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호법운동

 


'''二次 護法運動'''
Second Constitutional Protection Movement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2차 군정부의 수립
3.2. 쑨원의 북벌 주장
3.3. 쑨원의 북벌
3.5. 광저우 수복
4. 결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개요


1920년 11월 28일부터 1922년 8월 9일까지 전개된 쑨원중국 국민당의 임시 약법 회복 운동. 광동군벌 천중밍의 도움으로 시작되었으나 역으로 천중밍이 지지를 철회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2. 배경


1차 호법운동이 실패로 끝난 이후 쑨원은 일본을 거쳐 상하이로 떠났다. 쑨원은 <손문학설>(1918), <실업계획>(1919) 등을 저술하였고 이는 중국 국민당 정책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1919년 5.4운동이 벌어지자 대중의 힘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은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1919년 10월 10일 중국 국민당으로 개조하고 군중 중시 노선을 채택하게 되었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성기평론>, <건설>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반제 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명망 높던 쑨원을 몰아내고 학계를 펼치는 계계군벌 루룽팅에 대한 광동인들의 불만은 연일 높아지고 있었다. 또한 정학회의 주도로 졸속으로 화의를 추진하고 헌법을 제정하려는 천춘쉬안의 국정 농단에 대해서도 익우사와 민우사 의원들이 반발했다. 1919년 11월 8일부터 1920년 1월 12일까지 헌법 제정을 위한 제2독회가 다시 열렸으나 정학회는 헌법 독회를 방해했고 천춘쉬안은 군대를 동원해 국회의원들을 억류, 감시하였으며 양원의 비서처를 포위 수색했다. 이에 분노한 민우사와 익우사 의원들은 광저우를 이탈하여 상하이로 이동, 천춘쉬안이 북양군벌과 흉결하여 구 법통을 취소하려 한다고 전보로 비난하고 일곱 총재 중에 쑨원, 탕사오이, 탕지야오, 오정방이 모두 광저우에 없어 정무회의를 소집할 수 없으니 군정부의 명령은 불법적인 것이라 비난했다.
호법국회의 파탄에 힘입어 쑨원은 1920년 6월 탕사오이, 오정방, 탕지야오와의 합작을 성명하고 계계군벌들이 호법의 이름을 빌려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고 혹독히 비판하며 복건 남부에 주둔하고 있던 천중밍에게 계계군벌을 타도할 것을 호소했다. 익우사, 민우사 의원들도 8월 쿤밍에서 비상회의를 소집하였다. 하지만 탕지야오가 비상회의에 찬성하지 않자 사천성 충칭으로 이동하여 다시 회의를 열었지만 사천성 내부는 군벌들의 내전이 계속되어 회의 지속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사천성 인민들에게 고별을 고하는 통전을 보내고 상하이로 이동했다.
민우사와 익우사 의원들이 이탈한 후 정학회 의원들은 참의원과 중의원의 임시 의장을 선출하고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호법국회를 운영하려 했으나 1920년 9월 민남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천중밍이 쑨원의 호소에 응해 '월인치월' 즉, 광동인이 광동을 다스려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복건 남부에서 봉기, 조주와 혜주 등을 점령하자 광동성 경찰성장 위방평, 광동진수사 이복림 등이 독립을 선포하여 이에 호응했고 루룽팅과 막영신 등 계계군벌들은 광동에서 축출되었다. 천춘쉬안 등 정학회 정객들 역시 축출되었다.

3. 전개



3.1. 2차 군정부의 수립


천중밍은 일단 구 국민당 출신으로 쑨원의 동지 출신이었으나 일찍이 황싱의 구사연구회 노선을 지지하는 등 쑨원과 사상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해롤드 시프린은 오히려 사상적인 라이벌 관계에 가깝다고 설명하고 있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11월 9일 오권헌법과 1당 지도에 의한 훈정계획을 삼민주의에 통합시키는 새로운 강령을 발표하는 한편, 천중밍에게 광동성장 겸 월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그를 안심시켰다. 여기에 주집신이 천중밍과 쑨원 사이의 중재에 나섰고 랴오중카이, 장제스, 주집신이 두차례 천중밍을 만나 광저우로의 진격을 논하며 군자금을 제공했다. 결국 천중밍이 쑨원의 광동행에 동의하여 쑨원은 11월 28일 국회의원들을 거느려 광저우에 도착, 탕지야오, 오정방, 당소의 세 총재와 함께 정무를 처리하면서 2차 호법운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920년은 안휘군벌돤치루이직예군벌우페이푸가 천하의 패권을 두고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쑨원은 하루빨리 북방의 소요를 이용해서 북벌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천중밍은 연성자치론자로서 북벌에 큰 관심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광동 인민들에게 큰 부담과 고통을 가중시키는 무모한 북벌정책을 크게 비판적으로 보았다. 1921년 1월 12일 민우사 소속 의원들이 광저우로 돌아왔지만 익우사는 합류를 거부했고 정학회가 축출된 상태라서 국회의원은 200명이 겨우 넘었다. 이 때문에 정식국회가 아니라 비상회의를 소집해야 했다. 1921년 4월 2일 광저우에서 열린 비상회의는 군정부를 폐지하고 새로운 정식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고 4월 7일 <중화민국 조직대강>을 결의, 225명 중 213명의 찬성으로 쑨원을 비상 대총통으로 선출했다. 남방에서 정통 정부를 자처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자 당황한 북양정부는 1921년 광서로 물러난 루룽팅에게 광동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지만 천중밍은 오히려 루룽팅을 토벌하고 광서까지 점령하여 양광의 지배자가 되었다.
쑨원은 열강의 지지를 구하고자 했으니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쑨원은 미국의 원조[1]를 기대하여 대외선언을 발표, 조약상의 권리를 존중할 것과 외국인 투자를 촉진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워런 G. 하딩 미국 대통령이 취임하자 이를 축하하는 메시지를 3월에 보냈으나 미국 국무부는 메시지 수령을 거절하고 쑨원이 보낸 저서인 <실업계획>도 돌려보냈다. 5월에 하딩에게 보낸 편지 역시 반송되었다. 9월 쑨원은 다시 하딩에게 편지를 보내 민주주의의 모국이 광동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촉구했으나 이 편지는 하딩에게 전달되지조차 못하고 문서고로 들어갔다. 미국 국무부는 투자자들이 광동정부와 거래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로지 북양정부만을 승인한다는 방침을 확고히 했다.

3.2. 쑨원의 북벌 주장


광동의 군사적 위협이 제거되자 쑨원은 열성적으로 북벌을 주장하게 되었다. 천중밍은 정부 조직 이후 육군부장 겸 내무부장이 되어 광동의 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명목상 쑨원의 부하였으나 쑨원에게는 그에게 명령을 내릴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천중밍은 군사비 지출을 정부 예산의 30% 이하로 제한하고 천두슈와 협력하여 교육 개혁 예산에 20%의 예산을 할당하는 등 광동의 부흥과 개혁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하지만 쑨원은 국회에 1921년 10월 북벌안을 제출하여 통과시키고 계림에 대본영을 설치하여 대대적인 북벌을 준비하였다. 쑨원의 부하인 장제스는 천중밍에게 강서와 사천의 군벌과 연합하는 것과 군사비로 3천만원이 필요하다는 계획안을 제출했지만 천중밍은 국회의 북벌안이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이를 일축했고 화가 난 장제스는 광동을 떠나 고향인 강서성으로 돌아가버렸다. 쑨원은 천중밍을 설득하려 했다.

"광동군이 광동에 돌아와 있음은 1개 성의 땅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중원을 평정하는 큰 책임을 가진 것이다. (...) 우리는 북벌에서 승리를 하건 실패를 하건 다시 돌아오지 않고 광동을 그대에게 맡길 터이니,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리고 식량과 무기만을 보급하라."

천중밍은 이에 매월 군사비 50만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진 않았다. 장개석비록 등은 이에 대해 천중밍이 군벌의 못된 버릇을 드러낸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조너선 펜비나 해롤드 시프린과 같은 현대의 연구자들은 천중밍의 안목이 현실적이었다고 천중밍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한편 장제스와 천중밍의 관계는 더욱 험악하게 변하여 1921년 6월,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떠났던 장제스는 9월 중순 광저우로 돌아와 천중밍을 문안했을 때 크게 충돌하고 화가 나서 바로 상하이로 돌아가버렸다. 상하이로 돌아가서 두번째 아내 천제루와 결혼하여 1922년 초에 광저우로 돌아온 장제스는 다시 천중밍과 만났지만 역시나 험악한 만남이었다. 우선 천중밍의 사령부에 들어가기 위한 허락을 받기 위해 20분 동안 정문에서 대기해야 했고 장제스가 천중밍에게 쑨원의 북벌을 도와달라고 호소했을때 천중밍은 이렇게 대답했다.

"민국 2년제2차 혁명(계축전쟁)에서 쑨원은 후한민과 나에게 위안스카이에 대해서 출병을 하도록 요구했다. 그때의 출병에서 손해를 본 것은 나 뿐이었다. 만약 당시부터 내가 위안스카이에게 반대하지 않고 현재처럼 광동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아무 걱정 없는 세월을 보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네는 무엇 때문에 쑨원의 뒤만 따르고 있는가?"

장제스는 이때 굉장히 암담한 기분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천중밍은 장제스를 점심식사에 초대했는데 식사에 참여했던 천중밍의 군관 중 한 사람이 쑨원을 허풍선이라는 뜻의 '대포'라고 조롱하자 격노한 장제스는 천중밍을 옆방으로 불러내서 저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어떻게 용인할 수 있냐고 항의했지만 천중밍은 장제스에게 유머감각을 가지라는 조언을 할 뿐이었다. 장제스는 즉시 천중밍의 사령부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3.3. 쑨원의 북벌


장제스는 아내인 천제루와 함께 1월 18일 계림의 대본영으로 이동했다. 쑨원은 공개적으로 천중밍을 칭찬했는데 장제스는 천중밍을 파직하고 그를 토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쑨원은 장제스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사람에 대한 신뢰심을 키우라고 조언했다. 천제루의 회고록에 따르면, 장제스는 그날 숙소로 돌아와 비통하게 통곡했고 1월 19일 아침에는 상하이로 돌아가자고 히스테리를 부렸지만 마음을 추스려 북벌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회의에는 참모총장 리례쥔, 군장 쉬충즈 등이 참여한 상태였다. 이날 회의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 1. 사천성의 군을 동원하여 서북을 평정하고, 제1의 근거지로서 섬서성에서 직예성으로 나온다.
  • 2. 3개 사단은 호북에서 경한철로로 진격한다.
  • 3. 광동의 3개 사단은 동남을 평정하고, 난징에서 진포철로로 전진한다.
  • 4. 기타의 6개 여단은 해상에서 발해만의 진황도에 상륙한다.
1922년 봄 북방에서 환계와 봉계가 연합하여 직계와 싸우는 1차 직봉전쟁이 발생했다. 쑨원은 1922년 2월, 광저우를 찾아온 돤치루이의 특사 쉬수정과 회견하고 돤치루이, 장쭤린과 반직삼각동맹을 결성, 직계를 축출하고 쑨원을 대총통으로, 돤치루이를 부총통으로 추대한다는 합의를 도출하였다. 쑨원은 1차 직봉전쟁이야 말로 북벌을 달성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하지만 천중밍은 오히려 직계의 우페이푸, 호남독군 자오헝티와 연락하는 등 북벌에 반대했다. 하지만 쑨원은 천중밍을 무시하고 2월 3일 북벌을 지시했다. 리례쥔이 강서로, 쉬충즈가 호남으로 출격하였다. 이에 천중밍은 3월 21일 광구철로 대사두 역에서 홍콩에 다녀오던 광동군 참모장 겸 제사단장 등갱을 저격하여 암살했다. 등갱은 북벌자금 모집에 헌신적인 활동을 한 사람으로 북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이에 당혹한 쑨원은 3월 26일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호남 공격을 단념하고 대본영을 소관으로 이전하여 강서성 공격에 집중하기로 했다.
쑨원은 천중밍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어 광동성장, 내무부장, 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육군부장 자리만 가지게 하였다. 랴오중카이왕징웨이는 이 결정에 반대하며 천중밍의 직위를 유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쑨원은 묵살했다. 당연히 천중밍은 격노했고 천중밍의 부하인 예쥐가 1만 2천명의 군사들을 거느려 천중밍의 복직을 요구했지만 쑨원은 거절하고 5월 4일 다시 북벌을 내리고 5만명의 북벌군을 북상시켰다. 5월 6일 쑨원이 소관의 대본영에 도착했고 전 장병에게 북벌에 관련한 훈시를 하였고 5월 11일 강서성으로 병력이 진공했다. 북벌군은 손쉽게 승리하여 건남, 용남, 남안, 신풍, 남강, 숭의 등을 잇달아 함락시키고 30일에 감주에 이르렀다. 하지만 1차 직봉전쟁이 직계의 승리로 끝나고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쑨원에게 반기를 들면서 이 모든 것이 무소용이 되었다.

3.4. 영풍함 사건


하지만 쑨원과 천중밍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되면서 천중밍은 6월 16일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에 대한 쿠데타를 감행했다. 쑨원은 광동에서 축출되었고 북벌은 중단되었다.
이후 1차 직봉전쟁의 결과로 직예군벌들이 베이징을 장악하고 직계의 수령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여기에 구국회 참의원 의장 왕가양과 중의원 의장 우징롄 등이 구국회를 회복시키면 안복국회에서 선출된 대총통 쉬스창의 법률적인 지위를 취소시킬 수 있다는 점, 베이징 정부가 법통을 이어나가게 된다는 점, 서남의 호법운동을 끝낼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차오쿤의 대총통 당선이 유리하다고 직예군벌을 설득했고 이에 직예군벌들은 5월 20일 텐진에서 국회 회복을 준비하게 했다. 6월 12일 광저우의 민우사 의원들과 상하이의 익우사 의원들이 호응하여 북상했고 리위안훙이 6월 13일 1917년 6월 12일의 국회 해산령을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1922년 8월 1일 구국회가 정식으로 개회하면서 호법국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3.5. 광저우 수복


강서성으로 퇴각했던 쉬충즈는 9월 말, 연평에 주둔한 북양군벌 왕영천과 연합하여 복건성으로 진주, 10월 12일 푸저우를 점령했다. 쑨원은 북벌군을 동로토적군으로 개칭하고 쉬충즈를 총사령관에, 장제스를 참모장에 임명하여 천중밍을 토벌할 것을 지시했다. 푸저우에서 전열을 정비한 동로토적군은 12월 19일, 천주를 함락시켜 복건을 완전히 평정한 후 광저우로 진군하였다. 광서의 계계군벌 유진환, 운남의 전계군벌 양시민 등이 토적군에 참가하면서 서로토적군이 구성되었고 12월 말, 서로토적군이 오주를 함락시켰다.
1923년 정월, 쑨원은 <중국 국민당 선언>을 발표하여 "호법과 비법의 싸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결코 전진을 그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월 9일, 토적군이 조경을 함락시켰고 10일에 삼수를 점령했다. 삼수가 함락되면서 궁지에 몰린 천중밍은 그날로 하야를 통전하고 혜주로 물러가면서 토적군이 1월 10일에 광저우에 입성하여 7개월 만에 광저우를 수복했다. 이를 2차 호법전쟁이라고도 한다.
1923년 2월 21일 광저우로 돌아온 쑨원은 3월 2일 대본영을 발족하고 세번째로 광동정부를 조직하였다. 쑨원과 우호관계에 있던 중국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가 선전주임에 취임하여 광동정부 안정화에 착수했다. 4월 16일 광서군벌 심홍영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운남, 광서, 광동 연합군에게 진압당했다. 5월 9일 북강 일대를 혁명군이 장악하면서 심홍영은 서강으로 패주했다. 같은날 근성 넘치게도 천중밍이 용문을 점령하고 석룡으로 진격하여 매현, 조주, 산터우를 함락하여 광동 동부를 장악했다. 5월 20일 혁명군이 혜주를 공격했으나 천중밍이 혁명군의 배후를 습격하면서 혁명군을 괴롭혔다. 쑨원이 직접 전선에 나서서 독전했으나 이미 병사들은 석룡이 함락되었다고 외치면서 패주하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200명의 경위대를 조직하여 천중밍 부대가 이미 궤멸당했다는 소리를 지르게 했다. 이에 병사들의 사기가 회복되어 석룡을 사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중밍의 세력 자체는 완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라 1925년 2차례의 이 실시된 후에야 축출하고 광동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4. 결과


1923년 6월 우페이푸를 등에 업은 직계의 수령 차오쿤회선 사건이라 불리는 뇌물선거를 통해 10월에 총통에 취임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더 이상 호법운동의 전개가 무의미하다고 판단, 회선헌법을 발표하여 정통정부임을 자처하고 "현재의 정부는 혁명정부이며 군사시기의 정부이다."라는 이유로 대원수에 취임하여 다시 북벌을 준비하는 한편 국민당을 개편하여 후한민, 등택여, 린썬, 랴오중카이 등 9인을 임시 중앙집행위원회로 삼고 1923년 11월 국민당 개편선을 발표하였다.
영풍함 사건으로 영미의 차가운 반응에 쑨원은 소련에 기대를 걸게 되었으며 코민테른이 그에게 접근하면서 쑨원은 국공합작을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배신을 일삼는 군벌들에게 환멸을 느껴 독자적인 직할군의 창설을 도모하였다.
여담으로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홍일이 이때 귀주군에 복무하면서 허잉친 휘하의 기관총 소대장, 탄약관리장교로 참가하였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중국국민혁명 지도자의 사상과 행동, 민두기, 지식산업사.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푸른역사.
  •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아카데미.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중국국민당 좌파의 기수 랴오충까이(寥仲愷)와 국민당 개조작업, 장공자, 글로벌정치연구 2권 2호,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정치연구소.
  • 民國 元年을 전후로 한 '約法'과 孫文의 護法運動,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63권 63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1차 國共合作의 形成과 그 影響에 관한 硏究, 이준태, 아태연구 7권,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 政治勢力 간 통일전선 측면에서 본 제1차 國共合作의 고찰, 이준태, 아태연구 15권 1호, 경희대학교아태지역연구원.
  • 국공합작과 孫文·요페공동선언 : 몽골문제와 중동철도문제를 중심으로, 이승휘, 중국근현대사연구 29권 29호, 중국근현대사학회.
  • 제1차 국·공합작 : 성립배경과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김영숙, 호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6. 관련문서



[1] 예컨대 미국이 중국에 지불하는 관세의 일부를 광동정부에 지원한다거나 말이다.