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

 



'''조선 영조의 왕녀
화순옹주 | 和順翁主
'''
'''출생'''
1720년(숙종 46년)
조선 한성부 창의궁
'''사망'''
1758년(영조 34년) 1월 17일
(향년 39세)
조선 한성부 서부 적선방[1] 사저[2]
'''부왕'''
영조
'''생모'''
정빈 이씨
'''부군'''
월성위 김한신[3]
'''자녀'''
1남
(양자) 김이주
'''묘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1. 개요
2. 생애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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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의 2녀. 화억옹주효장세자의 동복동생이 된다.

2. 생애


1725년(영조 1) 2월 18일, 6세의 나이로 화순옹주로 책봉된다. 아버지인 영조가 아직 연잉군일 때, 정빈 이씨창의궁에서 낳은 자식으로, 정빈 이씨는 옹주가 태어난 이듬해에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동복형제들도 모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정빈 이씨의 자식들 중 화순옹주가 가장 오래 살았으며, 언니 향염이 화억옹주로 추증되기 전까지 사실상 영조의 서장녀로 대접받았다.
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효장세자가 죽을 즈음에 옹주가 홍진 및 하혈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효장세자를 독살했다고 추정되는 궁녀 순정이 벌인 일로 보이는데, 다행히 옹주는 성년이 되어 관례를 치르고 이조판서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과 혼인한다.[4]
그런데 김한신이 갑자기 병으로 죽는 바람에 충격을 받은 화순옹주는 7일 동안 곡기를 끊고 남편을 따라가려고 시도했다. 이에 걱정이 된 영조는 직접 화순옹주 집에 거둥하여 딸을 위로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약을 먹어보려고 했으나 전부 토하고 말았고, 열흘동안 아무 것도 못 먹은 결과 죽음에 이른다. 남편이 떠난지 13일 만에 따라간 것이다.[5] 예조판서 이익정은 옹주를 열녀로 정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영조는 따르지 않았고 "자식으로서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굶어서 죽었으니, 효(孝)에는 모자람이 있다"고 말했다. 사실 영조의 이런 말과 행동은 당시 화완옹주 역시 과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녀가 부담을 가질까 염려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정조 대에 이르러서야 열녀문이 내려졌다.
화순옹주와 남편 김한신의 무덤은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있으며, 이곳에는 그녀의 열녀문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유형문화재 제45호)이 있다. 이곳이 바로 추사 김정희의 본가다.[6]
일각에서는 화순옹주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로 열녀 이데올로기보다는 그녀의 외로웠던 인생사를 연관시킨다. 그녀는 어려서 동복형제들과 어머니를 잃어서 혈육에 큰 애착을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혼인하여 출가한 이후 남편 김한신과 금슬이 좋았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그런 남편마저 죽어서 더 이상 의지할 데가 없어졌으니 남은 여생을 외롭게 보내느니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3. 여담


  •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된 화순옹주홍문이 있다. 정조가 화순옹주의 정절을 가리면서 정려각과 열녀문을 세웠다. 이곳에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합장묘, 김정희묘와 고택이 있다.
  • 화순옹주는 자수를 아주 잘 놓았는데, 하루는 아버지의 곤룡포를 만들었다. 옹주는 곤룡포를 완성한 뒤에 어떤지 품을 보려고 남편 김한신에게 입어보게 하였다. 그런데 김한신이 임금만이 입는 곤룡포를 입은 모습을 본 사도세자가 격분하여 옆에 있던 벼루를 들어 김한신을 내리쳤다. 이로 인해 김한신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옹주는 남편의 억울한 죽음과 사도세자에 대한 원망을 품고 굶어죽은 것으로, 영조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후하게 장례를 치뤄주기로 했다. 그런데 명당이라는 용산 앵무봉 아래에 장사 지내려고 땅을 파니 물이 콸콸콸 쏟아졌다. 당연히 묫자리로 쓸 수 없었는데 김한신 집안에서 이 자리가 3대에 걸쳐 판서가 나올 자리라고 고집하여 200자 떨어진 곳의 땅을 다시 팠다. 다행히 물이 빠져나가 명당에 화순옹주의 묘를 쓸 수 있었고, 연못이 생긴 자리는 왕자지(王子池)라고 불렸다는 이야기가 지역에 전해진다. 왕자지 연못은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은 볼 수 없다고 한다.[7]
[1]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종로구 적선동 일부에 해당한다. [2] 창의궁을 옹주의 제택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당시 창의궁은 왕실 사당으로 기능하고 있었고, 화순옹주의 사당이 적선방에 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 적선방을 월성위골로 불렀다는 기록을 참고한다. [3] 본관은 경주, 자는 유보(幼輔),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4] 영조실록 32권, 영조 8년 11월 29일 임자 1번째기사. # [5] 이때 화순옹주는 영조의 설득에 약을 먹어보려고 했지만 "차마 목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원래 단식 기간이 길수록 약이나 음식을 바로 먹을 수가 없다. [6] 화순옹주 부부는 자식이 없어서 김한신의 친척 김이주로 사후양자를 삼는다. 김이주의 손자가 바로 김정희다. [7]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디지털예산문화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