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루
'''自擊漏'''
물시계의 일종.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준다.
대한민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물시계 관련 기록은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누각전이라는 물시계를 관장하는 관아에 대한 기록이 있다.[1] 하지만 역사 시험에서 나오는(...) 문제에서는 주로 태조 7년(1398)에 제작된 '''경루(更漏)'''. 이 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해서 종을 쳐서 밤 시간을 알렸다.[2]
하지만 세종 때 궁궐에서 쓰고 있던 물시계인 경점지기[3] 는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항상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이것을 지켜보고 알려야 했으며 이 때 만약 착오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 세종이 장영실, 김조 등에게 지시하여 2년간 노력한 끝에 세종 16년(1434) 6월에 완성,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했다. 물을 끌어올리는 기관뿐 아니라 알아서 시간이 되면 인형이 움직이고 북이 울리는 구조라, 당시로선 획기적인 자동 시보장치였다.
그해 7월 1일을 기해, 조선 왕조의 표준시계로 사용되었으나 자격루가 제작된 지 21년 만인 단종 3년(1455) 2월에 자동시보장치 사용을 중지했다. 장영실이 세상을 떠나 고장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없었음이 주된 원인이었던 듯하다.[4] 그 후 14년 만인 예종 1년(1469) 10월에 다시 가동했다. 이후 연산군 11년(1505)에는 자격루가 창덕궁에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 후 중종대에 이르러 자격 장치에 의한 시보와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100년 만인 중종 29년(1534)에 새 자격루를 만드는 작업이 착수되어 중종 31년(1536)에 장인 박세룡(朴世龍)이 완성했다. 여러 대에 걸쳐 개보수가 되었으나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고는 자격루는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 단 1개밖에 없다.
수압을 조절하기 위한 물통 4개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실린더를 넣은 물통 2개를 두어 오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추가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이용하여 보정하였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자격루의 모습이다. 세종실록 7월 1일기사
간단히 설명하자면 항아리에 물이차서 흘러내리면 살대가 점점 떠오르고 그게 구슬들을 움직이게 해서 그 구슬이 인형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이 울리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밤중 3경(三更)[5] 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리면, 그 소리를 들은 경복궁 정문의 문지기들은 다시 문루 위에 있던 북을 세 번 쳤다. 그리고 그 소리가 종각의 북 치는 사람 귀에 들어가 다시 종각에 북을 세 번 울려주어 서울 시내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격루의 물받이통은 두 개가 있다. (이하 편의상 두 물받이통을 '수수호A'와 '수수호B'로 설명) 이 두 물받이통은 평소에는 하나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수수호A를 사용하고 나면 수수호A의 물이 다 차서 물을 빼고 새로 넣고 다시 구슬 세팅하는 데 당연히 시간이 걸리므로 수수호A의 물이 다 차면 즉시 미리 구슬을 세팅해 놓은 수수호B로 물관을 옮긴다. 그리고 구슬을 회수한 후 수수호A의 물을 빼 놓고 다시 수수호A의 구슬을 세팅한다. 즉, 수수호A의 물을 빼고 구슬을 다시 세팅하는 시간 동안에 수수호B가 작동하므로 물받이통 교체에 따른 시간 지연을 없애 정밀한 시간 측정을 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날은 다시 세팅된 수수호A로 물관을 옮긴 다음 수수호B의 물을 빼고 다시 구슬을 세팅하는 식으로 매일 번갈아가면서 물을 빼고 구슬을 세팅한다.
장영실은 이것을 제작하고 관노의 신분에서 호군으로 신분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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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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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제 크기의 복원품을 볼 수 있다. 모습을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작동해서 일정 시간마다 스스로 소리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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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 제작된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가 수명이 다해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1534년(중종 29년)년에 박세룡에게 제작을 명하여 3년 만인 1536년(중종 31년)에 완성된 것이 창경궁 자격루다.
제일 큰 그릇에는 제작연대가 새겨져 있고[7] 두 개의 누기(기둥모양의 그릇)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자격루는 보루각 자격루(報漏閣自擊漏)라고 불린다. 보루각 자격루 또는 창경궁 자격루는 1985년 대한민국의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훼손될때 덕수궁 광명문으로 옮겨져 신기전, 흥천사명 동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가 2018년 보존작업을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2020년 보존작업이 끝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특이하게 51년마다 개보수가 이루어졌다.(명종 5년(1550) → 선조 34년(1601) → 효종 3년(1652))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18년 보존작업에 들어가 2020년에 완료되었다. 이번 보존작업을 통해 항아리에 새겨진 제작자들의 이름들이 오독된 부분을 전부 바르게 확인했고,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용 문양이 밀랍을 이용한 wax casting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했다. 앞으로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
1. 개요
물시계의 일종.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준다.
대한민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물시계 관련 기록은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누각전이라는 물시계를 관장하는 관아에 대한 기록이 있다.[1] 하지만 역사 시험에서 나오는(...) 문제에서는 주로 태조 7년(1398)에 제작된 '''경루(更漏)'''. 이 물시계로 시간을 측정해서 종을 쳐서 밤 시간을 알렸다.[2]
하지만 세종 때 궁궐에서 쓰고 있던 물시계인 경점지기[3] 는 정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항상 시각을 알리는 관리가 이것을 지켜보고 알려야 했으며 이 때 만약 착오가 있으면 중벌로 다스리는 폐해도 적지 않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 세종이 장영실, 김조 등에게 지시하여 2년간 노력한 끝에 세종 16년(1434) 6월에 완성, 경복궁 남쪽에 세워진 보루각에 설치했다. 물을 끌어올리는 기관뿐 아니라 알아서 시간이 되면 인형이 움직이고 북이 울리는 구조라, 당시로선 획기적인 자동 시보장치였다.
그해 7월 1일을 기해, 조선 왕조의 표준시계로 사용되었으나 자격루가 제작된 지 21년 만인 단종 3년(1455) 2월에 자동시보장치 사용을 중지했다. 장영실이 세상을 떠나 고장난 자동장치를 고칠 수 없었음이 주된 원인이었던 듯하다.[4] 그 후 14년 만인 예종 1년(1469) 10월에 다시 가동했다. 이후 연산군 11년(1505)에는 자격루가 창덕궁에 이전되어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그 후 중종대에 이르러 자격 장치에 의한 시보와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100년 만인 중종 29년(1534)에 새 자격루를 만드는 작업이 착수되어 중종 31년(1536)에 장인 박세룡(朴世龍)이 완성했다. 여러 대에 걸쳐 개보수가 되었으나 전란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사라졌고, 남은 것이라고는 자격루는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 단 1개밖에 없다.
수압을 조절하기 위한 물통 4개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실린더를 넣은 물통 2개를 두어 오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으며 추가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을 이용하여 보정하였다.
2. 제작된 자격루
2.1. 세종 당시 제작된 물시계
세종실록에 기록된 자격루의 모습이다. 세종실록 7월 1일기사
간단히 설명하자면 항아리에 물이차서 흘러내리면 살대가 점점 떠오르고 그게 구슬들을 움직이게 해서 그 구슬이 인형의 팔꿈치를 건드려 종이 울리게 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한밤중 3경(三更)[5] 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리면, 그 소리를 들은 경복궁 정문의 문지기들은 다시 문루 위에 있던 북을 세 번 쳤다. 그리고 그 소리가 종각의 북 치는 사람 귀에 들어가 다시 종각에 북을 세 번 울려주어 서울 시내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격루의 물받이통은 두 개가 있다. (이하 편의상 두 물받이통을 '수수호A'와 '수수호B'로 설명) 이 두 물받이통은 평소에는 하나만 사용한다. 예를 들어 수수호A를 사용하고 나면 수수호A의 물이 다 차서 물을 빼고 새로 넣고 다시 구슬 세팅하는 데 당연히 시간이 걸리므로 수수호A의 물이 다 차면 즉시 미리 구슬을 세팅해 놓은 수수호B로 물관을 옮긴다. 그리고 구슬을 회수한 후 수수호A의 물을 빼 놓고 다시 수수호A의 구슬을 세팅한다. 즉, 수수호A의 물을 빼고 구슬을 다시 세팅하는 시간 동안에 수수호B가 작동하므로 물받이통 교체에 따른 시간 지연을 없애 정밀한 시간 측정을 꾀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다음날은 다시 세팅된 수수호A로 물관을 옮긴 다음 수수호B의 물을 빼고 다시 구슬을 세팅하는 식으로 매일 번갈아가면서 물을 빼고 구슬을 세팅한다.
장영실은 이것을 제작하고 관노의 신분에서 호군으로 신분 격상되었다.
[image]
아마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image]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실제 크기의 복원품을 볼 수 있다. 모습을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작동해서 일정 시간마다 스스로 소리를 낸다.
2.2. 중종 때 제작된 자격루
[image]
세종 때 제작된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가 수명이 다해 시간이 잘 맞지 않게 되자, 1534년(중종 29년)년에 박세룡에게 제작을 명하여 3년 만인 1536년(중종 31년)에 완성된 것이 창경궁 자격루다.
제일 큰 그릇에는 제작연대가 새겨져 있고[7] 두 개의 누기(기둥모양의 그릇)에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 자격루는 보루각 자격루(報漏閣自擊漏)라고 불린다. 보루각 자격루 또는 창경궁 자격루는 1985년 대한민국의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훼손될때 덕수궁 광명문으로 옮겨져 신기전, 흥천사명 동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가 2018년 보존작업을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옮겨졌다. 2020년 보존작업이 끝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할 예정이다.
2.2.1. 기타
특이하게 51년마다 개보수가 이루어졌다.(명종 5년(1550) → 선조 34년(1601) → 효종 3년(1652))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18년 보존작업에 들어가 2020년에 완료되었다. 이번 보존작업을 통해 항아리에 새겨진 제작자들의 이름들이 오독된 부분을 전부 바르게 확인했고,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용 문양이 밀랍을 이용한 wax casting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했다. 앞으로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
2.2.2. 바깥고리
2.2.3. 국보 제229호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조선 세종 16년(1434)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중종 31년(1536)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물시계의 원리를 보면, 맨 위에 있는 큰 물그릇에 넉넉히 물을 부어주면 그 물이 아래의 작은 그릇을 거쳐, 제일 아래쪽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미리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장치해 놓은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의 쇠 구슬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준다. 이 쇠구슬은 다른 쇠구슬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과 징·북을 울리기도 하고, 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 나타나 시각을 알려주는 팻말을 들어 보이기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물시계는 쇠구슬이 굴러 조화를 이루던 부분이 없어진 채, 물통 부분들만 남아 있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
3. 등장 매체
- 대왕 세종
- 뿌리깊은 나무
- 장영실
- 천문: 하늘에 묻는다
- 2015년 4월 12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제7차 세계 물 포럼' 개막식 퍼포먼스에서 자격루가 박근혜 대통령과 세계 각국 정상들이 있는 방향으로 넘어져 행사장의 경호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소동이 있었다. #
- 한국 애니메이션 달빛궁궐에서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등장인물 중 하나가 자격루에서 도망친 쥐의 신이라는 설정. 이 시계가 멈추면서 신선 세계가 위기에 빠지게 된다. 자격루 자체가 가장 비중있게 등장한 작품.
- 퐁당퐁당 LOVE에서 조선으로 돌아간 고3 학생인 단비가 자격루를 만들게 된다. 이후 다시 현실로 돌아온 단비는 자신이 장영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 세계 역사가 아님을 유의할 것. 그리스와 중국은 이미 '''기원전'''에 자동물시계를 사용했다. 참고로 동시대 유럽에서는 자동시계가 발명되었다. 당장 프라하 천문시계가 1410년 작품이다.[2] 이 종을 치던 종루(鐘樓)가 있던 곳이 바로 종로이다.[3] 하룻밤을 다섯으로 나누어 5경으로 했는데 각 경을 알려주는 물시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예전에는 긴 겨울의 밤에 있어서 각 경과 짧은 여름밤의 각 경의 시간 길이가 달랐다.[4] 1454년 10월에 같이 제작에 참여했던 김실이 세상을 떠나서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장영실의 생몰년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문제의 가마 사건이 1442년이고 이후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145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5] 밤 11:00~새벽 01:00[6] 2020년 보존작업이 끝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전될 예정.[7] 가정병신유월일조(嘉靖丙申六月日造).[8]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李雲穡으로 오독되었었다.[9]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安法□으로 오독되었었다.[10]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金逐里으로 오독되었었다.[11]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都造官으로 오독되었었다.[12] 2018년-2020년 보수작업 전에는 이름 2자를 판독하지 못해 蔡□□으로만 알려졌다.[13] 이상 명문 수정 내용은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