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성의 난
1. 개요
1627년부터 46년까지 지속된, 명나라를 멸망시킨, 그러나 신 왕조 수립에는 실패하고 청나라에 의해 종말을 고한 명 말엽의 대규모 농민 반란.
2. 배경
근본적인 원인은 역시 100여년 가까이 누적된 명나라의 사회질서 붕괴와 변혁, 이에 따른 혼란, 재정파탄, 그리고 계속되는 암군의 등장으로 인한 통치체제 약화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의 기본적 질서인 농촌 사회는 이갑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시조인 홍무제 주원장 본인부터가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농민 반란을 통해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인물이었기에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 형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갑제 역시 호적에 등재된 사람들만 부역과 조세의 의무가 부과되었기에 농민들은 이를 감당할수가 없어 이갑제 체제에서 이탈, 즉 호적을 올리지 않고 유랑을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조세 부담이 과중해지고 다시 유랑민이 늘어나고 이하 무한반복. 더군다나 명 제국 최대의 치욕인 토목의 변, 그리고 북로남왜로 대표되는 이민족의 침략 등에 맞서기 위해 명나라의 군사비는 급증하기 시작했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대폭 올려야 했는데 이로 인해 농민의 부담이 크게 증가한다.
여기에 더하여 명나라 말기에 이르면 상인과 지주층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 의한 부의 축적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자영농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농촌에서 이탈하는 유민들의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1505년 정덕제의 즉위를 시작으로 그 이름도 찬란한 명나라 4대 암군, 소위 F4의 기나긴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정덕제는 아바타 놀이 말고는 국정을 소홀히 하지 않아 특별히 암군이라 부를 소지가 없었지만 가정제 치하 45년부터 문제였는데 가정제가 도교 신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하고 국고를 열심히 축내며 도교를 추종하는 권신이 조정을 좌우하면서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특히 이때부터 명나라는 북로남왜가 본격화되었고 농촌 유민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상황인데 황제가 이 모양 이 꼴이고 조정도 권신이 좌우하여 사리사욕이나 채우니 대책 같은 걸 세울리가 있나…
가정제 사후 5년 간의 짧은 쿨타임이 지나고 조선에 도움을 준 것 말고는 한 일이 하나도 없는, 명나라 F4에서도 톱을 달리는 만력제 치하 48년이 시작되면서 명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30여년에 걸친 기나긴 업무거부, 즉 파업을 단행하였고 이 시기에 만력 3정으로 대표되는 대외 전쟁과 만력제 무덤 공사로 막대한 재정까지 축내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1620년대까지 명나라는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다. 특히 명나라 중후반기 이후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상인, 지주층의 성장으로 늘어나는 재정 부담을 어떻게든 줄여주고 있었고, 과거를 통해 유입되는 인재들과 이들이 기반이 된 관료층은 어떻게든 제국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내부 통제에 들어가면서 남왜의 걱정은 사라졌고, 명나라는 모든 전력을 후금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위기만 넘긴다면, 어떻게든 명나라는 되살아날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162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을 휩쓴 대기근이 닥쳐왔다.[1] 국가별로 시기와 규모는 다르지만 25년~30년에 걸쳐 명나라, 몽골, 청나라, 조선, 일본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기근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화북 지방의 기근이 극심했는데 1627년 섬서성 일대의 대기근이 결정타였다. 이때의 기근은 유랑민들과 빈농들에게는 결정타였는데 이들은 말 그대로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을 위해 봉기한다. 농민 반란으로 건국된 명나라가 농민 반란으로 인해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그간 함께 여진을 압박하던 동맹국 조선이 왜란과 반란으로 약해진 상태로 후금에게 연속으로 패하고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복함에 따라 그나마 후금을 동쪽에서 견제해 주던 동맹이 오히려 적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전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
3. 전개
3.1. 전반기
1627년 섬서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농민 반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급료와 식량을 받지 못해 탈영한 군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실직자가 된 빈민과 전직 관리 등이 대거 가담했다. 이 봉기와 군세가 조직화된 것은 1628년의 일로, 왕가윤(王嘉胤)이 봉기하며 군세를 조직했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 도적떼에 불과했던 각지의 반군들이 왕가윤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1631년 왕가윤이 진압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지만, 이미 반란군에는 유능한 부장급 지도자들이 다수 있었고,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고영상이 왕가윤의 뒤를 이어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1633년까지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며 섬서, 산서 두 성을 차지한 고영상의 군대는 정부군의 진압작전에 한때 전멸 위기에 처했으나 같은 해 겨울에 황하의 결빙을 틈타 산동, 하남으로 탈출하고 반란의 규모를 크게 불렸다. 이후 고영상은 틈왕을 자처하였고, 이를 위협적으로 본 숭정제는 대대적인 토벌을 지시했다.
당시 명나라에서 반란군 토벌의 중책을 맡은 인물은 홍승주(洪承疇)로, 태자태보와 병부상서를 겸임하며 하남, 산서, 섬서, 호광, 사천의 군사전권을 맡을 정도로 숭정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무장이었다. 그리고 이 절대적 권한을 가진 홍승주는 대군을 이끌고 1635년 위남 전투에서 고영상의 군대를 말 그대로 영혼까지 털어버렸다. 위남 전투의 패배로 고영상의 군세는 거의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고, 이듬해인 1636년 섬서순무 손전정(孫傳庭)의 관군에 의해 지도자 고영상이 체포, 북경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이무렵 남은 반란군은 수십여 명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고 말 그대로 반란은 끝난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부장급 지도자 중 장헌충(張献忠)과 나여재(羅汝才)는 투항했고, 이자성(李自成)만이 투항을 거부하여 틈왕을 자처하였으나 이자성마저 1638년 동관 전투에서 홍승주와 손정전이 이끄는 진압군에게 참패하여 부하 17명만을 데리고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사실상 반란의 명맥이 끊긴 상황에서, 이자성을 구원한 것은 숭정제와 숭정제를 압박한 청나라였다. 같은 해 9월, 청의 군대가 금주를 포위했는데 이때 숭정제는 반란도 진압되었겠다, 자신이 가장 믿고 신임하는 최고의 에이스 홍승주를 전격적으로 계료총독이라는 대청전쟁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639년 출병시켰다.[3]
그러나 이자성은 아직 살아있었고, 항복한 장헌충과 나여재도 후일을 기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이 전력을 모아 청과의 전쟁에 임하는 동안, 이들 농민반란 지도자들은 하남으로 이동하여 세를 모으고 재궐기하기에 이른다.
3.2. 후반기(1639년~1644년)
이자성 등 반란군 지도자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점은, 명의 근본적인 사회문제가 전혀 개선되지 않은데다 기근까지 계속되어 재정과 민생이 파탄났고 황실과 조정에 불만이 많은 유민들이 하늘처럼 많다는 것이었다.[4] 투항했거나 도망친 부하들이 다시 이자성 주위로 결집하고 새로운 유민들이 여기에 가세하면서 이자성군의 세력은 급속도로 불어났다.[5]
여기에 이암(李岩), 우금성(牛金星), 송헌책(宋獻策)과 같은 지식인 집단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단순한 농민반란군 수준이었던 이자성군은 본격화된 반군조직이자 명을 대신할 새로운 국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들은 석권한 하남성을 중심으로 부정부패한 관료들을 처벌하고 관아의 재물과 곡식을 백성들에 나누어주면서 토지 재분배를 실시하는 등의 정책으로 빈곤과 착취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비슷한 시기 장헌충과 나여재의 군대도 화남 지방으로 진출한다.
1641년은 명나라에게 있어 실로 치욕스러운 해였다. 2월 장헌충군은 대치하던 양사창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북성 최대의 요충인 양양을 함락하고 양왕 주익명을 참살하였다.[6] 양왕 주익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낀 병부상서 양사창은 이후 홧병으로 사망했다.[7] 직후 나여재는 장헌충과의 불화로 이탈하여 이자성에 합류하지만 결국 이자성에게 목숨을 잃었다. 이로서 장헌충은 호북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같은 해 이자성과 그의 군사들은 낙양을 함락한 뒤 재물과 식량을 백성들에게 나눠준 후 복왕 주상순을 삶아 죽인 뒤 잡아먹었다.[8] 명 황실에 속한 친왕 2명이 반란군에 잡혀 끔살당한 것이다. 그걸로 부족해 양대 반란 세력이 중원 한복판을 차지하며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642년 이자성은 격전 끝에 개봉을 함락시켰고, 1643년에는 좌량옥(左良玉)을 격퇴하고 동관에서 손정전을 전사시키며 1638년 동관 전투 패배를 설욕했으며 상양을 점령하여 양경으로 개칭하고 스스로를 상양왕이라 자칭하였다. 같은 해 무창을 함락한 장헌충도 스스로를 대서왕이라 칭하였으며 이후로 이자성군은 순나라, 장헌충군은 서라는 국호를 쓰며 사실상의 국가체계를 갖추게 된다.
운명의 1644년, 이자성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 1644년 초 서안을 함락한 이자성은 서안을 수도로 삼는 대순(大順)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칭제하여 황제가 되었고 주력부대를 이끌고 북경으로 향했다. 이에 맞선 명 왕조에서는 조정 신료들이 남경 천도를 강력히 주장할 정도로 자체적인 방위력이 없는 실정이었는데, 명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은 모두 산해관에서 오삼계의 지휘를 받으며 청군과 대치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숭정제는 남경 천도를 거부했는데 이자성군이 북경에 육박한 상황에서 안전한 천도를 장담할 수 없었던 것, 그리고 북경을 포기할 경우 당시 명의 유일하다시피한 군사력인 산해관의 오삼계군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점이 작용했다. 이 시점에서 명 왕조의 유일한 살길은 청이 내부문제로 철군하고, 그 틈을 타 오삼계군이 북경으로 돌아와 이자성군을 격파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1644년 4월 23일, 외성수비를 맡은 태감 조화순(曹化淳)이 투항했고, 이틀 뒤인 4월 25일 자금성이 함락되었으며 숭정제는 자결하고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3.3. 난의 종결 (1644~1646년)
북경에 입성한 이자성군은 승리감에 도취된 나머지 그동안 엄격했던 규율이 일시에 무너졌고 곧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기 시작했다.[9][10] 이는 북경 시민들 및 지식인, 관료 및 신사층들이 반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설에 따르면, 이자성은 숭정제의 내탕금을 빼앗아 부하들에게 나눠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자금성을 함락하고 보니 내탕금이 없어서(…) 약탈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거기다 이자성군의 책사 역할을 했던 이암과 우금성 간의 갈등까지 벌어졌다.
한편, 이자성은 북경을 함락시키고 명나라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자성은 최우선적으로 오삼계를 회유하여 산해관에서 청나라와 대치하는 현 상황을 유지코자 시도했다. 그러나 오삼계는 이자성의 회유를 거부하고 역으로 청나라로의 투항을 선택한다.
이자성은 청군이 오삼계군에 합류하기 전에 각개격파를 하겠다는 의지로 출병하여 일편석에서 격전을 벌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으나, 접전의 와중에 청군이 등장하여 대규모 돌격을 감행하자 전세가 크게 기울었고 끝내 참패하고 만다.
이후 이자성은 청-오삼계 연합군으로부터 북경을 지켜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북경을 포기하고 후퇴, 화북 각지에서 남하하는 청군과 맞서 싸웠으나 여러 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사실상 재기불능에 빠졌고, 1645년 6월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이자성과 행동을 달리했던 장헌충은 촉 지방으로 후퇴하여 역시 결사항전하였으나 촉 지방의 지식인, 신사층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자행[11] 하여 민심이 이반된 데에다 강대한 청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패배, 멸망하고 말았다.
4. 평가
4.1. 명나라
명나라는 1505년 등극한 정덕제를 시작으로 무능한 황제들의 등극 및 초반에는 왜구와 오이라트가, 나중에는 만주족의 외침으로 이후 멸망때까지 약 140여년간 바람잘 날이 없었다. 외부의 적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정은 제대로 했어야 했는데, 무능한 황제들이 계속 등극하여 연달아 실책을 저지르고 환관이 국정을 농단하면서 민생이 악화되며, 대규모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다.
한편으로는, 명나라의 유능한 장수들이 하나둘 전열에서 이탈한 것도 컸다. 특히 사르후 전투와 송산 전투에서 명의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한데다 뛰어난 장수인 원숭환은 숭정제에 의해 처형되었고 홍승주는 대청전쟁을 위해 차출되었다가 패하여 포로로 잡힌 후 청나라에 귀순했고, 양사창은 후반기 반란군 토벌의 최고 책임자이자 최고의 전략가였으나 결정적인 순간에 사망하였다. 양사창 사후 반군 진압에 나선 장수들 중 가장 뛰어났고 사실상의 최고 지휘권을 갖고 있던 손정전은 동관에서 반군을 막아냈으나 숭정제와 조정의 무리한 출병 요구에 불리한 상황에서 억지로 출병했다가[12] 패하여 전사했고 동관도 함락된다. 최후의 명장이었던 손전정의 죽음과 동관의 함락은 곧 명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수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투항하여 이민족인 청나라로 편을 바꾸었고, 이들의 손에 남명은 멸망하는데, 이것만 봐도 명나라 황실은 이미 민심을 크게 잃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농민 반란에 청군까지 대처하느라고 명나라의 대군이 산해관에 묶였던 것은 명나라한테서 불운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청에 맞서던 오삼계군이 산해관을 떠나 이자성군 진압에 나섰다면 명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고 해도, 명 황실의 권위가 이미 땅에 떨어진 이상 명나라의 멸망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후한, 당나라, 청나라가 각각 황건적의 난, 황소의 난,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을 겪으면서 중앙정부의 정규군이 무능력을 보였고, 이 때문에 각각 군벌들로 가까스로 진압했으나 이들 군벌(후한은 동탁, 유표등의 자사, 당나라는 주전충 등의 절도사, 청나라는 원세개를 비롯한 북양군벌)이 성장하면서 이들 손에 사직이 끝장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명나라의 멸망은 외부의 침략보다는 지도층의 무능과 악정, 민생파탄, 반란이 겹친 내부문제가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명나라 초기에 토목의 변이 있었음에도, 몽골 고원을 통일한 오이라트나 남부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를 막아낸 것을 보면, 명나라가 내정의 안정화에 총력을 기울였고 내정이 안정화되었다면 청나라를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4.2. 이자성군
이자성의 패착이 '처음부터 제대로 된 계획없이 움직였다는 점'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기록을 보면 그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자성은 본인이 실권을 잡을 초창기만 해도 이전까지 실패를 검토해 배울 줄 아는 제법 노련한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고 모르면 기꺼이 남에게 물어서라도 익히려 했을 정도로 개방적인 인물이었다. 또한 '백성을 구하자'라는 명분에서 시작한 만큼 관을 털어서 얻은 식량들을 자신들이 독점하는게 아니라 대부분을 농민에게 배분해주었고 이자성 본인은 반란군의 최고 통수권자면서도 졸병과 같은 복장, 같은 음식을 먹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단순히 상관이 아닌 전우라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반군과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는 이자성이 몇번이고 밀려도 몇번이고 반군과 백성들이 다시 모여 재기할 수 있게 했던 발판이 되었다.
실권을 잡은 초창기의 이자성은 황건적의 난 초창기 이후로 이때까지의 반란군 수장치곤 정말 끈질겼고 제대로 무리를 이끌었고, 백성들을 구휼한 의적이란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동시에 자신이 있던 반란군의 원래 수장인 왕가윤과 다른 반란군의 수장이었던 고영상이 각각 패전을 겪고 처형당했다는 것을 보고 이자성은 수만 많은 잡졸들로는 승리를 거둘수 없다고 판단, 섬서에서 재기할 당시 농민만 끌어모은게 아니라 임관하지 않거나 못한 지식인과 선비들을 가능한대로 끌어모아 나름의 참모진을 구성해 군대로서 구색을 갖추었고 실제로 이들의 책략 덕분에 명나라 최후의 명장이자 고영상을 죽인 손전정을 패사시키고 명의 토벌군을 전멸시키기도 했다. 이를 보면 여러 전투에서 이 참모진들의 공로가 절대 작진 않다고 볼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건 이들이 개봉 점령 이후 거리가 얼마 안되는 동북쪽의 북경으로 바로 간게 아니라 '''눈앞의 북경을 두고 돌아가면서까지 북서의 태원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수도와 황궁을 지키는 정예군을 상대로 벌이는 공성전을 승산이 없다여겨 북경을 노리는 대신 북경의 석탄 공급원인 태원을 함락시킨다는 판단이 그 근거였다. 석탄 광산이 있는 태원을 차지하면 이자성군은 석탄을 대량 수급할 수 있는데 비해 북경 쪽은 석탄을 수급 못하게 되니 전략적으로나 생활적으로나[13] 북경 자체를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4] 실제로 이자성군의 이 계책은 훌륭히 맞아 떨어져 북경에 무혈입성하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북경에서도 이랬을 정도면 이자성군의 인기가 이 당시만해도 엄청났다는 증명인 셈이다.
다만 '''이후 두번 다시 이자성은 이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왜냐면 이자성 군 내외로 커다란 문제가 하나씩 터졌기 때문이다. 내적인 문제로는 당초 목표였던 황제를 쫓아내고 북경을 먹는 것을 달성한 이자성군이 그 순간 지휘부부터 군기가 느슨해지기 시작해 휘하 반란군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던 것. 더 큰 문제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농민들 출신이던 반란군은 '''군의 이름을 가장한 도적떼로 돌변했다는 것이다.''' 민심을 등에 업은 덕분에 커온 만큼 이 일은 아직 이자성군에 협력하지 않았던 또는 눈치보고 있던 명나라 유신들과 백성들이 반발하며 그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에 같은 반란군끼리도 뜻이 안맞아서 서로 협력하긴 커녕 장헌충과 서로 다른 나라를 세워내며 암묵적으로 견제해 세력의 약화를 불렀다. 원래부터 머릿수말곤 믿을게 없는 반란군 집단들이 서로 뜻도 안맞추고 개별 행동을 하니 이는 이후 청군과 청에 합류한 오삼계군의 공세에 무력하게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외적인 문제로는 명의 정예군을 다가지고 있으며 본인도 엄청난 명장인 오삼계를 제대로 포섭하지 못한 것이 결정타였다. 오삼계는 충성의 대상이던 명나라가 멸망하자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투항한 홍승주가 받은 대접을 보고 본인도 여진족에게 투항한다. 결과적으로 명나라 잔류세력(남명)들은 오삼계 및 한족 투항자의 손에 멸망했다.
이자성군의 전투력은 이때까지 농민 반란군 대부분이 그렇듯이 크게 봤을때 시대 상황을 고려하고 봐도 뛰어나다고 볼 수 없었다. 수가 많은건 이점이었지만 문제는 장비고 경험이고 죄다 빈약했고 뜻을 같이해야 할 반란군끼리도 수장들이 협력하지 않아 손발을 맞추지 못했다. 이는 집단적으로 훈련받은 명나라 정예군과 전투민족인 북방의 만주족과 비교하면 아무리 수적 우세가 있어도 손색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병력의 질적 문제를 주 실패원인으로 보는 주장도 있지만 이 문제도 영향이 아예 없다곤 못해도[15] 실질적인 패착은 상술한 두 개였다.
이자성은 오랑캐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1644년 5월 산해관에서 오삼계-청나라군과 전투를 벌이지만(일편석 전투), 이렇게 전투력도 차이가 있는데다가, 병력도 오삼계-청나라군의 반밖에 안되었다.(이자성군 약 6-10만, 오삼계군 5만, 청나라군 8만) 당연히 참패를 거둘 수 밖에 없었고, 이자성군의 정예부대는 여기서 모두 증발하게 되었다. 결국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이자성군은 서쪽으로 계속 도피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고 난은 실패로 끝난다.[16]
4.3. 이후
이자성의 난은 이후 중국의 정치가들에 지속적인 귀감이 되었다. 장제스는 대후금 전선에 주력군을 투입했다가 내부의 이자성군에게 망한 명나라의 실패를 뒤풀이 하지 않기 위해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内:외적 퇴치보다 내부 안정이 우선)라는 원칙을 세우고 일본 및 소련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대했다. 즉, 일본(열하사변 및 만주사변)이나 소련(봉소전쟁)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대폭 양보해 휴전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는 대신 내부 반란인 공산군에 대해서는 대규모 초공작전을 벌여 토벌하는데 더 힘을 쏟았다.
반대로 마오쩌둥은 북경 입성 후 도적떼로 변해서 민심을 잃어버린 이자성군을 반면교사로 삼아 인민해방군의 군기를 끝까지 유지하도록 애썼다. 또한 신민주주의론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지식인 및 자본가들도 계급투쟁 대상에서 제외하여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국민당군 장교나 고관들에게 이전과 비슷한 지위와 대우를 약속함으로서 투항을 유도하여, 제2의 오삼계가 나오는 것을 방지했다.
5. 대중문화
- 대명겁 (2013) - 이자성의 난 와중에서 명나라 최후의 토벌군을 이끄는 손정전과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 분투하는 의사 오우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난은 심화되는데 역병은 계속 확산된다. 손정전은 환자들을 모두 불사르는 극약처방을 쓰지만, 이는 민심을 더 악화시키고..
[1] 기근의 원인이 소빙기로 인한 기후 변화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2] 특히 명나라는 호란 때 청을 당해낼수 없었던 조선이 도와달라고 급히 요청했음에도 내부 사정이 막장인터라 조선을 도와줄 수가 없었다.[3] 하지만 숭정제에게는 불행히도, 그가 가장 믿고 누구보다 신뢰했던 에이스 홍승주는 송산전투에서 참패 후 포로로 잡혔고, '''청의 투항권유를 받아들여 항복'''하고 한군팔기의 지휘관이 되었다. 숭정제는 홍승주가 전사한 줄 알고 크게 슬퍼하고 대대적으로 제사까지 지내다가 나중에는 그가 생존하며 청에 투항한 사실을 전해듣고 멘붕했다.(…) 그리고 홍승주는 훗날 청의 중국대륙 침공때 선봉이 된다.[4] 명나라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다룬 중국 드라마 강산풍우정에서도 극중에서 감옥에 갇힌 내각수보(명나라의 재상직책) 주연유에게 홍승주가 최후의 만찬(+술, 사약)을 대접하면서 나눈 대화중 주연유가 언급한 것이 있다. 청나라의 팔기군이 기세가 대단해도 병력수가 18만명에 불과하니 명나라 곳곳에 있는 오만가지의 성곽을 뚫을 수가 없으나 명나라 내부 섬서, 하남 2개성에만 도적수가 최소 50만-100만이고 병력의 우위가 정부군의 10배가 넘어서 절대 막을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후 극중에서 주연유는 숭정제의 최측근인 태감 왕승은을 탄핵하다 이로 인해 숭정제의 분노를 사게되어 홍승주가 건넨 길상주(사약)을 받아 마시고 죽었다...[5] 1641년 개봉을 공격할 무렵 이자성의 군대는 3만 3천 명이었는데, 1642년 4월에 다시 개봉을 공격할 때에는 무려 113만 명으로 늘어났다. 다만 저 숫자 전부가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는 전투원인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직접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원은 전체 인원의 약 10분의 1 가량에 불과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투원을 위해 온갖 잡다한 일들(식량과 옷과 약품들의 보관 및 무기와 장비들의 수리 등)을 해주는 일꾼 역할을 했다고 한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07쪽[6] 당시 주익명은 양양이 함락될때 도망가려다 장헌충군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7] 책임감이 너무 과해서 자결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의 아들이 남긴 기록에서는 자결설을 부정하고 있다.[8] 다만 주상순은 사치와 탐학질로 낙양 백성들의 증오를 받았던터라 그가 잔혹하게 죽었을때 백성들이 전부 기뻐했다.[9] 이자성이 북경에 머무는 42일 동안, 그의 부하들이 북경의 시민이나 부자 및 관리들로부터 약탈한 금액은 모두 7천만 냥에 달했는데, 이 액수는 명나라 조정이 5년 동안 거둬들인 세금과 맞먹는 수치였다. 한 마디로 이자성군이 얼마나 약탈에 혈안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12쪽[10] 이때 이자성군한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 중에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장인인 주규나 대학사 진연 같은 고위관리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자성군을 막기 위해 숭정제가 군사비로 쓸 재산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처음에는 돈이 없으니 못 내놓겠다거나 혹은 황후한테 사정해서 바칠 돈의 액수를 깎는 치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막상 이자성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가진 재산을 몽땅 빼앗겼다(...). 돈 몇 푼을 아낄려다 전 재산을 잃게된 셈이다.[11] 신사층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폭발시켜 민중의 지지를 공고히 하려는 조치이긴 하지만, 과거를 열겠다고 속여 유생들을 불러모은 뒤 모두 학살하는 등 방법이 너무 지나쳤다. 장헌충 항목 참조.[12] 당시 손정전이 지키는 동관은 한쪽은 험준한 산이고 다른 한쪽은 급류의 황하가 흘러 지세가 험준하기에, 지키기는 쉬워도 공격하기는 무척 어려운 지역이었다. 그래서 수비 위주로 나가면 이자성 반군한테 큰 손실을 주며 막아낼수 있었다. 실제로도 이자성은 동관을 공격하다가 큰 피해를 입어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숭정제와 조정은 손정전한테 나가서 반군을 섬멸하라고 압력을 넣어 수비로 나가려던 손정전도 할수없이 동관의 전 병력을 이끌고 공격으로 나가게 되었다. 문제는 이때 손정전이 이자성의 유인책에 넘어가버리는 바람에 명군은 공격하다가 역으로 반군에게 포위당하여 4만명이 전사했고 손정전도 동관으로 겨우 퇴각했으나 반군이 추격해와 동관에 맹공을 퍼부어 중과부적으로 동관이 함락된다.[13] 중국의 화북 지역은 수천년간 인간의 활동무대였고 벌목이 성행했기 때문에 이미 송나라 시절부터 이 지역에는 삼림이 고갈되었다. 그래서 이 당시 중국은 석탄이 화북 지역에서 쓰이는 거의 유일한 연료였다. 특히 당시 화북에서는 석탄이 없으면 난방은 고사하고 용광로를 못돌려서 '''칼, 활 같은 병장기를 못만들 뿐만 아니라 밥짓기 같은 일상생활도 불가능하다'''. 무기제조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데 도성 방어가 잘 될 리가...[14] 북경에서 아무것도 안하면 어차피 자체적인 생산시설이 별로없는 북경이 점차 말라죽을수 밖에 없고 그렇다고 무리하게 나왔다간 지형적 이점을 이자성군에게 주고 시작하는거나 다름이 없다.[15] 사실 이는 통일 진나라 말기에 벌어진 진승, 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이때까지 벌어진, 딱 한 경우를 제외한, 모든 농민반란이 공유하는 주요 패착 중 하나다.(다른 하나는 병참문제) 그 유일한 예외는 그 당시 원나라가 망할 때의 명나라 이상으로 개판이었고 청나라 같은 외부세력의 개입도 없었고 유력한 수뇌부가 있는 다른 반란군이 없었기 때문이다.[16] 굳이 대회전을 벌인게 패착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하는데, 이자성이 북경을 먹을 때처럼 자신들의 약함을 전략으로 메꿀려는 생각은 1도 못하고 농민들 가지고 정예병들에게 어택땅을 찍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땐 민심도 따르지 않고 그나마 승산있던 수적 우세조차 밀리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