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J. 브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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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Jennings Bryan.
1. 개요
2. 전반적 생애
2.1. 1896년 대선
2.2. 20세기의 삶
3. 여담


1. 개요


'''“당신들은 노동자의 이마에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 없습니다! 인류를 금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1]

“도시를 불태우더라도 농장을 남겨두면 도시는 마술처럼 다시 솟아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농장을 파괴하면 이 나라의 모든 도시에는 잡초만 무성히 자랄 것입니다.”

미국의 41대 국무장관. 1860.3.19 ~ 1925.7.26.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3번이나 낙선한 인물로[2][3]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콩라인 정치인 정도로 볼 수 있지만... 사실 당대 미국 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은 공이 있는 인물로 미국의 공업화 과정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했던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권익에 신경쓰면서 혁신적인 공약과 정책을 내걸었다.
당시 브라이언이 주장한 독과점 기업 규제와 노동자 권익 보호, 여성 참정권의 보장을 통한 완전한 보통선거, 1일 8시간 근무제도 도입, 소비자보호법, 상원의원 직선제 등은 이후 시어도어 루스벨트우드로 윌슨 치하에서 법제화되었고, 마저 도입되지 못한 법안들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에서 시행되어왔기에 대통령만 되지 못했지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미국에 많은 영향을 끼친 정치인인 셈.
사실 브라이언 이전만 해도 미국 민주당은 인종차별적인 당원들이 당당하게 활동했을 정도로 보수적인 색채를 띄었는데[4], 브라이언 이후 민주당은 인민당과의 연합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도 많은 진보적인 정책들을 발굴했으며 인종간의 평등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등 이후 민주당이 진보적인 정당으로 탈바꿈하는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도 평가되기에[5] 단순히 콩라인 정치인 정도로만 치부하기에는 그 비중이 제법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전반적 생애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장로회 교인이 되어 14살의 나이로 세례를 받기도 했다. 후일 브라이언은 세례를 받은 날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일리노이 대학을 마치고 변호사가 된 그는 잭슨 민주당의 일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주당에 입당하였고 1890년 네브래스카에서 하원의원이 된 것으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1890년과 1892년 네브래스카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기업가와 부유층의 횡포에 맞서 서민, 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189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는 공화당의 존 멜른 터스튼에게 패배하며 야인이 되었다. 하지만 전국 순회연설을 다니면서 지속적으로 유명세를 쌓았고, 이러한 것들이 인정받아 1896년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았다. 이 때 당시 전당대회에서 금본위제를 반대하며 했던 연설이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남아있다.[6]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당시 언론들이 트러스트들에 장악되어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지만.
어찌됐건 높은 관세와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공화당윌리엄 매킨리에 맞서 저관세와 은화 자유 제조를 주장했지만 브라이언의 공약들은 대부분 부유층에 불리했기에 그들은 매킨리에게 엄청난 선거지원금을 퍼부었고 결국 매킨리가 승리하게 됨으로써 안습.

2.1. 1896년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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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대선, 득표 710만(51%) 대 649만(47%)로 매킨리의 승리. 선거인단은 271: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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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은 중서부와 남부를 석권했지만,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라 미국 인민당(포퓰리스트 당) 등과의 제휴에 따른 중부 권역 압승(46명)은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되려 웨스트 버지니아켄터키(18명)를 잃었으며, 선거에서 더 이기려면 결국 뉴욕주를 이겨야 했다. 물론 캘리포니아(2천표, 0.64%)와 켄터키(277표(!), 0.06%)에선 초박빙이었으며, 인디애나(15명)와 오레건(4명)에서도 2%대의 박빙 승부를 벌였다. 하지만 북부의 뉴욕 등에서는 압도적인 공화당 몰표가 나왔으니, 오하이오의 5% 차 가 최소 격차였고 북부 대부분이 두 자리수 이상의 % 차이가 났다.[8]
또한 민주당 내에서 이탈표가 나와 국민민주당(National Democrat, 이른바 '''금본위 민주당''')이 브라이언에 반대하고 나서 0.96%의 득표를 했으며, 금주당도 0.9%의 득표를 벌었다. 캘리포니아와 켄터키에서의 패배는 이런 이탈에 기인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선에서도 역사를 남겼는데 바로 '''패배 후보가 승복하는 메세지라는 전례를 남겼다.''' 당선인 윌리엄 매킨리에게 대선 이틀 뒤 전보를 보낸 게 시초였다. 당시 브라이언은 전보에 "축하를 드린다. 우리는 이 문제를 미국 국민에 맡겼고 그들의 의지가 법"이라고 썼다.
이 관례는 이후 약 120년간 지켜지다가, 2020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조 바이든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깨지게 되었다.

2.2. 20세기의 삶


1898년 스페인과 전쟁이 터지게 되자 시민군을 조직하고 참전하려 했다. 그러나 장티푸스로 인해 쿠바에 가지 못했다.
그리고 1900년, 다시 한번 매킨리와 맞서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하려는 공화당과 매킨리를 비난했지만,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 제국주의였던지라 또 다시 지고 말았다. 안습. 45.5% 득표를 하며 북부의 지지세 일부를 좁히고 켄터키(12명)를 회복하였으나, 인민당과의 제휴가 멀어지는 등 서부에서 되려 큰 격차로 지면서 선거인단 33명을 잃었다.
1904년에는 앨턴 B. 파커에게 민주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내주었고(파커는 시어도어 루즈벨트에게 낙선하였다), 절치부심 끝에 1908년 마침내 3번째로 대통령에 도전한다. 그러나 윌리엄 태프트에게 미주리까지 내주며 43%라는 본인이 출마한 대선 중 가장 낮은 득표율로 낙선하고 만다. 지못미.
이렇게 계속 안습하게 사나 싶었지만 1912년에는 민주당 우드로 윌슨 후보를 지원했고, 결국 윌슨이 당선되자 그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됨으로써 신세 좀 피나 싶었지만... 윌슨이 거의 모든 외교 정책을 스스로 결정해버려서 브라이언의 비중이 크진 않았다. 결국 1915년 국무장관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듬해에는 윌슨의 재선을 위한 선거 유세를 했다. 그리고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자 자신도 가겠다고 했지만 윌슨은 거절한다.
그 후에는 여성 참정권 획득 등 사회 개혁을 위해 노력하다 1925년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기독교 근본주의자였다. 그래서인지 진화론을 믿지 않았으며, 말년인 1925년에 그 유명한 스코프스 재판에 원고측 변호인으로 나서기도 했다. 재판 내용면에서는 떡실신당했지만 어쨌든 1심에서 승소하였으며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 상기된 진보적 행적과 비교하면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브라이언 뿐 아니라 초창기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의외로 진보적인 사회관을 가지려 했던 인물들도 많았다. 사실 기독교 근본주의가 세속 정치에 대한 관점까지 보수적으로 변해버린 것은 20세기 중반부터이다. 이는 도덕에 기반한 정치를 지향하는 진보주의의 특성 상, 당대 기준으로 '가장 도덕적인 사상'[9]으로 보였던 기독교 근본주의에 끌린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10]. 한편 그의 이런 행적으로 인해 스코프스 재판을 연극화한 <신의 법정>에서는 그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악역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 별명이 많기로 유명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The Great Commoner(위대한 평민)[11], Boy Orator of the Platte(플래트[12]의 꼬마 연설자) 등이 있다.
  • 비록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도 미국 내 몇몇 군데에서 꽤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 대학 등.
[1]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대통령편(12권)에서 이원복 교수는 이 연설을 '''역대 선거연설 중 최고'''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2]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유력정당에서 대통령에 세 번 도전해서 세 번 다 낙선한 인물은 브라이언이 유일하다.[3] 같은 시대 미국 사회당유진 뎁스가 다섯 차례나 출마했다가 낙선했지만, 1912년 최대 6%를 득표한 군소후보였다. 참고로 1900년 대선은 브라이언의 두번째 도전이자 뎁스의 첫 출마였는데, 뎁스는 불과 0.63%를 득표했다. 1908년에는 2.83%를 득표하며 나름 고춧가루.[4] 어찌보면 당연한게 이 당시 민주당은 1860년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링컨의 공화당에 반기를 들고 남북전쟁을 일으킨 남부 세력이 주축 중 하나인 정당이었다. 공화당 급진파들을 비난하던 리디머와 부르봉 민주당 등이 대표적. 지금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5] 민주당의 진보적인 색채가 고정된 것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재임기 이후부터다.[6] 개요 첫머리에 적힌 가시면류관, 금 십자가 관련 글귀가 바로 이 연설에서 한 발언이다.[7] 사실 디테일을 보테면 현재의 워싱턴 주네바다 주, 콜로라도뉴멕시코 주는 민주당이 강세고, 노스 다코타 주는 공화당이 강세다. 한편 북부의 산업주였던 웨스트 버지니아(공화당)와 남부의 큰 주였던 버지니아(민주당)는 여전히 같은 정당을 지지하고 있는데, 20세기를 거치면서 웨스트 버지니아가 낙후되면서 처지가 뒤바뀌었기 때문이다.[8] 북부 버몬트는 무려 80%, 매사추세츠, 메인 주, 로드 아일랜드에서는 각각 69% 공화당 몰표가 나왔고, 남부 미시시피에서는 91%(!) 민주당 몰표. 서부인 콜로라도, 네바다, 몬태나에서도 각각 85%, 81%, 79% 민주당 몰표가 나왔다. 한편 사우스 다코타에서는 183표(0.22%) 차로 민주당이 간발의 승리를 거두었다. 인구가 적은 와이오밍에서도 789표(3.7%) 차로 승리. 결국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에서도 오하이오에서 5% 이상은 격차를 좁혀야 승리가 가능했을 것이다. [9] 예로부터 미국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나라였으니만큼, 지금보다도 종교의 영향이 강했던 20세기 초반에는 그 종교의 근본주의자들이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보일 법도 했다.[10] 무신론이나 불가지론, 이신론 성향의 진보주의자들 중에서, 진화론이나 기타 자연과학 이론이 나치 독일같은 극우들의 창궐에 기여했다는 개소리에 낚여서, 반지성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다.[11] 영국에서는 귀족 작위 수여를 거부한 정치인(예를 들어 윈스턴 처칠 등)에게 주로 쓰이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선량함을 굳게 믿는 정치인이라는 뜻으로 쓰인다.[12] 그가 살던 네브래스카에 흐르던 강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