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회
弘益會
공식 홈페이지
철도청 시절부터 한국철도공사에서 퇴직한 직원들로 구성된 법인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퇴역한 군인들 출신으로 이루어진 군인공제회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이 모두 군납을 전문으로 하듯이, 홍익회 역시 철도청 납품을 전문으로 하였다.
역사를 보면 꽤 긴 역사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7월, 철도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공상, 순직한 유가족들을 돕기 위한 지원금을 보내 주는 목적으로 설립한 "재단법인 철도강생회"가 시초이며, 1942년부터 '교통강생회'가 되었다. 이후 1961년에 재생공업사, 교양조성회, 운수사업사, 상이부원회 등 4개 유사법인과 통합해 (재)강생회로 바뀌었다가 1967년 7월 1일에 현 명칭으로 개명하고 1972년부터 감독권이 교통부에서 철도청으로 이관되었다. 1978년에는 청량음료 제조사 일양식품을 인수했다.
그렇기에 홍익회도 일단은 재단법인이다. 부대사업으로 철도청에게 납품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984년 1월부터는 철도역 내 자판기 사업을 시작했다.
코레일 퇴직자 위주라는 점에서 '철우회(鐵友會)'와 같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쪽은 철도동호회 성격이므로 참고.
과거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법인화하기 전에는 열차 내 가판사업,[1] 철도역 내 자판기, 편의점 등 먹거리 판매로 인한 수익이 짭짤했었다. 또한 공익성의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철도청 입장에서도 별다른 수익을 얻을 이윤은 없었으므로, 당연히 이들의 활동에 대하여 별다른 터치를 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중 가판사업은 여객열차를 이용하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서 홍익회의 상징으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1999년-2000년에 한국통신이 고객주문용으로 만들었던 모델전화카드[2] 재고를 액면가의 70%에 구입하여 1500, 2000원권을 제외한 3000, 5000, 10000원 카드에 철도여행의 동반자 —- 홍익회 란 글자를 넣어 120만매 정도 발행하였다. 1번부터 108번 모델 105종이 사용되었는데, 22번 주민신고, 23번 희망찬 1993, 104번 팡파르는 사용되지 않았다. 104번 모델카드가 쓰여지지 않은 이유는 불명. 당시에 전화카드 수집하던 수집인들은 홍익회 글자가 들어간 카드를 상당히 싫어하였다. 2018년 현재에도 모델전화카드 수집가도 홍익회 로고 전화카드는 수집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당시 홍익회가 운영했던 매점(자판기 포함)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에는 홍익회의 타원형 로고와 함께 가격표가 붙어있었다.[3] 심지어 일반적으로 가격을 표시하지 않는 캔음료에도 (지금의 다이소마냥) 특유의 가격표를 붙여놓았다. 게다가 철도 내 독점 판매인지라 판매하는 식품류의 전반적인 가격과 품질이 외부와 비교하면 창렬하기 그지없어서 인식은 심히 안 좋았다. 그래서 일부 이용자들은 홍익회를 홍'''악'''회, '''흉악'''회로 부르며 극혐했고, 철도계에서 퇴출되어야 할 존재 1순위로 꼽았다.
하지만 이후 2005년 철도청이 한국철도공사로 법인화된 뒤 코레일네트웍스, 코레일관광개발, 코레일유통 등을 연이어 설립 후 역내매장, 차내판매 부문 등을 수의계약제로 개방해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크게 개선시켰다. 그렇다고 전권을 아주 넘겨 준 것도 아닌데, 철도청 퇴직자들에 대한 원호사업은 여전히 홍익회의 고유 사업이다.
한국철도공사 출범 후 차내 판매는 코레일관광개발로 운영권이 넘어갔고, 이후 카페열차로 발전한다. 철도역 구내 매점은 한국철도공사의 출범을 앞두고 2004년 12월에 설립하여 2005년 1월부터 영업을 시작한 코레일유통에 넘어갔으며, 스토리웨이라는 이름으로 편의점화되었다. 스토리웨이는 코레일 관할 철도역 및 수도권 전철역을 벗어나 서울교통공사 관할 지하철역, 수도권 이외 지역의 지하철역 등으로 확대 중이다. 어르신들 중 스토리웨이를 홍익회라고 부르는 분들도 간혹 계신다.
'홍익스토어'라는 사이트를 통해 겨우 명맥을 잇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업데이트가 2013년을 끝으로 멈췄으며, 그마저도 2018년경 들어 사라지고 없다.
공식 홈페이지
1. 개요
철도청 시절부터 한국철도공사에서 퇴직한 직원들로 구성된 법인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퇴역한 군인들 출신으로 이루어진 군인공제회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이 모두 군납을 전문으로 하듯이, 홍익회 역시 철도청 납품을 전문으로 하였다.
역사를 보면 꽤 긴 역사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7월, 철도업에 종사하다 불의의 사고로 공상, 순직한 유가족들을 돕기 위한 지원금을 보내 주는 목적으로 설립한 "재단법인 철도강생회"가 시초이며, 1942년부터 '교통강생회'가 되었다. 이후 1961년에 재생공업사, 교양조성회, 운수사업사, 상이부원회 등 4개 유사법인과 통합해 (재)강생회로 바뀌었다가 1967년 7월 1일에 현 명칭으로 개명하고 1972년부터 감독권이 교통부에서 철도청으로 이관되었다. 1978년에는 청량음료 제조사 일양식품을 인수했다.
그렇기에 홍익회도 일단은 재단법인이다. 부대사업으로 철도청에게 납품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984년 1월부터는 철도역 내 자판기 사업을 시작했다.
코레일 퇴직자 위주라는 점에서 '철우회(鐵友會)'와 같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쪽은 철도동호회 성격이므로 참고.
과거 한국철도공사(코레일)로 법인화하기 전에는 열차 내 가판사업,[1] 철도역 내 자판기, 편의점 등 먹거리 판매로 인한 수익이 짭짤했었다. 또한 공익성의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당시 국가기관이었던 철도청 입장에서도 별다른 수익을 얻을 이윤은 없었으므로, 당연히 이들의 활동에 대하여 별다른 터치를 할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중 가판사업은 여객열차를 이용하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어서 홍익회의 상징으로 자리잡기까지 했다. 1999년-2000년에 한국통신이 고객주문용으로 만들었던 모델전화카드[2] 재고를 액면가의 70%에 구입하여 1500, 2000원권을 제외한 3000, 5000, 10000원 카드에 철도여행의 동반자 —- 홍익회 란 글자를 넣어 120만매 정도 발행하였다. 1번부터 108번 모델 105종이 사용되었는데, 22번 주민신고, 23번 희망찬 1993, 104번 팡파르는 사용되지 않았다. 104번 모델카드가 쓰여지지 않은 이유는 불명. 당시에 전화카드 수집하던 수집인들은 홍익회 글자가 들어간 카드를 상당히 싫어하였다. 2018년 현재에도 모델전화카드 수집가도 홍익회 로고 전화카드는 수집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당시 홍익회가 운영했던 매점(자판기 포함)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에는 홍익회의 타원형 로고와 함께 가격표가 붙어있었다.[3] 심지어 일반적으로 가격을 표시하지 않는 캔음료에도 (지금의 다이소마냥) 특유의 가격표를 붙여놓았다. 게다가 철도 내 독점 판매인지라 판매하는 식품류의 전반적인 가격과 품질이 외부와 비교하면 창렬하기 그지없어서 인식은 심히 안 좋았다. 그래서 일부 이용자들은 홍익회를 홍'''악'''회, '''흉악'''회로 부르며 극혐했고, 철도계에서 퇴출되어야 할 존재 1순위로 꼽았다.
하지만 이후 2005년 철도청이 한국철도공사로 법인화된 뒤 코레일네트웍스, 코레일관광개발, 코레일유통 등을 연이어 설립 후 역내매장, 차내판매 부문 등을 수의계약제로 개방해 상품과 서비스의 질을 크게 개선시켰다. 그렇다고 전권을 아주 넘겨 준 것도 아닌데, 철도청 퇴직자들에 대한 원호사업은 여전히 홍익회의 고유 사업이다.
한국철도공사 출범 후 차내 판매는 코레일관광개발로 운영권이 넘어갔고, 이후 카페열차로 발전한다. 철도역 구내 매점은 한국철도공사의 출범을 앞두고 2004년 12월에 설립하여 2005년 1월부터 영업을 시작한 코레일유통에 넘어갔으며, 스토리웨이라는 이름으로 편의점화되었다. 스토리웨이는 코레일 관할 철도역 및 수도권 전철역을 벗어나 서울교통공사 관할 지하철역, 수도권 이외 지역의 지하철역 등으로 확대 중이다. 어르신들 중 스토리웨이를 홍익회라고 부르는 분들도 간혹 계신다.
'홍익스토어'라는 사이트를 통해 겨우 명맥을 잇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나 업데이트가 2013년을 끝으로 멈췄으며, 그마저도 2018년경 들어 사라지고 없다.
2. 역대 회장
- 강생회 이사장(해방 이전)
- 요시다 히로시 (1936~1938)
- 쿠도 요시오 (1938~1939)
- 야마다 신쥬로 (1939~1943)
- 고바야시 리이치 (1943~1946)
- 강생회 이사장(해방 이후)
- 홍익회장
- 정인화[4] (1967~1968)
- 강영진 (1968~1970)
- 김주홍 (1970~1971)
- 이진구 (1971~1972)
- 김재영 (1972~1973)
- 김동혁[5] (1973~1975)
- 이극호 (1975~1977)
- 이기상[6] (1977~1978)
- 이원전 (1978~1980)
- 이약우[7] (1980~1982)
- 김영관 (1982~1986)
- 황성연 (1986~1988)
- 김재국 (1988~1990)
- 방석기[8] (1990~1993)
- 김응주 (1993~1996)
- 김규성 (1996~1999)
- 윤주수 (1999~2002)
- 정동진 (2002~2005)
- 방동안 (2005~2009)
- 장흥순 (2009~2011)
- 이정채 (2012~2014)
- 안승언 (2014~2017)
- 맹주환 (2017~2019)
- 차경렬 (2019~ )
[1] 식당칸에서 음식을 팔기도 하고, 주전부리 카트를 끌고 객차 통로를 오가기도 했다. 즉 지금은 없어진 판매승무원 제도를 운영한 것.[2] 이미 도안이 인쇄되어 있는 공중전화카드에 주문받은 대로 글자나 그림등을 추가인쇄하여 발행하는 전화카드. 보통은 취급 상점이 따로 있었지만, 홍익회에서도 가판사업에서 취급한 적이 있었다.[3] 납품받아 가격표 부분에 홍익회 스티커와 가격을 붙이기도 했었지만 납품 계약 혹은 위탁생산 계약을 채결한 경우 포장에 인쇄시키게 했다.[4] 전 철도청 차장.[5] 전 철도청 차장.[6] 전 서울역장.[7] 전 서울역장.[8] 전 서울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