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트 디즈니

 


''' 월트 디즈니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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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월트 디즈니
WALT DISNEY
'''
'''분야'''
'''영화, 텔레비전'''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ffd700 위치}}}'''
'''}}}#ffd700 영화 : 7021 Hollywood Blvd.
텔레비전 : 6747 Hollywood Blvd.}}}'''


'''Walt Disney'''
'''본명'''
월터 일라이어스 디즈니 (Walter Elias Disney)
'''국적'''

'''출생'''
1901년 12월 5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사망'''
1966년 12월 15일 (65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묘소'''
미국 캘리포니아주 포레스트 론 묘지
'''신체'''
178cm
'''직업'''
애니메이터, 성우[1], 영화 제작자[2], 기업인
'''활동'''
1920년 ~ 1966년
'''정당'''

'''배우자'''
릴리안 디즈니 (1925~1966)
'''자녀'''
2녀[3]
'''종교'''
개신교(장로회)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비판
5. 루머
5.1. 유대인을 증오했다?
5.2. 그 외
6. 어록
7. 기타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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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월트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창업자'''이며 애니메이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거장 중 한 명이다. 또한 '''전 세계 대중문화 예술의 상징 중 한 명'''이자 미국 문화의 전설로 평가받는다.

2. 생애


1901년 12월 5일 미국 시카고에서 출생.[4] 부모님은 영국령 캐나다에서 이민온 아일랜드계 빈농이었다. 10세 때는 생계 문제 때문에 가족이 미주리주의 마르셀린으로 이주했다. 마르셀린에서 농사 실패로 농장을 팔아 캔자스시티로 이주했다. 돈 문제로 정규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으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상상력이 풍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그림 실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아 그림으로 많은 돈은 벌지 못했으며, 생계를 위해 이것저것 다양한 일을 했다. 1917년에는 적십자사 트럭 운전수로 제1차 세계대전을 경험하기도 했다.
전쟁 후 캔자스시티 광고업체에서 컷 아웃 애니 제작에 착수해 뉴욕에서 셀룰로이드를 사서 <빨간 모자>를 만들었다. 이 시기 친구이자 천재 애니메이터 어브 아이웍스와 인연을 맺어 1922년 '래프 오 그램(Laugh-O-Gram)' 사를 세워 <신데렐라>나 <잭과 콩나무> 같은 명작동화 단편 애니 6개를 제작하고 혼자 뉴욕에 가서 1만 1천 달러를 조건으로 배급업체에 팔았으나, 계약금 100달러를 받은 채 회사가 도산했다. 이후 그는 어브와 헤어져 뉴스영화 카메라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실사영화 감독이 되기 위해 할리우드로 진출했으나,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애니메이션 하나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형 로이와 함께 '디즈니 브라더스 스튜디오'를 세웠고, 실사-애니 합성영화 <앨리스 코미디 시리즈>를 제작해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 시기부터 월트는 사업 및 제작에 전념하고 어브를 총작화감독으로 다시 불러서 작화를 맡기도록 했다.
1927년 대형 영화사 유니버설 픽처스의 발주로 만든 오스왈드 래빗이 예상 외로 인기를 끌자, 배급사였던 유니버설 픽처스에게 그 캐릭터를 빼앗기고 말았다.[5] 이에 월트는 '두 번 다시 딴 회사 하청 안 맡겠다!'고 다짐하여 어브와 함께 오스왈드를 손봐 미키 마우스를 만들어 1928년에 미친 비행기를 선보였다. 미키 마우스의 성공으로 사업을 점차적으로 확장해 도날드 덕, 구피 등 인기 캐릭터들을 내세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큰 성공을 거뒀다.[6]
그러나 1930년 들어 절친 어브가 월트와의 갈등으로 헤어졌고, 팻 파워즈와도 대립이 지속되자 배급사를 컬럼비아 픽처스로 옮겨 최초의 컬러 애니 <꽃과 나무>를 만들었고, 1932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로 배급처를 옮긴 뒤 중편 애니 <아기돼지 삼형제>를 만들어 히트했다. 1934년 RKO 라디오 픽쳐스로 배급사를 옮겨 장편 영화의 제작에 뛰어들어 1937년까지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제작에 돌입했다. 제작 당시 주위로부터 '미친 놈' 소리를 듣고 빚더미까지 올랐으나, 개봉 후 흥행성적이 8백만 불에 달해 빚더미를 말끔히 청산하고 임금체불도 해소됐으며, 디즈니 프로덕션 역시 우량기업으로 등극했다. 이후 버뱅크로 스튜디오를 옮기고 1940년 브에나 비스타란 독자 배급사를 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피노키오(1940년), 덤보(1941년), 밤비(1942년) 등을 각각 만들었으나, 타 영화사들과 달리 흥행은 적자였고 정리해고 및 임금삭감 등의 조치를 취하자 노사분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를 타개하고자 장편 애니 제작을 중지하고 총통각하의 낯짝 같은 전쟁 홍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점차 애니메이터나 연출가 등 스탭들에게 권리를 존중하는 쪽으로 바꾸었다.
전쟁 후 신데렐라(1950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년), 피터 팬(1953년) 같이 동화에 기반을 둔 애니메이션들을 잇따라 개봉했는데, 그 때마다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 몰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디즈니 본인은 자신이 직접 체크하고 감독한 작품이 아니란 이유로 썩 내켜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구상해 낸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를 만든다. 1964년에는 애니메이션과 실사를 합성한 영화인 메리 포핀스를 제작해 생애 처음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뤘다.
디즈니 자신은 거의 700편에 달하는 각종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 다큐멘터리 등에 제작자로 참여했고, 1954년부터 CBS <Walt Disney's Wonderful World>[7]를 통해 진행/해설자로서 얼굴을 비췄다.
마지막으로 정글북을 제작하던 도중에[8] 폐암이 발병해 버뱅크 세인트 조셉 병원에 입원해 폐 절단 수술을 받았다. 그는 수술마저도 버텼지만 몸을 살피지 않고 불철주야로 일한 탓에 회복이 더뎠다.
디즈니 프로덕션 식구들의 끊임없는 쾌유 기원에도 불구하고 1966년 12월 15일, 생일이 지난 지 10일 만에 65세로 숨을 거뒀다. 사망 전에 유언으로 "내가 살아있는 것처럼 기억하기 위해 장례식을 치르지 말아달라"고 전했고, 유해는 화장되어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그의 사후에 디즈니 프로덕션은 한동안 부침을 겪었으나, 1980년대 들어 회사 외부에서 마이클 아이스너, 제프리 카첸버그 등의 경영인들을 영입하고 기업 구조를 쇄신하면서 디즈니는 새로운 회사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영화 산업과 저작권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회사가 되었다...[9] 여담으로 월트 디즈니의 시신이 냉동인간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설이 나돌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자.
그외 자세한 인생사는 살림지식총서- 월트 디즈니, 다음백과- 월트 디즈니영문 위키백과를 참고해볼 것.

3. 평가


그가 영화 업계와 세계 오락 산업에 미친 영향력은 현재도 방대하게 남아있으며 '''대중문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는 그를 통틀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유명한 비정치적 공인"'''이라고 일컬었고 뉴욕타임즈는 그를 추모하는 기사에서 "아마도 미국소련 양쪽으로부터 칭찬받은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평가했고 뉴욕 데일리뉴스는 그를 '20세기아이소포스'라 표현하기도 했다. 영화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은 월트 디즈니의 작품을 미국의 가장 뛰어난 예술적 성취라며 극찬을 하기도. #
1920년대 말 디즈니는 미국 애니메이션을 새롭게 창조했다. 움직임이나 선의 탄력성을 강조하던 신기한 어떤 것으로부터 캐릭터와 내러티브와 감정을 강조하는 예술로 차츰 뒤바꿔놓는 식이었다. 아울러 디즈니는 부드럽고 둥글고 대담하고 다채로운 형태를 선보임으로써 그래픽 디자인을 새롭게 창출하는 데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뒤 선구자적 예술가들은 그의 그래픽디자인을 채택해서 각색했다.
평론가 로버트 휴즈는 "디즈니는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의 수렴을 통해서 팝아트 분야를 일궈낸 장본인"이라고 평가했다.
디즈니는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디즈니랜드를 통해서 미국 오락의 외양을 변모시키기도 했다. 분명히 디즈니랜드 이전에도 놀이공원이 있긴 했지만, 하나같이 이러저러한 탈것들, 게임, 쇼를 뒤섞어놓은 잡탕이었다. 디즈니는 놀이공원을 일련의 오락거리를 모아놓은 곳이 아니라 상상력이 충만한 체험의 공간, 즉 테마파크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애니메이션이 그래픽 디자인을 변모시킨 것처럼 그의 공원도 결국에는 도시 디자인을 바꿔놓은 것이다.
[image][10]
기업인으로서 디즈니는 텔레비전의 잠재력을 알아본 할리우드 최초의 인물이었다. 디즈니랜드와 자사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홍보할 목적으로 ABC에서 방영될 시리즈물을 제작하기로 한 디즈니의 결단은 극장텔레비전이 화해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었다. 디즈니는 TV 프로그램, 장편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다큐멘터리, 테마파크, 음악 서적, 코믹북, 캐릭터 굿즈, 교육영화를 모두 단일 기업의 이름으로 묶어낸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경영적인 측면에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전형을 확립하여 최초의 현대적인 멀티미디어 기업을 일구어냈고, 뒤이은 미디어 거대 재벌의 단초를 마련했다.
이처럼 그는 위대한 기업인으로 평가받지만 그럼에도 사실 그는 직접 회사를 경영했던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주로 기획적인 측면에서 회사에 기여한 것이었고 회사의 전반적인 재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회사의 공동 창업자이자 그의 형인 로이 디즈니였다. 그는 1929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디즈니의 CEO로 재직하며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제작에 필요한 자금과 디즈니랜드의 건설에 필요한 투자처를 확보하는 등 월트가 구상한 아이디어를 경제적으로 서포트하는 데 끝까지 헌신했다. 그래서 로이 디즈니의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지금의 디즈니도 없었을 것이라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야심적인 크리에이터와 이를 뒤에서 지원하는 비즈니스적 파트너의 동업이라는 측면에서 둘의 관계를 다른 곳에 비유하자면 초창기 픽사에서의 존 라세터스티브 잡스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듯.

4. 비판


당연히 그에게도 어둠이 있다. 가공할 저임금으로 하청을 했으며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홍보하면서 덕분에 지금도 디즈니 애니로만 알지 이 작품들의 영화 감독이나 애니메이터들이 잘 알려지지 않게 된 것도 그의 공로(?)이다.[11] 실제로 디즈니 생전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에서 제작된 장편 애니들의 스태프진을 잘 살펴보면 디즈니 자신은 영화 제작자(producer)로 참여했다고 표기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시절을 산 월터 랜츠(1899~1993)도 비슷한 방법을 취했는데 둘은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다.[12] 현재도 디즈니, 픽사, 드림웍스 등 미국의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신작이 나올 때마다 제작사 자체의 브랜드에만 의존해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13] 덕분에 히트작을 다수 연출한 감독들조차 이름을 알리지 못하는 판. 옆동네 일본의 경우 아주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처럼 이름값 있는 감독들이 존재하는 걸 생각한다면..
또한 미키 마우스를 비롯한 디즈니의 마스코트들을 만들어낸 친구 어브 아이웍스와 갈등도 유명한 사실이다. 평소 조용하고 온화롭던 어브는 월트가 애니 타이밍을 무단 변경한다거나, '그깟 동화는 아랫것한테 맡겨라'라고 주장했기에 두 차례 언쟁을 벌였다. 분개한 아이웍스가 독립하자, 수단방법 안 가리고 훼방을 놓기도 했다. 결국 아이웍스는 애니메이션보단 멀티플레인 촬영기법 등 애니 효과 개발로 주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14]
이 사람의 인지도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거나 거의 묻혀진 동시기의 감독들도 몇몇 있는데 대표적인 피해자가 플라이셔 형제.[15]
그 밖에도 감독에게 하도 간섭하여 분개한 여러 감독들이 독립하여 UPA라는 독립 업체를 만들어서 디즈니를 풍자하며 실컷 비난할 정도였다. 돈에 환장하고 독재자 스타일이며 밑에 사람을 간섭하고 괴롭히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되었다.
이 가운데 유대인 스탠리 로즌솔은 디즈니에서 일하고 싶어했으나 입사가 거부된 탓에 하청 제작으로 일하였으나 열악한 대우에 결국 포기하고 여기로 들어와 실컷 디즈니를 깠다. 결국 이들 상당수는 매카시즘 당시 된통에 당했고, 로즌솔은 디즈니가 올 날을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1956년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매카시즘의 최대 협력자로서[16] 많은 사람들을 FBI 등에 밀고했다. 이런 이중성은 상대가 형제라고 예외가 아니였는데, 회사 설립 시 공동 창업자였던 형 로이 디즈니에게 회사명을 '디즈니 브라더스'로 짓겠다고 약속한 뒤, '월트 디즈니'로 등록한 뒤 화를 내는 로이에게 '사장 이름을 넣어야 신뢰감이 있다'고 발뺌했다.

5. 루머


루머가 많은데, 일부는 실제였으나 잘못 알려진 것도 상당수. 대표적인게 디즈니가 반유대주의자라는 것. 다음은 음모론자들의 주장이다.


5.1. 유대인을 증오했다?


디즈니는 특히 유대인을 너무나도 증오하여 디즈니 사에는 일절 유대인이 입사하질 못했다는 루머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덕분에 어빙 탈버그 상을[17] 받고서 트로피를 집안에 내던졌다는 후문까지 있다. 또한 한동안 나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때문에 사실 히틀러와 개인적인 친구라는 이야기까지 있었을 정도.[18]. 다만 히틀러가 별 볼 일 없던 시절에는 초창기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시기와 겹치기 때문에, 미키 마우스를 따라 그린 것이 남아있기도 하다.[19][20][21] 아이러니 하게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자, 나치와 싸우는 미군과 후방의 국민들을 고무하기 위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였다.[22] #
위의 음모론 관련 주장들은 확실한 근거가 빈약하다. 첫째로 월트 디즈니의 전기문을 쓴 Neal Gabler에 의하면 월트가 일부 반유대주의자들과 친구이긴 했으나 디즈니 자신은 반유대주의 활동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아래에도 명시된 대로, 월트는 오히려 유대인 단체들에 대한 기부도 활발한 편이었다. # 둘째로 디즈니가 나치에 긍정적이었다는 주장 역시 근거는 없으며, 실제로 나치에 대해서 제대로 알았을지조차 확실치 않은 관계로 루머이다. 게다가 유대인인 제프리 카젠버그는 월트 디즈니사 회장을 맡은 바 있으며, 부사장도 짐 골드먼 같은 유대인 간부들이 주축이다.[23] 또한 백인 우월주의자로서 KKK 회원이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았으며 실제로 월트 디즈니사는 월트 디즈니가 죽은 뒤에야 회장이 된 조카 로이 디즈니에 의하여 유색 인종 입사가 허용됐다는 루머마저 있다. 이 역시 사실이 아니며, 심지어 40~50년대에도 디즈니에는 아시아계 직원이 있었다.[24] 그러므로 디즈니가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루머는 근거가 약하다.[25]# 또한 월트는 살아서도 유대인들을 고용했으며 각종 유대인 관련 단체들에 기부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한 유대인 단체에 의해 1955년 올해의 인물로까지 선정되었다. ##2[26]

5.2. 그 외


  • 많은 사람들은 디즈니가 세상을 떠난 후 냉동 보관되었다고 믿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전술했듯 디즈니는 1966년 12월에 사망 후 화장되어 글렌데일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에 안치되었다. 참고로 최초의 시체 냉동은 1967년 1월에야 시작되었다고 한다.
  • 동성애자였다는 얘기 역시 존재한다. 물론 당시의 시대 상황상 자신이 스스로 커밍아웃했을 리는 없고, 죽은 뒤에 연인과 주고 받은 편지로 알려져 있다고 하나 확인되는 바는 없다.
  • 그가 설립한 디즈니의 사장은 대대로 생전의 그가 받았던 악명(?)을 그대로 계승하는 자들이 많다는것도 재밌는 대목. 대표적으로 디즈니의 사장을 지냈던 마이클 아이스너를 예로 들수있는데 그에게 반감을 가진 애니메이터들이 나와서 독립한 회사가 드림웍스인데 드림웍스의 슈렉은 악역의 얼굴을 아이스너의 얼굴을 베이스로 모델링하여 디즈니를 전면으로 까는 작품.
  • 월트 디즈니가 실사 영화를 만드는 걸 싫어했다는 이야기가 오랫동안 나왔지만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폭망 후 TV와 실사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호주 출신 영국 작가 P. 트래버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 실사 영화 메리 포핀스는 월트 디즈니가 사망하기 2년 전인 1964년에 나왔다. 게다가 영화 계획은 26년 전인 1938년에 나왔지만 원작자인 P. 트래버스가 자기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걸 싫어하여 월트 디즈니 컴퍼니가 오랫동안 설득했고, 영화 제작을 하면서도 작가가 워낙 하나하나 깐깐하게 굴어 감독인 스티븐슨은 물론 제작진과 출연자들도 고생했다.[27] 이 루머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에서 직접 디즈니 이름으로 12세 이상 등급의 컨텐츠를 제작하기 꺼려했다는 일화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28]
  • 월트 디즈니가 프리메이슨의 단원이었다는 루머도 매우 오래된 떡밥인데, 이는 하나의 루머가 생기고 거기에 와전(?)까지 된 것으로, 프리메이슨에서는 월트 디즈니가 단원이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사실 이 주장의 원형은 월트 디즈니가 장미십자회의 단원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월트 디즈니가 젊었을 적에 프리메이슨의 지원을 받는 DeMolay라는 남학생 친목 동아리의 회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루머는 물증이랄 것은 딱히 발견되지 않았지만 여러 가지 심증이 있어서 혼란스러운 문제인데, 일단은 결정적으로 월트 디즈니가 자필로 남긴 기록들 중 어느 것에도 디즈니 본인의 "장미십자회 활동"에 대해 기술한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주장에 대한 일차적인 심증은 장미십자회의 현대 분파들 중 하나인 AMORC에서 월트 디즈니가 단원들 중 하나였다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다는 건데, 디즈니의 유족들은 이에 대해 법적 제재를 요청한 적이 한번도 없다. 이에 더불어 미국에서 박물관 관련 쪽으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샌프란시스코의 Walt Disney Family Museum과 산호세의 Rosicrucian Egyptian Museum 사이에 인사 교류가 이상하리만치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가 차로 1시간 거리이니 사실상 같은 지역에 있기는 하나 만화사에서 가족 여행객들을 위해 만든 박물관과 오컬트 테마가 섞인 고고학 박물관이 인사 교류가 많다는 건 여전히 이상하게 생각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6. 어록


'''꿈꾸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 꿈을 실현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내 모든 것이 꿈과 생쥐 한 마리로 시작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 월트 디즈니, 1954년 10월 27일 디즈니 랜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돼지로는 절대 돼지를 능가할 수 없다.(You can't top pigs with pigs)'''[29]

'''우리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돈을 벌어들인다.'''


7. 기타


  • 프랑스계 미국인이기도 하지만 정작 자신은 프랑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디즈니란 성씨 자체가 원래는 디지니(D'isigny)라고 썼는데 de+isigny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조상은 노르망디의 마을인 이지니쉬르메르(Isigny-sur-Mer)[30] 출신이라고 한다. 노르만족으로서 1066년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때 같이 따라갔다가 17세기경 다시 아일랜드로, 그리고 미국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 역대 영화 및 애니 관련 제작자로서 가장 많은 상복을 차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아카데미상만 해도 29번을 수상[31]했으며,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어빙 탈버그 상[32]을 비롯한 상들을 엄청나게 받았다. 죽기 2년 전에 데즈카 오사무와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눈 적도 있는데, 데즈카의 자서전을 보면 디즈니가 자신의 이름을 알아서 되려 자신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 각각 1937년1954년타임지 표지를 장식한 적이 있다.
  • 후속작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1966년, 그는 주주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왜 메리 포핀스의 속편을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이유를 밝혔는데, 자신은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타고난 실험가일 뿐더러 설령 속편을 만든다 할지라도 절대 오리지널을 능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로부터 50년 뒤에서야 나온 메리 포핀스의 속편이 결국 원작만 못 하다는 평을 들은 것을 보면 디즈니의 우려가 타당했던 것일 수도.
  •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인생의 말년에 회사를 매각하려고 여러번 협상을 거쳤다 한다. 1966년, 제너럴 일렉트릭웨스팅하우스에 매각 가능성을 논의했지만 불발되었고 그해 워렌 버핏과 만난 자리에서 8000만 달러에 회사 전체를 팔겠다고 제안했지만 버핏은 그저 지분 5% 가량을 매입하는 데 그쳤다고.
  • 적십자 운전병으로 참전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으로의 귀환 명령을 기다리며 유럽에 대기 중이던 당시 우연한 기회로 뜯지도 않은 독일군의 새 철모[33]들이 중고 시장에 나온 것을 보고 몽땅 사들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미술 실력을 이용해서 철모에 가짜 총알 구멍을 내거나 찌그러뜨리고 색칠을 하는 등 전장에 굴러다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미군 병사들에게 팔아먹어 쏠쏠한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미군은 유럽 전선에 좀 늦게 참전했기 때문에 의외로 실전에 투입되지 않은 병력들이 꽤 있었는데, 이들이 귀국하면서 무용담을 늘어놓기 위한 용도로 많이 사갔다고(...). 이외에도 이 2년간의 프랑스 파견 기간동안 차량에 만화 캐릭터 노즈아트를 그리거나 적십자 포스터를 제작하기도 하고, 전쟁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미국 적십자의 관련 포스팅
  • 디즈니사가 배급하는 <세이빙 MR. 뱅크스>에서 톰 행크스월트 디즈니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메리 포핀스의 제작을 위해 소설 메리 포핀스의 작가로부터 판권을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던 월트 디즈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아래 사진은 디즈니가 젊은 시절 자신의 명함에 그린 오너캐다.
  • 진보적인 할리우드 산업체에서 일하는 인물답지 않게 공화당원이었다고 한다.[34] 그와 함께 정치적 의견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고.

8. 둘러보기


[image]'''미키 마우스 전담 성우'''
1대
월트 디즈니


2대
짐 맥도널드

3대
웨인 올와인

4대
브레트 이완

[1] 후술할 증기선 윌리 때문에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 성우'''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2] 초기 디즈니 단편의 경우는 쭉 감독을 맡아왔지만 이후 장편 영화를 제작하면서부터 감독 대신 프로듀서의 위치에서 디즈니 영화들을 관리하기 시작했다.[3] 그중 한명은 입양한 자녀다.[4] 여담이지만 그해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하였다. 군사의 힘으로 세계를 정복한 사람이 죽자 문화의 힘으로 대영제국보다 더욱 넓은 지역을 지배한 인물이 태어남으로써 19세기와 20세기의 세계정복 방식이 큰 차이가 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던 셈이다.[5] 훗날 미키 마우스를 시작으로 돈을 왕창 벌자 21세기에 오스왈드의 판권을 다시 사들였고, 에픽 미키에 출연하게 됐다.[6] 여기서 잘 안 알려진 사실 중 하나로, 1932년 월트 디즈니는 테크니 사와 테크니컬러 프로세스를 3년간 독점으로 활용할 수 있는 권리 계약을 체결한 바 있었다.[7] 한국 KBS1 방영 당시 <디즈니랜드>란 제목이었으며, 디즈니의 목소리는 유강진 성우가 맡았다.[8] 다음 작품인 아리스토캣까지는 기획 및 초안이 나온 상태였다.[9] 마이클 아이스너의 부임 이후 그룹 규모가 커지면서 영화사들을 산하에 거느리게 되었고, 성인용 장편 실사 영화의 제작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더 규모가 거대해진 지금은 애니메이션 영화보다 되려 실사 영화의 제작 편수가 더 많을 정도.[10] 월트 디즈니가 1957년 작성한 그림. 현대의 미디어 믹스 전략을 그보다 훨씬 이전에 정립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11] 이러한 운영 방식이 관행으로 남은 탓에 디즈니사는 지금도 블랙기업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12] 디즈니 이름에 묻혀져서 알려지지 않은 랜츠 프로덕션의 애니로는 딱따구리로 유명한 우디 우드페커, 팽귄인 윌리와 개 스미드릭 등의 캐릭터들이 국내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13] 디즈니/픽사 작품 포스터에는 아직도 '토이 스토리 제작진', '겨울왕국 제작진'같이 제작사의 이전 작품을 내세울 뿐 감독 이름이나 전작은 나오지도 않는다.[14]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에서 새들이 가득 검게 모여든 듯한 장면이 실은 아이웍스가 참여해서 그린 애니메이션 효과로 그려진 것이다.[15] 그나마 디즈니와 동시기에 활약한 애니메이터들 중 유명한 감독들은 워너 브라더스 출신의 척 존스 & 텍스 에이버리, MGM 출신의 윌리엄 해나-조셉 바베라 콤비가 존재한다.[16] 1947년 설립된 Motion Picture Alliance for the Preservation of American Ideals의 창립 멤버 중 1명이었단 점에서 디즈니가 반공주의자였음을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17] 탈버그는 유대인 이름이다.[18] 다만 만에 하나 이게 사실이더라도, 나치의 동조자라고 보기는 힘들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미국에 나치가 어렴풋하게만 알려져 있을 때에는 잔학행위나 전쟁범죄가 드러나기 이전이라, 그렇게 나쁜 놈들이라 생각치 못한 경우도 많기 때문. 심지어 유럽국가인 영국에서조차 폐허가 된 국토를 순식간에 복구한 능력있는 독재정당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히틀러가 천하의 개쌍놈이었음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히틀러를 깠던 찰리 채플린은 욕을 배불리 먹었다.[19] 이 때문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단 이야기가 있지만, 집권 이후론 아리아 문화 등의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미국 애니메이션 개봉 등을 일체 불허하고 거부했다.[20] 결국 디즈니와 맞짱(!) 뜨려고 괴벨스와 함께 독일 애니메이션 산업에 투자해 보는데, 히틀러조차도 보다가 때려쳤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21] 디즈니 영화가 시작할때 성과 함께 나오는 멜로디를 히틀러가 매우 좋아해, 파리 점령 후 에펠탑을 바라보며 흥얼거렸다는 이야기가 있다.[22] 그리고 이 역할을 엄청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디즈니사는 재정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고, 그 이후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이 대중적인 문화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전쟁 기간 동안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본 군인들과 후방의 국민들이 팬이 되었으므로-[23] 카젠버그는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독립해 드림웍스를 세웠다. 2011년 현재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CEO는 로버트 아이거이며, 최대 주주는 스티브 잡스.[24] 초기 디즈니 홍보용 영상에 아시아 직원의 모습이 보인다.[25] 다만 1930년대에 제작된 몇몇 디즈니 단편들, 2차 대전 시기에 제작된 프로파간다 단편들과 덤보, 환타지아, 피터팬 등의 초기 디즈니 장편에서 비백인계 인종의 스테레오 타입 개그, 유머가 묘사되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1933년 실리 심포니 단편 시리즈로 발표된 아기돼지 3형제에선 후반부에 늑대가 솔 파는 유대인 차림으로 변장한 모습이 나온다.[26] 월트 디즈니가 미국의 위인 취급으로 되는 인물이기에 대개는 화를 내지만 이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다. 패밀리 가이에서 디즈니가 그린 세상에서 유태인들이 마구 죽는 장면도 있으며, 몇몇 팬들은 "아, 월트 디즈니가 유태인 싫어했지."라면서 받아들이는 중...[27] 이 뒷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로 세이빙 MR. 뱅크스가 있다.[28] 실제로 캐리비안의 해적 이전까지 디즈니 레이블로는 아동용 위주로 제작했고, 청소년층 이상 부터는 터치스톤 픽처스미라맥스 등 계열사 레이블로 제작하는 관례가 있었다가 배급 방침이 바뀌면서 계열사들이 정리된 바가 있다.[29] 본인은 절대로 무언가의 후속작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로 던진 말이다. 디즈니의 히트작 중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원하는 것 같아서 기껏 속편까지 만들었더니 평가가 별로 좋지 않았던 것에서 비롯된 말. 그러나 디즈니가 사망한 후 방침이 바뀐 건지 21세기 현재는 이전 작품들의 후속작도 여럿 내고 있다.[30] 버터로 유명한 동네[31] 이는 아직도 아카데미상에서 한 개인이 가장 많이 받은 기록으로 깨지지 않고 있다.[32] 유대계 영화 제작자인 어빙 탈버그의 이름을 기려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주는 상[33] 독일군의 철모는 1916년경부터 기존의 뿔이 있던 피켈하우베에서 보다 실용성이 중시된 슈탈헬름으로 교체되고 있었으며, 나치 패망 때까지 우리가 '독일군'하면 떠올리는 그 헬멧을 개량해가며 사용했다.[34] 사실 당시에는 할리우드 내 공화당원이 더 많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