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

 


'''북원'''
'''ᠤᠮᠠᠷᠠᠲᠤ ᠥᠨ ᠥᠯᠥᠰ'''
'''北元'''

[image]
'''1368년 ~ 1388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
''''''
'''이칭'''
예케 몽골 울루스(ᠶᠡᠬᠡ ᠮᠣᠩᠭᠣᠯ ᠦᠯᠦᠰ), 다이 유완 구룬(ᡩᠠᡳ ᠶᡠᠸᠠᠨ ᡤᡠᡵᡠᠨ), 대원(大元)
'''위치'''
동북아시아
'''수도'''
상도 (1368년–1369년)
응창(1369년–1370년)
카라코룸 (1371년–1388년)
'''정치 체제'''
유목군주제
'''국가원수'''
(ᠬᠠᠭᠠᠨ)(황제)
'''국성'''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주요 카안'''
혜종(惠宗),(1333년 7월 19일 ~ 1370년 5월 23일),
소종(昭宗),(1370년 5월 23일 ~ 1378년 5월),
천원제(天元帝),(1378년 5월 ~ 1388년 11월),
'''언어'''
중세 몽골어, 중세 중국어, 티베트어
'''문자'''
몽골 문자, 파스파 문자, 한자
'''종교'''
티베트 불교, 샤머니즘
'''종족'''
몽골족
'''통화'''
교초(交鈔) 등
'''역사'''
1368년 성립
1388년 멸망
1. 개요
2. 상세
3. 의의
4. 역대 지도자
4.1. 역대 황제
4.2. 북원 멸망이후의 몽골 대칸
5. 기타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北元
1368년 명나라주원장원나라의 수도 대도를 점령한 후 중원 정복을 완수함에 따라 원나라토곤 테무르 칸(원혜종)이 북쪽으로 옮기고 나서부터 1388년까지 지속된 나라로 주로 내몽골과 북만주가 중심이었으며 일시적으로 외몽골에 들어가 외몽골 동부지역과 부랴트까지도 장악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영락제의 북벌로 약체화되고 멸망해 사라졌다.
1388년 3대 천원제가 부이르 누르[1]에서 남옥이 이끄는 명나라의 15만 대군에게 습격을 당하였고 결국 카라코룸으로 탈출하다가 투울 강 근처에서 예수데르에 의해 살해당했다.
예수데르는 과거 원나라를 창건한 쿠빌라이 칸과 대칸위 경쟁을 벌였던 아리크부카의 후손으로, 124년만에 쿠빌라이 칸의 가문을 무너뜨리고 조리그투 칸으로 즉위함으로써 대칸으로서의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중국식 원나라 천자, 즉 황제 지위는 본래 쿠빌라이 칸 대에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데르, 즉 조리그투 칸은 몽골의 대칸 지위는 이었지만 북원 황제위는 잇지 않았으므로 북원은 3대 천원제 대에 완전히 멸망했다.
북원 멸망 후 몽골은 차하르족, 할하족, 우량카이족을 중심으로 한 6부족 연맹 단위로 재편되었고, 이들 부족들이 서로 투닥거리고 통일되기도 하며 간간히 명나라를 침공해 경술의 변과 같은 사건을 일으켜서 위세를 떨치다가 청나라에 의해 내몽골이 정복당하고 차하르부가 갖던 몽골 제국의 대칸 자리도 청나라의 황제가 흡수하였다.
즉 북원은 천원제 대에 완전히 멸망했고, 이후 북원을 이루던 세력들은 스스로를 몽골이라고 부르며 불완전한 부족 연맹으로 머물렀으나, 이 문서는 청나라에 귀부할 때까지의 역사를 다룬다.

2. 상세


1368년 혜종은 남쪽에서부터 급격히 세를 불려가면서 북진을 해온 명나라의 맹공을 이겨내지 못했다. 결국 수도 대도를 빼앗긴 채 만리장성 이북의 상도로 도주했고, 곧 응창(應昌)에서 할거(割據)했다. 이로써 중원은 완전히 명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된다. 참고로 상도는 몽골이 전 중국을 완전히 차지하기 전에 원나라 수도였고, 통일 후에는 여름 피서 수도로 쓰던 도시다. 상도 유적 문서 참조.
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소종은 외몽골로 들어갔고 이후 1372년에 명의 원정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종과 코케 테무르 사후에 북원은 급격히 힘을 잃어 갔고, 중국 진출을 단념해야 했다. 원의 뒷배 역할을 착실히 해주던 만주의 군벌 나하추마저 명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자 북원의 세력은 더욱 쇠락할 수 밖에 없었고, 끝내 1388년 부이르 누르의 동북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명군에게 대패하였으며, 소종의 뒤를 이은 동생 천원제 테구스 테무르도 도주하던 중 도우라 강 기슭에서 아리크부카의 후손인 예수데르에 의해 피살당하면서 북원도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으로 대칸을 이었으나 북원의 황제 지위는 본래 쿠빌라이 칸이 선포한 것이고 자신은 쿠빌라이 칸에게 권력 경쟁에서 밀려난 아리크부카 가문의 후손이었으므로 중원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몽골의 대칸 지위만 유지했다.
이후 몽골은 차하르족, 할하족, 우량카이족을 중심으로한 부족 연맹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 황통과 아리크부카 황통이 칸의 자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경쟁하다가 다얀 칸의 치세 이후 쿠빌라이 황통이 다시 칸의 자리를 차지한다.
명나라에서는 북원이 멸망해 몽골 부족 연맹으로 분리되자, '몽골'을 원래 호칭인 '몽고' 대신에 '달단(타타르)'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명나라에서 부르던 명칭으로, 여전히 스스로는 '대원'이나 '몽골'이라고 불렀으며 만주에 사는 여진족(후의 만주족) 역시 이들을 '투메드 몽골' 내지는 "우브르 몽골"이라고 했다.
명나라에서 몽골을 타타르로 불렀던 것은 '''타타르'''가 '''야만인'''같은 멸칭으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원래의 타타르족은 몽골족과 대대로 원수지간이었고 결국 칭기스 칸에 의해 멸족당하고 몽골족에 흡수되었는데 몽골에게 타타르란 용어는 바로 야만인 정도의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몽골이 중국을 정복하자 야만인이란 의미로 타타르란 말도 중국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명나라가 성립된 후 몽골을 경멸적인 용어로 '타타르'로 호칭하기 시작하더니 아예 북방민족 전체를 비하하는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게 되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만주족도 명나라에서는 타타르라고 불렀다. 비유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북방민족을 비하해서 불렀던 '''오랑캐'''란 말과 같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청나라에서는 달단이라는 명칭은 폐기되고, 한자 표기 역시 '달단'에서 '몽고(몽골)'로 되돌아갔다. 물론 여기서의 달단은 내몽골을 말하는 것으로 러시아의 타타르인과는 무관하며 현재 내몽골 자치구와 관련있다. 전자의 경우 주치의 후손이고 후자는 칭기즈 칸의 동생 카사르의 후손들이다.
줄곧 오이라트와 세력을 겨루었으며, 한 때 오이라트 출신인 후일 다이온타슨다이 칸이 되는 에센 타이시는 일시적으로 몽골의 제부족들을 제압하고 명나라를 상대로 토목의 변을 일으켜 명나라 황제를 사로잡는 등 당대에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한다.
이렇듯 분열하고 오이라트에 권력을 내주기도 하다가 몽골 부족을 재통일한 칸은 다얀 칸이다. 다얀이라는 이름도 한자 대원(大元)을 몽골어로 차음한 것이며 그의 아내인 만투하이는 현명한 왕비로 유명하며 몽골에서 존경받는다. 다얀 칸은 에센 타이시 때부터 정립되어가던 6대 부락을 6만호 체제로 재정비하고, 몽골 제국 부활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이 경술의 변을 일으키면서 명나라를 공격, 한때 허베이성산시성을 수복하는 등 예전의 기세를 많이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알탄 칸때문에 대칸의 권력이 쇠퇴해 몽골 6부족은 다시 분열되었고, 17세기경 수십년의 시간차를 두고 만주족청나라에 귀부하며 운명이 갈라졌다. 어차피 몽골인은 청나라를 중국이 아닌 만주인으로 봐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훗날 청나라가 멸망하자 독립했다.
이후 만주족의 한(汗)이자 청나라 황제가 대대로 몽골의 칸자리에 올랐다. 그래서 청 황제는 한족에게는 중국식 연호를 썼으나 만주족에게는 만주식 한호, 몽골인에게는 몽골식 칸호를 썼다. 한 예로 누르하치후금을 건국하면서 중국식 연호가 아니라 몽골식으로 "텡그린 술데투"라고 연호를 선포했으며. 홍타이지부터는 정식으로 칸호로 스스로 호칭했다. 청태종의 칸호는 "복다 카간"이다. 청나라는 공문서도 만주어, 몽골어, 중국어로 기록하는 등 3개 세계를 모두 정복한 정복 왕조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갔다. 이후의 역사는 청나라 문서 참고.

3. 의의


몽골 제국은 내/외몽골과 부랴티아의 부랴트인, 그리고 칼미크의 토르구트까지 모두가 전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몽골 제국이 무너진 이후 북원 시대에 몽골은 크게 둘로 양분된다. 일반적으로 몽골과 오이라트로 분리되었다고 하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쿠빌라이계에 충성하는 원(元)조 세력과 반 쿠빌라이계 동맹인 오이라트로 볼 수 있다.
기실 양 집단은 민족적 구성으로는 그렇게 크게 다른 것은 아닌데, 오이라트 역시 원 오이라트 부족에 케레이트나이만 등의 부족들이 연합한 부족 연합체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다.
몽골인들의 경우에는 여러 개의 집단이 있었고 쉽사리 통일되지 않았으며 중간에는 오이라트 에센에게 권력을 내주기도 하는데 이것이 다얀 칸 때에 비로소 6개의 대부락으로 정리 된다, 이 6개의 대부락을 6투멘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 그 구성은 좌현이 차하르, 할하, 우량하이, 우현이 오르도스, 융셰부, 투메드이다. 후일 이들 중에서 차하르가 내몽골의 중심 부족이 되고 할하는 외몽골의 중심 부족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6부족 중 차하르 부족 등은 청나라에 복속되어 만몽 연합 제국 형태로 만주족여진족들과 호흡을 같이 하게 되고, 이러한 역사가 현대 내몽골의 정체성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내몽골과 달리 오늘날 몽골국인 외몽골은 할하 부족 등이 전신이며 이러한 역사가 마찬가지로 현대 외몽골의 정체성의 기원이 된다. 그리고 이 외몽골에는 몽골국뿐만 아니라 시베리아 남부 부랴트인과 칼미크의 토르구트인도 포함되고 엉뚱하게 튀르크계인 투바도 포함된다.

4. 역대 지도자



4.1. 역대 황제


대수
묘호
재위

비고
11
혜종(惠宗)
1333년 7월 19일 ~ 1370년 5월 23일[2]
보르지긴 토곤테무르(孛兒只斤 妥懽帖睦爾)
15대 대칸
12
소종(昭宗)
1370년 5월 23일 ~ 1378년 5월
보르지긴 아유르시리다라(孛兒只斤 愛猷識理答臘)
16대 대칸
13
천원제(天元帝)
1378년 5월 ~ 1388년 11월
보르지긴 토구스테무르(孛兒只斤 脫古思帖木兒)
17대 대칸

4.2. 북원 멸망이후의 몽골 대칸


조리그투 칸이 중국식 황제 칭호를 버린 후 역대 대칸 목록 글이다. 대체적으로 동몽골의 칸들은 재위 시절이 평탄하지 못한 편인데 개중에는 에센 타이시(다이온타슨다이칸)나 다얀 칸, 알탄 칸처럼 명나라를 위협했던 칸도 있었으나 대개 오이라트명나라에 시달리고 칸의 암살도 빈번했으며, 골육상쟁은 기본이었다. 다이온타슨다이 칸을 제외하고는 모두 몽골 제국의 황족 보르지긴씨가 대칸의 지위를 이어갔고 에제이 칸청나라의 태종 홍타이지에게 양위하며 만주족인 아이신기오로씨가 몽골 제국의 대칸의 자리를 이어 간다.
대수
칸호
재위

비고
18
조리그투 칸
(卓里克圖汗)
1389년 ~ 1392년
보르지긴 이수데르
(孛兒只斤 也速迭兒)

19
엥크 칸
(恩克汗)
1392년 ~ 1393년
보르지긴 엥크
(孛兒只斤 恩克)

20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
ᠡᠯᠪᠡᠭ᠌ ᠨᠢᠭᠦᠯᠡᠰᠦᠭᠴᠢ ᠬᠠᠭᠠᠨ
1393년 ~ 1399년
보르지긴 엘베그
ᠪᠣᠷᠵᠢᠭᠢᠨ ᠡᠯᠪᠡᠭ᠌

21
토요얀 칸
(脱古罕汗)
1400년 ~ 1402년
보르지긴 군테무르
(孛兒只斤 坤帖木兒)

22
울루그 테무르 칸
(兀雷帖木兒汗)
1402년 ~ 1408년
보르지긴 구리키
(孛兒只斤 鬼力赤)

23
울제이 테무르 칸
(完者帖木兒汗)
1408년 ~ 1412년
보르지긴 분야시리
(孛兒只斤 本雅失里)

24
델베그 칸
(答力巴汗)
1415년
보르지긴 델베그
(孛兒只斤 答力巴)

25
에세크 칸
(額色庫汗)
1415년 ~ 1425년
보르지긴 오이라다이
(孛兒只斤 斡亦剌歹)

26
아자이 칸
(阿岱汗)
1425년 ~ 1438년
보르지긴 아자이
(孛兒只斤 阿岱)

27
타이손 칸
(岱總汗)
1438년 ~ 1452년
보르지긴 토크토아부카
(孛兒只斤 脱脱不花)

28
오케크트 칸
(烏格克圖汗)
1451년 ~ 1453년
보르지긴 아크바르지
(孛兒只斤 阿噶多尔濟)

29
다이온타슨다이칸
(大元田盛大可汗)
1453년 ~ 1454년
오이라트 에센
(衛拉特 也先)
토목의 변
30
오헤크트 칸
(烏珂克圖汗)
1454년 ~ 1455년
보르지긴 마르코르기시
(孛兒只斤 馬兒古兒吉思)

31
멀런 칸
(摩伦汗)
1456년 ~ 1466년
보르지긴 토구스멩게
(孛兒只斤 脱古思猛可)

32
만도르 칸
(满都鲁汗)
1470년 ~ 1478년
보르지긴 만도르
(孛兒只斤 满都鲁)

33
다얀 칸
(達延汗)
1480년 ~ 1517년
보르지긴 바트몬크
(孛兒只斤 巴圖蒙克)

34
바르스볼트 칸
(巴尔斯博罗特汗)
1519년 ~ 1531년
보르지긴 바르스볼트
(孛兒只斤 巴尔斯博罗特)
35
알라크 칸
(阿剌克汗)
1519년 ~ 1547년
보르지긴 보디
(孛兒只斤 博迪)

36
구덴 칸
(庫騰汗)
1547년 ~ 1557년
보르지긴 다라이손
(孛兒只斤 打來孫)

37
자사그트 칸
(札薩克圖汗)
1557년 ~ 1592년
보르지긴 투멘
(孛兒只斤 圖們)

38
체첸 칸
(徹辰汗)
1592년 ~ 1604년
보르지긴 보얀
(孛兒只斤 布延)

39
링단 칸
(林丹汗)
1604년 ~ 1634년
보르지긴 링단
(孛兒只斤 林丹)

40
에제이 칸
(額哲汗)
1634년 ~ 1635년
보르지긴 에제이
(孛兒只斤 額哲)


5. 기타


  •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조선으로 유입된 북원 몽골인들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간간히 보인다. 명나라의 영향으로 달단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었는데, 이들은 조선에 자리를 잡고 버터를 공급하는 조건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고 한다. 버터를 수유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머무르는 곳을 수유치라고 불렀다고. 그런데 수유치 주민은 병역이 면제된다는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달단의 후예라고 주장하면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 가구에 장정만 수십명에 이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결국 수유치를 없애고 이들에게 버터를 만드는 일 말고 새로운 생업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백정이다.

6. 같이보기


  • 기황후
  • 나하추
  • 올량합 3위[3]
  • 청나라[4]

7. 둘러보기





[1] 현재의 내몽골 북동부 후룬부이르[2] 몽골 초원으로 이동해 북원이 성립된 시기는 1368년으로 북원 황제로는 2년 동안 제위했다. 물론 북원과 원은 북송과 남송처럼 같은 나라가 이어진 것이기에 대수로는 동일하게 11대가 된다.[3] 동방 3왕가 중 옷치긴 왕가의 요왕(遼王)은 주원장과 타협 끝에 명나라 아래서 만주에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여 올량합 3위로 불린다.[4] 청나라가 내몽골에서 북원의 옥새를 얻어 몽골계승을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