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 이씨

 



'''조선 영조의 후궁
온희정빈 이씨 | 溫僖靖嬪 李氏
'''
'''시호'''
온희(溫僖)
'''빈호'''
정빈(靖嬪)
'''출생'''
미상
'''사망'''
1721년(경종 1년) 11월 16일
(향년 28세)
'''사당'''
연호궁(延祜宮)
'''원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6 수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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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함양(咸陽)
'''부모'''
부친 이후철
모친 김해김씨
'''부군'''
영조
'''자녀'''
1남 2녀
(1녀) 화억옹주 (조졸)
(1남) 효장세자
(2녀) 화순옹주

1. 개요
2. 생애
3. 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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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분은 비록 남자와 여자이지만 생각은 친구사이여서 나의 마음을 아는 자는 그대요, 그대의 마음을 아는 자는 나였다.

《소훈이씨제문》

조선 영조의 첫 번째 후궁. 효장세자의 생모이다.

2. 생애


1701년(숙종 27), 8세의 어린 나이로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 영조는 그녀를 양가의 딸이라고 밝혔는데, 양인이지만 궁녀로 입궁할만큼 집안이 한미하고 쇠락했던 것으로 보인다.[1]
언제 어떻게 영조의 승은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17년(숙종 43) 4월 22일에 화억옹주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16년에는 승은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승은을 입은 이후, 영조가 왕세제가 되기 전까지 왕자의 신분으로 창의궁에서 살았다.[2]
1718년 3월 9일에 시어머니가 되는 숙빈 최씨가 사망하고, 한달만인 4월 8일에는 화억옹주[3]가 돌이 막 지나서 사망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영조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온 듯. 그도 그럴 것이 24세에 첫 딸을 보았으니 조선시대치고는 꽤 늦은 나이에 자식을 본 셈인데 그 자식은 첫사랑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영조는 일찍 죽은 딸을 위해 직접 글을 지어 무덤에 넣어주기까지 했고[4], 1773년(영조 49) 4월 7일 화억옹주로 추증한다.
이듬해 2월 28일, 첫 아들 효장세자[5]을 낳는다. 아들을 임신했을 때 꾸었던 태몽은 봉황과 같은 상서로운 새가 날아들고 황금 거북이가 나오는 꿈이었다고 한다.[6] 그러나 민진원의 말에 따르면 이 탄생은 썩 환영받지 못한 모양이다.

연령군(延齡君)은 사람됨이 온유하고 영민하여 임금의 사랑을 받은 것이 연잉군보다 지나쳤다. 연잉군은 자주 임금의 질책을 받았고 또 생모의 상중에 있으면서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행검이 없다고 책망하여 임금을 알현하지 못하게 한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 정유년(1617) 이이명(李頤命)이 독대(獨對)했을 때 임금의 뜻은 대개 연령군에게 있었다고 한다.

《단암만록》

출처가 출처인만큼 걸러서 보아야겠지만, 영조의 재위 초반부 정치적 파트너였기도 하고, 민진원의 정치 성향을 고려했을 때 굳이 이런 이야기를 싣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숙빈의 삼우제와 졸곡제가 5월에 있었고, 삼년상을 생각하면 임신은 절대 안되고 금욕해야 하는 기간이 맞다. 조선후기로 가면 민간에서 시부모의 상중에 임신한 며느리가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지경. 그러니까 숙종이 화냈어도 그럴 만한 일이다.
어쨌든 영조가 왕세제이던 시절에 종5품 소훈(昭訓)에 책봉되었으나,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영조는 제문에서 그녀가 정식 후궁이 되었고 자식들이 귀해진 탓에 궁궐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으나 도리어 병이 되었다고 말했다. 궁궐은 엄격하고 복잡한 곳이니 사저에서 살던 시절 같을 수는 없어서 고질병이 되었다고 탓했다. 그런데 1722년(경종 2) 3월 27일에 남인의 서얼 출신인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다. 노론 측에서 왕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7]를 들고 나왔는데, 이 중에 정빈 이씨의 죽음에 대한 고변도 있었다.
목호룡의 말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정빈 이씨의 독살을 주도한 사람은 서덕수[8]다. 1721년(경종 1) 6월에 은자 300냥을 환관 장세상에게 보내 약을 구입하게 했고, 약의 성능을 시험해보고자 그해 11월에 동궁의 주방나인 이씨를 시켜 음식에 탔다. 그리고 이 음식을 먹고 당시 소훈이었던 정빈 이씨가 죽었다.[9] 경종을 시해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모르모트가 된 셈인데, 이 사건은 신임사화로 번지고, 경종과 영조는 물론이고 정국을 흔들어 놓는다. 훗날 영조가 등극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따라 노론을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한 소론의 정치공작이 되고, 역적이 된 서덕수는 신원된다. 일각에서는 서덕수가 저지른 일로 영조의 정치 생명까지 끝장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성왕후와의 불화 원인으로 꼽는다.
영조는 즉위한 해에 이씨를 정4품 소원(昭媛), 그 다음 해에 정1품 정빈(靖嬪)으로 추증한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연호궁(延祜宮)에 모셔졌고, 무덤은 수길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숙빈 최씨 옆에 장사를 지낸 것은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옆에서 모시겠다는 그녀의 바람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도 소령원과 수길원은 무척 가깝다.

3. 가계


  • 남편 : 영조
    • 장녀 : 화억옹주 이향염 - 요절[10]
    • 장남 : 진종(효장세자) 이행
    • 며느리 : 효순왕후(현빈) - 풍양 조씨
    • 차녀 : 화순옹주
    • 사위 : 김한신

[1] 출처: 소훈이씨제문(해독). # [2]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까지 그녀의 자식은 모두 영조의 사저인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3] 당시의 이름은 향염(香艶)으로 향기롭고 고운 꽃이라는 뜻이다. 영조의 나이 88세에 화억옹주로 추증한다. [4] 《유녀향염광지(幼女香艶壙誌》,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5] 아명은 만복(萬福)이다. [6] 영조실록 20권, 영조 4년 11월 26일 임신 2번째기사. # [7] 대급수(大急手): 칼로 살해 / 소급수(小急手): 약으로 살해 / 평지수(平地手): 모해하여 폐출함. [8]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의 조카다. [9] 경종실록 8권, 경종 2년 5월 14일 무술 1번째기사. # [10] 첫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요절, 당시 생조모 숙빈 최씨의 상중이라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영조의 도포로 죽은 아이를 감싸 외조부인 이준철의 묘 발치에 묻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