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광명문
[clearfix]
1. 소개
德壽宮 光明門
덕수궁 함녕전의 정문이다.
위치는 함녕전의 남쪽이며,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 사이이다.
2. 역사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디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잠시 머물던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이후엔 왕들의 흔적이 서린 즉조당[1] 과 주변 몇 채 정도만 뺀 나머지 건물들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어있었다.
그러나 1896년(건양 원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환궁[2] 을 경운궁으로 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건 공사를 명하여 그제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궁궐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서 당연히 임금이 머물 정식 침전 역시 필요했고 그에 따라 1897년(건양 2년) 함녕전을 건립했다.
이 때 함녕전만 지은 것이 아니고 당연히 주변에 에워쌀 행각과 문도 같이 세웠다. 함녕전의 남쪽 행각을 이중으로 만들었고 바깥 행각에 정문을 지었으니 이것이 광명문이다.
건립한 지 불과 7년만인 1904년(광무 8년)에 함녕전 온돌을 수리하다 대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고[3] 그해 12월에 다시 지었다.
1919년에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덕수궁은 빈 궁궐이 되었고, 1933년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들이 팔리거나 헐렸다. 광명문은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양 옆 행각이 철거당했다. 그리고 1938년에 일제가 미술관[4] 을 개관하면서 건물 자체를 미술관의 남쪽으로 옮겼다. 이 때 벽체와 문짝을 다 뜯어버렸다. 그리고 신기전 기화차와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를 보관 및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8.15 광복 이후에도 수십 년을 그 모습으로 있었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현판의 색마저 바뀌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였던 것이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변했다. 이것은 문화재청에서 2016년에 본래 모습대로 복원해 교체했다.
문화재청은 2018년 6월부터 그 해 말까지 광명문을 원래 자리로 이전하고, 없어진 벽체와 문짝을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3·1 운동 100주년인 2019년 3월 1일에 '덕수궁 광명문 제자리 찾기 준공 기념행사'를 열어 일반에 개방했다. 이로써 광명문은 약 80년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3. 구조
- 원형 주춧돌 위에 원기둥을 올린 뒤 그 위에 1층[5] 짜리 건물을 올렸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또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평방 없이 창방 위에 바로 공포를 놓은 형태로, 공포는 익공 양식이다. 그리고 공포 사이마다 화반 3개 씩을 두었으며 공포와 화반 사이의 틈을 벽으로 메꾸지 않았다. 문짝은 나무 판으로 중앙 열 3칸에 달았으며 가운데 왕이 다니는 어칸(御間)을 조금 더 넓고 높게 만들었다. 양 측면의 칸 마다 중인방을 끼우고 위, 아래 를 나무 판으로 마감했다. 천장은 서까래와 구조들이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으로 했고, 문 위는 풍형 홍살을 꾸며놓았다. 단청은 모로단청[6] 으로 입혔다.
[1] 선조가 머물고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2]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3] 이 때 광명문 뿐 아니라 주요 건물 대부분이 불타버렸다.[4]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흔히 ‘석조전 서관’으로 부르는 건물이다.[5]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6] 부재 끝부분에만 문양을 넣고 가운데는 긋기로 마무리한 단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