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완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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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영조의 서9녀. 사도세자의 여동생으로 화평옹주가 죽고, 영조의 사랑을 독차지한 딸이었다. 정조, 순조 대부터는 화완옹주가 아닌 '정치달의 처'라는 의미에서 ''''정처(鄭妻)''''로 부른다.
2. 생애
2.1. 아버지의 사랑받는 딸
1749년(영조 25) 화완옹주는 12세의 나이로 이조판서 정우량의 아들 정치달과 혼인을 치른다. 지난 해 화평옹주가 요절한 뒤였으므로 이 당시의 화완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화완옹주보다 먼저 태어난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모두 세상을 떠났고, 영조의 편집증적인 증세와 고질병과 같은 편애로 화협옹주는 꺼리고 좋아하지 않았다. 때마침 영조의 곁에 남아있었던 옹주가 화완옹주였던 것.
혜경궁 홍씨도 한중록에서 영조가 화평옹주의 상사로 슬픔이 지나치던 중에 마음 붙일 데 없다가 자연히 화완옹주에게 정이 옮겨졌다고 썼다. 더군다나 화완옹주는 머리가 비상하고 성격이 애교 있어서 영조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런데 화평옹주가 편애받는 것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동생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중재하려고 했다면, 화완옹주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려고 들지 않았다. 다행히 혼인하면서부터는 남편 정치달이 화완옹주에게 조언하면서 사도세자에게 해가 없고, 이득만 있었다고 한다.
2.2. 과부가 되다
1756년(영조 32) 화완옹주는 딸을 낳는다. 이때 영조는 딸의 해산 소식을 듣고 버선발로 달려갔다. 불행히 생후 5개월 만에 딸은 눈을 감았고, 다음 달 2월 15일에는 남편마저 세상을 떠난다. 화완옹주에게 불행이 연속으로 겹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치달이 죽은 날은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도 사망했는데, 영조는 조강지처의 죽음을 내팽개치고 딸을 위로하고자 화완옹주의 집으로 갔다. 과거에 화평옹주 때도 그랬지만 정말 유별난 딸 사랑이었다. 이런 영조의 모습에 대간들마저 이건 아니라며 상소했다. 당시 반응을 보면 신하들이 영조의 옷자락 부여잡고 늘어지는 수준으로 격렬하게 행차를 반대했다. 끝끝내 영조가 하고 싶은대로 되지만 말이다.
또한, 영조는 관례를 깨고 화완옹주를 다시 궁궐에서 살게 한다. 남편과 어린 자식을 잃고 혼자 남은 옹주를 밖에 둘 수 없었던 듯 하다.
2.3. 조카에게 집착하다
화완옹주는 오빠인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에게는 조카인 정조에게도 무척이나 집착했다고 한다. 한중록을 보면 친모인 혜경궁 홍씨보다 더 세세하게 신경쓰는 장면도 나온다. 심지어 조카며느리인 효의왕후(당시에는 세손빈)에게도 자신이 시어머니 노릇까지 하면서 심하게 구박했다고. 이런 이유 때문에 효의왕후는 세손빈 시절에는 정조와 금슬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4] 비록 세손 시절의 일이지만 정조가 국왕이 되고 나서도 효의왕후는 끝내 회임하지 못하고 정조도 왕비가 아닌 후궁 처소 근처에서 기거했다는 걸로 볼 때 부부의 사이는 정말 안 좋았던 듯 하다. 혜경궁 홍씨는 화완옹주가 정조의 마음을 다른 곳에 빼앗기는 것이 싫어서 온갖 사람, 심지어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이런 고모에게 정조가 부담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화완옹주의 조카를 향한 비정상적인 애정은 당연히 남편과 사별한 혜경궁 홍씨를 더욱 힘들게 했다.
한중록을 보면 세손 시절의 어린 정조를 화완옹주가 끼고 돌면서 세손빈을 질투해서 세손 부부의 사이를 이간질했다는 내용까지 있다. 혜경궁의 말에 의하면 화완옹주는 세손이 좋아하는 책까지 질투할 정도로 조카에게 집착했고 세손빈하고는 잘 지내는 꼴을 못 봤다고 한다. 이러한 극성스러운 고모 때문에 세손과 세손빈의 사이는 1770년부터 말도 못하게 흉흉했다. 심지어 세손이 세손빈은 싫어해도 장인과 처남(효의왕후의 친정 아버지와 형제)은 좋아하자 이를 질투해 세손빈의 친정까지 흉봤다고 한다. 이후 세손이 좋아하고 따르던 장인(효의왕후의 친정 아버지)이 사망하면서 세손이 슬퍼하자 화완옹주는 오히려 세손이 아버지를 잃은 세손빈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잘 대해줄 것을 우려해, 세손빈의 부친상이 뭐가 그렇게 큰일이냐는 도를 넘어선 흉을 봐서 참다못한 혜경궁이 옹주를 야단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기록은 혜경궁이 본인의 시누이를 싫어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기록이 혜경궁의 조작이라기엔 내용이 좀 심상찮은게 사실이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가 죽은 뒤 아직 어린 세손인 정조를 옆에 끼고 살면서 음식부터 입고 신고 노는 것까지 죄다 챙겼다고 한다. 심지어 엄연히 세손과 옹주라는 신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함께 겸상까지 했다.[5] 그나마 친어머니인 선희궁 이씨가 있을 땐 어느 정도 행동을 자제했지만, 선희궁이 죽고 난 뒤에는 더이상 거리낄 게 없던지 더욱 조카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화완옹주의 행동이 지나쳤지만 화완옹주가 워낙 영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다보니, 혹시나 그녀의 심경을 거스르면 영조의 질책을 받아 잘못될까봐 세손의 친모인 혜경궁조차 나서질 못했다고 한다. 이후 청소년으로 장성한 정조가 송사를 편집한다고 초고를 쓰는데 몰두하자 송사도 시샘하고[6] , 세손이 궁녀를 좀 맘에 들어한다 싶으면 반드시 훼방을 놓았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세손빈인 효의왕후와의 사이를 방해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한중록을 보면 혜경궁은 자신의 시누이들을 매우 싫어했지만 적어도 남편 사도세자와 시아버지 영조의 관계를 걱정할 때 사도세자의 동복누나이자 화완옹주의 동복언니인 화평옹주가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고생했다고 언급하는 등 시누이들에 대해 중립적인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이를 볼 때 화완옹주에 대한 기록이 무조건 혜경궁의 거짓말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어찌보면 화완옹주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했던 이유도 이런 비정상적인 집착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나중에 머리가 굵어진 정조가 고모의 간섭을 싫어하기 시작하자 이에 빈정이 상해서 사이가 틀어졌다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2.4. 유배
정조의 즉위 과정에서 정조와 척을 진 것은 사실이기에, 정조 즉위 직후 화완옹주 역시 양자인 정후겸, 비슷한 혐의를 받고 있는 홍인한 등과 함께 죄인으로 몰려 탄핵당했다. 실제로 본인도 "아바마마가 저렇게 정정한데 대리청정이 웬 말이냐?!"며 대리청정을 반대한 전력이 있으니, 탄핵은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논의 끝에 옹주의 신분을 잃고 서인으로 강등당해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뭍으로 옮겨져 파주로 이배되었다. 귀양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는 얘기도 있지만, 사약을 받은 것은 양자인 정후겸 뿐이고 화완옹주는 계속 유형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2.5. 말년
정조 원년에 귀양을 갔다가 23년이 지나고 나서야 석방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정조도 "정처[7] 를 용서하겠다."고 한 것으로 볼 때, 오랜 귀양에서 풀려나기는 한 것 같다. 하지만 왕실 인물임에도 졸기는 없다. 이것으로 볼 때, 끝까지 옹주의 신분으로 복권되지는 못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1808년 5월 17일자에 기록된 순조 실록에서 대신들이 "정처가 죽어 더이상 죄를 묻지 않는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이다.
3. 평가
3.1. 근친상간?
여담이지만 한중록을 통해 화완옹주와 사도세자 남매 사이의 '''근친상간''' 가능성을 제시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그 근거라는게 겨우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의 궁에만 오면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 정도의 문구밖에 없다. 때로는 화완옹주가 정조에게 집착하는 모습과 영조가 화완옹주를 사도세자에게서 떨어뜨려 놓으려는 모습을 근거 삼기도 한다.[8] 이에 대해서 영조에게 편집성 인격장애가 의심되는 점으로 볼 때 자신이 아끼는 딸 화완옹주가 사도세자와 함께 있는 것조차 싫어할 정도로 사도세자를 증오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나올 수 있다.
한편 한중록에는 사도세자는 화평옹주나 화협옹주와는 달리 화완옹주에게는 유독 냉하게 굴어 화완옹주가 오빠를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완옹주는 "오빠는 왜 나에게만 그러는 걸까" 한탄했다고.
상단에 나오다시피 아버지와 남동생 사이의 중재에 신경을 썼던 화평옹주와 아버지에게 무시당해서 서로간에 동병상련을 느끼던 화협옹주와 달리 아버지의 편애를 받으면서도 언니처럼 중재에 별 신경을 안 썼기에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사도세자가 그런 화완옹주를 밉살스럽게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애초에, 영조의 성격상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저 둘이 살아있었을까?''' 사도세자는 몰라도 화완옹주는 확실히 엄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잊지 말자. 영조는 어릴 때 아꼈던 사도세자도 맘에 안 들자 학대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오랫동안 둘이 한 방에 있었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모두 녹초가 되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풀어헤쳐진 몰골로 함께 있었다."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3.2. 묘사
흔히 각종 소설, 드라마 등의 매체에서 화완옹주가 정치적인 이유로 오빠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사도세자 사후에는 조카 정조와 대립각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화완옹주의 시가(媤家)는 소론파[9] 였으며 사도세자와의 관계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시누이 화완옹주를 '''정처'''[10] 라 칭하며 싫어했던[11] 혜경궁 홍씨도 그 점만은 명확히 했다. 하지만 영조실록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정조의 왕위 계승이 초읽기에 들어간 시점에서 정조가 홍인한-정후겸의 연합 정권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자 홍인한과 정후겸은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방해했고, 화완옹주도 정조에게 "주상께서 정정하신데 마땅히 대리청정의 명을 사양하는 것이 옳다."고 옆에서 부추겼다. 어쨌거나 정후겸, 화완옹주는 정조에게 크게 척을 지지 않았고 홍인한이 주도적으로 정조를 공격했지만, 영조가 총애하는 적법한 후계자에게 반기를 든 것은 너무 무모한 행동이었다. 결국 정조는 성공적으로 왕위를 계승했고 홍인한과 정후겸은 모조리 숙청됐다.
4. 창작물에서
정조의 적으로 취급받고 있는 정후겸의 양모인데다 이덕일 식 노론 음모론의 영향으로 정조를 다루는 사극에서는 거의 악의 축으로 취급받는다. 화완옹주와 세자의 친밀한 관계가 제대로 구현된 작품은 찾기가 어렵다. 유일한 예가 《대왕의 길》. 여기서는 화완옹주와 세자의 친밀한 관계가 자세히 구현되었다.
- 《맹꽁이 서당》에서는 노론파와 함께 사약을 받고 죽는 걸로 묘사되었다.
영조(김성원 분)와 사도세자(최수종 분) 사이를 이간질하며, 사도세자가 죽은 후에도 세손이던 정조(전호진 분)의 일기장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는 내용이 있다고 일러바치는 등 정말 악랄하게 각색되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사도세자가 침소로 쳐들어와 목에 칼을 겨눈 채로 행동을 조심하라고 할 정도. 정조 즉위 후 정후겸이 사약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혜경궁 홍씨(최명길 분)를 찾아가 정조를 설득해달라고 한다. 그러나 확답을 못듣자 폭언을 내뱉는다.
작 중 내내 아버지 정순왕후(김여진 분)와 함께 왕실 내에서 정조(이서진 분)를 음해하는 역할을 했다. 정후겸(조연우 분)과 함께 정조를 축출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정조 즉위 직후 귀양을 가며 하차한다.
-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
정조에게 끝까지 발악하다 귀양을 가는 역으로 그려진다.
김대명 분)가 폭주할 경우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정도로 묘사된다.[12] 그예로 영빈 이씨(이항나 분)의 생일날 세자가 가마를 준비했는데, 그 가마가 중전만이 탈 수 있는 화려한 가마였다. 영빈은 중전만이 타는 가마라면서 신분에 맞지 않으므로 세자에게 탈 수 없다고 하자 세자가 폭발하여 칼을 들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자 그를 진정시키기도 했다. 그외에도 세자가 내관을 죽이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누군가 시체를 자신의 침소에 넣어놨다고 헛소리를 하는 것을 처리해 주고 위로해주는 명백한 아군으로 묘사된다.
극중에서 사도세자(노론 음모론이 만연했던 창작 분위기에서 노론 음모론을 전격 배제한 작품이란 공통점이 있다. 이 역시 사도세자(유아인 분)와 옹주의 관계가 나쁘지 않게 그려지는 작품. 잘 알려진 대로 영조(송강호 분)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모습도 나오지만 사도세자가 영조와의 갈등을 못 이기고 칼까지 들고 폭주하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모두 기함할 때 화완옹주만이 '자신이 중재할테니 일단 진정해 달라'고 간곡히 설득하는 모습도 나온다. 사도세자가 죽은 직후 조카인 세손 정조(이효제 분)에게 매달리며 집착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붉은 달》과 이 작품은 이덕일이 《사도세자의 고백》을 출간해 5. 관련 문서
[1] 향교동에 있었다. [2] 본관은 연일이다. [3] 본래 정석달의 아들로 정치달의 사후양자로 입적되었다.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이었으나 화완옹주 덕택에 출세한다. [4] 당시 정조가 효의왕후를 싫어한 사실이 홍대용이 쓴 계방일기에도 잘 나오는데, 정조가 홍국영, 홍대용과 대화하다가 빈궁을 측천무후와 여후에 비유하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여자를 저렇게 비유한다면 어마어마한 욕이다.[5] 많이 알려지다시피 조선 시대에는 독상을 주로 했지 겸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엄연히 국본인 어린 조카와 겸상하며 밥도 같이 먹을 정도로 화완옹주가 조카에게 집착했다는 얘기가 된다.[6] 여기서 송사라는 건 중국 24사사 정사 중 하나이자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다룬 역사책 송사를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도 아니고 서책을 시샘했다는 것.(...) 여담으로 송사 문서에도 나오지만 정조는 즉위 후에 자신의 초고를 토대로 송사를 개정하게 했다.[7] 정씨, 즉 정치달의 아내라는 뜻.[8] 배경은 약간 다르지만 연산군과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관계도 이럴 가능성이 크다. 야사에서는 연산군이 박씨를 범해서 아기를 임신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정사에는 없다. 다만 신하들이 지나치다며 지적할 정도로 연산군이 박씨에게 각종 물품을 많이 하사하고 세자의 교육을 맡기는 등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는 기록은 있다.[9] 흔히 노론파로 알려졌지만, 화완옹주의 시가는 엄연한 소론이었다.[10] 鄭妻. '정씨의 처'라는 뜻으로, 옹주에서 폐해진 뒤 이런 호칭으로 불렸다.[11] 혜경궁 홍씨가 화완옹주를 싫어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때 화완옹주는 이미 옹주 작위를 박탈당해 정처가 공식 명칭이었기 때문에 화완옹주를 정처라 부른 부분이 혜경궁 홍씨의 화완옹주에 대한 감정의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12]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드라마 속에서 아버지 영조(김명곤 분)는 갈등의 대상이고 어머니 영빈 이씨(이항나 분)는 후궁 출신, 혜경궁 홍씨(박하나 분)는 남편에게 순종해야할 부인일 뿐이지만, 화완옹주는 자신과 같은 왕족이자 모든것을 이해해주는 자기 편으로 인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