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 블류헤르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이름'''
러시아어 :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영어 : Vasily Konstantinovich Blyukher[1]
한국어 :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출생'''
1889년 12월 1일, 러시아 제국 바쉰카
'''사망'''
1938년 12월 9일, 소련 모스크바
'''복무'''
러시아 제국군(1914년 ~ 1917년)
노농적군(1917년 ~ 1938년)
'''최종 계급'''
육군 원수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봉소전쟁
하산 호 전투
'''주요 서훈'''
레닌훈장 2회
적기훈장 4회
1. 개요
2. 삶
3. 관련문서
3.1. 인물
3.2. 사건


1. 개요


소련군의 육군 장성으로 세묜 부됸니,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미하일 투하쳅스키,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함께 초기 5원수 중 한 명이었다. 중국 국민당 고문과 극동군관구 사령관을 역임한 주요 인물이다.

2. 삶


바실리 블류헤르는 모스크바 북동쪽 야로슬라블의 바쉰카라는 마을에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성씨만 보면 독일계 러시아인인 듯 하지만 사실 원래 성은 구로프(Gurov)였다. 19세기에 지주가 그의 가문에게 나폴레옹을 꺾은 프로이센 원수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의 성을 딴 별칭을 붙여준 데서 그의 성이 유래한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많은 소작농들이 그랬듯 도시로 와서 공장 노동자로 일했으며, 1914년 입대하여 상병으로 복무하여 1차대전에 참전했지만, 1915년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의병제대를 하게 된다.
1916년 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노동당(공산당의 전신. 레닌의 볼셰비키는 이 당의 한 분파였다)에 입당하였고, 곧 10월 혁명 당시 사마라의 혁명에 가담하여 지도적 위치에 오른다.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당이 집권하였으나 러시아 내전이 벌어지자, 그는 적위대(붉은 군대의 전신)에 가담했고 정치장교에 임명되었다. 이어 적위대가 붉은 군대로 개편되자 그는 볼셰비키에 의해 지휘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광활한 러시아를 누비면서 여러 반혁명군(백군)을 진압했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소비에트 정권하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훈장인 적기훈장 수여자가 되었다.
[image]
러시아 내전 말기인 1923년의 블류헤르
유럽지역 러시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만주 접경의 극동지역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도 반혁명군을 진압하고 일본군의 개입을 무력화시켰다. 이때의 공적으로 그는 극동지역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고 "동방의 왕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후 쑨원-요페 회담에서 중국 국민당과 코민테른 간의 반제국주의 전선이 성사되자, 1924년부터 1927년까지 "갈렌(Galen)"이라는 가명으로 장제스의 군사고문으로 활동하면서 황푸군관학교의 창설과 국민혁명군의 토대를 닦았고 블류헤르가 양성한 병력은 국민당의 1차 동정에서 우수한 전투력를 입증하였다. 장제스와 깊은 우정을 쌓아 국민당의 1차 북벌 와중에 고문뿐만 아니라 군사 지휘관으로 큰 활약을 했다. 이때 이념성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전문적인 군사 전문 지식만을 보여 국민당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허나 장제스와 공산당의 사이가 악화됨에 따라 미하일 보로딘의 지시에 따라 장제스의 곁을 떠나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했고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청당을 선포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자 블류헤르는 마지막으로 난창 폭동의 계획을 입안한 후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이때 상하이를 들러 마지막으로 장제스와 만나 언젠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image]
1920년대 중후반의 블류헤르[2]
이어 우크라이나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하바롭스크에 사령부를 둔 극동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이 군관구는 거의 블류헤르 개인의 왕국이나 다름 없었다. 이때 1929년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과 소련이 명목상 공동관리하는 중동로 철도의 이권을 둘러싸고 소련과 장쉐량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장쉐량이 만주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이를 일방적으로 압수하자 블류헤르는 소련군 4만명을 이끌고 만주를 침공했다. 이를 중동로 사건이라고 한다. 봉천군의 규모는 30만에 이르렀지만, 숫자만 많았지 화력도 빈약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나마 무장이 잘 된 봉천중앙군은 장쉐량이 투입하지 않아서 형편없는 지방군만으로 소련군과 싸워야 했다. 이렇다 보니 몇년 후 벌어진 만주사변일본군에 당했던 것처럼 소련군에게 처참하게 격파당했고, 장쉐량은 뒤늦게 장제스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2차 장계전쟁2차 장풍전쟁, 장당전쟁 등 끊임없는 내부 반란과 더불어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진행 중이라 오히려 장쉐량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판이었다. 결국 소련 측의 주장이 대폭 반영된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맺게 된다.
[image]
옷깃의 계급장을 보면 원수로 진급한 1935년때 인듯하다.
1935년 계급이 없었던 소련군에 전면적으로 계급이 도입되고, 5명의 원수가 임명되면서 블류헤르도 원수 계급을 달게 된다.
[image]
1935년 11월 11일 촬영한 초기 붉은 군대 5원수[3]
이렇게 봉소전쟁에서 승리했지만, 1931년 일본 제국만주사변을 일으켜 이곳을 차지했고, 결과적으로 봉천군벌보다는 비교도 안되게 소련의 안보에 위협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기억으로 소련군을 오합지졸이라 오판하고 있던[4] 일본군은 만주 각지에서 도발을 일으켰고, 블류헤르 자신도 차차 이오시프 스탈린의 신뢰를 잃었다. 또한 위에 언급된 것처럼 극동에서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경계를 받게 된 까닭도 있었다. 여기에 장고봉 전투에서 이겼음에도 상당한 피해를 냈다는 것과 조선 국경 지대에 대한 스탈린의 무차별 폭격 명령을 조선인 민간인 희생자가 날 수 있다는 이유로 거부한 죄로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블류헤르는 대숙청 시기에 일본의 여간첩에게 홀려 정보를 넘겼다는 죄목으로 잡혀와 허위자백을 강요받았지만 이를 거부해서 고문을 당했고[5], 견디다 못해 고문 담당자와 '''싸우다''' 사망한다.
장제스는 이후 소련과 외교관계를 회복한 후에 줄기차게 블류헤르를 다시 중국에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무시했고, 블류헤르가 사망한 후에야 짤막하게 그가 처형당했다는 통고를 보냈다.

3. 관련문서



3.1. 인물



3.2. 사건



[1] Blucher, Blücher, Bliukher등으로도 표기한다.[2] 1930년 9월 블류헤르는 적성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아직 적기훈장만 있는걸로 봐선 1930년 이전에 찍힌것 같다.[3] 아래줄 왼쪽부터 투하쳅스키, 보로실로프, 예고로프, 윗줄 왼쪽부터 부됸니, 블류헤르.[4] 이들의 오판은 할힌골 전투 이후 완전히 깨지게 된다.[5] 이때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