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폰 몰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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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muth Karl Bernhard von Moltke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1]
( 1800.10.26 ~ 1891.4.24)
1. 소개
19세기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군인."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
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2]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독일 통일의 1등공신으로 추앙받는 인물. 오늘날 세계 각국의 군대에서 채택하고 있는 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를 정립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훗날 그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되는 조카와 구분하기 위해, '대(大)몰트케'라고 부른다.
2. 생애
1800년 프로이센 북부의 파르힘이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일찍 집을 나와 11세에 덴마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수석졸업 후 1818년에 덴마크 육군 소위가 되었다. 그러나 젊은 몰트케는 덴마크군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군적을 바꿔 프로이센 육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1822년 프로이센군 육군 소위가 된 몰트케는 프로이센 전쟁학교에 입학, 3년간 수학하고 1826년 졸업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몰트케는 베를린 참모본부에서 1년간 근무한 후 1833년 중위가 되었으며 1835년에는 다시 대위로 진급했다. 진급 직후 6개월의 휴가를 받은 몰트케는 남유럽 및 동유럽을 여행하게 됐는데, 코스탄티니예를 방문했을 때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무트 2세의 요청으로 오스만군의 현대화를 도왔다. 1838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아나톨리아 주둔군의 군사고문이 되었으며, 이집트에서 일어난 무하마드 알리의 반란을 진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몰트케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며 결국 알리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몰트케는 온갖 고초 끝에 겨우 도망쳐 1839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국 후에는 오스만 여행기와 당시의 전쟁 상황을 담은 책을 출판해 명성을 얻기도 했다.
1840년에는 베를린의 프로이센 육군 제4군단의 참모장교가 되었고 여행 경험을 살려 소아시아 일대의 지도를 제작했다. 또한 이 시기 함부르크-베를린 간 철도건설 작업의 감독관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철도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철도의 중요성을 깨달은 인물 중 하나였다.
1857년에는 드디어 프로이센군의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참모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전쟁이 과거의 주먹구구식에서 점차 정밀하고 과학적인 방법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참모부 소속장교들을 전문교육기관에서 양성하는 제도를 도입시켰다. 이 덕분에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참모들은 다른 국가 장교들에 비하여 작전 수행의 일관성과 체계성을 획득했고 이것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으로 이어지는 대승리의 주 요인이었다.
그는 과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지속적인 공격 개념을 개량하였다. 특히 정면공격보다는 적군을 포위한 후 궁지에 몰린 적군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정면 공격을 하게 한 후 적군을 무력화시켜 신속히 전쟁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적보다 많은 아군을 신속히 동원해 전역에 투입하고 각 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일찍이 산업혁명의 정수를 느꼈던 그는 철도와 전신이 이것을 가능케 하리라 믿었고,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작전을 계획했다.[3] 그의 이러한 미래를 내다본 통찰력은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주었다.
보불전쟁 승리 이듬해인 1872년 프로이센의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는 영예를 누렸고, 1888년에는 30년동안 재직한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났다. 3년 후 향년 91세로 타계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상관이었던 비스마르크처럼 빌헬름 2세와 그의 측근들이 보였던 호전적인 군국주의를 경계했고, 1890년에는 9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독일 의회에 몸소 출석해 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이때 몰트케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범위가 어마어마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몰트케는 그 다음해 사망했으나 그의 선견지명은 1차대전의 참상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3. 군사학적 영향
정치가 군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으며, 군의 독립적인 작전 전개를 기동전의 생명이라고 여겼다.
'''임무형 지휘 체계에 입각한 군의 분산 이동을 통해 전장의 중심 내선에 병력을 집중시킨 후 전선의 중점을 타격해 포위 섬멸[4] 하는 것'''을 강조했다. 그의 '''작전적 기동전'''은 이후 후대 도이칠란트군의 주요 교리가 되었다.
'''작전'''을 '''전술'''의 범주에 포함시켜 전략-작전-전술의 체계를 새로이 정립시키기도 했다. 다만 '''작전'''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5]
4. 기타
- 그가 죽은 지 15년 후인 1906년, 조카 소(小)몰트케가 그의 뒤를 이어 총참모장이 되었다.
- 인터넷에서 '몰트케'란 이름으로 검색하면 1) 장발에 수염없는 깔끔한 장군, 2) 대머리에 콧수염이 달린 장군의 모습이 동시에 나와서 헷갈리는 경우가 있는데, 본 항목에 나오는 대(大)몰트케는 전자다.
- 전술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임기응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아무리 잘 짜여진 전술, 작전상의 계획이라도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 라는 격언을 남겼다. 잭 웰치가 이 말을 인용했으며, 마이크 타이슨이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주둥이에 한 방 얻어맞기 전까지는."으로 고쳐서 말한 것이 유명해졌다.
- 가장 옛날에 태어난 사람의 음성녹음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889년 파리 엑스포가 끝난 이후 독일측에서 베르너 폰 지멘스의 후원으로 축음기 시범을 보일 당시 녹음을 해본 사람 중 하나이다.[6] 그는 1800년생으로 그때까지 축음기에 녹음을 해 본 사람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그 녹음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연도를 보면 나와있지만 19세기 기준으로, 아니 사실 현대적 관점으로도 상당히 장수한 인물이라 누린 복인 셈.
[1] 외래어 표기법을 원칙대로 적용하면 '폰몰트케'가 되지만 오랫동안 '몰트케'로 알려졌기에 관용적 예외가 인정된다.[2] 일반적으로는 "아무리 훌륭한 전투 계획이라도 첫 총성이 울리는 순간 쓸모가 없어진다."라는 의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3] 철도와 전신의 군사적 효과는 앞서 미국의 남북전쟁에서도 입증된 바 있었다.[4] 적의 궤멸이 아니라, 적을 무력화하는 것이다.[5] 이후 작전을 전략, 전술을 연결하는 보다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영역으로 정립 및 체계화한 것은 20세기 초 소련의 알렉산드르 스베친이 작전술(operational art)을 주창하면서 이루어졌다.[6]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당시 시범 녹음에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