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충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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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
許崇智
한국식 독음
허숭지
영문
Xu Chongzhi
생몰년도
1887년 10월 14일 ~ 1965년 1월 25일

여위(汝爲)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국민당의 기틀을 마련하다
2.3. 숙청과 서산회의
2.6. 말년
3. 주요 경력
4. 참고문헌
4.1. 서적
4.2. 논문
5.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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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혁명가, 중화민국의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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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쉬충즈
1887년 광동성 번우에서 태어났다. 복주항정학당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유학했으며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복주에서 호응하여 1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13년 계축전쟁에 참여하여 복건도독 손도인에게 압력을 넣어 독립을 선포하게 했으나 손도인은 1913년 8월 9일 쉬충즈가 복건을 떠나자마자 독립을 취소했다. 계축전쟁 진압 이후 일본 제국으로 망명하여 1914년중화혁명당에 가입, 군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선포하여 일어난 호국전쟁에 참여했으며 1916년 위안스카이 사후 부원지쟁장훈복벽을 거쳐 돤치루이가 구국회 복구를 거부하고 독재를 실시하자 쑨원을 따라 1차 호법운동에 참가, 광저우로 남하하여 호법정부에 참여했다. 그곳에서 참군장 겸 육군총장 서리에 임명되었으며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복건성으로 진공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5월에 군정부가 개조되면서 쑨원은 호법정부를 이탈하여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2.2. 국민당의 기틀을 마련하다


1920년 2차 호법운동이 시작되어 광동군벌 천중밍이 월인치월을 구호로 내걸고 광동을 장악한 계계군벌 루룽팅에 대한 공세를 취하자 이에 합세하여 루룽팅을 광저우에서 축출하고 2차 광동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광동정부에 참가하여 북벌을 논했으며 1921년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와 회담하여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에 대해 논했다. 1922년 쑨원의 명령에 따라 복건성으로의 북벌을 시작하여 복건독군 리허우지를 축출하였으나 6월, 영풍함 사건이 일어나면서 복건에서 회군하여 천중밍 토벌에 참가, 동로토적군 사령관 겸 2군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광서, 운남에서 가세한 유진환, 양시민과 함께 천중밍을 토벌하고 1923년 광저우를 점령하였다.
1925년 광동성장에 임명되었으며 국민당의 1차 동정에 참여, 월군을 지휘하여 천중밍 군대를 토벌했고 양시민, 유진환이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했다.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 수립 때 왕징웨이를 지지하여 그의 집권을 도왔고 국민정부 위원 겸 군사부장에, 7월 6일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쑨원 사후 국민정부의 최강의 군사실력자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재정 문제 때문에 탄옌카이, 주페이더, 리지선을 비롯한 다른 군장들과 휘하의 장제스의 불만을 사게 되는데 그게 그의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2.3. 숙청과 서산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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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의 쉬충즈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암살되면서 후한민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이 숙청되던 와중에 쩌우루, 셰츠, 등택여, 후한민 등 우익 인사를 모조리 숙청하자는 미하일 보로딘의 의견에 반대했다. 허나 왕징웨이에게 위험한 인물로 찍히고 말았다. 쉬충즈 본인은 왕징웨이를 주석 후보에 추대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성향은 우익이었으며 그의 휘하 장교들은 혁명기념회에 참여하는 등 반공 성향이 뚜렷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1925년 9월 1일 쉬충즈는 재정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재물욕이 많다는 평을 받던 쉬충즈가 재정위원장에 임명된 것은 다른 군부 인사들의 불만을 샀다. 월군 참모장 겸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는 노골적으로 '특정 인물'이 재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터트렸다.
결국 장제스가 광저우 위수사령관에 임명, 쉬충즈가 천중밍과 내통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해 쉬충즈 휘하의 병력을 무장해제시키고 월군사령부를 포위한 후 쉬충즈에게 광저우를 떠나라고 위협했다. 쉬충즈는 자신이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먹히지 않고 결국 9월 20일 군정부장에서 사퇴하여 뇌질환 치료를 목적으로 상하이로 떠나야 했다. 이후 상하이에 머물다가 11월 서산회의가 소집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이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서산회의에 참여한 중앙위원들에게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하며 서산회의파를 도왔다. 이 때문에 19126년 3월 상하이 당중앙이 소집한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본격적으로 상하이 당중앙에 참여하여 정무를 보진 않았으나 지속적으로 상하이 당중앙과 교류하여 서산회의파로 분류되었다. 그의 축출 이후 1926년 5월, 쉬충즈의 친척 중 하나가 장제스와 천제루 부부를 암살하기 위해 총을 난사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4. 국민혁명반장전쟁


1927년 장제스가 우한의 연석회의에 의해 권력이 박탈당했을 때 장제스를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다.
명령에 복종하고 당신의 잘못을 인정하십시오. (...) 신용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고, 당신이 한 약속을 지켜야만 이 나라가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국민혁명 이후 4.12 상하이 쿠데타를 거쳐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1927년 8월,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영한합작을 이루었는데 이때 서산회의파의 상하이 당중앙도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쉬충즈는 왕징웨이와 접촉하여 개조파와 서산회의파의 화해를 도모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이후 영한합작 과정에서 장제스가 다시 권좌에 복귀하여 서산회의파들은 난징 참안의 배후로 지목되어 입지가 좁아졌고 그 때문에 대부분 출국의 길을 택하였는데 쉬충즈도 일본 파견을 명목으로 제거되었다.
쉬충즈는 쩌우루 등과 함께 일본과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그곳에서 다시 유럽으로 출국하기 전, 쉬충즈는 쩌우루 등과 연명으로 2기 중앙집행위원회가 법률상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고 비판하며 서산파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이번 여행을 계기로 쉬충즈는 서산회의파의 거두인 쩌우루와 관계가 매우 밀접해졌다. 이후 쉬충즈는 7월 12일 쩌우루와 함께 독일에 초착했다가 7월 27일 쩌우루 일행이 스웨덴으로 이동할 때 혼자 중국으로 귀국하여 1928년 8월 28일 귀국하는 후한민을 영접하기도 했다.
1929년 편견회의를 계기로 군벌들의 불만이 가중되고 호남 사건의 발생으로 리쭝런, 바이충시계계군벌1차 장계전쟁을 일으키자 쉬충즈는 쥐정, 셰츠 등과 1929년 5월 광저우에 집결하여 계계군벌과 같이 반장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5월 18일 쉬충즈는 장제스의 국민정부 주석 취임 반대, 국민회의 소집, 3전대회 정당성 불인정, 쉬충즈의 도장총사령관 추대 등에 합의했다. 정치력이 부족했던 광서파는 양광을 통일하기 위해 군사 문제는 쉬충즈에게, 정치문제는 쥐정과 셰츠에게 위임하기로 하였으나 계계군벌은 곧 중앙군과 월계군벌에게 토벌당했다. 계계군벌이 토벌당하고 장제스가 서산회의파의 일원들에게 총살명령을 내렸다는 소문이 퍼지자 서산회의파들은 평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펑위샹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군벌이 장제스에 대항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쉬충즈는 펑위샹을 만나 반장을 위한 합작을 원한다는 의사를 타진했고 펑위샹은 이에 호감을 보이며 대표를 톈진에 보내 쩌우루를 자신의 총사령부에 초대했다. 이리하여 서산파와 서북군벌의 합작이 이루어지고 1차 장풍전쟁이 일어났으나 서북군벌 역시 장제스에게 토벌당하면서 실패했다. 1929년 12월 12일, 중국 국민당은 쩌우루, 셰츠, 쥐정 등과 함께 쉬충즈의 당적을 박탈했다. 하지만 쉬충즈는 12월 13일 쥐정, 셰츠, 쩌우루와 함께 장제스의 하야와 출국을 요구하는 통전을 발표했는데 리례쥔을 비롯한 국민당 원로들이 다수 호응했다. 이에 국무회의는 쉬충즈 등에 대한 공식 지명수배를 결정했다.
1930년 왕징웨이의 개조파하고도 힘을 합쳐 1930년 옌시산이 주도한 중원대전에 참여했으나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간 이후 한동안 상하이에 머물면서 반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2.5. 탕산 사건1차 양광사변


1931년 탕산 사건이 일어나자 구잉펀과 등택여 등은 장제스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 반장파에 가담했다. 이들은 전 국무총리 탕사오이를 반장파에 끌어들이는 한편 쑨커, 쉬충즈, 천유런, 왕징웨이의 광동행을 추진했다. 이에 설득된 쉬충즈는 쑨커, 천유런 등과 함께 비밀리에 상하이를 떠나 5월 24일 새벽 영국령 홍콩에 도착했다. 이들은 왕징웨이의 집에 모여 양광의 정세를 논하는 한편 반장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토의하였고 이로 인하여 개조파와 서산회의파가 다시 손을 잡게 되었다.
5월 27일 왕징웨이, 쑨커, 쩌우루가 주축이 되어 탕사오이, 왕충후이, 린썬, 리례쥔, 등택여, 소불성, 등청양, 구잉펀, 천지탕, 진책, 마초준, 이문범, 유기문, 임운해, 리쭝런, 쩌우루, 탕성즈, 진요원 등 22명의 반장파가 모여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회 비상회의를 광저우에서 소집하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선포했다. 쉬충즈는 국민정부위원,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광저우 국민정부가 난징에 대한 북벌계획을 수립하면서 쉬충즈는 복건 공격을 맡게 되었지만 장제스가 제3차 초공작전을 지휘하기 위해 강서성으로 가면서 당장 교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후 광저우 국민정부는 북벌을 개시했으나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고 장제스가 통합을 조건으로 하야하자 광저우 국민정부는 1932년 1월 난징 국민정부와 재통합했다.

2.6. 말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9년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했고 왕징웨이 공작으로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된 이후 참가를 권유받았으나 거절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홍콩이 함락,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전향을 거부했다. 석방 이후 영국령 홍콩에 계속 거주했으나 장제스의 초빙으로 총통부 자정을 역임했다. 1965년 홍콩에서 사망했다.

3. 주요 경력


광동성 정부 주석
광동성 정부 수립

1대

2대
쉬충즈
(1925년 7월 3일 ~ 1925년 9월 20일)

진수인

4. 참고문헌



4.1. 서적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4.2. 논문


  • 蔣介石의 '第1次 下野'와 復職, 김영신, 중국학보 44권, 한국중국학회.
  • 中央特別委員會의 役割과 活動, 김영신, 동국사학 36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 중국학연구회.
  • 黨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西山會議의 본질, 김영신, 유지원, 중국학연구 58권 58호, 중국학연구회.
  • 西山會議 召集에 대한 各界의 反應, 김영신, 동국사학 31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49권 49호,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北伐 前後 中國國民黨의 內紛 : '上海中央'의 활동과 廣州中央의 대응을 중심으로, 김영신, 중국근현대사연구 4권, 중국근현대사학회.
  • 北伐完成 직후 蔣介石의 中央軍體制 確立 努力과 編遣會議, 배경한, 동양사학연구 48권, 동양사학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42호,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50호,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53호,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61호, 중국학연구회.

5.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