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포
박람회 / 世界博覽會, 萬國博覽會 / Expo
1928년 설립된 국제박람회기구라는 국제기구에서 관할한다.
엑스포 초기의 시대상은 중세 유럽으로부터 내려오던 길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지역적 폐쇄성이 사라지며[2] 각 지역의 산업 발전 정도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게 되면서 이러한 기술적 발전을 한 데 놓고 비교하는 자리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1756년에 '영국산업박람회'가 열렸고, 1798년 프랑스 정부가 최초의 국영 산업전시회인 '제1회 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박람회의 시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849년까지 총 11회 정부의 공식 국영박람회가 개최됐고 이후 더 큰 규모로 박람회를 개최하려다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개최가 늦춰지자 영국이 선수쳐서 유리궁전을 짓고 개최한 국영 박람회인 1851 런던 엑스포를 실질적인 '''세계박람회'''로서의 시초로 꼽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자국의 선진 과학 문명의 산물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다.
의외로 시작이 초라했던 올림픽과 월드컵과는 달리 '''엑스포는 초창기 부터 화려한 시작'''을 했다. 애당초 올림픽이 엑스포에서 스포츠 분야를 분리해서 시작한 행사이다. 때문에 초기 올림픽들은 엑스포와 같이 시행하였다. 만국박람회는 자국이 얼마나 발전되었고 선진화되었는지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고 각 나라의 과학적, 예술적, 문화적인 걸작들이 출품되어 한 자리에 모이는 세계 교류의 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나서서 엑스포 개최를 도모했고 이것이 자존심 싸움으로 까지 번져 1937 파리 엑스포때는 독일[3] 과 소련은 자국의 파빌리온[4] 을 서로 마주본 채로 상대방 보다 높고 거대하게 만들려 했다.[5]
1900 파리 엑스포 때는 무려 2천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는데 당대 인구로 미뤄볼 때 엄청난 수준이다[6] 그리고 엑스포의 영향력은 막강해 와인 등급[7] 과 세계 도량형 기구가 엑스포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원래 시카고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나중에 세인트루이스로 변경했는데 이유가 세인트루이스에 엑스포가 개최 중이라 거기에 모인 관람객들에 편승하려고(...). 한마디로 '''세계박람회 근처 작은 운동회'''인, 지금의 올림픽의 위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자 너도나도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혼란[8] 을 수습하고자 파리에 국제박람회기구(국제박람회사무국, BIE)가 설립되었고, 이에 의해 공인받은 엑스포만이 공식적인 국제 행사로서의 '세계박람회'가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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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는 화려했던 만큼 '''정치 선전의 도구로 너무나도 쉽게 악용되었다'''. 사진은 1937 파리 엑스포의 '''나치 독일 VS 소련'''으로 불리는 사진이다. 왼쪽이 독일이고 오른쪽이 소련이다. 독일과 소련은 호스트인 프랑스 국가관의 몇배나 되는 국가관을 짓고 자존심 경쟁을 벌렸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10] 국가관을 통해 서로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선전하였고, '''그 끝은 1941년 독소전쟁'''으로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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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최된 엑스포도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다니긴 마찬가지였다. 1967 몬트리올 엑스포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하여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라는 퀘벡 분리독립 연설을 하는 바람에 캐나다와 프랑스를 '''완전히 뒤집어 놨다.'''
BIE가 설립되면서 엑스포의 명칭도 "등록박람회"는 '''World's Fair'''로 정해졌다. Expo는 약칭으로 쓰는 것이다. 인정박람회나 원예박람회는 Expo라는 단어만 쓸 수 있고 World's Fair를 못쓴다. 이 World's Fair라는 표현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인 1949년, UN 산하 기구로 BIE가 편입되면서 UN의 '''세계 표준 상표권'''으로 등록되었다. 따라서 등록박람회 World's Fair라는 표현을 다른 전시회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Expo에는 이런 조치를 하지 않아서 지역의 박람회를 "엑스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엑스포가 창시될 당시에는 각국의 국력 과시의 장이자, 인류 문명의 성취를 확인하는 장으로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2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미국을 제외한 각국 경제의 피폐 및 과학 문명에 대한 회의로 인해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 몬트리올 엑스포 및 1970 오사카 엑스포의 성공으로 엑스포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국력 과시의 장에서 대중에게 희망을 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은 세계박람회를 마치 흥행을 위한 테마파크인 양 변질되게 한 측면도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의 많은 엑스포가 환경의 보호나 그 유사한 것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실상은 엑스포 개최지 주변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11] 이고, 빠르게 발전된 정보 통신수단으로 인해 엑스포의 의미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많고 극단적으로는 행사 개최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박람회는 관광객 유치 내지는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꾸준히 유치 경쟁이 존재하고 또 개최되고 있다. 특히 유럽 지역의 경우 박람회 문화가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12] 엑스포가 자주 유치되고 또 개최된다.
2017 아스타나 엑스포는 중앙아시아 지역 최초의 엑스포이다. 유치전 당시 라이벌이 벨기에의 리에주 밖에 없어서 수월하게 엑스포를 따냈다.
차기 2020 두바이 엑스포는 아랍권 지역 최초의 엑스포이다.
차차기 2023 부에노스아이레스 엑스포는 남미 지역 최초의 엑스포이다.
2025 엑스포에 월드엑스포로 유치 신청서를 제출한 입후보 도시는 일본 오사카,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아제르바이잔 바쿠이며 2018년 11월 23일 오사카로 결정났다.
한국은 조선 왕조시기인 1883년 최초로 서구로 파견된 사절인 보빙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열린 1883 보스턴 기술공업박람회에 비공식으로 물품을 출품하였다. 이때 처음 보스턴박람회를 본 민영익은 “나는 암흑 속에 태어나 광명 속으로 갔다”고 감동하면서 다음해인 1884년에 한양에서 국제산업박람회를 열겠다고 발표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889 파리 엑스포에는 민영찬(閔泳瓚)을 대표로 파견하여 참가하였으나 따로 전시관도 마련하지 않았고 그저 참가에만 의의를 둔것이었다. 그 후 본격적인 참가는 1893 시카고 엑스포로서 세계박람회위원회의 초청으로 정경원(鄭敬源)을 파견하여 '제조와 교양관'(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Building)에 전시관을 마련하고 물품을 출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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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후 1900 파리 엑스포에 프랑스의 초청으로 참가하였다. 이번에는 전시관없이 참가만 한 1889 파리 엑스포나 1893 시카고 엑스포때 '제조와 교양관' 한켠에 전시관을 마련한것과는 달리 독립적인 국가관을 세워 훨씬 더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민영환이 유럽대사로 임명되면서 대표로 갔고 사업가인 루리나를 파리주재총영사로 임명하여 진행시켰다. 대한제국관은 프랑스의 페레(E. Feret)가 설계한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한 것이었다. 정부 대리인으로 관립 불어학교 교사이자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를 찍었으며 불한사전을 써낸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évêque)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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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베트남에서 개최된 비공식 박람회인 1902 하노이 엑스포에 물품을 보내고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는 대한제국은 박람회에 참가 할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라가 없어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주도로 비공식 박람회인 1910 영일박람회,1922 평화기념동경박람회(平和記念東京博覽會)등에 '식민지 조선'이 참가하였고 일제강점기시기 조선총독부가 일본에서 열린 박람회, 공진회에 참여한 것도 104차례에 이른다.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박람회와 공진회가 173개나 열렸다. 특히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오주년기념(始政五周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 때에는 궁궐을 파괴하면서 전시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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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후에는 1962년 시애틀 엑스포에 대한민국 국명으로 첫 참가 하였으며 이 때부터 계속 참가하고 있다. 한편 1967년 홍콩에서 한국섬유전시회를 개최한 뒤 1968년에는 국내 최초로 ‘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을 주제로 해외 10개국, 국내외 293개 업체 참가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975년에는 75특별상품전(’75 Special Merchandise Show)을 개최하였고 그 후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매년 2회 봄, 가을에 서울교역전(Seoul Trade Show)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이 서울교역전을 모태로 하여 1982년부터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82: Seoul International Trade Fair 82)[13] 를 열었으며 1993년에 대전에서 첫 인정박람회를 개최하였고 2012년 두번째로 여수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부산광역시는 등록박람회 개최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 여러 번 시도한 하계 올림픽 유치를 계속 나빠지는 제반 사정으로 사실상 포기하고[14] 2030년 엑스포 유치에 도전장을 내민 상황이다.
이전의 대전광역시와 여수시에서의 엑스포는 인정 박람회였지만 부산이 도전하는 2030 엑스포는 등록 박람회다.[15] 만약 유치에 성공한다면 한국은 최초로 등록박람회를 개최하게 되며, 벨기에, 프랑스, 미국, 아이티, 캐나다, 일본, 스페인, 독일, 중국, 이탈리아, 아랍 에미리트(2020년 예정)에 이어 12번째로 등록박람회를 개최하는 국가가 된다.[16]
아시아 국가들로만 한정한다면 일본, 중국,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4번째. 현재 부산시는 엑스포가 서부산지역의 개발과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 강서의 맥도 일대가 주목받고 있었다. 주변에 김해국제공항이나 KTX 구포역, 남해고속도로가 인접해 접근성이 우수하고 에코델타시티, 항공클러스터 같은 대개발 사업과 시너지를 낼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또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로 일본인 관광객 유치도 수월하게 이루어 낼 수 있다. 2017년 현재 사업부지 선정을 위한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2016년 7월 20일, 부산시는 2030년 등록박람회를개최하기 위해 정부에 유치 계획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했다고 밝혔으며[17] 2018년 5월 1일 국가사업화가 결정났다. 그러나 2019년에 들어서는 강서구 지역이 아닌 동구 지역에 위치한 북항재개발 2단계 지역에 엑스포를 유치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하지만, 2018년 11월에 발표할 2025년 등록엑스포 개최지라는 변수가 있다. 2025년 유력한 등록엑스포 유치 후보였던 프랑스 파리가 유치 계획을 철회하면서 일본 오사카가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 오사카는 70년 만국박람회 55주년인 2025년 등록엑스포 개최를 위해 정부까지 나서서 지원하고 있다. 다만 예카테린부르크 측도 정부차원에서 밀어주고 있다. 우랄산맥 인근 최대도시인 만큼 경제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엑스포를 유치하려 하고 있다. 2020 박람회 유치전 당시 3차 투표까지 갔을 정도로 두바이와 경쟁하던 후보가 예카테린부르크인 만큼 속단하기는 이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2018년 11월 24일 결국 2025 오사카 등록엑스포 유치가 확정되었다. 바쿠는 가장 먼저 탈락했고 예카테린부르크는 2차 투표에서 탈락, 오사카가 유치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최근 반러여론이 고조되는 구미의 표가 일본에 쏠린 것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대륙안배개최 원칙에 따라 부산의 유치계획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러나 전 대회가 중동인 두바이에서 열린 것을 감안하면 반대로 대륙안배원칙이 반드시 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 즉, 완전히 가능성이 차단당한 것이 아니라서 부산시는 유리한 입장은 아니지만 강행추진하고 있다.
세계박람회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계박람회기구(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에 의해 개최 주기 및 품격이 관리된다. 1996년 이후 시행된 현행 규약에 의하면 세계박람회는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제로 하는 '''등록박람회'''와 특정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인정박람회''', A1 박람회라 불리는 원예전문 박람회까지 3가지로 분류된다. 단, 원예전문 박람회는 BIE 주관이긴 하지만 '''자연'''을 소재로 하는만큼 분야가 다르다. 원예박람회는 엑스포 특유의 상업성을 철저하게 제한받는다.
'''등록박람회'''(Registered Exhibition, World's Fair)는 1800년대부터 존재하던 만국박람회의 전통을 계승한 엑스포이다. 5년 간격으로 '0'과 '5'로 끝나는 해[18] 에만 개최되고 최대 6개월 동안 열릴 수 있으며, 전시규모는 무제한(!)이다. 주제가 있지만 일반적인 주제로 충분하며, 다양한 분야의 전시를 하게 된다. 또한 참가국이 각자의 비용과 설계로 전시관을 건립한다.
사실 0년 규칙은 최근에야 정례화 된 것이다. 첫 등록박람회인 벨기에 브뤼셀 박람회는 1935년에 개최되었으나 1937년 파리, 1939년 뉴욕, 1949년 아이티, 1958년 브뤼셀, 1962년 시애틀, 1967년 몬트리올, 1992년 세비야의 7회는 규칙를 따르지 않았다. 1970년 오사카 박람회만 규칙 준수한 셈. 물론 이것은 1996년에 BIE가 해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과거의 박람회를 재분류한 것이기때문에, 지금 분류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84 뉴올리언스 엑스포만 해도 등록박람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World's Fair'''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반면 '''인정박람회'''(Recognized Exhibition, International Expo)는 등록박람회에 비해 규모가 작은 박람회이다. 즉, 등록박람회가 열리는 사이에 개최되며 최대 3개월만 개최가능하고, 전시규모는 25만㎡ 이내로 제한된다.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하며, 모든 전시는 그와 관련된 것에 한정된다. 각국의 전시관은 개최국이 건설하여 제공한다.
이처럼 엑스포를 두 가지 형태로 구별하게 된 이유는 결국, 돈 문제(...)이다. 새로이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하는 국가에서는 바로 전회 엑스포보다 더 큰 규모의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하게 되고 따라서 갈수록 엑스포의 규모는 커지게 된다. 규모가 커서 나쁠 것이 뭐가 있나 싶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규모에만 신경쓴 나머지 행사 자체의 품격(...)이 떨어질 수 있으며, 엑스포를 개최할 수 있는 나라가 한정되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거나, 엑스포를 치르는 나라가 거덜나는(...) 일을 맞게 되어버려 장기적으로 엑스포 행사 자체의 운명에 약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규모 박람회는 5년에 한 번씩만 열 수 있도록 하되, 굳이 엑스포가 너무 개최하고 싶어 죽겠다면 인정박람회로서 제한된 규모로 개최할 수 있도록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1993 대전 엑스포의 경우 세계박람회기구에서 인정박람회로 취급하고 있지만, 위의 개정된 규약 시행 전인 1993년에 개최었으므로 규모면에서는 위 분류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전시공간 규모가 현행 인정박람회에서 허용되는 규모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이다. 2012 여수 엑스포의 경우 개정된 규약 시행 후에 개최되는 인정박람회로서 위 분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따라서 전시공간의 규모가 대전 엑스포보다 작다.
1. 개요
세계 여러 나라가 참가하여 각국의 생산품을 합동으로 전시하는 국제 박람회. 1851 런던 엑스포를 그 기원으로, 1928년에 파리에서 체결한 국제 박람회 조약에 따라 가맹국의 주최하에 5년마다 열리며, 주로 공업 제품ㆍ미술 공예품 따위를 출품한다.
-표준국어대사전-
'''Expo'''sition internationale의 줄임말로 흔히 Expo라고 한다[1] .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는 일본의 명칭을 그대로 들여 온 만국박람회라고 불렀으나, 중간에 세계박람회라고 고쳐서 부르다가 대전엑스포를 계기로 엑스포 쪽을 일반적으로 더 널리 부르게 되었다. 참고로 일본에서도 지금은 과거 명칭 대신 국제박람회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공업, 농업, 상업, 수산업 등의 산업과 기예(技藝), 학술(學術) 등의 문화에 대한 활동과 성과의 실태를 생산품, 모형, 기구도(機構圖) 따위를 이용하여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모임. 특히 세계 각 나라의 주요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세계 박람회를 이른다. 근대적 의미의 박람회가 그 모습을 갖춘 것은 산업 혁명 이후의 일이며, 1928년 파리에서 국제 박람회에 대한 조약이 조인(調印)되어 세계 박람회가 활발하게 열렸다.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대전에서 개최된 바 있다.
-고려한국어대사전-
1928년 설립된 국제박람회기구라는 국제기구에서 관할한다.
2. 역사
엑스포 초기의 시대상은 중세 유럽으로부터 내려오던 길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고, 지역적 폐쇄성이 사라지며[2] 각 지역의 산업 발전 정도가 눈에 띄게 차이가 나게 되면서 이러한 기술적 발전을 한 데 놓고 비교하는 자리가 필요해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1756년에 '영국산업박람회'가 열렸고, 1798년 프랑스 정부가 최초의 국영 산업전시회인 '제1회 산업박람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진 박람회의 시초가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1849년까지 총 11회 정부의 공식 국영박람회가 개최됐고 이후 더 큰 규모로 박람회를 개최하려다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개최가 늦춰지자 영국이 선수쳐서 유리궁전을 짓고 개최한 국영 박람회인 1851 런던 엑스포를 실질적인 '''세계박람회'''로서의 시초로 꼽는다. 이 때를 기점으로 자국의 선진 과학 문명의 산물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다.
의외로 시작이 초라했던 올림픽과 월드컵과는 달리 '''엑스포는 초창기 부터 화려한 시작'''을 했다. 애당초 올림픽이 엑스포에서 스포츠 분야를 분리해서 시작한 행사이다. 때문에 초기 올림픽들은 엑스포와 같이 시행하였다. 만국박람회는 자국이 얼마나 발전되었고 선진화되었는지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고 각 나라의 과학적, 예술적, 문화적인 걸작들이 출품되어 한 자리에 모이는 세계 교류의 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국가원수들이 직접 나서서 엑스포 개최를 도모했고 이것이 자존심 싸움으로 까지 번져 1937 파리 엑스포때는 독일[3] 과 소련은 자국의 파빌리온[4] 을 서로 마주본 채로 상대방 보다 높고 거대하게 만들려 했다.[5]
1900 파리 엑스포 때는 무려 2천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는데 당대 인구로 미뤄볼 때 엄청난 수준이다[6] 그리고 엑스포의 영향력은 막강해 와인 등급[7] 과 세계 도량형 기구가 엑스포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원래 시카고에서 개최하려 했으나 나중에 세인트루이스로 변경했는데 이유가 세인트루이스에 엑스포가 개최 중이라 거기에 모인 관람객들에 편승하려고(...). 한마디로 '''세계박람회 근처 작은 운동회'''인, 지금의 올림픽의 위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자 너도나도 엑스포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혼란[8] 을 수습하고자 파리에 국제박람회기구(국제박람회사무국, BIE)가 설립되었고, 이에 의해 공인받은 엑스포만이 공식적인 국제 행사로서의 '세계박람회'가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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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는 화려했던 만큼 '''정치 선전의 도구로 너무나도 쉽게 악용되었다'''. 사진은 1937 파리 엑스포의 '''나치 독일 VS 소련'''으로 불리는 사진이다. 왼쪽이 독일이고 오른쪽이 소련이다. 독일과 소련은 호스트인 프랑스 국가관의 몇배나 되는 국가관을 짓고 자존심 경쟁을 벌렸다.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은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지만)[10] 국가관을 통해 서로 자신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선전하였고, '''그 끝은 1941년 독소전쟁'''으로 터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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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개최된 엑스포도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다니긴 마찬가지였다. 1967 몬트리올 엑스포는 샤를 드 골 프랑스 대통령이 방문하여 '''"자유 퀘벡 만세!(Vive le Québec... libre !)"'''라는 퀘벡 분리독립 연설을 하는 바람에 캐나다와 프랑스를 '''완전히 뒤집어 놨다.'''
BIE가 설립되면서 엑스포의 명칭도 "등록박람회"는 '''World's Fair'''로 정해졌다. Expo는 약칭으로 쓰는 것이다. 인정박람회나 원예박람회는 Expo라는 단어만 쓸 수 있고 World's Fair를 못쓴다. 이 World's Fair라는 표현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이후인 1949년, UN 산하 기구로 BIE가 편입되면서 UN의 '''세계 표준 상표권'''으로 등록되었다. 따라서 등록박람회 World's Fair라는 표현을 다른 전시회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 없다. Expo에는 이런 조치를 하지 않아서 지역의 박람회를 "엑스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엑스포가 창시될 당시에는 각국의 국력 과시의 장이자, 인류 문명의 성취를 확인하는 장으로서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2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미국을 제외한 각국 경제의 피폐 및 과학 문명에 대한 회의로 인해 위기에 봉착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7 몬트리올 엑스포 및 1970 오사카 엑스포의 성공으로 엑스포는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로운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국력 과시의 장에서 대중에게 희망을 주는 교육의 장으로서 새로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식 상업주의의 영향은 세계박람회를 마치 흥행을 위한 테마파크인 양 변질되게 한 측면도 있으며, 20세기 중반 이후의 많은 엑스포가 환경의 보호나 그 유사한 것을 주제로 삼고 있으나 실상은 엑스포 개최지 주변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 경우가 대부분[11] 이고, 빠르게 발전된 정보 통신수단으로 인해 엑스포의 의미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경우도 많고 극단적으로는 행사 개최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박람회는 관광객 유치 내지는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꾸준히 유치 경쟁이 존재하고 또 개최되고 있다. 특히 유럽 지역의 경우 박람회 문화가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교통이 편리하다 보니[12] 엑스포가 자주 유치되고 또 개최된다.
2017 아스타나 엑스포는 중앙아시아 지역 최초의 엑스포이다. 유치전 당시 라이벌이 벨기에의 리에주 밖에 없어서 수월하게 엑스포를 따냈다.
차기 2020 두바이 엑스포는 아랍권 지역 최초의 엑스포이다.
차차기 2023 부에노스아이레스 엑스포는 남미 지역 최초의 엑스포이다.
2025 엑스포에 월드엑스포로 유치 신청서를 제출한 입후보 도시는 일본 오사카,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 아제르바이잔 바쿠이며 2018년 11월 23일 오사카로 결정났다.
3. 한국과 엑스포
한국은 조선 왕조시기인 1883년 최초로 서구로 파견된 사절인 보빙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열린 1883 보스턴 기술공업박람회에 비공식으로 물품을 출품하였다. 이때 처음 보스턴박람회를 본 민영익은 “나는 암흑 속에 태어나 광명 속으로 갔다”고 감동하면서 다음해인 1884년에 한양에서 국제산업박람회를 열겠다고 발표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1889 파리 엑스포에는 민영찬(閔泳瓚)을 대표로 파견하여 참가하였으나 따로 전시관도 마련하지 않았고 그저 참가에만 의의를 둔것이었다. 그 후 본격적인 참가는 1893 시카고 엑스포로서 세계박람회위원회의 초청으로 정경원(鄭敬源)을 파견하여 '제조와 교양관'(Manufactures and Liberal Arts Building)에 전시관을 마련하고 물품을 출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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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뀐후 1900 파리 엑스포에 프랑스의 초청으로 참가하였다. 이번에는 전시관없이 참가만 한 1889 파리 엑스포나 1893 시카고 엑스포때 '제조와 교양관' 한켠에 전시관을 마련한것과는 달리 독립적인 국가관을 세워 훨씬 더 본격적으로 참가하였다. 민영환이 유럽대사로 임명되면서 대표로 갔고 사업가인 루리나를 파리주재총영사로 임명하여 진행시켰다. 대한제국관은 프랑스의 페레(E. Feret)가 설계한 것으로 경복궁 근정전을 모방한 것이었다. 정부 대리인으로 관립 불어학교 교사이자 한국 최초의 사진엽서를 찍었으며 불한사전을 써낸 프랑스인 샤를 알레베크(Charles Alévêque)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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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베트남에서 개최된 비공식 박람회인 1902 하노이 엑스포에 물품을 보내고 박람회 임시사무소를 개설하였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는 대한제국은 박람회에 참가 할수가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나라가 없어진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주도로 비공식 박람회인 1910 영일박람회,1922 평화기념동경박람회(平和記念東京博覽會)등에 '식민지 조선'이 참가하였고 일제강점기시기 조선총독부가 일본에서 열린 박람회, 공진회에 참여한 것도 104차례에 이른다.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박람회와 공진회가 173개나 열렸다. 특히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시정오주년기념(始政五周年記念) 조선물산공진회 때에는 궁궐을 파괴하면서 전시실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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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15 광복후에는 1962년 시애틀 엑스포에 대한민국 국명으로 첫 참가 하였으며 이 때부터 계속 참가하고 있다. 한편 1967년 홍콩에서 한국섬유전시회를 개최한 뒤 1968년에는 국내 최초로 ‘내일을 위한 번영의 광장’을 주제로 해외 10개국, 국내외 293개 업체 참가한 제1회 한국무역박람회를 개최하였으며 1975년에는 75특별상품전(’75 Special Merchandise Show)을 개최하였고 그 후 1976년부터 1981년까지 매년 2회 봄, 가을에 서울교역전(Seoul Trade Show)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이 서울교역전을 모태로 하여 1982년부터 서울국제무역박람회(SITRA82: Seoul International Trade Fair 82)[13] 를 열었으며 1993년에 대전에서 첫 인정박람회를 개최하였고 2012년 두번째로 여수 엑스포를 개최하였다.
3.1. 부산광역시의 엑스포 개최 시도
부산광역시는 등록박람회 개최준비를 하고 있다. 과거 여러 번 시도한 하계 올림픽 유치를 계속 나빠지는 제반 사정으로 사실상 포기하고[14] 2030년 엑스포 유치에 도전장을 내민 상황이다.
이전의 대전광역시와 여수시에서의 엑스포는 인정 박람회였지만 부산이 도전하는 2030 엑스포는 등록 박람회다.[15] 만약 유치에 성공한다면 한국은 최초로 등록박람회를 개최하게 되며, 벨기에, 프랑스, 미국, 아이티, 캐나다, 일본, 스페인, 독일, 중국, 이탈리아, 아랍 에미리트(2020년 예정)에 이어 12번째로 등록박람회를 개최하는 국가가 된다.[16]
아시아 국가들로만 한정한다면 일본, 중국,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4번째. 현재 부산시는 엑스포가 서부산지역의 개발과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된다는 것에 주목해 강서의 맥도 일대가 주목받고 있었다. 주변에 김해국제공항이나 KTX 구포역, 남해고속도로가 인접해 접근성이 우수하고 에코델타시티, 항공클러스터 같은 대개발 사업과 시너지를 낼수 있다는 점이 강점이다. 또한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로 일본인 관광객 유치도 수월하게 이루어 낼 수 있다. 2017년 현재 사업부지 선정을 위한 용역이 진행되고 있다. 2016년 7월 20일, 부산시는 2030년 등록박람회를개최하기 위해 정부에 유치 계획서를 공식적으로 제출했다고 밝혔으며[17] 2018년 5월 1일 국가사업화가 결정났다. 그러나 2019년에 들어서는 강서구 지역이 아닌 동구 지역에 위치한 북항재개발 2단계 지역에 엑스포를 유치하는 것으로 계획이 바뀌었다.
하지만, 2018년 11월에 발표할 2025년 등록엑스포 개최지라는 변수가 있다. 2025년 유력한 등록엑스포 유치 후보였던 프랑스 파리가 유치 계획을 철회하면서 일본 오사카가 유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섰다는 점이다. 현재 일본 오사카는 70년 만국박람회 55주년인 2025년 등록엑스포 개최를 위해 정부까지 나서서 지원하고 있다. 다만 예카테린부르크 측도 정부차원에서 밀어주고 있다. 우랄산맥 인근 최대도시인 만큼 경제활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엑스포를 유치하려 하고 있다. 2020 박람회 유치전 당시 3차 투표까지 갔을 정도로 두바이와 경쟁하던 후보가 예카테린부르크인 만큼 속단하기는 이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 2018년 11월 24일 결국 2025 오사카 등록엑스포 유치가 확정되었다. 바쿠는 가장 먼저 탈락했고 예카테린부르크는 2차 투표에서 탈락, 오사카가 유치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최근 반러여론이 고조되는 구미의 표가 일본에 쏠린 것이 큰 변수로 작용했다. 그렇기에 대륙안배개최 원칙에 따라 부산의 유치계획에 적신호가 켜졌다. 그러나 전 대회가 중동인 두바이에서 열린 것을 감안하면 반대로 대륙안배원칙이 반드시 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 즉, 완전히 가능성이 차단당한 것이 아니라서 부산시는 유리한 입장은 아니지만 강행추진하고 있다.
4. 종류
세계박람회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계박람회기구(Bureau International des Expositions)에 의해 개최 주기 및 품격이 관리된다. 1996년 이후 시행된 현행 규약에 의하면 세계박람회는 사람과 관련된 모든 것을 주제로 하는 '''등록박람회'''와 특정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인정박람회''', A1 박람회라 불리는 원예전문 박람회까지 3가지로 분류된다. 단, 원예전문 박람회는 BIE 주관이긴 하지만 '''자연'''을 소재로 하는만큼 분야가 다르다. 원예박람회는 엑스포 특유의 상업성을 철저하게 제한받는다.
'''등록박람회'''(Registered Exhibition, World's Fair)는 1800년대부터 존재하던 만국박람회의 전통을 계승한 엑스포이다. 5년 간격으로 '0'과 '5'로 끝나는 해[18] 에만 개최되고 최대 6개월 동안 열릴 수 있으며, 전시규모는 무제한(!)이다. 주제가 있지만 일반적인 주제로 충분하며, 다양한 분야의 전시를 하게 된다. 또한 참가국이 각자의 비용과 설계로 전시관을 건립한다.
사실 0년 규칙은 최근에야 정례화 된 것이다. 첫 등록박람회인 벨기에 브뤼셀 박람회는 1935년에 개최되었으나 1937년 파리, 1939년 뉴욕, 1949년 아이티, 1958년 브뤼셀, 1962년 시애틀, 1967년 몬트리올, 1992년 세비야의 7회는 규칙를 따르지 않았다. 1970년 오사카 박람회만 규칙 준수한 셈. 물론 이것은 1996년에 BIE가 해당 규약을 개정하면서, 과거의 박람회를 재분류한 것이기때문에, 지금 분류와는 맞지 않는 것들이다. 예를 들어 1984 뉴올리언스 엑스포만 해도 등록박람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World's Fair'''라는 이름으로 개최되었다.
반면 '''인정박람회'''(Recognized Exhibition, International Expo)는 등록박람회에 비해 규모가 작은 박람회이다. 즉, 등록박람회가 열리는 사이에 개최되며 최대 3개월만 개최가능하고, 전시규모는 25만㎡ 이내로 제한된다.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하며, 모든 전시는 그와 관련된 것에 한정된다. 각국의 전시관은 개최국이 건설하여 제공한다.
이처럼 엑스포를 두 가지 형태로 구별하게 된 이유는 결국, 돈 문제(...)이다. 새로이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하는 국가에서는 바로 전회 엑스포보다 더 큰 규모의 엑스포를 개최하고자 하게 되고 따라서 갈수록 엑스포의 규모는 커지게 된다. 규모가 커서 나쁠 것이 뭐가 있나 싶지만, 이것이 반복되면 규모에만 신경쓴 나머지 행사 자체의 품격(...)이 떨어질 수 있으며, 엑스포를 개최할 수 있는 나라가 한정되게 되는 사태에 이른다거나, 엑스포를 치르는 나라가 거덜나는(...) 일을 맞게 되어버려 장기적으로 엑스포 행사 자체의 운명에 약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대규모 박람회는 5년에 한 번씩만 열 수 있도록 하되, 굳이 엑스포가 너무 개최하고 싶어 죽겠다면 인정박람회로서 제한된 규모로 개최할 수 있도록 폭넓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다.
1993 대전 엑스포의 경우 세계박람회기구에서 인정박람회로 취급하고 있지만, 위의 개정된 규약 시행 전인 1993년에 개최었으므로 규모면에서는 위 분류에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전시공간 규모가 현행 인정박람회에서 허용되는 규모의 두 배에 해당하는 50만㎡이다. 2012 여수 엑스포의 경우 개정된 규약 시행 후에 개최되는 인정박람회로서 위 분류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따라서 전시공간의 규모가 대전 엑스포보다 작다.
5. 역대 엑스포
6. 원예전문 엑스포
7. 여담
- 개최기간이 3주에서 6개월[21] 로 제한되는 관계로, 커다란 비용을 들여 건설한 박람회 시설의 사후 활용이 중요하다. 대체로 임시시설물로 건축되어 철거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1993 대전 엑스포의 시설물의 경우 '엑스포 과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반 정도의 시설물을 영구시설물로 남겨 테마파크를 구성했으나 결국 대전광역시의 악성 적자 컨텐츠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교훈(?)을 살려 2012 여수 엑스포의 전시관들은 대부분 철거될 예정. 현재는 주제관, 국제관, 스카이타워, 아쿠아리움만 남아있다. 그러나 아쿠아리움과 스카이타워는 그럭저럭 돌아가지만 주제관과 국제관은 영 아니올시다인 상황.
- 대한민국이나 일본에서는 1993 대전 엑스포나 1970 오사카 엑스포의 영향으로 열렸다 하면 흥행에 대성공하는 일종의 황금알 낳는 거위 비슷한 것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일본의 경우 4번의 공인 박람회[22] 를 개최하였으나 1970 오사카 엑스포를 능가하는 흥행을 거둔 바는 없으며, 1985년 츠쿠바 엑스포의 경우 츠쿠바 학원도시를 건설하기 위한, 그야말로 초딩 눈높이 엑스포를 표방했다가 제대로 망했어요 루트를 타며 현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23]
- 일본의 만화에서는 1970 오사카 엑스포(오사카 만국박람회)가 자주 등장한다.[24]
- 몬트리올의 한인들이 1967 몬트리올 엑스포 한국관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장-드라포 역 인근에 가림막으로 가려진 채 방치되고 있다고 한다. #
8. 같이보기
- 박람회
- 국제박람회기구
- 조선물산공진회
- 내나라 여행박람회
- 순천만정원박람회
- 대한민국 국제농기계 자재박람회
- 박람회역
- 수정궁
- 에펠탑
- 대관람차
- 인류학의 날
- 올림픽
- 1900 파리 올림픽
- 1904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 민영익
- 민영환
- 샤를 알레베크
[1] 미국 문화권에 한해 등록박람회를 World's Fair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인정 박람회는 그냥 Expo다.[2] 1791년에는 "노동의 자유에 관한 선언"이 발표되기도 하였다.[3] 운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함.[4] pavilion, 박람회나 전시장 등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임시로 만든 건물.[5] 소련은 특유의 선전 동상을 출입구 건물을 기단 삼아 올렸는데, 독일은 슈페어 특유의 고전주의 건축물을 동상보다도 높게 세우고 그 위에 국장인 독수리를 올려놓았다. 매우 활동적인 형태의 소련 동상과 그걸 내려다보는듯한 차가운 인상의 독수리가 인상적. [6] 당장 인구가 당시에 비해 훨씬 증가하고 열린 2012 여수 엑스포의 관람객이 '''약 800만'''이다. 1900 파리 엑스포가 관객을 약 2.5배 더 불러 모은 셈.[7] 프랑스 보르도와인을 박람회에서 홍보할 목적으로 1855년에 그랑크뤼클라세(등급제)를 제정하게 되었다[8] 올림픽은 참가자들의 비용을 주최 측에서 지원하지만 세계박람회는 원칙적으로 각 참가국에서 알아서 비용을 대야 한다. 그렇지 때문에 마구잡이로 엑스포가 열리게 되면 돈이 들어서 참가하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체면상 참가하지 않을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9] 그 외의 경우는 아무리 '엑스포'나 '박람회'라는 명칭을 써도 그냥 지역 행사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을 예로 들자면 고성군 공룡 엑스포 같은 경우.[10] 아돌프 히틀러는 1937 파리 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프랑스 제3공화국 측에서 히틀러의 참석을 견제해서 결국 방문 일정을 포기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조치에 빡친 히틀러는 '''3년 후에 프랑스를 멸망시켜서 기어이 파리 땅을 밟는 데에 성공했다.'''[11] 1970 오사카 엑스포는 물론 심지어 미국에서 개최된 1982 녹스빌 엑스포도 마찬가지이다.[12] 박람회라는 것을 보러 가기 위해 돈을 쓰는 사람들이 주로 유럽인이고, 유럽에서 열리는 엑스포가 그들이 관람하기는 가장 편할 수 밖에...[13] 1982부터 1994년까지 2년마다 격년제로 시행하였으며 위치는 한국종합전시장 COEX였다. 이때는 아직 빌딩이 올라가기 전이었다.[14] 올림픽 개최 효과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강해졌는데, 엑스포는 개최장소를 개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므로 하고 나서 남는 것도 많다. 그리고 올림픽은 어쩌다 보니 한중일에서 2018~2022년의 3번의 동하계 올림픽을 독식해버리면서 동아시아권에서 한동안 다시 올림픽을 유치하기 어렵게 되었다.[15] 등록 박람회가 곧 엑스포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 여수도 등록 박람회를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신 뒤 인정 박람회로 전환했다.[16] 의외로 등록박람회는 1935년에 시작되어 영국과 소련(러시아)은 등록박람회를 한 적이 없다. 1970년의 오사카 박람회 이후로 1992년의 스페인 세비야 엑스포까지 22년간 만국박람회가 열리지 않았다는 점도 특기. 독일도 2000년 하노버 엑스포가 첫 등록박람회다.[17] 부산시, 2030부산등록엑스포 유치, 정부에 공식 신청 관련 기사 [18] 육십갑자로 치면 을(乙)과 경(庚)으로 시작하는 해이다.[19] 전세계에 프랑스와인을 쉽게 소개하고자 엄선된 61개의 샤토들을 5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소개했다. 이때문에 와인과 깊은 연관을 가진 엑스포이기도 하다.[20] 에도 막부와 사쓰마 번이 각각 물품을 출품했다.[21] 인정박람회는 3개월[22] 오사카(등록박람회), 오키나와(인정박람회), 츠쿠바(인정박람회), 아이치(등록박람회)[23] 참고로 1970년의 기록은 2010년에 상하이 엑스포에서 깨졌는데, 워낙 많은 인구의 내수시장이 든든히 받쳐 준 결과였다.[24] 일본 만화인 짱구는 못말려에서 시대 박물관에 70년대 전시관에 나오는데, 그 당시 딱히 우리나라에서 진행한 박람회 행사가 없었기 때문에 국내판에서는 70년대 서울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로 얼버무려 나온다. 2000년대부터는 1993 대전 엑스포로 로컬라이징되는 경우가 많다. 2020년대 이후에는 2012 여수 엑스포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