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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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錫
1883년 11월 23일 ~ 1950년
1. 개요
2. 친일 행적
3. 광복 후 행적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일제강점기 때 악명높은 친일경찰로, '고문왕'이란 별명을 들었다. 본관은 경주(慶州).
1883년 11월 23일, 평안도 양덕현 온천방 일양리[1](현 평안남도 양덕군 일암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1908년 3월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그해 4월부터 잠깐동안 평양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다가 곧 일본에 유학하여 니혼대학 법과 야간부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 1910년 5월 충청남도 홍주보통학교, 1911년 4월 평양공립보통학교 훈도로 교원생활을 했다.

2. 친일 행적


그러다가 1912년 9월 조선총독부 경찰관 통역생으로 전직하면서 친일 행적의 낌새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는 함경북도 웅기경찰서, 평안남도 광양만(廣粱灣)경찰서, 평양경찰서를 전전하며 통역생으로 근무하였는데, 통역생으로 근무하던 1915년 평양경찰서장의 특명으로 항일 비밀결사 '일심사(一心社) 사건'의 일부를 취급하여 관련자 검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경무과 차석으로 있다가 1918년 3월 경무부 총감부 고등경찰과에 전직, 순사가 되어 본격적으로 친일 경찰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 해 8월 경찰관제도의 변경으로 경기도 고등경찰과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때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한 전과가 가히 어마어마했다. 1919년 9월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일으킨 강우규를 체포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도록 공헌하였으며 그 밖에 연루자인 허형최자남(崔子南)·오태영(吳泰泳) 등을 검거하는 등의 공으로 경부로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 또 1920년 7월 밀정 김진규(金珍奎)를 이용하여 밀양폭탄사건의 관련자 이성우(李誠宇)[2]·곽재기·황상규·윤세주[3] 등 6인을 체포하여 취조 끝에 김병환(金鉼煥)의 집에 폭탄 2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1921년 10월 말에는 밀정 김인규(金寅圭)를 이용하여 제2회 보합단(普合團) 경리부장 김희중(金熙重)을 검거, 취조하여 조선독립군사령부 조직 모의사실을 알아내고 황정연이춘구(李春求)를 추가로 검거하기도 했다. 1922년 황포탄의거 때는 중국 상하이로 도항하여 김익상을 조사하기도 했으며, 체포 및 조사과정에서 온갖 고문과 악행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23년 8월에 경시로 승진되어 경기도 형사과장으로 근무하였고, 그 해 12월 16일 퇴직하였다.
경찰 퇴직 후 1924년 12월부터는 군수로 전임되어 경기도 가평·연천·부천 등지의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38년 6월 경상남도 칙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전직하였는데, 이때 당시 조선지원병 모병시험과의 업무도 겸하면서 청년 25명을 출병하도록 유인했다고 한다. 1940년 9월에 퇴직하면서 종(從)4위 훈(勳)4등에 서훈되었고, 1944년 6월에 중추원 칙임 참의에 선임되기도 했다.김태석의 친일행적

3. 광복 후 행적


8.15 광복 이후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발효되자 친구 이원찬(李源讚)을 이용하여 일본으로 도주하려다 실패하였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체포되어 그해 3월 29일 공판에 회부되었는데, 이때 공판에 참석해서 보여준 언행이 가히 전설의 레전드급이라 할 수 있겠다.당시 공판기록[4]

"제가 이 자리에서 자랑 같겠지만 독립운동가를 제법 구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로선 애국자는 한 사람도 잡은 일이 없고 도리어 도망시킨 일이 있다."

"그저 김태석은 죽어도 조선민족을 위하여 애썼으므로 부끄러울 게 없습니다"

이때 검찰관으로 입회하였던 곽상훈은 김태석의 이러한 철면피 같은 태도에 격분하여 "이때까지의 피고인의 진술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참으로 성현의 말과도 같고 가장 애국자 같이 보인다. 이렇기 때문에 본 재판을 가장 공정하게 진척시키려면 먼저 피고인의 머리를 정신분석하여 정신이상 유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공판 당시 무기징역 및 50만원의 재산몰수 처분을 받고 복역하다 1950년에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 지가 알려져 있지 않은데, 1950년 이후에 행방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 즈음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찬가지로 고문의 황제라는 별명을 들었던 김덕기 또한 1950년 이후로 행적이 끊어져 있는데, 모두 전쟁통에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김태석의 최후에 대해서는 전쟁 통에 북한의 인민군 손에 붙잡혀 인민재판에 회부되었고 그때 처형당했다고 하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4. 대중매체에서


1990년 MBC 8.15 특집드라마 <반민특위>에선 배우 김상순이 연기했다.

[1] 인근의 평암리와 함께 경주 김씨 집성촌이다.[2] 이명 李成宇[3] 이명 윤소룡(尹小龍)[4] 시간이 있으면 읽어보기 바란다. 김태석이 얼마나 뻔뻔한 인간이었는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