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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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胡惟庸 (? ~ 1380).
원나라명나라초의 인물. 나름 수완 좋은 정치가로써 명나라 개국 초기에 권신이 되어 최고의 권력을 누리다가 결국 역모죄로 숙청당했다.

2. 생애


안휘성 출신으로 젊었을 적 행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주원장의 내정 참모였던 이선장과도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이 인연으로 이선장의 추천을 받았고 1363년 당시 진우량과 전쟁중이던 주원장에게 합류했다. 이 때 주원장은 수군 강화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호유용은 전선 몇 척을 자비로 건조하여 주원장에게 진상하면서 합류했다고 한다. 주원장 역시 젊고 재주있는 호유용을 높이 평가하면서 옆에 두고 이선장을 보좌하여 내정업무를 맡겼다.
이후 명의 건국에도 공을 세웠고 정부조직 개편과 함께 중서성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후 개국초기 승상을 맡고 있던 이선장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고 빠른 속도로 승진했다. 그리고 이선장, 서달 등 1세대 공신들이 일선에서 하나 둘 물러나자 홍무 3년 정1품 좌승상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며 우승상에 제수되었던 왕광양이 축출당한 이후로는 명 조정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홍무제를 보좌했다.
홍무제는 호유용의 뛰어난 능력을 좋아했어도 그가 자신의 능력과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교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싫어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실제 호유용을 경계하게 된 계기는 명확히 나오지 않지만 야사의 기록을 보면 삼국지연의양수의 일화와 비슷한 형태로 해석하고 있다. 요컨데 홍무제가 어떤 말을 했는데,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호유용이 그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고 어떤 일을 꾸미고, 얼마 후 이 사실을 점검하던 홍무제가 잘 풀린 것을 다행히 여기면서도 "아니 이 새끼가?"란 반응을 보이는 패턴이다.[1]
실제 명사나 야사 기록을 참고하면 호유용이 뒤에서 더러운 짓을 참 많이하긴 했다. 개국공신 중에서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몰아내는 일에 주력했는데, 이에 대해서 공식적인 기록은 호유용의 교만함과 권력욕으로 쓰고 있지만 홍무제가 은밀히 뒤에서 호유용을 움직였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 개국공신인 서달을 몰락시키고자 그 밑에 있는 사람을 매수하여 거짓고변을 시켰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호유용 나빠요!"라 고변하는 바람에 궁지에 몰릴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홍무제와 서달이 시큰둥한 태도로 나와서 무사히 넘어갔다. 또한 유기의 사례에서도 호유용이 보낸 의사가 다녀가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사망했다. 중국사람들이나 역사가들도 호유용이 의도적으로 독살한 것이라 해석하고 있으며 당시에도 그런 견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홍무제는 호유용이 개국공신들을 공격하거나 공격하려 했다는 증거가 있어 이를 공론화시킬 수 있음에도 그냥 덮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홍무제가 밀령을 내렸거나, 공신 파벌을 박살내기 위해 일부러 묵인해주는 식의 커넥션을 유추하고 있다.

3. 호유용의 옥


그렇게 명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호유용은 그야말로 한큐에 제거당했다. 홍무 12년, 호유용은 노비를 멋대로 죽이고,[2] 반역자의 여인을 다른 사람의 첩으로 내린 혐의를 물어 체포되었다. 그리고 호유용의 뒤를 캐자 황제를 기만하고 속인 것, 각종 인사비리, 행정비리 등이 드러나고 북원와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했다는 정황까지 드러났다. 당연히 홍무제는 대노했고 이에 호유용과 그 일파는 싸그리 숙청당하고 만다.[3] 허나 신성곤&윤혜영의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에서는 이 호유용의 옥에서 "모반을 위해 북원과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반역&매국노라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론몰이 정도는 확실할 테니까.
호유용 사건으로 명사에 기록된 이 사건으로 호유용 파벌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났다. 파벌에 연루된 관료와 그 일족만 해도 무려 3만 명이 처형당했고 이때 처형당한 고급관료만 해도 20여 명이 넘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호유용 사건은 이대로 끝난 것이 아니라 10년 후 다른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호유용 사건이 다시 한 번 재조명됐고, 그 때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증거들이 드러나 겨우 목숨만은 건졌던 연루자들이 또다시 박살났다. 이 때 이선장 등 주요 공신들도 함께 숙청당했다.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능력은 뛰어났으나 반골의 기질이 강했고 권력을 탐하고 황제에게 모반한 역사에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될 간신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옹호론을 펼치는 입장에서는 1세대 개국공신들을 숙청하기 위해 호유용을 기용했고, 1세대 개국공신들이 정리되자 토사구팽당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독으로 독을 제압하고 그 독을 버려버린 격이다.
이후 홍무제는 승상직과 조정의 성(省)들을 다 날려 버리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한다. 이 과정에서 황제의 업무를 도와줄 전각대학사(殿閣大學士)를 임명했다. 영락제 시기에는 문연각에 여러명을 입직시키며 자문하도록 하여 내각대학사 제도가 시작되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내각대학사가 과거 상국이나 승상의 역할처럼 변질되고 내각의 역할이 이전의 성(省)들처럼 변질되는데 이 내각 제도는 청나라에도 이어졌고, 영어 cabinet의 번역어로 채택돼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물론 내각대학사라는 직책은 청나라 이후로 사라졌다.

[1] 드라마 주원장에서는 주원장의 형식 상의 주군이자 향후 가장 큰 걸림돌이 될 한림아를 수장시킨 것도, 주원장의 뜻을 미리 간파한 호유용이 호위 군사에게 넌지시 암시하는 걸로 나오며, 그걸 알게 된 주원장은 호유용의 독단을 경계한다.[2] 정확히는 자신의 마부가 아들을 태우고 마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내는 바람에 아들이 죽어버렸다.[3] 드라마 주원장의 최후는 정말 끔찍한데, 호유용이 범죄 혐의로 인해 수감된 옥에서 이와 벼룩 때문에 간지럽다고 말하자 홍무제는 "그럼 간지러워서 죽는 형을 내리겠다"고 하여 상의 탈의 후 나무에 묶어 놓고선 모기들이 밤낮을 물게 하였다. 물론 모기 물린 것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사겠지만... 나중에 죽은 모습을 보면 상체가 벌겋게 되어 있을 정도. 얼마나 가려웠을지는 상상에 맞긴다. 홍무제의 독한 법 집행을 본보기로 만든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