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옥(1887)

 




'''황옥
黃鈺'''
'''출생'''
1887년 5월 3일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윗한두리
(現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59)[1]#
'''사망'''
불명[2]
'''본관'''
장수 황씨[3]
'''이명'''
황만동(黃晩東)
'''부모'''
아버지 황의만
'''형제자매'''
동생 황직연[4]
'''친인척'''
손자 황정하
1. 개요
2. 생애
2.1. 사건 이전
2.3. 광복 후
3. 기타
4.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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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3년에 있었던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 계획 실행 요원. 일제 기관 파괴와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의 지령을 받고 무기를 국내로 반입하는 것을 돕다가 발각돼 체포되었다. 이에 대해 황옥이 공을 세우기 위해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지만,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어서 친일파라고 확실하게 단정짓진 못하고 있다.[5]

2. 생애



2.1. 사건 이전


1887년(고종 24) 5월 3일 경상도 상주목 산북면 윗한두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59번지)에서 황의만(黃義晩)의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가정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09년 통감부의 재판소 서기 겸 통역생으로 취직한다. 그해 8월 16일 재판소 번역관보(판임관4등 8급봉)로 서임, 이어 11월 29일 평안북도 선천구재판소, 평양구재판소 서기(書記) 겸 통역생(通譯生)으로 근무한다.
1910년부터 1911년까지는 평양지방재판소 산하 진남포구재판소 서기과에서 서기 겸 통역생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해주지방법원 재령지청 판사(判事)와 서기과 서기로 근무하였다. 이후 1917년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 서기과에서 통역생으로 근무, 1918년 해주지방법원 수안출장소와 신계출장소 서기, 1919년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 서기과 통역생과 신천출장소 서기, 1920년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서기과 서기 겸 통역생 등 11년간 여러 지방의 법원에서 서기 또는 통역생, 판사 등으로 재직했다.
그러던 1920년 3월, 경기도 경찰부 직속 도경부(道警部)에 특채되었으며 1922년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경부(警部)로 재직하게 된다.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 직원록 자료

2.2. 황옥 경부 폭탄사건


[image]
같은 해 경기도 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하던 중 의열단의 단원인 김시현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결의하였으며[6] 김상옥 의사가 국내 활동 중 수사망이 좁혀져 오고 있다는 정보를 제공해서 상하이로 망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23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 톈진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나 항일 독립 운동에 가담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총독부 등 일제의 기관 파괴와 일제의 요인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암살 등의 지령을 받았다. 이어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받아 권동산·김시현·김재진 등과 함께 신의주를 거쳐 서울까지 운반하였다. 그러나 김재진이 일본제국 경찰에 밀고함으로써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황옥은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체포 이후 재판 당시 모습
1924년 경성 지방 법원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장결핵과 폐렴으로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 1928년 5월 재수감되었다가 1929년 2월 다시 가출옥하였는데, 이 사건을 가리켜 일명 '의열단의 제2차 국내 거사 계획' 또는 '황옥경부폭탄사건'이라 일컫는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서는 황옥이 고려 공산당의 내정과 극동 인민 대표 대회의 내용을 정탐하기 위한 일제의 주구 역할을 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이 거사가 실패로 끝난 것은 황옥의 간계 때문으로, 황옥이 공을 세우기 위해 의열단에 접근해 무기의 국내 반입을 돕는 척하며 일제의 밀정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일제가 의열단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벌인 대표적인 공작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하지만 위 주장에 대한 반박도 가능하다. 황옥이 정말 밀정이었으면 의열단원들이 체포된 후 황옥은 포상을 받고 경찰직도 유지 또는 승진을 했을 것인데, 오히려 경찰직을 박탈당하고 의열단원들과 함께 징역형을 받았다는 것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수사한 친일 경찰 김덕기가 받은 포상과 비교하면 더 그렇다. 그리고 황옥은 출소 후 같이 투옥되었던 김시현이나 의열단원 우승규 등 독립 운동가들과 교류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조선 독립 운동사 편찬 발기인 대회에 김시현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한 반민특위에서 친일 경찰들의 행위 증명을 위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하였다. 밀정으로서 감쪽같이 속인 것 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반민 특위에서 황옥의 밀정 행위에 대한 처벌, 정 아니라면 반민 특위에 회부된 친일 경찰들이 자신들의 처벌을 위해 증인으로 나서는 황옥을 밀정이라 말했어야 하나 그러지도 않았다. 쉽게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의열단의 단장이었던 김원봉이 그를 "경기도 경찰부 고등부 경부이나 과거 의열단원으로 활동했으며,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자로서 불쌍한 자"라 발언하기도 해서 그의 행적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7]

2.3. 광복 후


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에서 제2경무총감부의 경무총감으로 근무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국민당 소속으로 파주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한 그는 6.25 전쟁 시기에 납북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기타


  • 영화 밀정의 주인공인 이정출(송강호 분)의 실제 모델이다.

4. 외부 링크


영화 '밀정' 실존 인물 황옥의 정체는 뭐였나
[1] 인근의 대상리와 함께 장수 황씨 집성촌이다.[2] 6.25 전쟁납북된 터라 정확한 행적은 알 수 없다.[3] 23세 ◯연(淵) 항렬. 족보명은 황철연(黃喆淵)이다.황옥(황철연) 계보[4]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5] 게다가 동생인 황직연이 황옥의 부탁을 받아 의열단과 접촉해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일제의 공을 세우기 위해 동생을 독립운동에 투신시킨 상황도 앞뒤가 맞지않다.[6] 다른 의열단 사람들은 처음에 황옥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애초에 경찰이기 때문.[7] 1934년 의열단원으로서 국내 공작 활동을 하던 홍가륵의 신문조서에서 나온 증언이다.신문조서(제9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