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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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황옥과 독립유공자 황직연 형제는 그의 사촌 형이다.[3]
2. 생애
황정연은 1891년 2월 25일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아랫한두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상리 32번지)에서 황의헌(黃義憲)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장수 황씨 문중에서 설립한 한두리의 도천소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며, 본생가 7촌 숙부(재종숙)인 황의필(黃義弼)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받아 1908년 교남교육회에 평회원으로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9년 12월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으로 이주하였으며, 1921년 3월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같은 해 그는 중국 베이징에서 박용만·이회영·신채호 등이 주도 조직한 제2회 보합단(普合團)에서 마침 경리부장을 담당하던 고향 후배 김희중(金熙重)의 권유를 받고 제2회 보합단 국내지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김희중은 태평양회의가 미국 워싱턴 D.C.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독립을 공인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내 각지에 독립단을 결성할 목적으로 그해 8월 귀국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희중은 9월 평소부터 독립운동의 뜻을 함께 하던 황정연, 이춘구(李春求) 등과 모임을 갖고 태평양회의의 개최에 발맞추어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이며 이를 위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지방의 유력인사들을 모집하고 폭탄 및 무기를 들여와 충청북도 괴산군에 군사령부를 설치할 계획임을 알렸다. 이에 황정연을 경리부 부장, 이춘구를 참모장으로 하는 조선독립군사령부를 조직키로 하고 이후 사단 설치를 위한 모의를 계속하였고, 이때 황정연은 상하이와 베이징, 경성부와 대구부를 오가며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7촌 숙부(재종숙) 황의목(黃義睦)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4,000여 원의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해 10월 말 김희중이 친일경관 김태석의 밀정 김인규(金寅圭)의 농간으로 체포됨으로써 황정연도 연루, 체포되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21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복역 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고막을 상실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출옥 후 괴산군 불정면 목도리로 돌아가 1928년 10월까지 살았으며, 이후 고향인 문경 아랫한두리로 돌아가 8.15 광복 전까지 요양 생활을 지속했다. 한편, 집안 식구들은 황정연이 독립운동에 가담하면서 재산을 탕진하자 1935년을 전후하여 경상남도 부산부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8.15 광복 후 집안 식구들이 살고 있는 경상남도 부산시로 이주하여 살다가, 1955년 1월 10일 별세하였다.
200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1] 인근의 대하리와 함께 장수 황씨 집성촌이다.[2] 23세 연(淵) 항렬.[3] 아버지 황의헌(黃義憲)은 본래 황태주(黃泰周)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는데, 이후 7촌 숙부(재종숙)인 황면주(黃冕周)에 입양되었다. 황옥·황직연 형제는 황태주의 장남인 황의만(黃義晩)의 차남·3남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황정연에게는 본생가 쪽 사촌 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