편집국의 일방적인 태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김종호 문화일보 편집국장이 '비판의 무게 중심이 한나라당에 치우쳐 있다'는 식의 이유를 들어, 별도의 수정 지시도 없이 일방적으로 만평에 대한 게재 누락을 지시하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한 이재용 화백은 2006년에 문화일보를 그만 두게 된다.
심지어는 이 시기에는 오피니언란에 실린 칼럼의 서두와 결론이 일방적으로 고쳐지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일쑤였다. 도올 김용옥이 문화일보 명예기자 활동을 그만 둔 시기도 바로 2004년이었다. 김용옥이 200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해 반대하는 내용의 칼럼을 썼는데, 편집국에서 이 칼럼의 논조를 반대하며 지면 게제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 일이 벌어지자 김용옥은 곧바로 명예 기자직을 그만두었다.당시 관련 기사 또한 이런 일련의 사건들 이후 2006년에는 편집국 공채 1기 김모 기자가 '가치관과 맞지 않아 재직할 수 없다'며 회사 총원에게 전자메일로 사직의 변을 내고 퇴사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대해 당시 이용식 편집국장이 "쓴소리를 하려거든 남아서 하라"고 말하며 논쟁을 빚기도 했다.
어쟀든, 이 시기의 이러저러한 사태를 즈음하여 문화일보는 완연한 '보수 신문'의 대열에 들어섰다. 심지어 지금도 보수 진영의 본심은 조선일보을 보면 알 수 있고, 조선일보의 본심은 문화일보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이 언론계에 회자될 정도.
어쨌든 그 외에도 후술할 신정아 가짜 누드 사진 공개 사건, 정청래 의원의 육두문자 시전 가짜 뉴스, 이철우 의원의 경쟁후보 비방설 등 수 많은 기사들을 조작하여, 메이저 언론 중에서는 월간조선과 함께 소송 대상 1, 2위를 다투게 되었다. 그래서 '조중동문'이라는 말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결국 기독교방송과도 결별했다.
문화일보의 특징은 국내 유일의 동시석간이라는 점이다. 동시석간과 전통적인 석간의 차이점은 전통적인 석간의 경우 전날 일어난 사건을 다음날 오전 내에 더 숙고하고 추가 정보도 모아서 종합적으로 제시하는 형태이고 동시석간은 발행당일 오전 오후의 사건들을 실시간으로 정리해서 저녁에 발행하는 형태라는 점이다. 이 동시석간이라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석간 특성상 오후에 배달이 가능하려면 오전 11~낮 12시에는 기사 마감을 해야 한다. 그래서 문화일보 기자들은 오전 6~7시쯤 출근해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데, 3~4시간 동안 그것도 꼭두새벽에 나와서 취재를 해야 하니 동시석간은 꽤나 품이 드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유명 정치인이나 영부인의 장례식이 당일 오전에 있다, 축구 결승전이 제작 당일 새벽에 있다거나 하는 경우가 있겠다. 이러면 밤을 새거나 반쯤 실시간으로 현장 취재사항을 기사로 때려박아야 한다. 드라마로 치면 실시간으로 쪽대본을 전송하는 셈. 논조를 떠나 당일 일어난 일이라면 당일 제작 조간이 가판을 짜기 전에 속보성으로 기사를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겠으나 아무래도 품이 많이 들고 사고 가능성도 높아 양날의 칼이 되겠다. 어쨌든 석간은 이러한 사정상 취재기자들이 주중에 회사에 거의 안 들어간다는 특징이 있다. 보통 취재처로 바로 출근하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송고하고 수정하기 때문.
처음 창간되었을 당시에는 종합 일간지 승인을 받지 못해 문화 전문지로 출발했는데 1995년 7월 21일에 종합 일간지 승인을 받아 지금과 같은 일반 신문이 되었다고 한다. 초대 사장은 한국경제신문 사장을 10년이나 지냈던 이규행(1935~2008), 주필은 경향신문에서 이직한 손광식이었다. 참고로 1999년 11월 1일부터는 종이가 현재와 같은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비수도권에서는 문화일보를 보기가 매우 힘들다. 관공서나 도서관, 혹은 큰 기차역, 지하철 역 안의 신문 가판대가 아닌 이상 거의 팔지 않을 정도. 여러 종류의 신문을 비치하는 도서관에서도 문화일보는 없는 경우가 많다. 세계일보, 서울신문과 같이 발행부수가 10만 부 초중반에 머무르는 소규모 전국지들도 문화일보와 상황은 마찬가지.
2014년 3월 21일에는 원래는 다른 보수 언론들처럼 복지정책 욕하기에 바빴던 데에서 ## 교과서에 나온 복지에 대한 설명이 '지원해줬더니 놀고먹는다'식으로 왜곡됐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외설시비


2005-2006년 문화일보 지상에 연재되던 "강안남자"라는 소설이 있었다. 지은이는 유명하신 이원호. 2012년에는 중앙일보 계열인 일간스포츠에서 김성모가 각색하여 만화로 연재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거의 포르노라고 할 정도로 매회 노골적인 성표현이 묘사되었다. 제목도 그렇지만 주인공 이름부터가 '''조철봉'''. 더구나 주인공이 친구의 아내와 관계를 갖는 등, 내용 또한 도덕적으로도 막장 중의 막장이었다.
당시 문화일보와 갈등을 빚던 청와대는 이 소설을 문제삼아 청와대 구독을 끊어버렸는데, 문화일보는 이를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반발했다. 문화일보는 적반하장격으로 당시 진보 인사이자 KBS의 사장이었던 정연주를 비판하기 위해 KBS 일일드라마 어여쁜 당신에서 이혼녀가 전남편과 관계를 맺는 내용이 비도덕적이라고 주장했다.

6.2. 신정아 누드사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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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문화일보는 모 사진 작가가 보유하고 있던, 신정아의 누드라고 알려진 사진을 문화일보 신문 지면에 공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해당 사진은 그 사진 작가의 친구가 슬쩍해서 비공식적인 경로로 입수한 것이었다고 알려졌는데, 문화일보는 거기에 신정아 성로비 가능성 의혹이라는 기사까지 곁들여서, 신정아를 거의 매춘부 수준으로 묘사해 놓았던 것이다.[6]
이에 신정아는 자신이 누드 사진을 찍은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반발하면서 문화일보를 상대로 허위 보도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특히 문화일보가 이를 보도한 것은 취재 윤리를 명백히 무시한 처사였기에, 재판 끝에 신정아 측이 승소하여 동아일보는 8000만 원을 물어줬다.[7] 만약 이 사건이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한 미국에서 일어났다면, 아마도 문화일보는 신정아에게 수십, 수백 억을 물어준 뒤에 아예 언론사 문을 닫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재판 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문화일보에 보도된 누드 사진도 심지어 가짜였다. 해당 사진은 모 사진 작가가 신정아의 얼굴과 누드 사진을 합성한 사진을 다시 촬영한 것이라는 점이 재판 과정에서 밝혀졌던 것.

6.3. 노무현 대통령 연설 왜곡 사건


2007년 5월 26일, 문화일보의 이미숙 정치부 차장은 자신의 기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현대중공업에서 열린 해군 이지스 구축함 '세종대왕함' 진수식에서 "정말 이 좋은 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냐 곰곰이 생각도 해보았다.", "우리가 언제까지 북한하고만 아옹다옹하고 있을 일은 아니지 않으냐" 라고 말했다며 이지스함 진수식을 성대하게 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우리 해군이 세계최고수준이 됐다는 것을 명시적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정작 함대의 유용성에 대해선 의문을 던지는 발언을 했다'라며 비난했다. 盧 “정말 필요한 배일까” 발언 논란
하지만 정작 실제 연설의 원문은 이렇다.
정말 이 좋은 배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냐 곰곰히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북한하고만 아웅다웅하고 있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장차 저는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화해와 협력 그리고 통합의 질서로 나아가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전세계의 질서가 그와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동북아시아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이 동북아시아의 멈추지 않는 군비경쟁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구경만 하고 있을수는 없다는 것이죠.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스스로 힘을 함부로 쓰지 않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평화를 지키고자해도 스스로 평화를 지킬 능력이 없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역사에서 우리가 얻었던 교훈대로 이제 우리 스스로를 확실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가야 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전투능력이 오늘 이 이지스로써 표현되는거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앞으로 해군력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의 전투력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확실하게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전쟁을 확실하게 억지할 수 있는 광의의 방위력을 확고하게 갖추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논란은 커녕 "이게 꼭 필요할까 생각해 봤는데, 언젠가는 필요 없어질 날이 오긴 하겠지만, 그때가 언젠진 모르겠고, 힘을 가진 자만이 평화를 지키고 누릴 수 있으므로 이지스 함이 꼭 필요하다." 라는 완전 반대의 뜻을 연설문 첫줄만 빼서 엉뚱한 소리를 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 연설 도중 노무현 대통령은 만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지스 함에 대한 자랑과 함께 "우리나라의 국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유지되며 대한민국 최고의 번영의 시대를 대표하는 그 분의 이름을 딴 배를 우리나라 해군이 갖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축하할 일입니까!" 라며, "이제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이 된 것이죠 어디서 돈 주고 사온것도 아니고 현대중공업에서 만든 것입니다."라는 발언까지 했다. 이런 엄청난 칭찬 세례는 싹 잘라놓고 '필요없는 배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완전히 왜곡한 것이다.
이후 이 기사를 쓴 이미숙 기자는 '소설녀' 라는 비난을 받았다. 참고로 이미숙 기자는 국제부장을 거쳐, 2020년 현재 논설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6.4. 정청래 의원 관련 가짜뉴스 보도


문화일보는 총선 기간인 2008년 봄, 선거운동을 하던 정청래 의원이 지역구 내 어느 초등학교의 교감에게 욕설을 했다면서 총 9건의 기사를 통해 대대적으로 집중 보도했다. 그리고 연이어 이를 조선일보가 크게 인용 보도하면서 정청래 의원은 선거운동에 큰 타격을 입었다. 결국 정청래 의원은 낙선하고야 말았다.
그러나 해당 문화일보 등의 보도는 가짜 학부모의 거짓 증언에 따른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문화일보에 가짜 학부모의 인터뷰를 중개해준 이가 바로 강용석 한나라당 후보의 선거운동원이었던 사실도 검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그 후 해당 '가짜 학부모'와 한나라당 선거운동원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는 정청래 의원이 2006년에 문화일보에 연재되던 '강안남자' 소설의 음란성을 국회에서 문제삼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평이 많다.
이때 당선된 이가 바로 그 유명한 '''강용석''' 의원. 2009년 정청래 의원은 결국 문화일보를 상대로 한 정정보도 청구소송에서 승소했으나, 이미 국회의원에서 낙선된 이후였다. 그러나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정청래가 승리한다.

6.5. 뉴데일리 수준의 보도


문재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부산에서 출마를 한다고 하자, 뉴라이트 계열 언론사("라이트뉴스")와 문화일보만이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옛명칭)이 맞대결을 위해 백태웅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 교수를 영입할 것처럼 보도했다. 그러나 백태웅 교수는 1991년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하는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이 사건은 당시 안기부가 해방이후 최대규모의 지하혁명조직이라고 평가했던 사건이다. 과거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 수많은 조작사건이 있었지만, 이 경우는 실체가 명확히 있는 사건이다. 당시 체포된 사노맹 조직원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노동자계급혁명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타도할려고 했다는 증언을 남겼다. 이들은 심지어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자체적인 무기와 독극물 개발까지 시도했으며, 유사시 무기탈취와 구체적인 봉기계획까지 수립했을 정도였다.
백태웅은 한나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과도 거리가 먼 성향으로, 본인도 출마 의사를 한번도 밝힌 적이 없다. 아마도 한나라당 인사 한 명의 아이디어에 낚인 문화일보 기자가 추측성 기자를 쓴듯 하다. 마치 "조갑제지만원진보신당이 영입하려고 한다."수준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기사화 한 것이다.

6.6. 철도 사진 도용 사건


2013년 11월 15일에 정부에서 자동차 운송 전용 열차를 국내 도입해 명절 기간에 활용하고자 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는 기사를 올리면서 모 철도 블로거가 직접 촬영해 자기 블로그에 올린 사진을 무단도용했음이 알려졌다.
원작자의 글
원문 기사. 이후 사진이 삭제된 상태.
다행히도 누군가 퍼 놓은 것
원작자가 증거자료로 올려놓은 글
합의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예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결국 문화일보 측에서 도용을 인정하고 인터넷판에 떴던 사진을 모두 삭제했으며, 피해자가 소정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6.7. 삼성 혈맹 일보


'''"앞으로 좋은 기사, 좋은 지면으로 보답하겠습니다"''' - 김병직 문화일보 편집국장

'''"문화일보, 그동안 삼성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물론이고요. 도와주십시오. 저희는 혈맹입니다."''' - 김영모 문화일보 광고국장

''' "어려운 여건에서도 문화일보를 배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무엇이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소용될 일이 있으시면 하시라도 하명해주십시오. 다시한번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일교차가 큽니다. 건강유념하십시오! 김영모[8]

각골난망" '''

시사 주간지 시사IN 517호(2017년 08월 12일), 그리고 미디어오늘후속기사에 따르면, 문화일보의 편집국장이 삼성에 노골적으로 협찬액을 구걸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유리한 기사를 쓰겠다고 한 정황이 드러났다. 이른바, "삼성 장충기 문자 게이트" 사건.
그러나, 장충기 문자 게이트 폭로이후에도 여전히 이에 대한 보도나 심지어 사과발표조차 전혀 없다. 문자 내용처럼 삼성과 이재용에게 "좋은 지면으로 보답하고있습니다". 이외에도 한겨레/JTBC를 제외한 모든 주류신문과 주요방송이 장충기 문자를 다루고 있지않다.
MBC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 따르면 아예 삼성에 충성하기 위해 언론의 중립성 따위는 포기해버린듯한 문자까지 보냈다. 위에 볼드체로 언급된 문자가 바로 그 것.
삼성 장충기 문자 청탁 사건 참고.
이게 밝혀진 이후 삼성에 대한 문화일보의 충성은 더더욱 노골화되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문화일보를 보면 삼성의 심리를 알 수 있다는 평가도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삼성의 시각에서 현안을 바라보고 있다는 평가가 생겨나고 있는 중이다.

6.8. 문재인 정부에 대한 중국의 반응 왜곡 보도


원문 기사@지면기사 및 항의문@, 그리고 반론 기사@ 문화일보가 중국이 한국의 문재인 정부를 지극히 불신한다는 내용의 기사를 냈는데, 이 기사에 이름이 실린 중국 대학교 교수가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항의한 사건. 항의 이후 명의 도용한 교수의 이름은 빠졌지만 기사는 내리지 않았다.

6.9. 설훈 국회의원 20대 비하 사건


설훈 국회의원의 설훈 국회의원 20대 비하 사건 인터뷰를 받은 두 언론사 중 한 곳이다. 나머지 언론사는 폴리뉴스.

6.10. 주한미군과 한국군 갈등 조장 가짜뉴스


문화일보의 김영주 기자와 정충신 기자는 2020년 6월 4일자 기사에서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이 지난해 8월, 전시작전권 전환을 위한 기본운용능력(IOC) 검증 훈련 도중 크게 실망해 성남의 전시지휘통제소인 'CP탱고'를 떠나 평택기지로 돌아갔으며, 이는 한국군의 전작권 행사를 상정한 유사시 시뮬레이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IOC 훈련 직후 '성공적'이었다는 우리 군의 공식 발표와 달리 미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가짜뉴스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한미군은 다음 날인 6월 5일, 해당 문화일보 보도에 관해 이례적으로 발표한 성명에서 "완전한 오보", "근거가 결여된 억측"이라면서, "(이러한 오보는) 70년간 이어진 한미동맹에 해만 끼칠 뿐"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로버트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당시 훈련을 중단하고 훈련장을 이탈했던 것은 훈련 기간 도중에 에이브럼스 사령관의 장모가 미국에서 갑작스럽게 별세한 바람에 장모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심지어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직접 2019년 8월 18일, 미국 현지에서 장모의 장례식을 치른 사실을 알리며, 본인 트위터 계정에 애도와 감사의 글을 올리기도 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은 항의 성명에서 "당시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훈련 도중 현장을 떠난 이유는 IOC 훈련 기간이었던 작년 8월 12일 발생한 '장모의 별세'로 인한 것이었다고 설명하며, "에이브럼스 사령관은 갑작스런 비보에 즉각 지휘소를 떠나 아내와 가족들이 있는 미국으로 출발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이는 대한민국 국방부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한미연합사령부에 의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다른 이유로 지휘소를 떠났다고 하는 것은 커다란 손실을 입은 그의 가족과 에이브럼스 사령관에 대한 모욕"이라며, "문화일보 기자들은 저널리즘의 기본을 지켜 주한미군에 문의했어야 한다"고 문화일보의 보도에 일침을 가했다.관련 보도
우리나라 국방부도 문화일보의 해당 보도에 대해 강력한 유감을 표명했다. 최현수 국방부 대변인은 주한미군의 항의 성명이 나온 같은 날 정례브리핑에서 해당 왜곡 보도와 관련하여 "사실과 명백히 다른 과장, 왜곡 보도"라며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6.11. 그 밖의 사건사고


  • 2020년 3월 30일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현황 그래프를 왜곡한다는 내용의 사설을 기재했는데 이를 코로나 관권(官權)선거를 노린 의도였다고 주장하였다.# 청와대에서는 사실인 부분이 전혀 없고 도를 넘은 불공정 보도라면서 법적 검토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문화일보측에서 정정보도를 할 의사를 전해 사설 기재날로부터 3주가 된 날인 4월 21일에 정정보도를 내놨다.관련 기사

7. 관련 문서



8. 역대 임원 및 간부



8.1. 회장


  • 이규행 (1994~1995)
  • 김진현 (대표이사 · 발행인, 2000~2001)
  • 이병규[9] (대표이사, 2014~ )

8.2. 사장


  • 이규행 (대표이사, 1991~1994)
  • 손광식 (대표이사, 1994~1995)
  • 유인근 (대표이사, 1995)
  • 이인원 (사장대행 · 대표이사, 1995)
  • 남시욱[10] (대표이사, 1995~1999)
  • 김진현 (대표이사, 1999~2000)
  • 김정국 (대표이사, 2001~2004)
  • 이병규 (대표이사, 2004~2014)

8.3. 부사장


  • 이영일 (대표이사 · 인쇄인, 2000~2001)

8.4. 편집국장


  • 최성두 (1991.10 ~ 1993.11)
  • 유경환 (1993 ~ 1994)
  • 백기범 (1994.4 ~ 1995)
  • 이두석 (1995.2 ~ 1995.11)
  • 우승용 (1995 ~ 1996.8)
  • 박창래 (1996.9 ~ 1998.3)
  • 강신구 (1998.3 ~ 1998.12)
  • 김병규 (1999.1 ~ 1999.6)
  • 김호준 (1999.6 ~ 2000.10)
  • 최희조 (2000.11 ~ 2002.3)
  • 황열헌 (2002.4 ~ 2004.3)
  • 김종호 (2004.3 ~ 2005.3)
  • 이용식 (2005.3 ~ 2008.4)
  • 박학용 (2008.4 ~ 2012.4)
  • 최영범 (2012.4 ~ 2016.4)
  • 김병직 (2016.4 ~ 2019.4)
  • 박민 (2019.4 ~ 현재)


[1] 하지만 동양문화재단과 문우문화재단이 각각 30.63%씩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현대중공업이 설립한 재단으로 여전히 현대의 영향력이 크다.[2] 일례로 2014년 지방선거 때, 엄연한 현직 문화일보 기자들이 대거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 캠프에 합류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3] 문화일보는 종이 색깔이 보통 흰색인 타 신문들과 달리 살구색이다.[4] 가수 알리의 아버지가 디지털타임스의 전임 대표였다.[5] 김용옥은 2002년 12월부터 2004년 3월까지 문화일보 명예기자 신분으로 고정 칼럼 연재나 특별 인터뷰를 하며 활동했다.[6] 사실 신정아의 학력위조는 변명할 거리가 없는 범죄였지만, 예술가에게 의뢰해서 자신의 누드사진을 찍은 것은 사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종종있는 일이다. 젊은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운 몸매를 사진으로 간직하기 위해, 누드사진 촬영을 의뢰해오는 경우는 꽤 있다.[7]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언론에 대한 손해배상이 그다지 폭넓게 인정받지 못한다. 당시 신정아가 받게 된 손해배상액 8000만 원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기준으로도 언론 역사에 손꼽힐 만한 큰 금액이었다.[8] 당시 문화일보 광고국장[9] 전 현대백화점 사장.[10]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