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라 준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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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후쿠라 준이치 (福良淳一)
'''생년월일'''
1960년 6월 28일
'''국적'''
일본
'''출신지'''
미야자키현 히가시우스키군 키타우라정[1]
'''학력'''
미야자키현립 노베오카공업고등학교
'''포지션'''
2루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드래프트 6순위
'''소속팀'''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 (1985~1997)
'''지도자'''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타격·내야수비주루코치 (1998)
오릭스 블루웨이브 2군 수비주루코치 (1999)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2군 감독 (2007)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코치 (2008)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타격코치 (2009~2011)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1군 수석코치 (2012)
오릭스 버팔로즈 1군 수석코치 (2013~2015)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대행 (2015)
오릭스 버팔로즈 감독 (2016~2018)
'''프런트'''
오릭스 블루웨이브 스카우터 (2000)
오릭스 버팔로즈 제너럴매니저 (2019~)
''''''오릭스 버팔로즈''' 역대 감독'''
모리와키 히로시
(2013~2015.6)

'''후쿠라 준이치'''
'''(2015.6~2018)'''

니시무라 노리후미
(2019~2020.8)
1. 개요
2. 선수 시절
3. 은퇴 이후


1. 개요


[image]
일본프로야구 선수, 감독. 현 오릭스 버팔로즈 GM, 편성부장. 오릭스 버팔로즈의 지휘봉을 잡았었다.

2. 선수 시절


현역 시절에는 수비능력과 작전 수행능력이 뛰어난 내야수였으며, 현역 선수생활을 전부 한큐-오릭스에서 하며 팀의 전성기를 지지했다.
신인이던 1985년 당시 감독인 우에다 토시하루의 엄격한 연습을 힘들어해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1군 첫 경기에 출전하게 된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파울 플라이를 낙구하고 1개월동안 기용되지 않기도 했다. 첫 시즌을 마친후 스프링캠프에서 수비 훈련을 중점적으로 받았다. 2년차인 1986년에는 주전 이와모토 요시히로의 부진, 백업 후쿠하라 미네오와의 2루수 레귤러 경쟁에서 승리했다. 세이부의 기요하라 카즈히로와 신인왕을 놓고 다퉜다. 1988년에는 등번호를 1번으로 바꿨는데 전주인은 프런트와의 불화때문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쫓겨난 미노다 고지였다.[2] 1989년은 모기업이 한큐 전철에서 오릭스로 바뀐 첫 해인데, 오릭스의 제1호 홈런을 기록했다. 1992년에는 수비율 .992를 기록했으며, 1993년~1994년 836 연속수비기회 무실책 일본기록을 수립했다. 1995년은 첫 퍼시픽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1996년에 첫 일본시리즈 우승의 영광을 안게 된다. 1997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

3.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오릭스, 닛폰햄의 코치직을 맡았으며, 특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젊은 야수들의 성장에 공헌했다고 평가받았다. 2006년 44년만의 일본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 오릭스의 수석코치를 맡던 2015년 모리와키 히로시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 사퇴하자 감독대행을 맡아 남은 기간동안 팀을 지휘했다.
2016년부터 정식으로 감독을 맡았고[3] 지옥훈련으로 선수들을 조련했으나 결과는 2016년 최하위에 2017년에도 개막 1달만에 DTD를 찍고 B클래스에 교류전도 잘나가다 DTD를 찍으며 B클래스에 계속 머무르는 만년 B클래스의 이유를 증명하는 실망스러운 야구를 보여주고 있다. 오릭스 팬들은 후쿠라의 이해할 수 없는 선수기용 및 배치[4], 번트작전 남용 좀 그만 하라고 하는 중이며 해설자들도[5] 이게 무슨 야구인지 모르겠다며 비판하는 중. 성적은 2017년 8월 초 기준으로 4위지만 퍼시픽리그 최악의 감독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무능한 감독을 대체할 마땅한 후보가 없었는지 2017년 시즌 끝나고 1년 계약 연장을 제시하면서 후쿠라를 신임했다. [6]
2018년 시즌에 의외의 재능이 발견되었다. 비디오 판독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첫 해인데 NPB 12개구단 감독 중에서 비디오 판독 신청 성공률이 가장 높은 감독으로 드러나면서 현지에서는 매의 눈을 가진 감독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시즌이 가면 갈수록 성공률이 떨어져서 비디오 판독 성공률마저도 1위에서 밀려났다. 사실상 무툴인 셈.
결국 1년 더 계약을 연장한 2018년에도 예년과 별 다를바 없는 성적으로 팀은 4년 연속으로 포스트 시즌 진출이 좌절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릭스의 프런트는 팬들의 비판을 무시하고 아무런 성적을 내지 못한 후쿠라에게 '''또다시 계약연장의사를 타진하는 등(!)''' 답이 없는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만 감독 본인이 재직한 3년반동안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데에 대한 책임을 통감했는지 구단의 연장계약 제안에도 불구하고 2018년 시즌을 끝으로 무조건 퇴임한다는 의사를 구단에 전달했다. 후임은 전 롯데 감독이자 후쿠라 감독 체제 하에서 벤치코치를 지냈던 니시무라 노리후미로 낙점되었다.
GM과 편성부장으로도 심각하게 평가가 좋지 못하다. 팜은 나름대로 풍요로워졌으나, 오프시즌 중 전력보강에 심각하게 소홀하여 오릭스 팬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다.

[1]미야자키현 노베오카시[2] 미노다 고지는 노쇠화로 1990년 시즌 중반에 은퇴했다. 다만 1989년 일본시리즈때 역스윕의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우승반지를 추가하게 된다.[3] 이 때 이하라 하루키가 오릭스를 살려낼 사람으로 후쿠라를 지목했다. [4] 특히 팀의 중심타자 T-오카다의 경우 1번부터 7번까지 고정을 안하고 기용한 탓에 다른 중심타자들마저도 페이스가 흔들렸다.[5] 특히 요미우리 출신들이 앞장서서 극딜했는데 요미우리 감독인 하라보살의 입단동기인 코마다 노리히로는 해설하는 내내 씹어댔다.[6] 근데 오릭스 프런트가 답이 없는 건 정말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오릭스 버팔로즈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