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1. 개요
조선시대에 지어진 궁궐. 원래 왕가의 사저인 명례궁이였으나, 임진왜란 직후 행궁으로써 임시 정궁 역할을 했으며, 대한제국 시기에 황궁으로 사용되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서울특별시청 건너편에 위치해 있다.
원래 세조가 며느리 수빈 한씨[2] 를 위해 특별히 지어준 사저였고[3] 이후 한씨의 큰아들 월산대군이 소유하게 되었다. 한참 후 임진왜란 후 몽진에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의 저택이자 별궁인 명례궁을 개조하여 임시 거처인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된 것이 시초다.
이후에는 창덕궁이 중건된 후 명례궁은 잊혔다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1897년에 이 곳으로 돌아오면서 역사의 전면에 재등장해 10년 간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됐다.
구한말 격변기에 조성된 궁전이기 때문에 본래부터 명례궁의 건물이었던 2층 한옥인 석어당뿐만 아니라 서구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 동양의 양식을 흉내낸 서구식 건물인 정관헌 등 서로 다른 특이한 양식의 건물이 많이 모여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난을 당했으며, 현재는 대한제국 시절의 1/3 이하로 그 면적이 줄어들었다. 덕수궁 주변에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로마네스크)과 성가수녀회 본원(양이재라는 이름의 한옥)[4] 영국ㆍ러시아ㆍ캐나다 대사관, 덕수초등학교 등도 자리한다.[5]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던 시기와 달리 구한말에 증건(增建)된 전각들이 꽤 있기 때문에, 即(卽), 眀(明)[6] 등 약자(略字)나 속자(俗字)가 적힌 편액(현판)들이 다른 4개 고궁보다 많다.
2. 역사와 복원
2.1. 명례궁(왕가의 사저)
원래 수빈 한씨(훗날의 인수대비)가 남편 의경세자의 사망으로 세자빈의 지위를 잃고[7][8] 궁궐을 떠나 살게 되면서 시아버지인 세조가 특별히 수빈 한씨와 그 소생의 월산군, 자을산군, 명숙공주가 기거할 곳을 마련해 주기 위해 지은 사저(私邸)였다. 이후 성종이 왕위에 올라 그 모후인 수빈 한씨도 왕대비가 되어 대궐로 들어가게 되자 이 집은 월산대군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이 집이 바로 명례궁이다.'''
2.2. 정릉동행궁
원래는 월산대군[9] 의 저택인 명례궁이였으나[10]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피난갔다가 환도한 선조가 도성내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려 거처 할 곳이 없자 월산대군의 저택인 명례궁을 개 보수해 임시 궁궐로 사용하면서 '''정릉행궁''' 또는 정릉동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월산대군의 저택이 온전했던 이유는 왜군이 이곳을 주둔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산대군의 저택으로는 궁궐 공간이 현저하게 부족하여 불편이 야기 되었기 때문에 주변 민가들을 대거 징발하여 궁궐로 연결하여 썼다.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는 전각들 중 나중인 대한제국 시절에 지어진 중화전 일대와 석조전을 제외하고, 즉조당과 석어당 등 오래된 전각들을 보면 알겠지만, 원래 전각들은 궁궐이라기 보다 권세 있는 양반집의 모습이다. 선조는 임진왜란 이후 줄곧 이 정릉행궁에서 거처하다가 중건 중인 창덕궁의 완성을 목전에 두고 승하했다.
2003~04년 동안 방영했던 SBS 사극 왕의 여자는 이 정릉동행궁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실제 역사를 반영하여 궁궐 세트가 아니라 대감집 느낌 나는 세트에서 선조 후반 및 광해군 초반의 시기가 다뤄졌다. 심지어 동궁(태자궁)은 초가집이었다.[11] 배우개그의 건물 버전으로 용인 한국민속촌의 중부지방 양반가22호는 왕과 비에서 수양대군의 사저이자 후에 월산대군이 물려받는 집으로 등장하였다가 왕의 여자에서 경운궁으로 출연하였다.
2.3. 경운궁
광해군 원년에 마침내 창덕궁이 중건되었지만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광해군은 보충 공사를 재차 명하여 약 2년간 정릉행궁에 계속 머물렀다. 이후 창덕궁으로 옮겨갔지만 이후에도 다시 정릉행궁으로 돌아와 장기간 거처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이유로 창덕궁을 꺼려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인경궁, 경희궁 등 여러 궁궐을 마구 건설한 것은 근본적으로 창덕궁에 거주하는 것을 무척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마침내 정릉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려 정식으로 궁궐로 승격시켰으며, # 경운궁 확장 공사를 벌여 궁역 내에 여러 전각을 새로 지었다. 그러나 곧 인경궁에다 경덕궁(경희궁)까지 착공하게 되자 물자가 부족하게 되어 도리어 경운궁에 새로 짓던 전각들을 도로 해체하여 경덕궁 건설에 사용했다. 또 소성대비(인목왕후)를 이곳으로 유폐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가 이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것은 인조의 본의가 아니라 철저히 타의(인목왕후)에 의한 것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이 거의 전소되었지만,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 외전 일대만큼은 용하게도 피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에 능양군(인조)은 정궁인 창덕궁에서 즉위식을 치러 정통성을 확보하길 원했다. 그런데 의외로 인목왕후가 "능양군이 직접 경운궁으로 올 것"을 명하면서 차기 왕과 기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조선에서 즉위 절차상 대비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세자가 없는 경우에는 대비가 차기 왕을 지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다.[12] 게다가 능양군 측은 반정으로 정권을 찬탈한 상황이었던 만큼, 한시라도 빨리 즉위식을 올리는 것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인조반정의 가장 큰 명분이 광해군의 폐모살제(인목왕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였던 만큼, 인조가 절대로 인목왕후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임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능양군은 경운궁까지 와서 인목왕후에게 엎드려 조아린 후에야 간신히 즉위식을 치룰 수 있었다. 그러나 즉위식은 경운궁에서 치뤘지만, 인조는 바로 경운궁을 떠나 화재로 폐허가 된 창덕궁으로 들어갔다.[13] 즉위한지 3달 후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 단 2채를 제외한 경운궁의 나머지 가옥과 대지를 모두 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14][15]
인조의 조치를 통해 경운궁은 단 2채의 전각[16] 만이 남아 정릉행궁 시절보다 더 조촐해졌다. 이후 경운궁은 별궁 정도로만 여겨지며 아관파천이 일어날 때까지 약 274년간 역사에서 잊혀진 궁궐이 되었다.
2.4. 대한제국의 황궁
인조반정 이후 이곳은 오랫동안 버림받았다가 근 300년후인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 후 환궁할 때 경복궁이나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경운궁(덕수궁)에 거처하게 되면서 구한말 역사의 중심지로 재등장하게 된다. 고종은 죽을 때까지 덕수궁에서 지냈고, 이후 대한제국의 중요한 사건은 경운궁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다만 1907년 11월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법궁(황궁)의 지위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이 이어할 당시 경운궁은 민간에는 그 이름 조차 잊혀져 있던 상태로, 당시 민간 서적인 한경지략에는 왕가의 작은 별궁인 명경궁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고종이 넓고 좋은 다른 궁궐들을 놔두고 원래 민가였고 이제는 고작 2채의 건물만이 남아 있던 버려진 좁은 별궁인 경운궁에 애착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러시아공사관, 미국공사관, 영국공사관 등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다.[17] 참고로 러시아 공사관과의 거리는 '''10m가 채 되지 않았으며 만약 육로로 못 갈 경우 안전하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과 연결된 지하벙커(지하도)까지 건설했다.''' 사실 러시아 공사관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인근이 미-영 공사관이 있는 '''외국 공사관 밀집지역'''이었다. 인근에 있는 외국 공사관만 해도,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가 인근에 있었다. 이 지역이 바로 개항시기 외교관들을 '''정동구락부'''라고 부르게 했던 바로 그 정도, '''공사관 구역'''이었다. 아관파천 이전에는 미국과 영국 선교사들까지 득시글거려서 한양내의 서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 이 지역이었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경복궁을 포위 점령했던 사건이나 을미사변을 기억하고 있는 고종으로서는 외국 공사관에 둘려싸여서 어떤 나라, 특히 일본이 무력 도발을 할 수 없는 위치였던 경운궁은 특히 각별했다.
아관에서 머물면서 내외로 환궁 압력에 시달리던 고종은 1896년 경운궁 개수를 명하여 환궁을 준비했다. 경운궁은 인조 원년인 1623년에 대거 축소되어 원래 민가였던 즉조당과 석어당 2채만 달랑 남아있던 상태였다. 당연히 정궁으로 쓰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고종은 우선 침전인 함녕전과 서재인 보문각,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사성당 등 당장 필요한 건물들이 급한대로 지어진 상태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했다(1897년). 정전으로는 1902년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5년간 즉조당을 활용했다.
고종은 경운궁을 황궁(정궁)으로 조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를 이어나갔다. 원래 경운궁에 남아있던 전각이 2채 뿐이었기 때문에 그냥 궁궐을 하나 새로 짓는 것에 가까운 대공사였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창덕궁의 인정전을 본따 지은 복층양식으로 단층인 창경궁이나 경희궁의 정전과는 격이 달랐다. 중화전을 중심으로 전통적인 동양식 전각들을 세워가면서 동시에 석조전과 돈덕전, 정관헌 등 서양식 전각도 건립해 나갔다. 당시 경운궁 공사를 위해 '''경복궁 전각들을 헐어'''다가 사용하기도 했다(...). 이 포스팅에 따르면 당시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건된 건축물들은 회안전, 문경전, 태원전 축대, 흥복전 행각, 다경합, 만화당 등이었다고 한다. 이 중 만화당은 경운궁의 함녕전으로 개축된다.
1902년 경운궁 공사는 일차적으로 일단락되어 새로운 정전인 '''중화전'''을 비롯한 주요 전각들이 완공되었다.[18] 그때까지 경운궁은 5년 동안이나 즉조당을 제국의 정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사진들을 보면 1902년에 완성된 경운궁의 규모가 지금보다도 훨씬 컸음을 알 수 있다.
공사할 당시 중층이었던 원래의 중화전. 경운궁 확장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중층 중화전이 지어져 있으므로 1902년경에 찍혔을 사진이다.
또한 새롭게 대한제국이 출범하는 시기였던 만큼 기존의 경복궁 중심으로 짜여진 도성을 덕수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방사상의 새로운 황도로 개편하려는 도시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지금의 세종대로도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2.5. 경운궁 화재 사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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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사진에 남아 있는 문은 동아시아 제후국 궁궐관제인 3문 3조에 맞춰져 지어져 있던 조원문으로, 대한문 바로 뒤에있는 금천교 다음의 문으로 중화전 회랑의 바로 바깥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1904년에 덕수궁 화재사건이 발생하여 서북쪽 권역을 제외한 궁궐 거의 전역이 전소되었다. 당시 궐내(闕內) 함녕전의 온돌 교체공사 도중에 바람을 타고 화재가 일어났던 것. 그 결과 중화전, 중화문을 비롯한 주요 목조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경복궁까지 헐어가며 애써 지은 궁궐이 2년만에 다 불타버린 것이다. 원래 남아있던 2채인 즉조당과 석어당도 이때 소실되었다.
화제 직후 고종은 황실 도서관 건물로 사용하던 ‘수옥헌(漱玉軒)'으로 거처를 옮기고 중명전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후 1910년 석조전이 완공될 때까지 줄곧 중명전이 고종의 침전 겸 편전(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대화재로 사실상 궁궐이 모두 소실되자 고종황제와 대한제국 정부는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안도 유력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결국 비용이 많이 들더라도 경운궁을 재건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1905년에 경운궁 중명전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1906년 경운궁 중건 공사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재정 문제로 인해 1902년의 원래 규모보다 축소되어 복구되었다. 특히 정전인 중화전은 단층으로 복구되어 원래 복층 건물의 장엄함이 사라졌다.[19]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는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고, 이어 순종황제가 중명전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순종은 한동안 중명전을 집무실로 사용했으나, 4달 후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이후 중명전은 다시 태상황 고종의 집무실 및 접견실이 되었다.
퇴위한 이후에도 경운궁에 머무르는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아 순종이 '덕스러울 덕(德)', '목숨 수(壽)'의 '''덕수'''라는 궁호(宮號)를 지어 올린 이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1910년 석조전이 착공 10년만에 완공되었다. 사실 석조전은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부터 정전으로 구상했던 건물이었으나, 결국 이 건물은 자신이 퇴위하고서도 한참 후인 망국의 시점에 즈음하여 완공되었던 것이었다. 완공 후 고종 일가는 석조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해 8월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합방’이 체결되었고(경술국치), 고종은 태상황에서 이태왕으로 격하되었다. 고종은 1919년 붕어할 때까지 계속 덕수궁의 주인으로 남았다. 고종은 석조전에 불편함을 느껴 함녕전에 주로 기거했다고 한다. 이후 석조전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 영친왕이 귀국했을 때 머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2.6.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덕수궁의 건물들을 철거하기 시작했으며, 중화문과 중화전을 빙 둘러 있던 2칸폭의 행각 역시 철거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복원되지 않았다. 30년대 일제가 당시 경성에 기존의 공원으로도 수용할 인원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덕수궁을 공원화할 때 석조전의 앞마당에 프랑스식 정원을 만들 때 방해가 된 것이 중화전의 서쪽 행랑채였다.
해방 직후, 정부수립 이전 미군정기에는 덕수궁의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난 1950년에 덕수궁에 '''북한군이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의 포격으로 없어질 뻔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인천 상륙작전이후 북한군을 밀어붙여 서울로 진격하던 미군은 남산과 덕수궁 일대를 사정거리에 두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북한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드는 바람에 미군은 덕수궁을 포격해야할 상황이 된 것. 그러나 당시 미군 포병장교였던 제임스 해밀턴 딜 중위는 '''"한국의 문화유산인 덕수궁을 파괴하는것은 양심에 걸린다"'''라고 고민하던 끝에 북한군이 덕수궁에서 빠져나가 을지로로 향할 때 포격을 개시했다. 만약 딜 중위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포격을 했으면 덕수궁은 그대로 잿더미가 돼버렸을 상황(...) 이에 감사의 뜻으로 한국 정부는 1996년 해밀턴에게 감사패를 전달하였다.
이후 1960년대 초반 돌담이 헐리고 창살담으로 개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마치 낙동강 오리알처럼 고립되어 버렸고, 결국 이 문을 서쪽으로 옮겨야 했다.
붉은색이 1911년의 덕수궁 권역이다. 파란색은 구 주한미국대사관, 지금은 미국 대사관저인 하비브 하우스. 녹색은 주한영국대사관의 영역이다. 현재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 세워져 있다. 성공회는 영국에서 생겨난 개신교 교파이나 현재는 본국 영국 국교회산하가 아니라 대한성공회 소속이다. 노란색이 현재 덕수궁 영역. 대한문은 원래 지도의 붉은색에서 동하단의 끝에 있었다.
덕수궁도 이런 저런 일로 상당히 많이 훼손되었으며, 그 권역 또한 무지막지하게 줄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경희궁의 권역과 덕수궁은 홍교라는 돌다리로 연결될 정도로 가까웠지만, 지금은 너무나 멀게 느껴져서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왼쪽에 경희궁, 오른쪽에 덕수궁(경운궁)이 있다. 어느 블로거가 정리한 홍교의 건립 시기와 건립 의도 이 포스팅에 따르면 홍교는 고종이 경희궁에서 열릴 관병식을 보려고 지어졌으며 1902년 8월~10월 사이에 지어졌다고 한다.
2.7. 복원
1980년대에 돌담을 복원하면서 덕수궁은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1988년에 경희궁지를 발굴하는 것을 시작으로 90년대에 창덕궁과 경복궁, 창경궁의 전각들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2010년부터 덕수궁 또한 예전의 모습을 찾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현재 창덕궁의 규장각 및 선원전 권역 복원, 인정전 내.외 행각 복원 등은 완료되었다. 2016 ~ 2017년 사이의 3단계 작업에 중화전 행각 복원, 조원문 복원, 금천교 복원, 광명문 이건 등이 포함되었다. 언제 있지 모르는 4단계 복원에는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용산구로 이전하는 대로 선원전 및 덕수궁의 양관(洋館) 중 하나로 석조전과 함께 평면도가 남아 있는 돈덕전이 들어갈 예정이다.
현재까지 문화재청은 덕수궁 복원 사업을 4단계에 걸쳐 수립해 놓았다. 1단계인 2010년~2013년에 석조전 내부 복원, 덕홍전 주변 행각지 발굴 및 복원, 준명당 및 즉조당 보수공사 등이 진행되고 있으며 석조전의 경우 2014년 10월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다만 덕수궁은 경희궁처럼 궁역의 대부분이 민간에 매입된 상태이다. 4단계 복원 사업 중 하나이자 양관 건물인 돈덕전의 경우 주한미국대사관 관저 동쪽 담장과 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돈덕전과 선원전 일원의 복원에 많은 차질이 우려된다. 물론 주한미국대사관 관저가 이전하는 대로 담장을 세우는 등 덕수궁의 궁역을 복원할 예정이지만, 이미 중명전을 중심으로 한 옛 수옥헌 위에 세워진 예원학교와 선원전 권역 서편에 세워진 구세군 교회, 수학원이 있던 홍원 일원을 점유한 주한영국대사관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주교좌대성당과 합의를 봐야하는 실정이다.
특히 정동 1-23에 위치한 구세군중앙회관은 덕수궁의 옛 궁역 내 건축된 건물이나, 1926년 완공된 그 자체로 역사성을 가진 지정문화재이다. 만일 덕수궁 전역을 복원한다면 이 건물은 창경궁 대온실처럼 남겨 궁내 존치할 가능성이 높다. 과거 덕수궁 배치도와 현재를 비교하면 구세군회관 자리에도 덕수궁 전각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지만, 문화재를 복원하겠다고 기존의 문화재를 파괴하는 것은 비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궐내각사 터가 위치한 동쪽 궁역은 이미 태평로와 서울광장으로 뒤덮인 상태로 교통 혼잡 등의 이유로 복원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2014년 수립된 도시계획에 따라 '''태평로가 축소될 계획'''이라 아직은 미지수. 그러나 완전 복원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석조전과 중화전, 준명당의 서쪽 행랑채, 담장 측면의 배치가 '''처음부터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20] 아무리 덕수궁이 동서양의 건축이 한데 어우려져 있다는 평을 받지만 전각 배치가 어긋난 탓에 부조화스러운 일면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중화전이 즉조당 등의 위치에 맞게 세워졌기 때문이었다. 고종황제가 경운궁으로 이전할 때 중화전은 아직 세워지기 전이었다. 본디 석조전이 먼저 세워질 계획이었으나 전통 방식의 건축과 달리 기초 공사가 1년이 지나도록 계속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법전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고종의 지시에 의해 결국 중화전이 석조전보다 빨리(!) 세워지게 되었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정도의 돈지랄이다! 결국 중화전 서쪽 행랑채를 완전히 복원하려면 석조전의 정원을 밀어버리는 것 외엔 달리 대안이 없다.
그 외에도 복원해야 할 전각이나 양관들이 많지만, 양관들의 경우 현재까지 최소한 평면도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돈덕전과 제 위치를 고수 중인 정관헌, 석조전, 중면전과 달리 현존하지 않는 구성헌이나 환벽정 등은 그 평면도 등이 아직도 발견되지 않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경복궁 내 서양식 건물인 관문각은 복원 자료가 없어 터만 남겨두었다.
2015년 8월 20일에는 서울특별시에서 궁역 인근에 위치한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구 조선총독부 체신국 청사)을 철거해 그 자리를 시민광장으로 개장하였다. 기사
원형이 유지되었다면 그 자체도 역사 유적의 하나라 보존될 가능성이 컸지만, 사진과 같이 사실상 다른 건물이기 때문에 문화재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철거했고 그보다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 좌대성당을 열어주어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일제 잔재라며 홍보적으로 악용하고, 철거한 자리에서 유적이 발굴되었음에도#[21] 도시재생 주제의 건축전시를 위한 가건물을 짓거나# 박물관을 짓는 등# 다른 현대적 건축물을 지어 홍보 목적과는 반대되는 행동을 하자 철거가 올바른 방향이었냐#는 논란이 일었다.
철거된 자리에 2019년 3월 서울도시건축전시관이 개관하였다.[image]
주변 돌담과 뒤의 성당과 잘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2019년 3월1일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옮기는 복원공사가 완료되었다.
돈덕전은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칭경(稱慶, 축하의 의미)예식을 하기 위한 서양식 연회장 용도로 지어졌으며, 고종을 만나기 위한 대기장소나 외국사신 접견장소, 국빈급 외국인 방문 시 숙소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1907년에는 순종이 즉위하는 곳으로 사용됐다. 하지만, 순종이 거처를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는 덕수궁 공원화 사업 때문에 같이 훼철되었고 이후에는 아동 유원지로 활용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돈덕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는 2017년에 마쳤으며, 2018년 현재 복원을 위한 설계를 하는 중이다. 2018년 내에 공사를 시작하여 2021년 완공할 예정이다. 복원되면 대한제국과 관련한 자료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그러나2020년이 다되어가는데 최근위성으로 봐도 별진척도가 없어보인다
덕수궁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 10월 화재로 불타게 되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 7월 11일에 복원되었다. 그러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모두 없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왔다.
해방 이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 용지로 쓰이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양도되었다. 2003년 6월 미국공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한 문화재 지표조사 중에 덕수궁 선원전 터가 확인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되어 2011년 우리나라에 다시 소유권이 넘어왔다. 선원전 권역인 정동부지는 2011년까지는 미국대사관, 경기여고 등의 부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교환된 부지 사이에 경계벽이 설치되고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이 지난해 말 완공되면서 복원이 시작되었다.
문화재청은 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을 복원해 나갈 예정이다.
* 진전(眞殿): 역대 왕의 御眞(어진:초상화)을 봉안한 건물
* 빈전(殯殿): 왕이나 왕후 승하 후 그 시신을 모셔둔 곳
* 혼전(魂殿): 발인 후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옮기기) 전까지 신주(神主)를 모셔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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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칭
하기할 논쟁에 대한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문화재청 측에서 발의된 '경운궁' 환원(#)에 대해 3차례에 걸쳐 의논한 결과 '덕수궁'으로 유지하기로 결정났다고 한다. 명칭 변경에 대한 혼선과 더불어 바뀐 명칭을 홍보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그 밖에 '덕수궁'에 대한 역사성이 그렇게 짧지 않다는 것(100년 이상)도 이유로 거론되었다.
3.1. 경운궁/덕수궁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결정적인 이유는 대한민국 문화재청의 공식 자료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서적에 의하면 다음을 참조할 수 있다.
'덕망 높이 오래오래 사시라'는 의미를 가진 덕수궁은 역사적으로 퇴위한 황제나 왕이 머무는 궁궐에 붙여지던 이름들 중 하나다. 남송의 고종이 효종에게 양위한 후 머문 궁을 덕수궁이라고 하였다. 조선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퇴위한 후 머문 궁의 이름이 덕수궁이었는데, 이 때는 정종이 개성으로 환도하여 덕수궁 역시 거기에 있었으나, 태종 즉위 후 다시 한양으로 천도한 후 이 곳에서의 이성계의 거처도 덕수궁으로 불렸다. 이처럼 덕수궁은 퇴위한 상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에 가까운 용어다. 퇴위한 왕의 거처를 항상 덕수궁으로 부른 것은 아니다. 덕수궁 외에도 태종의 퇴위 후 거처인 '수강궁'이나 충렬왕이 충선왕에게 양위 후 머문 '덕자궁'(德慈宮)처럼 다른 명칭도 존재했다. 덕수궁이란 명칭은 어러한 몇 가지 명칭들 중 하나였던 것이다. 덕수궁 명칭은 퇴위한 왕이 머무는 동안 일시적으로 붙는 명칭에 가까우며, 보통 해당 상왕(상황)이 사망하면 더이상 덕수궁으로 불리지 않고 원래 궁 이름으로 환원된다.덕수궁의 '수(壽)'는 선왕의 장수(오래삶)을 바라는 뜻에서 지어졌다. 궁호라는 것은 건물이 남아있다고 해서 계속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상왕의 붕어와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지기도 한다. 고종의 경우,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궁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황제가 양위되면서 바뀐 것이고, 이 때 순종은 태황제의 궁호로 '덕수(德壽)'를 택했고, 고종의 거처인 경운궁은 그 때부터 덕수궁이 된 것이다. 국민들은 나라를 뺏긴 국민으로서 조선의 마지막 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고종에 대한 애틋함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계속 덕수궁이라는 궁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다.
경운궁이 덕수궁으로 불리게 된 것도 퇴위한 고종이 머물렀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후다.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순종과 대신들이 결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퇴위한 상왕(상황)이 사망하면 다시 원래 궁 이름으로 환원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다. 따라서 고종이 승하한 후 궁 이름을 원래대로 경운궁으로 환원시켜야 했다. 문제는 고종의 승하 시점에서 궁 이름을 환원해야 할 주체인 조선 왕조가 이미 망해버리고 없는 상황이었다는 점. 물론 순종이 '창덕궁 이왕'으로 살아있긴 했지만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황이었다. 아래도 나와 있지만 일본은 이에 대해 딱히 별 생각이 없었던 듯 하다.
3.1.1. 일제의 강제 변경 음모론
'덕수궁'이라는 용어가 일제가 '''대한제국의 망국을 목적으로 고의로 사용하게 한 용어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지만, 그 근거는 그리 튼튼하지도 않으며, 현재로선 낭설로 중론화되고 있다.
3.1.1.1. 근거
덕수궁은 위에 언급한 것처럼 '퇴위한 왕/황제의 거처'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 '덕수'라는 단어는 '덕 덕(德)'에 '목숨 수(壽)', 즉 상황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격하의 의미가 없고, 오히려 고종을 존중하는 의미로서 '''용어만 놓고보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 과정에서 일어난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마냥 낭설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일제는 고종을 협박해 강제로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다. 고종은 황태자(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긴다고 했는데 이를 일제가 슬그머니 양위로 바꾸었다. 이에 고종과 황태자는 당연히 반발했고 '''황제 교체 상황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전 황제와 신 황제가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아 의식을 내관들이 대리하는 권정례로 치르는가 하면, 백성들이 강제 퇴위에 반대해 전국적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등 당시 시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그러자 일제는 고종을 ''''완전히 정식으로 물러난 황제'로 대외적인 이미지를 굳히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연호를 '융희'로 바꾼 것과[22] 고종의 궁을 ''''상황의 궁'이란 의미의 '덕수궁'으로 바꾼 것이다.'''
즉, '''덕수궁 이름 자체가 아니라 덕수궁으로 바뀐 배경이 문제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사자들은 양위 상황 인정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태상황도 있을 수 없는데 일제가 막무가내로 고종을 태상황으로 대우하였다. 그에 따라 '덕수궁' 이름을 올린 것이며, 그래서 명칭 변경에 일제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일제가 이 시절에도 대한제국 병합에 대해 주저하고 있었으며 대한제국 병합으로 가닥을 잡은 것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이 된 이후이니 일제가 한국 멸망을 위해 덕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병합의 시기 속도에 대해 조율하던 것일 뿐이며 애당초 한국을 집어삼킬 마음이 없었으면 처음부터 침략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3.1.1.2. 반박
위의 주장은 고종이 일제에 의해 퇴위된 배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으나, 결론적으로 고종의 퇴위에 따른 부산물로 덕수궁이라는 명칭이 부여된 것이지, 일제가 경운궁 명칭 자체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려는 정황은 딱히 발견되지 않는다. 위에 상술된 바와 같이 덕수궁이라는 명칭 자체는 고종의 퇴위에 따라 대한제국 조정에서 조선왕조의 예에 따라 덕수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었다.
만약 일제가 대한제국을 망하게 하기 위해 경운궁을 덕수궁이라고 격하(?)하였다면, 격하의 대상이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경운궁인가 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물론 경운궁은 대한제국이 세워진 후 10년간 황궁이었다. 그러나 경운궁은 고종이 환궁하기 전까지는 조선의 궁궐에서도 작은 행궁에 불과한 궁이었다. 경운궁이 정궁이었던 기간은 10년에 불과했고, 그 10년 중 5년을 민가나 다름없는 즉조전을 정전으로 삼아 버텼다. 중화전이 준공된지 2년 만에 잿더미가 되자 나머지 3년 동안 도서관 용도로 지어진 중명전을 황제의 침전 겸 편전으로 썼던 것이 경운궁이었다.
순종이 즉위한 지 석달 후 창덕궁으로 이어를 결심한 것도 그런 도서관 건물을 황궁으로 계속 사용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행궁에 불과했던 경운궁보다는 태종 이래 500년간 선왕들이 사용해온 창덕궁으로 이어하는 것이 황제로서 더욱 권위가 선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후 대한제국의 황궁은 창덕궁'''이 되었다. 동시에 황궁으로서의 경운궁의 지위는 상실되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망하게 하려는 의도로 덕수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논리의 커다란 허점 중 하나는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법궁이었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는 점이다. 물론 대한제국 선포 이후 고종이 줄곧 경운궁에 머물렀고, 경운궁은 엄면한 황궁이었다. 그러나 경운궁이 대한제국의 '''법궁'''이었냐는 다른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경복궁은 조선시대 내내 '''법궁'''이었다. 비록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270년이 넘게 폐허로 방치되었지만, 폐허인 시절에도 법궁의 지위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 후기에 창덕궁은 사실상의(de facto) 정궁이었을 뿐이다. 조정에서는 270여년 동안 경복궁의 드넓은 부지에 출입을 통제하고 성역화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 때 불타없어진 지 100여년이 더 지난 숙종 때에도 경복궁을 수리하자는 상소에 대해 숙종이 직접 경복궁을 '''법궁'''이라 칭하며 "복원은 하고 싶은데 그럴 새가 없는걸 어쩌자는거야"라는 식의 대답을 한 기사도 있다.숙종 30년 5월 30일 기사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한 이유도 다름 아닌 조선의 법궁을 되살린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사실은 임금이 머무르지 않는다고 해서 법궁의 지위를 상실하는게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 임금들은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에 머무를 때도 많았지만 임금이 머무른다고 해서 창덕궁이 법궁이 되고 비어있는 경복궁이 이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제나 당시 대한제국 백성들이나 대한제국과 조선을 근본적으로 분리해서 보지는 않았다. 대한제국 황실 역시 마찬가지다. 조선조의 선왕들을 황제로 추존했다. 때문에 대한제국 시절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법궁은 경복궁이라는 인식을 쉽게 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제가 조선의 상징으로 여긴 궁전 역시 다름 아닌 경복궁이었다. 한일합방 후 일제가 상징적으로 일장기를 내건 곳은 바로 경복궁 근정전이었으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은 곳도 바로 경복궁 근정전 앞이었다. 경복궁은 일제강점기 내내 지속적으로 전각이 헐리는 수난을 당했다. 반면 창덕궁과 덕수궁은 비교적 무사했다. 일제가 순종이 머물고 있는 창덕궁과 고종이 거처하는 경운궁/덕수궁을 존중하여 일부러 그곳을 보존했던 것은 아니다. 그게 사실이라 쳐도 고종과 순종이 승하한 후 궁을 헐 수도 있었다. 일제가 경복궁만 집중적으로 훼손한 것은 경복궁이야 말로 조선왕조의 상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순종이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으로 이어한 것도 경복궁이 가진 상징성과 그로 인한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운궁으로 명칭을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경우, 일제가 격하의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덕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덕수궁의 의미 자체는 위에 써놨듯이 퇴위한 왕/황제의 거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 잔재라고는 할 수 없다. 경운궁으로 명칭을 환원한다고 주장할 때는 차라리 덕수궁이라는 용어 자체는 퇴위한 왕의 생존 기간 동안 지칭되는 '''보통명사'''에 가까운 용어이기에 고종이 죽은 이후에는 덕수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반면 덕수궁이란 이름이 가진 역사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23] 덕수궁 이름을 경운궁으로 환원하지 말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
문화재청에서는 페이스북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는데, 명칭 변경을 찬성하는 댓글은 일제 잔재라는 의견이 많았다. # 하지만 덕수궁이란 말은 일제 침략 이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건 여러 기록으로 확인되므로, 고종의 퇴위가 일제 침략과 관련이 있다고 해서 덕수궁/경운궁 문제도 일제 잔재의 문제로 봐야할지는 논쟁거리가 될 수 밖에 없다.
3.2. 대안문/대한문
지금 현재 덕수궁의 정문은 동문인 대한문(大漢門), 이전엔 대안문(大安門)이었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다. 그런데 1900년 대안문 앞으로 대로가 생기고 당시 정문인 인화문 통행이 줄어들자 1904년의 덕수궁 화재 후인 1906년 대안문을 수리하면서 정문으로 삼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꿨다.
원래는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했지만 지금의 위치로 옮겨서 덕수궁 담장과 이었다. 옮기는 방식이 흠좀무한데 해체해서 다시 지은 것이 아니라 문 전체를 조금씩 들어 옮겼다고(...)
이 대한문의 뜻에 대해 여러 오해가 있다. 일제가 퇴위한 고종을 조롱하여 '큰 놈(漢)이 사는 곳의 문'이라 그렇게 지었다든가, 일제가 조선을 중국의 속국이란 뜻으로 '위대한 중국(漢)의 문'이라고 지었다든가...하는 식. 또 다른 속설로는 매국노 배정자 연관설이 있다. 대안문(大安門)의 安자가 家 머리 아래에 女가 있어 궐문을 뻔질나게 드나드는 배정자를 연상케 해서 배정자를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 女가 겁내는 漢자로 바꾸었다는 속설이 당시에 널리 퍼졌을 정도.
그런데 이런 해석은 '''아무 근거 없는 속설'''이다. 서울의 옛 이름인 한성도 중국의 성이란 뜻이 아니라 한수, 즉 큰 강의 북쪽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한(漢)은 음차. 한국의 한(韓)과 같은 쓰임새다. 여튼 이런저런 논란이 있으나 논란 자체가 필요없는 상황이다. 왜냐면 대한문 상량문에 대한문인 이유가 나와 있기 때문이다.
아주 간단히 말해서 '큰 하늘의 문'이란 뜻이다. 일종의 글로벌 한양으로 이해하면 편할 듯? 대한제국이 앞으로 번창하길 바라며 지은 이름인데, 모두 아는 바와 같이...
4. 주요 건축
4.1. 정문
4.2. 외조
4.3. 내조
4.4. 서양식 건물
5. 기타
경운궁 화재는 고종황제를 죽이기 위해 위해 일본이 일부러 방화한 것이라고 주장이 있다. 당시 일본군들이 궁궐에 불이 나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들을 재미있게 구경하는 사진이 있어서, 가해자들이 즐거워 한다며 대한제국에서는 이를 갈았다 한다. 또한 궁궐의 화재를 불길한 징조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26]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소 다르다. 경운궁 대화재를 자세히 다룬 블로그 이 포스팅에 따르면 일본군이 궁궐에 불이 나서 우왕좌왕하는 한국인들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다는 사진은 실은 사진이 아니라 삽화이며, 현재까지 발견된 경운궁 대화재 당시의 사진은 겨우 1장에 불과하다. 또한 일본군들이 화재 당시 경운궁 밖에서 화재를 밖에서 지켜본건 사실이지만, 당시 조선 왕실 법도상 모든 궁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궁궐 내부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일본과 청을 비롯한 각국 공사관에서 파견된 소방수들은 불타는 궁궐을 바라보며 발만 동동구르고 있었다.
덕수궁의 명물하면 돌담길 산책로인데, 옛날에는 돌담길을 연인이 끝까지 걸으면 헤어진다는 도시전설이 있었다. 이는 과거 서울가정법원[27] 으로 가는 길목이 이 길을 지나가야만 나왔기 때문. 과거 모 남녀관계 분석 프로그램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호젓하고 운치있는 분위기지만 길을 따라가는 주변에 가게 등이 적기 때문에 분위기가 상대에게 집중하면서도 이성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으므로 사랑보다 현실을 보게 하는 역할을 해서 좋지 않다나.. 아무튼 분위기 내는 데는 그다지 좋지 않으므로 인적이 없고 볼거리가 적은 황량한 시간을 선택하는 것은 피하자.[28]
가수 진송남의 노래 덕수궁 돌담길 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수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의 가사 초반부에 "이제 모두 세월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이 수록되어 있다.[29]
SBS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은 마지막화를 찍으면서 돌담에다가 본드로 종이 여러장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짓을 저질러 까이기도 했다.
2010년경 석조전 내부를 보수공사하는 중에 벽 내부의 배수파이프에 단열재로 새끼줄을 해놓은 것 등이 주목받았다.
서울특별시청과는 악연 아닌 악연을 가지고 있다. 서울시청 설계안이 나올 때마다 문화재인 덕수궁의 경관을 해친다는 이유와 앙각(仰角) 제한 규정, 즉 문화재 담장에서 27도 사선을 그었을 때 100m 경계선 안의 건물 높이는 이 사선을 넘지 못한다는 규정 때문에 문화재청에 의해 딱지를 맞았다. 높이를 대폭 낮춘 현재의 신청사 이전의 초기 설계안들이 전체적으로 동고서저 형태를 띄는 것도 이 제한 규정 때문.
대한문에서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경에 수문장 교대의식이 있다. 단 매주 월요일은 의식이 열리지 않는다.
태평로는 대한제국 시절 방사형 도시계획의 일환이었고 고종이 다닐 만큼 번듯한 길이었음이 문헌에 남아있다. 흔히들 일제의 도로 개설로 덕수궁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지만 이것은 오해다. 도로는 이미 당시의 경운궁을 중심으로 개통되었고, 1912년 이래로 도로 확장을 목적으로 대한문이 후퇴되고 궁장이 깎이는 등 궁역이 줄어든 것이다. 그 후에 해방이 되고나서도 1960년대 한 차례 확장이 되면서 궁역이 축소되었다.
또한 덕수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를 추진한다고 2013년도에 서울시가 발표한바 있다. 동아시아에 남아있는 한국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궁인데다가 한국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니 충분한 이유가 될수 있다. 그런데 아직 세계유산 후보에도 없다.
얼렁뚱땅 흥신소에서 고종황제의 비자금 금괴 85만냥이 나뭇잎형태로 경운궁 지하 우물속에서 마지막회에 발견되는데 실제로 경운궁 아니면 철원에 고종황제의 비자금이 있다고 대동칠십일갑사라는 야사에 나와있다.
어른(만 25세 이상)은 1,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으며 매표시간은 20시까지이고 퇴장시간은 21까지다. 제한적으로만 야간개장을 하는 다른 고궁들과 달리 항상 야간까지 개장한다
[1] 정동 5-1[2] 월산대군, 자을산군(성종) 형제의 어머니[3] 그 이전에는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 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었던 흥천사의 부지이기도 했다.[4] 이 건물 자체가 본래 경운궁의 전각이었다. 경운궁 안에 있던 건물을 사들여서 축소되면서 새로 둘러친 경운궁 담장 바깥으로 옮긴 것인지, 건물 자체의 위치는 그대로인데 이 건물이 팔리면서 덕수궁 권역과 이 건물 사이에 담장을 둘러친 것인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는데, 사실 이 건물의 위치는 덕수궁 내부이다. 즉. 본래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이다.[5] 기실 '주변'이라기보다는 훼손된 경운궁(덕수궁)의 옛 부지 위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복원 중인 덕수궁 주변''''에 자리하게 된 것이다.[6] 일제가 싫어서 '日'대신 '目'을 썼다는 설이 있으나 낭설이다.[7] 과부는 궁궐에서 거처할 수 없었는데 이는 후궁이 그 대상이고, 예법과 궁중법도상 세자빈의 지위는 왕후(왕비, 왕대비, 대왕대비)와 같은 왕실의 종통(宗家)이 되므로 궁궐에서 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지위에 오를 때에는 역시 왕후와 마찬가지로 상국(上國)인 명나라의 책봉 교지가 필요했다.[8] 한씨(인수대비)의 경우는 신분이 종통인 세자빈이므로 궁궐에서 그대로 살 수 있었고, 또 세조 내외가 며느리 한씨에게 궁궐에서 그대로 살기를 권하였으나, 한씨는 거듭 사양하고 궁궐 밖으로 나가서 살게 된 것. 이후 과부가 된 세자빈으로 공회빈 윤씨, 현빈 조씨(효순왕후), 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헌경왕후), 빈궁 조씨(신정왕후)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궁궐에서 살았다.[9] 성종의 형[10] 때문에 일반적인 궁궐의 배치를 따르지 않는다.[11] 보통 도성에서 도망쳐야 할 정도의 큰 난리를 겪은 군주 중에서 이런 경험을 한 군주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삼국지에서조차 헌제가 이각과 곽사가 제멋대로 마구 전횡을 부리고 자기들끼리 도성 안에 군대를 갖고와서 허구한날 쌈박질하고 도성에 살던 백성들은 굶어죽거나 살해당하거나(당연히 이각곽사 무리들이 죽였다.) 도성으로부터 멀찌감치 도망치는 바람에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허허벌판'''인 상황까지 몰렸다. 이 때문에 헌제는 야밤에 이각곽사를 피해 도망쳐야만 했으며 이후 조조가 헌제를 영접할때까지 일반 개인집 중 하나를 주워다가 (징발이 아니라 주워다 쓴 거다. 왜냐 하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같은 국난이 연달아 일어나서 사람들이 씨가 마르기 일보직전이라 빈집이 지천에 널렸기 때문이다.) 임시로 조정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추가로 헌제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를 따라온 문무백관들의 녹봉을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2] 실제로 명종 등이 대비(문정왕후)의 지명으로 갑작스레 왕위에 오르기도 했다.[13] 실거주는 창경궁에서 했다.[14] 즉조당과 석어당은 선조가 머물렀던 곳이며, 또한 자신이 즉위한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냥 놔둔 듯 하다.[15] 인조의 이러한 조치는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인목왕후에 대한 은밀한 견제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 생전에는 내내 눈치를 보며 국법까지 무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인조인데 왕 입장에서 그게 편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인목왕후는 철거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인경궁으로 거처가 옮겨졌다. 물론 이러한 조치는 (표면적으로는) 인목왕후의 만수무강을 위한 것이었다.[16] 부속 건물까지 합쳐도 4채 밖에 안되었다.[17] 고종은 경복궁에 살던 시절에도 궁내 양반집 저택의 형태를 띤 건청궁을 지어 거처했다.[18] 창덕궁의 인정전(정면 5칸 측면 4칸)을 본 따 만들어졌다.[19] 참고로 중화문도 중층이었다가 낮아진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화문은 처음부터 단층이었다.[20] 훼손이나 복원 과정에서 어긋난 게 아니다![21] 기사에도 적혀 있지만, 문화재청은 '보존가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서울시는 보존 후 전시 결정을 내렸다.[22] 원래 유교 예법은 비정상적 황위 계승을 제외하면 유년칭원법으로 연호를 계산하기 때문에, 정상적으로는 1908년이 융희 원년이 되어야 맞다. 그러나 고종을 퇴위시킨 일제는 고종의 흔적을 서둘러 지우기 위해 유년칭원법을 어기고 1907년 8월부터 새 연호 융희를 사용하게 했다. 일본 자체가 즉위년 칭원법을 채택하므로 그 영향일 수도 있으나 이러나 저러나 일본의 영향이 들어간 건 사실.[23] 1907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110여년이 넘는 세월을 덕수궁으로 있었다. 갑자기 이름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한들 사람들 인식에 혼란을 가져올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부수적인 문제지만 이럴 경우 덕수궁에서 이름을 따 온 학교들(덕수초등학교, 덕수중학교, 덕수고등학교)도 이름을 바꿔야 하는 문제가 있다.[24] 1897년 ~ 1898년에는 태극전, 1898년부터 1902년까지는 중화전으로 불렸다. 신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다시 환원.[25] 이쪽은 대한제국 황실이 처음부터 박물관 용도로 건립했기 때문에 저항이 없었다.[26] 공교롭게도 그 해에 러일전쟁이 발발, 1년 후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27] 현 서울시립미술관. 법원 건물을 리모델링 후 계속 사용중[28] 대한문을 기준으로 덕수궁 뒤에 배재학당(현재 배재학당 기념관)과 이화학당(현재 이화여자고등학교)이 있고 한양도성이 훼손되기 전에 학교로 가는 길은 대한문 옆으로 난 길 뿐이었을 때, 등교하던 남녀학생들이 갈림길에서 남학생은 왼쪽(배재학당)으로, 여학생은 오른쪽(이화학당)으로 갈라졌던 데에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남녀가 헤어진다는 도시전설이 나왔을 거란 추정도 있다. [29] 덕수궁 월곡문 뒷편 정동길에 광화문 연가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