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버 클리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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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22·24대 대통령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Stephen Grover Cleveland
'''
'''출생'''
1837년 3월 18일
미국 뉴저지 주
'''사망'''
1908년 6월 24일 (항년 71세)
미국 뉴저지 주
'''재임기간'''
제28대 뉴욕 주지사
1883년 1월 1일 ~ 1885년 1월 6일
제22대 대통령
1885년 3월 4일 ~ 1889년 3월 4일
제24대 대통령
1893년 3월 4일 ~ 1897년 3월 4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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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리처드 클리블랜드(1804 ~ 1853)
어머니 앤 닐(1806 ~ 1882)
'''형제자매'''
여동생 로즈 클리블랜드(1846 ~ 1918)
'''배우자'''
프랜시스 클리블랜드 프레스턴(1864 ~ 1947, 1886년 결혼)
'''자녀'''
루스 클리브랜드(1891 ~ 1904)
에스더 클리블랜드(1893 ~ 1980)
마리온 클리블랜드(1895 ~ 1977)
리처드 F. 클리블랜드(1897 ~ 1974)
'''친인척'''
외손녀 필리파 풋(1920 ~ 2010)
'''종교'''
개신교 (장로회)
'''학력'''
Fayetteville Academy
Clinton Liberal Academy
'''신체'''
180cm, 125kg
'''정당'''

'''주요 경력'''
'''미국 제22대 대통령'''
'''미국 제24대 대통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대통령이 되기까지
2.2. 대통령 시절
2.2.1. 1번째 임기: 1885 ~ 1889
2.3. 재선 실패 후, 와신상담: 1889 ~ 1893
2.3.1. 2번째 임기: 1893 ~ 1897
2.4. 이후
3. 평가
4. 한국과의 관계
5. 가족
5.1. 아내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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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1]

1. 개요


미국의 제22대·제24대 대통령, 역대 미국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임기가 둘로 나눠진 사람이기 때문에 제22대 대통령이자 제24대 대통령이다.
다만 1950년대까지는 클리블랜드를 그냥 제22대 대통령으로만 쳤다고 한다. 즉 제24대 대통령 시절에도 그는 그저 22대 대통령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임인 윌리엄 매킨리는 제24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제25대라는 식으로 대수가 올라갔다.
원래 이름은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였으나, 소년 시절 스티븐이란 이름을 버리고 죽을 때까지 '그로버 클리블랜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 생애



2.1. 대통령이 되기까지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클리블랜드의 집안은 뉴저지주 콜드웰의 장로회 목사 집안이었는데, 이 지역에선 목사로 나름 유명했던 집안이었다. 원래 공부를 좋아했지만[2] 16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숙부와 함께 살면서 잡화점 점원으로 일하다 한동안은 뉴욕의 한 맹인학교에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꽤 바쁜 삶을 살았지만 변호사를 꿈꿨고, 숙부의 배려로 버팔로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법학을 독학으로 공부해 1859년 변호사가 되었다. 미국사의 '독학 대통령' 중 한명.
그는 과부인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부양해야만 했기 때문에 남북전쟁 기간에도 돈을 벌어야 했다. 변호사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했는지 부지방검사, 보안관(뉴욕주 에리 카운티 셰리프국장), 버팔로 시장 등도 지냈다. 남북전쟁 당시의 징병법에는 본인이 병역에 응하지 못하면 대리인에게 돈을 주고 병역을 치르게 하고 자신은 면제받을 수 있었는데, 클리블랜드는 형 두 명이 군대에 가 있어서 혼자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법안에 따라 150달러에 폴란드 출신 이민자를 대리인으로 내보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이 점은 훗날 대권을 노리는 그에게 약간의 위기를 주기도 했다.
어쨌든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민주당에 입당했고, 여러 공직을 거치면서 정직과 성실, 원칙과 소신에 따른 행동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1883년 뉴욕 주지사가 되었다. 주지사로써도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하고 개혁을 실시하여 꽤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렇게 얻은 인기와 명성에 힘입어 대권 후보로 크게 부상, 결국 1884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후보로 지명되었다.
상대당인 공화당에서는 제임스 블레인이 나왔는데, 당시 민주당과 공화당의 당론은 관세법에 대한 견해[3] 외에는 큰 차이가 없어서 이때의 선거운동 양상은 상대 후보 흠집잡기와 개인적 도덕성을 물고 늘어지는 데 집중되었다. 공화당은 클리블랜드의 병역 문제를 두고 '병역 기피자'라고 몰아세웠고, 급기야는 공화당 지지 언론들이 클리블랜드가 버팔로의 젊은 과부와 놀아나 애까지 가졌다는 폭로성 기사까지 쓴다.
[image]
클리블랜드의 스캔들을 풍자한 만평. 당시 공화당에서는 울고 있는 아기의 대사를 약간 바꿔서 "우리 아빠 어디 갔어요!"라는 선전 구호로 클리블랜드를 비하했다. 그리고 이에 대범하게 민주당에서는 "백악관에 가셨단다. 하하하!"라는 구호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런 상황에 클리블랜드는 과부와의 스캔들을 인정했고[4], 비록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책임감을 느끼고 아이의 양육비를 지불하겠다고 선언한다.[5] 또 병역 문제는 블레인도 병역을 치르지 않고 대리인을 보낸 처지라서 그닥 클리블랜드의 발목을 잡지 못했고, 오히려 이 스캔들에 대처하는 그의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정직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개표 결과 간발의 차이(뉴욕 주의 경우 575표/0.05% 차)로 승리하여 백악관에 입성한다. 민주당으로서도 남북전쟁 이후 기념비적인 첫 대선 승리였다.

2.2. 대통령 시절



2.2.1. 1번째 임기: 1885 ~ 1889


그가 대통령이었을 때 주된 문제는 관세무역과 노동운동이었는데, 클리블랜드는 당론인 관세인하정책에 따라 관세를 낮추고 자유무역을 장려하여 시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금본위제를 정착시키는 데 노력했다. 또한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조직하였고 그 강직함으로 공직사회의 부패를 일소한 점은 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점으로 첫 번째 임기를 수행할 무렵에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시기도 바로 이 시기였다. 1886년 미국노동총연맹이 결성된 이래 노동운동은 조직화, 거대화되어갔으며, 특히 같은 해인 1886년 일어난 헤이마켓 사건은 그의 재임기에 일어난 최대의 노동운동 중 하나였다. 그러나 클리블랜드의 정강정책은 시장의 자유를 추구하여 정부의 개입을 막고 있었고, 클리블랜드 본인 역시 "국민이 정부를 돕더라도, 정부가 국민을 도와서는 안 된다."[6]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노동자에게 그닥 우호적이진 않은 인물이었다.
또한 여러 정책을 펼쳤으면서도 국민의 교육과 복지를 위한 조치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이 점도 비판을 많이 받았다. 사실 이 당시 민주당 자체가 지금의 민주당하곤 결이 좀 다른 것도 있었고.. 클리블랜드 다음 민주당 대선후보를 지낸 윌리엄 J. 브라이언 때부터 슬슬 기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2.3. 재선 실패 후, 와신상담: 1889 ~ 1893


1888년 재선을 노리고 공화당의 벤저민 해리슨과 격돌했는데, 이 때 클리블랜드는 득표수에서는 해리슨을 5만 표 차이(0.6%)로 눌렀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뒤지는 바람에 백악관을 해리슨에게 내 줘야 했다. 이런 사태가 초래된덴 당시 주미 영국 대사였던 라이놀 웨스트의 발언도 한몫 했는데, 뭔 소린가 하면 공화당 측 선거참모가 웨스트에게 선거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지만 웨스트는 "우리는 영국에 호의적이고 자유무역과 관세인하를 모토로 하는 클리블랜드를 선호하는데 굳이..?" 라는 식으로 조언을 거부한다.
허나 공화당 측에서는 이를 역으로 이용해 "영국은 클리블랜드를 원한다!"는 식으로 대대적인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는데 이게 결국 클리블랜드에게 악재가 되었다. 특히 당시 인구가 많던 뉴욕 주에는 아일랜드계 유권자들이 상당했는데, 알다시피 영국과 아일랜드는 (특히 당시에는 더) 숙적이었으니 클리블랜드에게 좋을건 없었다. 결국 이 선거도 뉴욕주에서 고작 7187표(0.54%)로 승부가 갈렸다.
그렇게 '자연인'이 된 클리블랜드는 이시기 뉴욕에 법률사무소를 열고 지냈는데, 사무소 일보다는 별장에서 낚시하는 걸 더 좋아했던 듯하다. 첫째 딸 루스를 얻은 것도 이때. 이 당시 정치활동은 1891년 대통령 해리슨에게 매킨리 관세와 셔먼 반독점법에 항의하는 공개서한을 보내는 등의 소소한 정도였다. 그래도 대통령 재선을 포기한건 아니라 여전히 준비를 하곤 있었다.

2.3.1. 2번째 임기: 1893 ~ 1897


4년 동안 와신상담하며 백악관 탈환을 준비하던 클리블랜드는 1892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어 결국 당선에 성공했고 기어코 두 번째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임기는 그야말로 악순환이었다. 해리슨 정부 당시부터 악화되던 경제상황이 결국 공황으로 확산되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디플레이션이 와 농업이 피폐화된다. 그리고 이런 공황에 힘입어 압도적 다수당을 4년간 차지했던 민주당은 중간선거에서 다시 대패하여 전체 의석의 1/3 이하로 쪼그라들고 만다.
6백개의 은행이 파산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895년에는 국가보유금이 떨어져 급히 J.P. 모건 등 거대 은행그룹에 돈을 빌려야 했다. 그 와중 광산,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다시 일어났으며, 이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강경진압에 여당의 인기는 더욱 곤두박질친다. 결국 이런 위기 속에서 허덕이다가 두번째 대통령 임기를 마치게 된다.

2.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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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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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의 모습. 사망하던 해에 촬영된 사진이라서인지 현역 뚱보 시절에 비해 살이 많이 빠지고 해쓱해졌다.
퇴임 이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만 71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평가


현재 대통령 시절 업적에 관한 평가 및 인기 순위는 엄청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무난한 수준이다. 높이 평가받는 점은 원칙과 소신, 강직함으로 부패를 근절했다는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된 노동운동 탄압과 집권 2기 경기침체를 초래한 점은 그에 대한 평가를 깎이게 하는 부분. 사실 경기침체는 그가 초래했다기보다는 쌓이고 쌓이던 것이 그의 재임 시기에 터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이전 경제정책을 딱히 수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뒷날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은 "링컨 사망 이래 1894년 사이의 대통령들 중 미국에서 가장 주도적이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높이 평가했으며, 미국의 몇몇 역사가들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시어도어 루스벨트 사이의 대통령들 중에선 그래도 가장 중요하고 뛰어난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한다. 실제로 학자나 연구자에 따라서는 그를 꽤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개혁을 앞세우며 행정부에서는 지도력을 발휘했지만, 입법부는 일정기간 여소야대를 맞이하기도 해 태클거는 의회와 으르렁거리기도 했다. 지나치게 강직했던 나머지 다소 독선적인 면도 보여서 비전 없는 정책을 밀어붙이기도 했고, 1기 행정부 때는 의회의 가결 법안을 414개나 거부하기도 해 한 임기(4년) 중에 가장 거부권을 많이 행사한 대통령이 되었다. 연설이나 글도 서투른 편이었고, 개혁 정책을 내세운다고는 했지만 그 정책도 장기적인 비전이나 융통성이 없었다는 점에선 평가가 깎이는 편.
그래도 정치적으로 다소 답답한 점은 있었지만, 자신의 모든 정책 결정에서 도덕적 기초를 생각했고 정직성과 근면성은 평가를 받았다 또 권위나 공직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추구하진 않았다. 전임자인 체스터 A. 아서와 함께 행정부의 도덕성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시킨 인물로 꼽힌다.

4. 한국과의 관계


한국 역사상 최초의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에 파견된 것이 바로 그의 재임기였다.[7] 1888년 1월 17일 박정양은 백악관에 가서 클리블랜드를 만나고 국서를 제출했다. 이 때 박정양은 사모, 관대를 착용하고 신하의 대례복인 흑단령을 입은 채로 백악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고종의 이름으로 된 당시의 국서는 이러했다.

대조선국 대군주는 대아미리가(大亞美里加, America의 음차)합중국 대백리새천덕(大伯理璽天德, President의 음차)에게 글월을 올린다. 짐은 본국과 귀국이 먼저 조약을 체결, 우의가 돈독하고 두터워 사절이 왕래한 지 여러 해가 되었다. ...(중략)... 이에 짐은 신애하는 종2품 협판내무부사 박정양을 뽑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귀국에 파견, 바라건대 성실히 서로 믿고 종우접대하기 바라며, 아울러 수시로 입관하여 짐의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대신 아뢸 것이다. - 개국 496년(서기 1887년) 8월 7일

이에 클리블랜드는 다음과 같은 답사를 했다.

"미합중국 정부는 양국이 조약에 규정된 바와 같이 상호외교교섭관계의 확립을 확인함으로써 양국이 바라던 우호적 교섭을 하게 되어 크게 만족하는 바입니다."


5. 가족


  • 아내 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 (1864~1947)
  • 장녀 루스 클리블랜드 (1891~1904)
  • 차녀 에스더 클리블랜드 (1893~1980)
  • 3녀 마리온 클리블랜드 (1895~1977) 출처 타계를 알리는 기사
  • 장남 리처드 폴섬 클리블랜드 (1897~1974) -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아버지가 대통령에서 물러난지 7달 후에 태어났다. 즉 남동생과 마찬가지로 백악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다.[8] 커서는 아버지처럼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한동안은 아버지의 당이었던 민주당을 응원했으나, 말년에는 반대로 공화당을 응원했다고 한다.
  • 차남 프란시스 그로버 클리블랜드 (1903~1995) - 이 쪽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5년 전에 태어났다.

5.1.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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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폴섬 클리블랜드.[9]
클리블랜드의 행적에서 이색적인 것 중 하나는 아내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27세라는 점이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1864년 프랜시스 폴섬이 처음 태어난 해. 클리블랜드와 프랜시스 폴섬의 아버지인 오스카 폴섬은 동료 변호사 사이로 친밀한 사이였다.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 폴섬이 태어나자 선물로 유모차를 선물했다고 한다. 사족으로, 이것은 최초의 유모차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1875년 프랜시스가 11세가 되던 해 오스카 폴섬이 마차 사고로 사망하자 클리블랜드는 직접 폴섬 가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해줬다. 그는 프랜시스를 어린 시절부터 '프랭크'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귀여워했고 프랜시스의 교육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프랜시스도 이 뚱뚱한 아저씨를 '클리브 아저씨(Uncle cleve)'라고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프랜시스가 대학에 들어가자 클리블랜드는 프랜시스의 어머니인 엠마 폴섬에게 "따님과 계속 연락해도 될까요?" 라고 물었고, 그날 이후 프랜시스의 방에는 클리블랜드가 보낸 꽃다발로 넘쳐 흘렀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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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대통령에 당선된 클리블랜드는 48세였다.[10] 그런데 그가 이 때까지도 총각이었기에 영부인 역할은 여동생인 로즈가 대신했다. 그러나 이 해에 프랜시스에게 청혼하여 곧 이듬해 6월에 백악관에서 결혼했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영부인으로 뉴욕의 웰스 칼리지를 졸업한 당시 나이는 '''만 21세'''. 당시 언론들은 대통령이 결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클리블랜드와 폴섬가의 친분을 알고 있어서인지 "분명 폴섬 가문의 미망인인 엠마 폴섬이 상대겠지" 라고 예상했지만 정작 대통령 결혼식날에 대통령의 딸뻘 되는 아가씨가 나타난 것을 보고 당황했다고 한다.
젊은 프랜시스는 영부인이 된 후에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계속해서 받았고 인기와 평판도 나쁘진 않은 편이었는데 한편으론 당돌한 면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 일화를 소개하자면, 1888년 해리슨에게 백악관을 내어 주었을 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가구와 장식들을 잘 관리해 주세요. 4년 뒤에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또한 클리블랜드가 아내를 구타한다는 정적들의 모함에 대해 직접 언론에 나서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이로써 프랜시스는 최연소 영부인이라는 것 외에 직접 '''언론에 나서 공식해명을 한 최초의 영부인'''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나이차가 많은 결혼이었지만 부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던 모양으로 2남 3녀의 자식을 두었다. 부부는 1897년 두 번째 임기를 마친 후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살았으며, 1908년 클리블랜드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 프랜시스는 프린스턴 대학 교수 토마스 J. 프레스톤 주니어와 재혼했으며[11] 1947년까지 살았다. 프랜시스는 클리블랜드 사후 '''여성은 아직 참정권을 획득할 만큼 현명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며 여성 참정권 운동을 반대하기도 했다.[12]

6. 기타


클리블랜드는 미국 대통령 관련해서 세운 기네스가 몇 있는데, 유일하게 임기를 두 번으로 나눠 수행한 인물이었다는 점 외 미국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 뚱뚱했다는 점이 있다. 현역 시절 몸무게가 무려 125kg에 이르렀다. 참고로 1위는 175kg을 자랑하는(?) 부동의 윌리엄 태프트. 물론 둘 다 말년때는 살이 많이 빠졌다. 한편, 클리블랜드는 가장 처음 취임한 역대 3번째 뚱보 대통령 아서에 이어 후임으로 취임한지라 당시 미국인들은 뚱보 대통령을 2연속으로 보게 됐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13]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와 함께 클리블랜드를 만난 일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FDR의 아버지는 클리블랜드에게 자신의 아들을 위해 덕담을 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때 클리블랜드는 농반진반 "얘야,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 기도할 때 '하나님, 부디 절 대통령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하거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카더라성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내용은 유년기 가난하던 시절 나쁜 친구와 어울리다가 어느날 한 교회의 전단지를 우연히 보게 되고, 문득 마음이 이끌려 교회로 들어갔는데 목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해 나쁜 친구와 인연을 끊고 독학하여 변호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때 함께 어울리던 나쁜 친구는 훗날 살인을 저지르고 사형수가 되었는데, 클리블랜드가 당선된 기사가 나온 신문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 교회 목사들이 자주 써먹던 예화였다. 사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도 비슷한 이야기가 존재하는걸 보면, 어느 쪽이 원조인지는 불명이다.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피트 알렉산더의 본명인 그로버 클리블랜드 알렉산더가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재밌게도 퇴임 이후 123년이나 지난 2020년에 들어서,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유는 민주당 조 바이든 후보에게 패해 재선에 실패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24년 대선 재도전을 원한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클리블랜드의 사례가 인용되고 있기 때문. 만약에 트럼프가 2024년에 재도전해서 당선되면 클리블랜드에 이어 두번째로 자신의 1,2기 임기를 나눠서 채운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물론 현실은 한번만 하고 정계은퇴한 대통령들이 훨씬 많았지만.

[1] 두번째 임기에 도전하던 1892년 선거 캠페인 당시 연설.[2] Fayetteville Academy와 the Clinton Liberal Academy를 다녔다. 흔히 무학으로 알려졌는데, 최소 고졸은 된다. 단, 클리블랜드는 이들 학교를 졸업했다는 증명이 없어서 무학으로 간주된 것이다. 클리블랜드는 3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학력을 입증할 서류(쉽게 말해 '''졸업증''')를 제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까지 미국 정치권에서는 무학이라는 것이 핸디캡이 아니라 오히려 자수성가의 상징으로 통하던 시대라, 이 부분은 공화당도 비난하지 못했다.[3] 민주당은 관세 인하 자유무역 지지, 공화당은 높은 보호관세 지지.[4] 참고로 이때 클리블랜드는 총각이었다. 후술되어있듯 대통령이 된 후 결혼했기 때문. 상대방도 과부였으니 불륜이라 보긴 좀 힘들듯..? 문제는 19세기 후반의 미국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성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많은 시대였다는 것이다. 2차대전 이전의 미국은 혼외정사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예민했으며 임신은 반드시 결혼 이후에 해야 한다는 분위기도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혼인을 하지 않고 자식을 낳았다는 의혹을 받은 클리블랜드는 선거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섰다.[5] 훗날 이 아이는 의사가 되었다고 한다.[6] "Though the people support the government; the government should not support the people."[7] 보빙사 일행이 처음 미국 대통령을 만난건 전임이었던 체스터 A. 아서 시기.[8] 반대로 장녀 루스는 아버지가 낙선했지만, 재선을 준비하던 시절(23대 벤저민 해리슨 시절)에 태어났다. 그나마 차녀 에스더와 3녀 마리온이 아버지의 재선 시절에 태어났으며, 딸들 모두 백악관에서 살았던 건 같다.[9] 영문 성명은 Frances Folsom Cleveland. 생몰년도는 1864년 7월 21일 ~ 1947년 10월 29일.[10] 당시 기준 율리시스 그랜트 전 대통령 이후 간만에 당선된 40대 대통령인 셈이다. 물론 이전에 가필드가 있긴 했지만, 가필드는 임기 중 사망.[11] 미 대통령의 미망인이 재혼한 첫번째 사례기도 하다. [12] 참고로 미국에서의 여성 참정권은 소위 진보 시대라 불린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각 주에서 점진적으로 실현되다, 1920년 미국 수정 헌법 제19조의 통과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13] 같은 민주당 소속이었으나 이 당시만 해도 민주당은 보수 성향이 강했기에 클리블랜드가 노동운동에 비판적이었던 것과 달리, FDR은 뉴딜정책으로 지금의 리버럴 성향 민주당을 만드는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