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명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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興天寺銘 銅鍾. 조선 세조 8년, 1462년에 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종. 현재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0호이다.
흥천사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 인근에 건설했던 사찰이다. 이성계는 사찰이 건설된 후 1398년 7월에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직접 참여하였고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가 베풀어질 때 사찰 스님들을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였다. 이후 태조는 흥천사를 아내의 명복을 오래도록 비는 원찰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 3년인 1403년에 태종이 절의 노비와 밭의 양을 크게 감하였고, 이후 1408년에는 절의 태평관(太平館)을 허물었다. 이후에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허물고 수리하기를 반복하다 연산군 10년 12월에 절을 불태웠고 중종 5년인 1510년에 마지막 남은 사리각마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정조 18년, 1794년에 정조의 명으로 현 위치인 성북구 돈암동 지역에 신흥사(神興寺)란 이름으로 절을 다시 복구하였고 훗날 이름을 다시 흥천사로 되돌렸다.
흥천사에 있던 동종은 흥천사가 박해받던 조선 초중기때 7대 왕이었던 세조가 국가의 발원과 재력을 동원하여 1462년 만들어 달아주었던 높이 282cm에 이르는 대형 범종이다. 연산군과 중종시기 흥천사가 결국 개박살날때 이 대종만은 훼손하지 않고 덕수궁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종의 횡대와 문양대 사이에는 세조 8년에 왕의 명으로 국가에서 흥천사용으로 제작한 사실이 명문으로 돋을새김되어 있고, 이어서 종을 제작할 당시의 분업 상황과 참여한 직제 등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또한 아름다운 유곽이 새겨져 있고 광휘에 뒤덮인채 합장하는 보살상이 유려하게 입각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쌍룡이 판각되어 있다.
흥천사명 동종이 걸려 있는 광명문(光明門)은 원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 남쪽에 있었는데 1938년 일제가 멋대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원래는 함녕전 권역의 대문이었던 광명문에 동종이 걸리고 자격루가 전시되면서 그 역할을 잃었다. 문화재청은 2016년 광명문이 원래 위치해 있던 함녕전 남쪽 터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여 건물 유구를 확인했고, 2018년 1월 18일 "광명문 위치 복원 공사를 봄에 시작해 올해 안에 마무리하려 한다”는 뜻을 밝혔는데## 광명문이 원래 위치로 옮겨지고 보존 처리까지 마치게 되면 흥천사명 동종이나 자격루 역시 위치가 다른 곳으로 이전되어야 하고, 자격루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큰데, 흥천사명 동종의 경우 원래 있던 곳인 흥천사로 보내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고려때에 수입된 중국의 양식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양식이 혼합되어 조선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전통방식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후 조선에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 고유한 범종의 모본이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또한 왕실에서 왕의 명을 받아 직접 만든 것으로 크기와 예술성, 판각 기술 등이 매우 수준 높으며 이 종이 만들어지던 당시 세조가 지녔던 숭불의식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1. 개요
興天寺銘 銅鍾. 조선 세조 8년, 1462년에 왕의 명으로 만들어진 종. 현재 덕수궁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의 보물 제1460호이다.
2. 내용
흥천사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가 죽자 이를 슬퍼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기 위해 신덕왕후의 릉인 정릉 인근에 건설했던 사찰이다. 이성계는 사찰이 건설된 후 1398년 7월에 우란분재(盂蘭盆齋)를 직접 참여하였고 8월에는 신덕왕후의 천도회(薦度會)가 베풀어질 때 사찰 스님들을 만나 시주하고 천도회를 주도하였다. 이후 태조는 흥천사를 아내의 명복을 오래도록 비는 원찰로 삼았다.
그러나 태종 3년인 1403년에 태종이 절의 노비와 밭의 양을 크게 감하였고, 이후 1408년에는 절의 태평관(太平館)을 허물었다. 이후에도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허물고 수리하기를 반복하다 연산군 10년 12월에 절을 불태웠고 중종 5년인 1510년에 마지막 남은 사리각마저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정조 18년, 1794년에 정조의 명으로 현 위치인 성북구 돈암동 지역에 신흥사(神興寺)란 이름으로 절을 다시 복구하였고 훗날 이름을 다시 흥천사로 되돌렸다.
흥천사에 있던 동종은 흥천사가 박해받던 조선 초중기때 7대 왕이었던 세조가 국가의 발원과 재력을 동원하여 1462년 만들어 달아주었던 높이 282cm에 이르는 대형 범종이다. 연산군과 중종시기 흥천사가 결국 개박살날때 이 대종만은 훼손하지 않고 덕수궁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종의 횡대와 문양대 사이에는 세조 8년에 왕의 명으로 국가에서 흥천사용으로 제작한 사실이 명문으로 돋을새김되어 있고, 이어서 종을 제작할 당시의 분업 상황과 참여한 직제 등이 자세히 새겨져 있다. 또한 아름다운 유곽이 새겨져 있고 광휘에 뒤덮인채 합장하는 보살상이 유려하게 입각되어 있으며 두 마리의 쌍룡이 판각되어 있다.
흥천사명 동종이 걸려 있는 광명문(光明門)은 원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 남쪽에 있었는데 1938년 일제가 멋대로 지금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원래는 함녕전 권역의 대문이었던 광명문에 동종이 걸리고 자격루가 전시되면서 그 역할을 잃었다. 문화재청은 2016년 광명문이 원래 위치해 있던 함녕전 남쪽 터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여 건물 유구를 확인했고, 2018년 1월 18일 "광명문 위치 복원 공사를 봄에 시작해 올해 안에 마무리하려 한다”는 뜻을 밝혔는데## 광명문이 원래 위치로 옮겨지고 보존 처리까지 마치게 되면 흥천사명 동종이나 자격루 역시 위치가 다른 곳으로 이전되어야 하고, 자격루는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질 가능성이 큰데, 흥천사명 동종의 경우 원래 있던 곳인 흥천사로 보내는 것이 맞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다.
3. 의의
고려때에 수입된 중국의 양식과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양식이 혼합되어 조선만의 독특하고 고유한 전통방식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이후 조선에서 만들어지는 우리나라 고유한 범종의 모본이 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또한 왕실에서 왕의 명을 받아 직접 만든 것으로 크기와 예술성, 판각 기술 등이 매우 수준 높으며 이 종이 만들어지던 당시 세조가 지녔던 숭불의식에 대해서도 알아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4. 바깥고리
5. 보물 제1460호
흥천사종은 고려말부터 수용된 중국종적인 요소 가운데 한국 전통 종에서 보였던 형식과 요소가 가미되어 새로운 조선전기의 종으로 정착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범종이다. 이후 만들어지는 조선전기 범종의 하나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흥천사종은 다른 조선전기 범종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크기나 문양·주조기술의 탁월함 외에도 왕실에서 발원(發願)한 종이어서 각 분야의 관장(官匠)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어졌으며 명문(銘文)은 주성시(鑄成時)의 조직체계를 알려 주고 있다는 점 등에서 당시의 사회제반사항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