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객군 반란

 


1. 개요
2. 배경
2.1. 양시민과 유진환의 음모
2.2. 양시민과 유진환의 반란
2.3. 반란군 토벌
3. 결과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개요


1925년 초여름, 국민당 산하의 전계군벌 양시민계계군벌 유진환이 외부 세력과 결탁하여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다가 정부의 통제권 강화 시도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란을 의미한다.
객군은 타 지방에서 온 군대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중국 국민당이 북벌을 위해 포섭한 타 지방 군벌세력을 의미한다. 전계군벌 양시민, 계계군벌 유진환을 빼고도 탄옌카이상계군벌리지선월계군벌, 주페이더전계군벌 세력 등도 있었는데 이들은 국민당에 복종했다.

2. 배경


1922년 영풍함 사건으로 천중밍쑨원이 결렬된 이후, 상하이로 피신했던 쑨원은 천중밍 토벌을 선언하고 쉬충즈를 동로토역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천중밍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운남의 양사민, 광서의 유진환을 비롯한 여러 군벌이 호응하여 7성연군, 11개 군 10만명의 부대를 조직하여 서로토역군총사령관에 취임, 천중밍을 축출하고 광저우 함락에 기여했고 국민당의 초기 군사력의 중요 기반이었다.
허나 객군이라 불리는 이들 군벌 세력은 어디까지나 광동의 풍부한 재원을 노리고 쑨원에게 일시적으로 협력한 것일 뿐 진정한 의미로 국민당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들은 천중밍, 탕지야오,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차차 중앙에 대한 반기를 들었고 지방의 재정권을 장악하고 독립적인 지휘계통을 유지하며 정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지배구역에서 도박장과 아편굴을 만들어 부정한 이익을 취했으며 정부의 통제력과 재정을 악화시켰다. 그 때문에 광저우는 여전히 군인들이 할거하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군벌들의 전횡이 심하여 국민당은 1923년 3월 29일 양시민을 중앙직할진군총사령관에, 유진환을 서로토벌군총사령관에 임명하여 군정부 직할 명령계통 아래에 두었고 1924년 7월 11일 중앙정치위원회 제1차 회의에서 국민당 군사위원회 개편을 결정, 후한민, 랴오중카이 등 당의 중요 인사들을 위원에 임명하면서 당에서 군사업무를 관장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였다. 1924년 9월 5일, 대본영 군사회의는 북벌을 발표하여 행패를 부리는 군벌들을 광동 바깥으로 내보낼 계획에 착수하기도 했고 1924년 10월, 대본영은 산하의 20개 군을 건국군이라는 이름으로 재편제하여 편제를 통일하였으나 명의상으로만 통일이 이루어졌을 뿐, 여전히 각 군은 정부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 국민당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1924년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당에 복종하는 교군을 양성하며 혁명정부의 군권의 집중과 군제 통일의 기회를 엿보았다.

2.1. 양시민과 유진환의 음모


국민당의 1차 동정 기간 동안, 쉬충즈의 광동군과 장제스의 교군은 천중밍 군대에 맞서 열심히 싸웠지만 전군을 맡은 양시민의 운남군과 중로군을 맡은 유진환의 광서군은 거의 움직이지 않으며 광동군과 교군의 전투를 수수방관하였다. 1925년 3월 20일, 교군이 흥녕을 점령하고 임호의 여러 문서들을 노획했을 때, 장제스는 양시민과 우페이푸가 내통한 증거 문건들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장제스가 공개한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1. 유진환은 직접 운남으로 잠행하여 탕지야오로부터 군대를 광동으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탕지야오는 쑨원이 대원수로 취임했을 때 부원수로 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임하지 않은 항명분자였다. 그런데 쑨원이 죽자 별안간 부원수를 자임하고 병력을 모아 광저우로 육박해왔다. 류전환은 그러한 탕지야오를 도왔다. 당에서는 마침내 그의 부원수직을 박탈하고 토벌을 선언했다.
  • 2. 양시민은 홍콩으로 가서 영국인과 결탁, 베이징 정부를 움직여 베이징 정부의 광독독리에 오를 공작을 폈다.
이는 혁명정부의 세력이 공고화되면 광동을 자신들의 사유지로 장악하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양시민과 유진환이 선제적으로 국민정부를 전복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국민당은 군벌들의 전횡을 정리하고 군정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2.2. 양시민과 유진환의 반란


1차 동정이 마무리되자 운남군과 광서군은 동강에서 철수하여 광동성 성장 관서, 재정부를 공격하려 하며 난폭한 행동을 벌였다. 이에 3월 20일에 사망한 쑨원을 대신하여 대원수 대리를 맡고 있던 후한민쑹쯔원과 함께 3월 27일 <군민재정 통일선언>을 발표하는 한편, 군벌들에게 3가지 사항을 요구했다.
  • 1. 정부에 절대 복종하라.
  • 2. 점거한 지방을 내놓고 정부가 지정한 지방에 주둔하라.
  • 3. 점령하고 있는 재정기관을 반환하라.
하지만 양시민과 유진환은 이를 거절하고 공개적인 반란에 들어갔다. 4월 28일 양시민이 동정전선의 증만종 사단과 4개 독립여단에게 광저우로 돌아오라는 밀명을 내렸고 유지환 부대가 동관을, 료행초 부대가 서관을 점령했다. 양시민 부대도 영한로와 광저우 역을 비롯하여 광저우의 주요 요지를 점령하였다. 양시민은 전계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후한민은 이들과의 타협을 모색하려 했으나 랴오중카이와 중국 공산당은 강경하게 양시민과 유진환의 토벌을 주장했다. 결국 국민당은 토벌을 결정했고 광서군과 운남군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하였다.
1925년 4월 28일, 산터우의 광동군 총사령부 행영에서 총사령관 쉬충즈와 황포군관학교 당대표 랴오중카이가 운남군과 광서군 토벌을 논했다. 5월 8일, 베이징에 머물던 왕징웨이가 조주를 통해 광동으로 돌아와 장제스와 회동하였으며 5월 9일, 산터우로 이동하여 쉬충즈를 만났다. 5월 13일 쉬충즈의 총사령부에서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장제스, 바실리 블류헤르가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양시민과 유진환 제거를 위한 군사계획 수립을 도모했다.[1] 쉬충즈는 양시민과 유진환을 군사적으로 제거하는 일에 대해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나 왕징웨이의 설득으로 결심을 굳혔다. 동정군은 일단 조매를 포기하고 전군을 광동으로 회군시켜 양시민과 유진환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2.3. 반란군 토벌


5월 21일, 허잉친이 지휘하는 당군[2] 제1여와 천밍수의 광동군 제1여가 매현을 출발하여 광저우로 향했다. 양시민과 유진환은 군대를 출격시켜 토벌군을 저지하려 했지만 광구철도[3], 광삼철도[4], 월한철도[5]의 노동자들 및 선창의 잡부들이 바실리 블류헤르와 랴오중카이의 선동으로 파업을 일으켜 군벌군에게 저항하면서 군벌군들은 이동이 불가능해졌다. 중국 공산당 광동구 위원회는 라액농(羅亦農)을 대표로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중운동을 전개하게 하는 한편 철갑차대를 구성하여 토벌에 협조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홍콩파업위원회 소속 규찰대를 비롯한 노동자, 농민협회 회원들이 정찰과 물자 수송을 지원하여 토벌군을 도왔고 부상자 구호와 적군 교란 등에 협조했다.
본격적인 광서군과 운남군 토벌을 앞둔 5월 30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는 1. 각군의 독자적인 행동을 방지하기 위한 군령의 통일, 2. 민정의 통일을 통해 군대의 인사와 행정권에 대한 간섭 엄금, 3. 재정의 통일과 군수의 독립을 통해 각 군대가 재정을 분할하고 독점하던 악습의 엄금, 4. 모든 군대는 정치훈련을 통해 주의와 기율을 갖춘 혁명군대로 탈바꾸어야 한다는 <정식군대방안>(整飾軍隊方案)을 통과시키고 이를 대리대원수 후한민에게 집행할 것을 권고했다. 6월 3일, 양시민과 유진환은 공개 반란을 선언하고 병기 공장을 점령하고 세금을 탈취했으며 광동성 성장 공서, 재정부 기관을 점령하였다.
토벌군은 장목두에 집결하여 당군 제1여를 선두로 석룡을 점령했다. 6월 6일 벌어진 격렬한 전투는 6월 7일까지 이어졌으나 폭풍우로 한시간 동안 중단되었다. 마침내 1,000명의 당군 병력이 소련 고문의 지휘를 받아 도하에 성공하여 석탄을 함락시켰다. 군벌군은 조명시설, 통신시설을 장악하고 참호와 바리케이드를 구축하는 한편 용안동과 광구철로에 병력을 전개했다. 6월 9일, 토벌군은 주력을 용안동에 투입하는 한편 일부병력을 광구철로 연변으로 진격시켰다. 6월 11일 오후, 용안동이 함락되었으며 6월 12일 아침까지 광저우의 요충지가 모두 토벌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6월 12일 장제스는 광저우 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광저우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군벌군은 수구령에서 저항했으나 토벌군은 해군 함정과 항공대의 지원 사격을 받아가며 맹공을 퍼부었고 운남군의 조성량이 전사하자 군벌군은 붕괴되었다. 오후에 토벌군이 광저우 시내로 진주하자 군벌군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2만에 달했다. 노획무기는 소총 1만 6천정, 기관총 120정, 캐넌포 20문이었다. 이 전투에서 당군 사령관 겸 광저우 위수사령관으로 활약한 장제스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으며 바실리 블류헤르의 명망도 높아졌다.

3. 결과


패배한 양시민과 유전환은 6월 13일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다. 하지만 이후 터진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비롯한 혼란을 틈타 천중밍이 광동 남부 군벌 등본은과 결탁하여 광저우에 대한 2차 공격을 준비하면서 국민당은 국민당의 2차 동정을 거행하게 된다.

4.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공산당 역사 1권 상, 중국중앙공산당사연구실, 서교출판사.
  • 國民政府 成立 前後의 軍政改革과 財政統一, 김영신, 중국학 연구 38권 38호, 중국학연구회.
  • 改組, 國民政府 成立과 中國國民黨, 김영신, 중국학연구 21권, 중국학연구회.
  • 護法時期 黨·政의 軍政組織과 軍權統一, 김영신, 중국근현대사연구 15권, 중국근현대사학회.

5. 관련문서



[1] 동시에 왕징웨이는 랴오중카이와 결탁하여 자신의 집권을 위한 군부의 지지를 호소했다.[2] 쑨원 사후 황포군관학교 교도대를 중심으로 조직된 군대.[3] 광저우-구룡.[4] 광저우-삼수.[5] 광저우-한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